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의 그녀들
나는 편의점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고 가다 목이 마르면 음료수나 사러 들리는 수준.
립스틱을 빠트리고 출근했을 때 들어가 빨간색이 나는 립밤을 사 바르며
'편의점에는 없는 게 없네'하며 둘러보다가 휘향찬란한 편의점 주력상품들을 발견하지만 이내 '무슨 인스탄트들이야'하며 매정하게 나오곤 했다.
그러던 내가 이 편의점을 밥 먹듯이 드나들기 시작한 건 작년 여름,그러니까 '순수콘'이라는 깨끗한 우유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부터였다.
계산할 때마다 '2천원입니다'를 '20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점주 아저씨와 단 한 번도 웃어드리지 않았던 나와의 관계가,밖에서 마주쳤을 때 웃으며 목례를 주고받는 수준이 된 걸 보면 어지간히 사다 먹었구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갑작스런 순수콘의 단종 소식을 들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하겐다즈로 안전하게 환승한 나는,
그때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강아지와 함께 먹을 고구마 간식, 마더 혜레사 도시락, 1+1 행사하는 섬유 유연제 등을 신나게 집으로 퍼다 날랐고,
자연스레 여러 명의 알바생들이 바뀌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젠 몇 번만 봐도 이 사람이 오래 할 것인지 아닌지가 대충 감이 오는 지경에 이르렀달까.특히 야간타임.
편의점 일이라는 게 난이도는 쉬울지 몰라도 생각보다 잔 손이 많이 가는 업무구나라는 것도
밤에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다 최근, 얼굴을 익힐만하면 바뀌고 바뀌고 하는 그 어려운 자리에 드디어 정착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이 여알바생은 매일 레드불을 한 캔씩 사서 마시는지 언제 불쑥 방문해도 단 한 번을 꾸벅꾸벅 하지 않는 미친 프로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며칠 전, 밤에 갑자기 탄산수와 크런키 초콜렛을 먹지 않으면 큰일 날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집을 나섰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어 성의 없게 허공에 인사를 한 후,
재빨리 초콜렛과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하나 꺼내 카운터로 가는데,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손님이 담배이름을 말하며 지폐와 동전을 너무 거칠게 주는 것이다.
거의 테이블에 뿌리는 거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동전을 집어서 세는 그 몇 초를 참지 못하고
'아, xx(욕설) 맞으니까 담배부터 줘 '하며 재촉하는 그.
그리고 끝까지 웃음기를 거두지 않는 그녀.
그것은 모멸감, 싫은 내색을 할 수준을 이미 넘어서 이 불쾌한 순간을 빨리 넘기고만 싶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아마 처음 겪는 일이 아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미안할 정도의 무시하는 말투였다.
여기에서 나는 한국사회 쥐꼬리 권력의 모순을 본다.
손님과 가게 종업원 사이에서 손님이 권력적 우위에 있다고 여기고, 물건을 사러 온 편의점에서 알바에게 고개 숙임을 받고 싶어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사람 인사도 없이 나갔다.
저런 류의 사람들이 자기 인사는 되게 챙긴다.
어디 가서 불친절에 대한 조금의 관용도 없이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화내고.
자신이 쥐꼬리 권력밖에 없으니까 직접 알바에게 뭐라 하지는 않겠지.
'야 됐고, 여기 점주 어딨어'
알바와 권력관계가 명확한 점주에게 일러바치는 거다.
언제 또 새벽에 가게 될지 모르지만 그녀가 그곳에 여전히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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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쓰시네요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