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tah Jazz :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honor of dad
Canton, Ohio » 에너지 솔루션 아레나의 상품점에서 파는 '재즈 팬 외 주차금지'라고 쓰여진 스포츠 기념품 - 타올, 펜던트, 머그잔 - 들은 글렌오크 고등학교의 상담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고등학교 교사인 캐시 쿠포스는 직업 상담하기 위해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단지 아들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 기념품들을 선물한다.
"뭐든지 당신이 원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바란다면 언젠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녀의 아들, 코스타는 20년 동안 꿈꿔오던 일을 지난해 재즈에서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NBA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7풋의 축복받은 신체를 타고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코스타는 10여년 동안 농구에 미친듯이 몰두해서 살아왔다.
혈관, 종양학의 전문의였던 알렉스 쿠포스는 오하이오, 신시내티, 몬트리올 등지의 병원에서 수 년을 보냈고, 이제 고향에 돌아와 아크론 소아 병원에서 일하려던 때에 예기치 않은 간암판정을 받았고 결국 1998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성직자로서 내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신이시여, 어찌 이런 일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병과 싸워온 사람이 결국 병으로 삶을 마치게 되었을까?" 주교인 댄 로기치는 당시를 회상했다.
코스타는 뒷마당에서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고, 아픈 아버지 옆에서 기차 모델을 만들던 때를 기억한다.
당시 그는 너무 어려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자신이 NBA선수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한다.
"아마 그는 매우 자랑스러워 했을 거에요. 아버지는 항상 열심히 해야한다고 말했거든요. 그는 훌륭한 의사였고 항상 자신의 직업이 최고라고 믿고 최선을 다했어요."
알렉스를 잃은 공허함을 대신해주려고 캐시는 그의 아들을 과거 대학농구 선수였던 로기치가 운영하는 농구코스에 맡겼고 로기치는 코스타의 멘토가 되어 주었다.
"우리가 코스타를 볼 때마다 그가 그동안 이룬 것들이 자랑스러워요. 그는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Basketball 101
남편을 잃은 후에 캐시가 혼자 세 아이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녀는 아들이 농구선수로서 전미 고등학교 탑 랭커였음에도 농구에 대해 자세히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선생님이었고, 큰 아들인 바실리우스는 고등학교 밴드에서 연주를 했고, 딸은 성가대원이었다.
그러나 코스타는 유명 대학들이 스카우트하기를 원하는 센터로 성장했다.
글렌오크 고등학교의 감독인 잭 레이놀즈는 코스타의 2학년 때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다. 캐시는 당시 빅텐 컨퍼런스가 뭔지 몰랐다고..
"하루는 그녀가 와서 빅맥 컨퍼런스의 한 관계자가 전화가 왔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햄버거 회사에서 왜 전화했지?' 하고 놀렸지요. 지금도 가끔씩 '햄버거 회사에서 전화오냐'고 농담을 하곤 해요."
그 이후부터 캐시는 열심히 다양한 컨퍼런스와 코치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스타의 고등학교 경기들을 다 보았고, 라스베가스에서 열렸던 AAU 토너먼트에 가서 태드 마타, 릭 피티노, 톰 이조같은 코치들을 만나보기도 했다.
코스타가 18세이하 선수권대회에 그리스 대표로 참가했을 때 캐시는 스페인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지난 여름 재즈가 코스타를 1라운드에서 지명하자.. 캐시는 유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재즈에 관한 모든 것들, 로스터, 제리 슬로안과 코칭 스탭, 심지어 스탁턴- 말론의 프랜차이즈 역사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드래프트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코스타의 루키시즌 동안, 캐시는 늦게까지 재즈 게임들을 다 지켜보면서 게임스탯을 정리했고, 점심시간에는 항상 재즈에 관한 신문기사와 인터넷 블로그까지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코스타가 플레이할 때 캐시는 가장 열심히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항상 '넌 이거이거 잘못했다'고 지적해요.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괜찮을 수 있었던 이유지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지난 크리스마스 때 코스타는 어머니에게 포드 자동차를 선물해서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키운 보람이 있네요."라고 그녀는 농담을 했다.
Closing the gym
코스타의 연습량에 대한 이야기는 글렌오크의 전설로 남아있다.
3학년 때 그의 다리가 골절되었는데..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매일 500개씩 슛을 던졌다.
그 해 라이벌 마실리언과의 경기에서 코스타가 막판 3점슛을 미스하면서 경기를 패배했을 때.. 레이놀즈 코치는 코스타가 경기후 코트 같은 위치에서 100개의 슛을 성공시키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기억했다.
"나는 그보다 열심히 연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아침부터 체육관 문닫을 때까지 연습하더군요."
코스타는 레지 밀러를 좋아해서 31번을 달았고, 고등학교에서 르브론과 연습게임을 하면서 NBA에 대한 꿈을 키웠다.
코스타는 공부도 열심히 해서 평균 3.7을 받았고.. 고등학교 때 켄트 대학 코스를 미리 이수하기도 했다.
원래 코스타가 계획했던 것은 대학에 적어도 2년간 머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NIT에서 MVP를 수상한 후에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19살의 나이에 코스타는 이미 그리스 리그에서 5mil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하이오 대학에 입학한 바 있었다.
캐시와 로기치는 코스타에게 NBA에 가겠느냐고 물어봤고.. 그는 NBA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그가 드래프트에서 로터리 픽 안에 뽑히는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재즈의 23픽까지 내려왔다.
홈타운인 클리블랜드는 코스타를 지나쳤고, 그는 한 번도 워크아웃 하지 않았던 유타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캐시는 유타가 코스타에게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고, 로기치는 코스타가 드래프트되는 순간 솔트레이크 시티에 있는 그리스 주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농담을 했다.
지난 시즌 NBA에서 앤서니 랜돌프에 이어 두 번째로 어렸던 코스타는 48게임을 출전하면서 4.7득점과 2.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나이를 감안하면 그의 루키시즌은 괜찮은 출발이었다.
그는 작은 콘도에서 생활했고.. 대학 온라인 강좌를 수강했으며.. NBA 스케줄을 풀로 소화했다.
재즈가 플레이오프에 나갔을 때, 코스타는 그가 코트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경기를 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제 고향인 캔톤으로 돌아와서 코스타는 연습을 하면서 재즈의 섬머리그와 그리스 대표팀에서의 유로 선수권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난 경기를 좋아하고 내가 농구를 열심히 할 수 있는 지금 상황이 좋아요."
코스타의 11학년 때 화학선생이었던 존 쉽은 이렇게 말했다.
"코스타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면 항상 특유의 집중력을 느낄 수 있어요. 그가 농구를 하면서 좋은 일도 생기고 나쁜 일도 생기겠지만.. 그렇게 플레이하다 보면 그의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거에요."
GO! JAZZ~
쿠퍼스.. 현재 유타입장에서 절대 버려서는 안되는 선수중에 하나죠
멋진글 잘읽고갑니다
GO JA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