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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궁의 변’으로 보는 손오의 고질적인 문제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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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7-21 00:40:27

이궁의 변은 오나라 황제 손권의 후계자 선정을 놓고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손오(孫吳)는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이궁의 변의 실질적 원인은 손권의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손권의 장남이자 오나라의 황태자 손등은 24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더 빨랐던 232년에 차남인 손려가 먼저 죽었다.

 

장유유서의 특성상 일반적으로 장남이 죽으면 차남이 그 뒤를 잇기 마련이다. 장남과 차남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손권은 삼남 손화를 태자로 삼는데, 사남 손패 역시 같은 궁에 살면서 예법에 따로 구분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다른 궁에 살게 하지만, 이때부터 신하들이 두 세력으로 분리되면서 다투기 시작한다. 당시 손화와 손패를 지지한 세력은 다음과 같다.

 

손화-승상 육손, 상서선조랑 육윤(육개의 동생), 대장군 겸 형주자사 제갈각, 태상 겸 평상서사 고담(고옹의 손자), 경하독 겸 잡호장군 고승, 편장군 고제, 표기장군 주거, 아내 손노육(주공주), 회계태수 등윤, 평위장군 주적, 상서 정밀, 태자태부 오찬, 우림도독 겸 잡호장군 장휴(장소의 아들), 상서복야 굴황, 손화의 어머니 왕부인

 

손패-표기장군 보즐, 진남장군 여대, 대사마 전종. 아내 손노반(전공주), 전기, 전단, 무위도위 손준, 마한부우독 겸 월기교위 여거, 태자소부 겸 중서령 손홍, 제갈각의 장남 기도위 제갈작

 

이 두 세력의 싸움으로 오나라는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정작 승리한 쪽은 손화도 손패도 아닌, 7살에 불과한 손량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육손과 고옹의 일족들, 그리고 장소의 아들 장휴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각에서는 손권이 나이가 들더니 노망이 났다라고 혹평할 정도.

 

그러나 필자는 이궁의 변이 순전히 손권의 노망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뒤에는 수많은 정치적 요소들이 있었고, 이는 손권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점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은 손오(孫吳)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었다.

 

 

전국 옥새를 취하는 손견

 

태생에 한계가 명확했던 손()씨 일가와 손권

 

중국 드라마 랑야방 : 권력의 기록을 보면 황제인 소선이 황자들 간의 힘의 균형을 맞추려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는 특정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인데, 그 이유는 황제 자신의 권력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손권은 이 황제 소선과 가장 유사한 인물이다. 이는 본인이 권력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속성 때문이다.

 

손권은 본래 황제가 될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 손견의 유지를 이은 것은 엄연히 그의 형이자 장남인 손책이었다. 손책에게 아들 손소가 있었지만, 손소가 후사를 잇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19살이었던 손권이 지도자가 됐다. , 정통성 문제에 있어 손권은 취약했다.

 

여기에 손()씨 일가의 태생적인 문제점도 있다. 손견인 경우 손자병법을 저술한 손무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나, 삼국지 정사를 저술한 진수는 아마 손자의 후손일 것이다라고 추측성 글을 작성했다. 이런 표현은 웬만큼 선조가 불확실하지 않으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

 

촉한(蜀漢)의 소열제 유비는 유비는 중산정왕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는 점을 비교하면 손씨 일가의 혈통이 얼마나 불확실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권세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 손권은 한 황실의 정통성(비록 유비가 수많은 중산정왕의 후손과 유()씨 일가 중 한 명이라고 해도 유씨라는 확고한 혈통을 부정하기는 어렵다)을 가지고 있었던 유비와 비교하면 강동의 호족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만한 힘이 미약했다.

 

 

조조

 

이는 조위(曹魏)의 무제(武帝) 조조와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조조 역시 개국 공신인 조참의 후손일 것이다라는 추측만 있을 뿐 출신 자체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조조는 환관 가문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더욱 뚜렷했던 인물이다. 오히려 손권보다 혈통 문제에 있어 집중 견제 받을 만한 인물은 조조였다.

