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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의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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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12-17 10:25:10

나는 편의점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고 가다 목이 마르면 음료수나 사러 들리는 수준.
립스틱을 빠트리고 출근했을 때 들어가 빨간색이 나는 립밤을 사 바르며
'편의점에는 없는 게 없네'하며 둘러보다가 휘향찬란한 편의점 주력상품들을 발견하지만 이내 '무슨 인스탄트들이야'하며 매정하게 나오곤 했다.


그러던 내가 이 편의점을 밥 먹듯이 드나들기 시작한 건 작년 여름,그러니까 '순수콘'이라는 깨끗한 우유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부터였다.
계산할 때마다 '2천원입니다'를 '20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점주 아저씨와 단 한 번도 웃어드리지 않았던 나와의 관계가,밖에서 마주쳤을 때 웃으며 목례를 주고받는 수준이 된 걸 보면 어지간히 사다 먹었구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갑작스런 순수콘의 단종 소식을 들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하겐다즈로 안전하게 환승한 나는,
그때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강아지와 함께 먹을 고구마 간식, 마더 혜레사 도시락, 1+1 행사하는 섬유 유연제 등을 신나게 집으로 퍼다 날랐고,
자연스레 여러 명의 알바생들이 바뀌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젠 몇 번만 봐도 이 사람이 오래 할 것인지 아닌지가 대충 감이 오는 지경에 이르렀달까.특히 야간타임.
편의점 일이라는 게 난이도는 쉬울지 몰라도 생각보다 잔 손이 많이 가는 업무구나라는 것도
밤에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다 최근, 얼굴을 익힐만하면 바뀌고 바뀌고 하는 그 어려운 자리에 드디어 정착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이 여알바생은 매일 레드불을 한 캔씩 사서 마시는지 언제 불쑥 방문해도 단 한 번을 꾸벅꾸벅 하지 않는 미친 프로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며칠 전, 밤에 갑자기 탄산수와 크런키 초콜렛을 먹지 않으면 큰일 날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집을 나섰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어 성의 없게 허공에 인사를 한 후,
재빨리 초콜렛과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하나 꺼내 카운터로 가는데,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손님이 담배이름을 말하며 지폐와 동전을 너무 거칠게 주는 것이다.
거의 테이블에 뿌리는 거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동전을 집어서 세는 그 몇 초를 참지 못하고
 '아, xx(욕설) 맞으니까 담배부터 줘 '하며 재촉하는 그.
그리고 끝까지 웃음기를 거두지 않는 그녀.
그것은 모멸감, 싫은 내색을 할 수준을 이미 넘어서 이 불쾌한 순간을 빨리 넘기고만 싶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아마 처음 겪는 일이 아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미안할 정도의 무시하는 말투였다.



여기에서 나는 한국사회 쥐꼬리 권력의 모순을 본다.
손님과 가게 종업원 사이에서 손님이 권력적 우위에 있다고 여기고, 물건을 사러 온 편의점에서 알바에게 고개 숙임을 받고 싶어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사람 인사도 없이 나갔다.
저런 류의 사람들이 자기 인사는 되게  챙긴다.
어디 가서 불친절에 대한 조금의 관용도 없이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화내고.
자신이 쥐꼬리 권력밖에 없으니까 직접 알바에게 뭐라 하지는 않겠지.
'야 됐고, 여기 점주 어딨어'
알바와 권력관계가 명확한 점주에게 일러바치는 거다.



언제 또 새벽에 가게 될지 모르지만 그녀가 그곳에 여전히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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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12-17 01:17:42

글 잘 쓰시네요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되네요

WR
2016-12-17 04:34:23

쓰다보니 길어져서 살짝 걱정했어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6-12-17 01:29:06

달필이십니다

WR
Updated at 2016-12-17 04:37:07

좋은 맘으로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즐거운 주말 되시길 기원합니다.

1
2016-12-17 01:35:04

편의점 뿐만일까요...

유독 대한민국에서 그런 문화가 강합니다...
김밥천국에서 호텔급 서비스를 바라는 고객도 있고...
우리나라에선 나이, 위치 관계없이 서로 존중하고 존대하고 기분좋으면 안되나 봅니다. 

WR
Updated at 2016-12-17 04:38:26

공감 가는 말씀이세요.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느 사회나 항상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겠지만
내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의 하루를 망칠 수도 있다는 점 하나만 인식해도 지금보다 환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
2016-12-17 02:07:15

이쁜가요? 왠지 그 알바분 귀요미 스타일 이실듯 하네요 그리고 그분 절대 안짤립니다. 전 메너없는 아저씨가 반말로 던힐줘 xx야 했을때 던힐 여깄다 라고 해도 안짤렸죠 물론 아저씨한태 맞았습니다.

WR
2016-12-17 04:39:54

'던힐 여깄다'
듣는 속은 시원하네요

2016-12-17 09:59:07

시원하게 뺨따구 맞았죠

2016-12-17 14:32:06

경찰서 보내드렸나요??

