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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왜 북벌에 집착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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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16 10:55:48

 

*노래 들으면서 글 읽으시는 거 추천합니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227년 출사표를 올린 이후 234년 오장원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6년간 총 5번의 북벌을 감행했다.

    
제갈량이 북벌을 추진한 이유에 대해서는 약 1800년이나 지난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있다. 어떤 이는 소열제 유비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북벌에 집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제갈량 개인의 이득을 위해 북벌을 추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북벌이 없었다면, 촉한은 제갈량 사후 곧바로 멸망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물론, 제갈량이 북벌에 집착한 진짜 이유는 알 수 없고 이 문제는 앞으로 많은 이들의 토론 거리가 될 것이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필자 역시 마찬가지. 당연히 북벌에 대해 여러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생각을 적은 글일 뿐이다종종 역사 이야기에 관련된 글을 보면 그것이 진짜가 아니다와 같은 댓글을 적으며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것은 필자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즉, 정답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필자가 역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답을 내릴 수 없기에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역사에 답이 없다고 보는 사람이기에 누구나 주장을 할 수 있지만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은 이 세상에 당사자 본인 이외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이 글도 마찬가지어디까지나 생각을 적었을 뿐이다. 이 글은 그저 그럴 수도 있겠구나와 같은 하나의 주장으로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➀‘유비’라는 보호자를 잃다
    
제갈량은 서주 출신이지만, 15살이 되기 전에 양친이 세상을 떠나 보호자이자 숙부인 제갈현의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숙부가 유표에 몸을 의탁하자 형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융중에 정착해 유비를 따라나섰다.
    
그 후 유표가 사망했고 유비는 적벽대전 이후 어수선한 형주를 빠르게 장악했다. 그리고 방통과 황충, 마량, 장완, 등지 같은 형주 출신 인물들을 대거 등용해 세력을 키웠다.
    
이후 유비는 산세가 험해 지키기 쉽고 넓고 기름진 평야와 소금 광산이 많은 익주를 점령했다. 이때 제갈량을 비롯한 형주 인사들이 큰 공을 세웠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유비는 익주에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이후 익주의 지도자였던 유장을 형주로 이주시켰다. 그 이유는 익주의 호족들이 유장을 내세워 완전히 익주를 장악하지 못한 유비에 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주 인사들을 형주로 돌려보내지 않고 남긴 이유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익주의 호족들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형주 출신 인물들의 세력도 약화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형주 인사들이 유비 세력의 핵심이었기에 유비가 곁에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다. 그러나 형주 인사들의 기반은 엄연히 형주에 있고, 형주는 익주와 거리가 멀기에 본거지에서만큼 힘을 쓰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익주에 새로운 기반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고 익주의 호족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섰다. 유비는 이 점을 활용해 세력의 균형을 맞추면서 자신의 권한을 강화했다.
    
유비가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이유는 자신의 권력 문제도 있지만, 광무제가 세운 동한(東漢)이 한고제가의 서한(西漢)보다 강하지 못했던 실질적인 원인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동한은 광무제를 앞세운 지방 호족들이 세운 국가라고 보는 것이 옳다. 호족을 너무 의식한 광무제는 재위 기간에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정책 자체를 내놓지 못했다. 이후 호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동한이 멸망하는 실질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형주와 익주 세력의 균형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역시나 제갈량 같은 형주 출신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지배력이 흔들리는 거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본거지인 형주가 오(吳)에 빼앗긴 것이다.
    
본거지의 상실은 힘의 손실로 이어진다. 형주 인사들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루가 사라졌다. 당연히 발언권 부분에서 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형주를 잃자 당황스러웠던 것은 유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대업을 위해서라도 풍부한 물자와 교통이 좋은 형주는 필요한 곳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오가 유장을 내세우며 유비를 자극한 것이다. 여기에 주태를 한중 태수로 임명하는 등 노골적으로 유비를 위협했다.
    
유장이 머잖아 죽었고 유비가 건재했기에 오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유비 입장에서 오가 보여준 행동은 당연히 천인공노할 일이었다. 만약 익주 호족들이 오의 전략대로 내분을 일으켰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비와 형주 인사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입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형주를 탈환해야만 했다. 그러나 촉한은 이릉대전에서 참패했고 마량을 비롯한 다수의 형주 사람들이 죽었다. 실의에 빠진 유비는 머잖아 세상을 떠났다.
    
유비는 근거지를 잃고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형주 출신 인물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기둥이 무너졌으니 정치적 생명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고 익주 출신 인사들에게 보복을 당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유비는 죽음이 임박하자 제갈량과 이엄 같은 형주 출신 인사들에게 후사를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두 사람의 능력이 당시 촉한에서 가장 출중한 것도 있지만, 익주 호족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력을 확장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

 
유비의 의도가 어땠든지 간에 뒤를 이은 유선은 형주 인사들의 보루가 되어주기에는 부족했다. 유선은 형주 출신이었지만, 유비만큼 공이 없었기에 익주의 호족들을 견제할 힘 자체가 없었다. 특히, 이릉대전 이후 형주 출신들이 대거 사망해 뒤숭숭한 분위기였던 만큼 유선의 재위 초기에는 수가 더 많은 익주 인사들의 발언권이 형주 인사들보다 더 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따라서 북벌은 제갈량을 비롯한 형주 출신 인사들이 살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 황실의 부흥이라는 표면적인 명분을 앞세우고 공을 세워 안과 밖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해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익주의 호족들을 최대한 견제한 것이다.
    