 

그런데도 조조가 이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엄청난 전공과 헌제를 보호한다는 확고한 명분, 그리고 잔혹함 때문이었다.

 

조조는 엄연히 탁류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조조가 청류파들을 흡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동한의 황제 헌제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껍데기일 뿐인 천자였지만, 400여 년을 뿌리 내린 한 황실의 근본이자 상징과 같았던 황제를 보호하고 있다는 점은 그에게 엄청난 정치적 장점들을 안겨줬다. 여기에 반()동탁 연합군 시절 끝까지 동탁 군대를 추격했다는 점은 순욱을 비롯한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었다.

 

여기에 헌제를 보호한 이후부터는 여포와 원술, 원소 등 황실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군웅들을 격파해 전공을 세웠다. 이들을 격파한 조조는 한 황실의 보호자라는 대의명분을 통해 세력을 구축했고, 한 황실의 이름과 동시에 자신이 세운 전공만으로도 호족들을 압박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승처럼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있으면 가차 없이 제거해 본보기로 삼았다. 한 황실의 힘은 조조 아래에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조의 아들인 조비는 아버지만큼의 전공이나 위엄은 없었지만, ‘선양이라는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정통성을 부여했다.

 

 

유비

 

유비는 전장에서 조조만큼 큰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여러 곳을 떠돌며 존경을 받았고 명성을 쌓았다. 무엇보다 한 황실의 후손이라는, 당시 지식인들과 호족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명분을 가졌다. 그가 선양이 아닌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비판받지 못한 이유도 이런 까닭이었다. 유비는 이 점을 활용해 형주 출신 인사들과 익주 호족 간의 세력 균형을 꾀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손권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비처럼 한 황실의 후손도 아니고 가문은 그 출생마저 불명확해서 입지가 미약했다. 그렇다고 조조나 아버지 손견, 형 손책만큼 뚜렷한 전공을 세운 것도 아니다. 적벽대전 때 강동을 구한 것은 실질적으로는 주유였고 이릉대전 때 공을 세운 인물도 육손 같은 호족이었다. 정작 손권이 친정해서 대승한 적은 드물었고 합비에서는 장료와 만총 등에게 패배를 거듭했다.

 

, 손권은 촉한과 조위의 황제들처럼 호족을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이나 공적이 없었기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다는 입지에 놓여있다고 봐야 한다. 황제라고 하기에는 그 명분이 미약하기 그지없었고 공적도 적었기에 호족들의 권력 강화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손권은 이런 가문의 한계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형이 죽음 이후 지속해서 생존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외부에는 조조라는 거대한 적이 있었던 까닭에 자신과 손씨 일가를 지키려면 그 누구보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가 황제가 된 이후 보여준 행보에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손권은 229년 오나라의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아버지 손견을 무열황제로 추존했는데, 형인 손책은 장사환왕, 한 마디로 황제가 아닌 왕으로 추존했다.

 

이는 자신의 정통성 문제를 의식했던 점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손책을 황제로 추존할 경우 형의 후손들이 자신에게 황제의 자리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손권의 후손들에게 치명타를 입힐 뿐만 아니라 손오(孫吳)의 세력 다툼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손권은 칭제할 수 있는 명분이 한없이 미약했다. 조비는 선양이라는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 정통성 부분에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 황실의 후손인 유비는 한나라의 재건이라는 확고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당시 한나라를 숭배하던 사대부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손권은 칭제할 수 있는 명분이 아예 없었다. , 손씨 집안의 권력은 언제 무너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위태로웠다.