2016-12-17 15:23:33

그냥 노려봤더니 사과하시길래 햄버거 쿨피스 핫바로 퉁쳤습니다.

2016-12-17 03:05:30

그 40대는 금전적인여유가 없을꺼라고 67프로!?쯤 확신합니다

동전에 바닥에 던지다싶이에서

곡성의 황정민이 상에 쌀알을 뿌리며 "악질중에 악질을 건드러부렀어~"가 오버랩되는건 왜일까요?

고전적인 부자들이 친구를 둘때 웨이트리스 및 서비스직 종사자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중하게 본다는디

참 인성이 못되먹은 분들이 참 많은것같아요

PS:참고로 전 식당이든 편의정이든 택시든 어디를 가던 안녕하세요,잘먹었습니다 또 와야겠네요(다시는 안올 밥집이라도 그럴지라도) , 좋은하루되세요 , 기사님에겐 어감이 조금 이상한대 "많이 태우세요~" 등등 참 인사성밝은 유쾌한유부남입니다

PS2:그런대 말입니다... 역으로 편의점 출입하며 퇴장!?하며 두번의 인사를 하는대도 소히 쌩까거나 카드나 잔돈을 황정민의 쌀 처럼 뿌리는 알바들도 있다는 말이죠 참 고민됩니다
그런 알바들은 제가 정중히 한마디하면 또 갑질이네 어쩌네 생각할것 같단말이죠 ㅋㅋ
참 사람은 쉽지 않은 동물인것같습니다

PS3:아이스크림은 까패!?올레 , 더운!?사냥
소!?바 이런류가 갑 아닌가요? 순수바는 슈퍼집아들 얼추30년차인대 첨듣네요 생경합니다 ㅎㅎ 굳밤되세요 즐겁게 읽었습니다 ^^뿅~

WR
1
2016-12-17 04:41:32

역시 날카롭고 유쾌하게 풀어내시네요.
곡성 비유에서 빵 터졌어요.

Ps'많이 태우세요' 라는 말 참 따뜻해요. 하나 배웠습니다.

3
2016-12-17 05:42:33

젊을때 야간 1년정도 했었죠.
세상에 이렇게 X새끼들이 많구나 라고 느낀 소중한 1년 이었습니다.
공짜술 달라는 아재한테 안된다하니까 뺨도 맞아봤고. 8만원을 100원짜리로 결재하면서 빨리안한다고 얼굴에 동전을 뿌리는 아줌마도 있었구요. 청소 다해논곳에 일부러 가래침을 뱉는 고딩들에. 밤마다 자기집 마냥 술따르기를 시키는 택시기사분도 계셨고....수도없는 쓰레기새끼들을 만나봤습니다.

그만두는 마지막날에 진상한명이 멱살을 쥐어잡길래 멱살잡은 손가락을 반대로 꺾어서 3개정도 부러뜨리고 따귀 두방 치고 기절한거 냅두고 스스로 신고해서 씨씨티비 보여주고 합의한 기억이 있네요.

스산했던 23살 겨울이 문득문득 기억나면서 몸서리가 쳐지네요.
야간인데도 시급 3000원을 받던 2005년의 절망적인 현실.
정말 성실하고 듬직하다 말많이 하면서도
100원이라도 빵구나면 월급에서 까버리는 매정한 사장.
정말 인생 바닥부터 여러가지 일을 다해봤지만 편의점처럼 지랄같고 힘든게 없었습니다.

WR
1
2016-12-17 07:01:08

아아, 읽기만 해도 고단하고 생생한 경험담이네요.
성실히 견뎌냈을 그 겨울의 23살 청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2016-12-17 09:29:52

정말 세상 별별 사람들 많죠....
최근에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하셨던 명언 두개가 많이 생각 나더라구요
똥은 똥끼리 뭉친다 하고 세상은 넓고
떠라이는 많다... 살면서 정말 많이 느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에게 떠라이 같이 안보이려고 많이 노력하면서 사네요 서로 힘내시게요~

WR
2016-12-17 15:46:14
마사장 그리고 코비님도 화이팅
2016-12-17 09:54:54

저런 사람도 땅콩회항때는
침 튀어가며 욕했겠죠
자신이 그러는줄은 모르고

WR
2016-12-17 15:49:51

저와 꽤 많은 이슈에서 의견을 같이 하는 분일지도 모르겠네요.

2016-12-17 10:15:29

피천득님??


아, 좋은 글입니다. 좋은 글이야.
WR
2016-12-17 16:03:10

당대 최고의 수필가로부터 인생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듣고 싶네요.
코멘트 감사합니다.

2017-01-08 14:57:48

저는 어느 곳에 가건, 상대의 연령이 어떻건 존대와 예의를 잃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술집가서 반말한 일이 떠오르네요.
무슨 안주 시키지?하고 있는데 아 씨 아무거나 시켜!하는 사장님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그라모 파전 꾸가 막걸리랑 가온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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