실제로 북벌 기간에 촉한의 핵심 인사였던 마속과 이엄, 위연, 양의 등은 형주 출신 인물들이었다. 제갈량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된 장완도 마찬가지. 비의와 동윤 같은 익주 출신, 혹은 익주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사람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맡는 핵심 인사가 된 것은 형주에서 유비를 따라 입촉(入蜀)한 인물들 대부분이 사망한 뒤였다.


 

 
 
➁중앙 집권이 가장 강했던 촉한
    
드라마 ‘신삼국’을 보면 사마의가 위 문제 조비에게 “부왕께서는 전장을 누비며 큰 공을 세웠고 그 위엄으로 천하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황제의 자리에 오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 전하께서는 그렇지 않기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셔야 합니다”라며 그가 동한의 헌제로부터 선양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드라마 ‘신삼국’은 2차 창작물이지만, 이 대사는 당시 동한과 위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던 지방 호족 문제다.
    
지방 호족 문제는 200년 가까이 자리 잡았기에 불과 몇십 년만의 시간으로 뿌리 뽑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또한, 따지고 보면 조조와 조비도 호족이다. 거기에 스스로 외척이 되어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호족들을 견제할 수 있는 명분 자체가 미미했다.
    
그런데도 조조가 호족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세운 공이 워낙 엄청났고 자신을 견제하려던 세력은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등 그 위엄이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다. 즉, 조조가 살아있을 때는 그 위엄만으로도 호족들을 압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조가 세상을 떠나자 조위는 호족들을 견제할 힘을 상실했다. 특히, 위는 사예, 옹주, 연주, 서주, 기주, 병주 등 촉한이나 오보다 다스려야 할 땅이 워낙 넓었기에 조비 혼자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비가 아버지처럼 이들을 다스리려면 본인만의 명분과 공이 필요했다.
    
따라서 ‘신삼국’에서 사마의가 조비에게 제위를 권한 이유는 ‘천자(天子)’라는 명분이 생기고 이를 통해 호족들을 압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군신 간의 예의를 중시하는 유교 철학이 깊게 자리 잡았기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호족들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
    
(물론, 조비가 위를 건국한 이후 이런 유교적인 명분은 약화했다. 당시 유교 철학이 팽배한 동한에서 신하가 군주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누가 봐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조위가 멸망하고 서진이 건국된 이후 5호 16국 시대가 일어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마의의 대사가 중요한 이유는 ‘나와 사마씨 일족이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너희 조씨 일가가 먼저 역적이 되고 우리 사마씨 일가가 너희 대신 천하를 쥘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신삼국의 대사는 어디까지나 후세 사람들에 의해 창작된 것이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오 역시 호족들이 중심이 된 나라이며 손(孫)씨 일가의 기반 자체가 본디 미약했기에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약했다. 훗날 벌어진 ‘이궁의 변’은 손권이 이런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 중 하나였다고 본다.
 

 
 
반면, 촉한은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적었고 익주와 형주 인사들의 균형이 나름 잘 맞춰져 있었기에 가장 중앙집권화가 잘 된 국가였다. 제갈량과 장완, 비의, 동윤 같은 재상의 힘이 막강했지만, 이들은 황제인 유선을 도와 내실을 다졌다. 그렇기에 한 개의 주(州)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이상의 생산력을 냈으며 북벌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제갈량을 비롯한 형주 인사들이 세상을 떠나면 호족 간의 균형을 상실하게 되고 이는 중앙 집권화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제갈량이 북벌에 집착했던 이유는 형주 인사들이 아직 건재할 때 공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후대도 익주 호족들을 견제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면서 미래의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개국공신을 비롯한 공신 집안의 후손들이 조정에서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제갈량이 그중에서도 관중 지방을 지배하고자 원했던 이유는 한 황실의 부흥이라는, 당시 지식인들이 꿈꿔왔던 이상을 실현하고 지금보다 더 강력한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서한의 고제는 익주와 관중에서 힘을 키워 천하를 도모했다. 그리고 장안을 도읍으로 삼았다. 서한은 장안과 관중 지방을 중심으로 흥했고 뛰어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문경지치의 치세를 이루었다. 무제 때는 막강한 국력을 앞세우며 흉노와 고조선을 정벌하는 등 대규모 정복 사업을 벌여 ‘중화사상’을 확고히 했다.
    