 

 

삼국의 실제 영향력

 

손오(孫吳)는 호족의 권력이 강했다

 

또 다른 문제는 손오(孫吳)가 기반을 둔 강동 지방의 한계였다. 촉한(蜀漢)이 세워지는 익주인 경우 한나라를 건국한 고제(古帝) 유방이 한중에서 일어났던 탓에 그 상징성이 남달랐던 곳이다. 그리고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또 한 명의 한 황실의 후손인 유언은 익주 지방의 호족들을 대학살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유언의 대학살은 이후 익주를 차지한 유비가 중앙 집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조조가 기반을 잡은 중원은 중국 역사에서 예로부터 중요했던 곳이었으며, 한나라의 수도였던 장안과 낙양이 있었던 탓에 중앙 집권 체제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반면, 손권이 기반을 둔 강동은 달랐다. 당시 양쯔강 이남은 습지대로 뒤덮인 곳이었기에 대부분 지방에 인구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 보니 관리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많았고 이곳은 다양한 이민족들이 차지했다. 강동은 동진(東晉) 시대에 접어들어서야 이민족들의 침략을 피해 양쯔강으로 넘어온 한족(漢族)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 이곳 강동 지방은 중앙 정부에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강동은 진() 시황제가 천하 통일을 이룬 이후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가장 덜 받은 곳이기도 했다. 항량과 항우 일가는 회계에서 초()의 재건을 선포했다.

 

이후 천하를 차지한 서한(西漢)과 동한(東漢)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강동 지방이 수도인 장안과 낙양에서 멀리 떨어진 점도 있지만, 당시 강동은 습지가 많아 땅은 넓어도 농토가 적었기에 넓고 기름진 평야가 많은 익주나 중원 등과 비교하면 중앙 정부의 우선순위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만큼 중앙 정부의 입김이 매우 약한 곳이었기에 이곳은 호족들의 세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육손

 

따라서 손씨 일가는 흔히 말하는 오의 사성이라고 불리는 장(), (), (), () 이 네 가문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네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로는 장온과 주환, 육손, 고옹 등이 있다. 이들 모두 오나라에서 요직을 차지했던 이들이다. 특히, 육손과 고옹은 승상 자리까지 올라갔던 이들로 오나라의 권력 핵심 인사였다.

 

필자 개인적으로 오나라가 촉이나 위보다 영토 확장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들 지방 호족들의 입김이 지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손견을 따라 공을 세웠던 정보와 황개, 한당, 그리고 손책과 손권을 따랐던 주유, 장흠, 그리고 주태 등과 같은, 소위 말하는 개국공신에 가까운 이들의 후손들이 요직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당인 경우 아들인 한종이 위나라에 투항했다는 점이 크다) 특히, 주유나 노숙, 여몽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당시 개국공신 가문들의 후손은 선조들의 영향력 때문에 승진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촉한의 승상인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과 조위의 진군의 아들 진태, 그리고 종요의 아들 종회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오나라의 개국공신에 가까운 후손들은 요직을 차지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개국 공신들은 말 그대로 황제의 최측근이다. 그만큼 황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이기에 이들의 후손들에게도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 개국공신 후손들의 세력이 미미했다는 점이 오나라의 가장 큰 약점이자 동시에 오나라가 영토 확장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 한계였다.

 

이들 네 가문 이외에 오나라에서 권력을 확고히 다졌던 가문으로는 제갈근의 제갈씨와 전종의 전씨, 그리고 장소의 장씨 정도에 불과했다. 그만큼 호족들의 힘이 한없이 강했다.

 

설상가상 강동 지방은 중앙 정부의 힘이 미약했던 탓에 손씨 일가 정권은 자주 이민족들과 다툴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이유로 필자는 손씨 일가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자 했었던 손권이 이궁의 변을 통해 친위 세력 구축에 많은 힘을 쏟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궁의 변은 오히려 손씨 일가가 분열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그리고 이런 권력 다툼은 오나라 황실의 고질병으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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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4-05 20:40:47

 강동은 표기상으론 넓어보여도 개발도가 낮고 이민족 출입 관리가 제대로 안되는 상태였죠.


개국공신들이 모여서 사마씨 편 들고 통수친 위나라도 있지만...

 

하여간 오는 이모저모로 공격에 적극적이긴 힘들었지 않나 합니다.

2019-04-05 23:00:13

잘봤어용

2019-04-05 23:04:25

오가 그렇게 형주에 집착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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