따라서 계한(季漢)인 촉한이 관중 지방을 장악한다는 것은, 유(劉)씨 일가가 서한의 재건이라는 확고한 명분을 얻고 인재 확보와 생산력을 앞세워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갈량을 비롯한 형주 인사들의 권한은 강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익주 호족들과의 세력 균형을 이루면서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만약 촉한이 관중을 장악했다면, 제갈량은 성도에서 장안으로 천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➂조위의 약점을 알다
    
제갈량은 자신이 북벌에 실패해도 조위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북벌에 성공하면 앞서 언급한 것들을 얻을 수 있지만, 실패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조비와 조예는 조식처럼 계승권을 가진 친족과 호족들이 황실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을 염려해 병권을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조진과 조휴와 같은 방계 조씨와 하후씨 일가를 중용했지만, 호족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조비의 뒤를 이은 조예는 북벌 기간에 조진을 비롯한 방계 조씨 일가와 사마의 같은 호족들에 의지했다.

 

결정적으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조비와 조예 모두 조식과 같은 친족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친족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는 그 힘을 너무 약화시키다 보니 서한 초창기 때 여후가 사망한 이후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확실한 명분을 가졌던 유씨 일족과 달리 조씨 일가는 그럴만한 명분이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인물은 당연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다. 제갈량과의 전쟁 기간 동안 사마의와 그를 따르는 인물들은 위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전쟁 이후 조상과 함께 위의 실세가 됐다. 즉, 조조와 조비가 그렇게 공들였던 조씨 일가와 지방 호족 간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사마씨는 ‘고평릉의 난’을 일으켜 조씨 세력을 약화했고 조위는 끝내 사마염에게 멸망한다.
    
즉, 제갈량이 추진한 북벌의 실질적인 목표는 앞서 언급한 이유도 있지만, 실패해도 결국 조위가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위는 분명히 막대한 물자를 가졌지만, 지방 호족들을 견제할 수 있는 조씨 일가는 한정되어 있고, 촉한의 침략은 국가의 중대사였던 만큼 위나라 호족들의 힘을 키워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제갈량은 북벌을 통해 잃을 수 있지만,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도박을 감행한 것이다.

 

 

 ➃조위(曹魏)는 제갈량의 원수였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갈량은 서주 출신의 인물이다. 그런 제갈량이 서주를 떠나 형주로 들어간 시기는 12살이 되던 193년으로 추정된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알아챌 것이다. 바로 조조가 서주 대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조조가 아버지의 원수를 빌미로 서주를 침략한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연의에는 서주 대학살에 관련된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삼국지 정사’와 ‘자치통감’ 같은 역사서에는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공격해 10여 성을 함락하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웠다”면서 “동탁의 난을 피해 많은 백성이 유랑민이 동쪽으로 나와 서주에 의탁했는데, 조조가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며 조조가 이들을 모두 도륙해 닭과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많은 이들이 “제갈량이 조조를 섬기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악행을 자행한 인물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제갈량의 아버지인 제갈규 역시 조조의 군사들에게 죽었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런 주장이 아예 터무니없다고 보지 않는다. 당시 동한이 아무리 난세였다고 해도 거처를 쉽게 옮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도겸의 뒤를 이어 서주의 주인이 된 유비가 조조에게 패해 서주를 상실하고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던 200년 때까지 서주에 거주했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장소와 장굉, 노숙, 여대, 제갈근, 보즐(오), 미축, 제갈량 (촉한) 같은 중신 중의 중신들이 많다. 이들이 왜 조조가 아닌 유비와 손권을 섬겼겠는가.
    
즉, 10대 초반에 조조의 악행을 본 제갈량은 서주 대학살 이후 그를 원수로 인식해 반드시 쳐 없애야만 한다는 가치관이 자리 잡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가치관이 제갈량이 유비를 섬겨 훗날 북벌을 감행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5
Comments
1
2019-11-16 11:01:16

잘 읽었습니다. 추천!

1
2019-11-16 11:07:15

좋은글 잘 봤습니다. 견문이 넓어지네요

2
2019-11-16 11:28:00

삼국지에서도 수시로 거론되고 실제로도 가장 큰 명분이었을거라고 짐작되는 유방의 북벌은..

사실 유방이 파촉 지방에 머문 시간은 4개월 밖에 안됐습니다.

그것도 성도로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고 한중에만 주둔해 있다가..

최소한의 군정비, 보급만 마치고 이미 가지고 있던 전력으로 북벌을 시작한거죠.

제갈량이 이 사실을 몰랐을리는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5
2019-11-16 12:42:48

제갈량의 정치적 스탠스에 관한 글이군요. 세부적인 팩트 등에 대한 내용 등은 말씀하신 것처럼 불요하리라 생각하고, 저 역시 결정의 배경에는 이런 부분들도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전 이런 정치적 스탠스는 제갈량의 경우보다도, 특히 강유의 북벌에 대한 집착과 제갈첨, 그리고 동궐의 강유에 대한 입장에서 크게 두드러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 개개의 충성심과는 별개로 말이죠. 언젠가 다루어보려했는데, 비슷한 흐름의 좋은 글이 먼저 나왔군요. 감사합니다.

1
2019-11-16 14:59:17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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