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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으로 문란했던 최고 영웅과 밤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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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3 00:04:11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애틀랜타의 유복한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보스턴 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의 침례교 목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다음해인 1955년 12월 몽고메리의 한 버스에 올라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의도적으로 백인만 앉을 수 있는 맨 앞좌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로자는 곧 경찰에 체포되었고 흑백분리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킹 목사는 이에 대항하여 몽고메리의 모든 버스를 보이콧하는 운동을 지휘하였고, 1956년 11월 연방대법원은 앨라배마의 흑백 분리 버스 탑승 제도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27살의 킹 목사는 이를 계기로 하여 전국적인 흑인 지도자 반열에 올랐고, 그와 다른 흑인 목사들은 1957년 애틀랜타에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를 결성했습니다. 이 조직의 목적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남부 전역에서 흑백차별을 철폐하고 흑인의 투표권을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 19세기말에 흑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그 이후인 1920년입니다. 하지만 1957년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에게 사실상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남부 지역의 주들은 유권자에게 정치현안에 관한 최소한의 기본 지식을 묻는 이른바 ‘문맹검사’를 실시하는 제도를 도입했는데, 심사관들은 흑인에게 터무니없이 어려운 질문을 던져 투표 부적격자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문맹검사를 통과한 소수의 흑인에게는 KKK단의 공공연한 협박이 뒤따랐고, 혹시나 투표하러 가는 경우 폭력을 당하는 등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의 지역에서는 치안을 담당하는 보안관과 기소를 담당하는 검사장이 모두 투표로 선출됩니다.


당시에 남부 지역에서는 거의 백인들만이 투표를 했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선출된 보안관과 검사장은 백인이 흑인에게 해를 가한 사건도 수사나 기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KKK 등에 의해 자행된 흑인 살해 사건이 기소가 되더라도, 배심원은 투표권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에 흑인이 배심원에 포함될 수 없었고, 백인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흑인을 살해한 자에게 무죄평결을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따라서 킹 목사와 SCLC 대표들은 흑인의 완전한 투표권 획득을 민권운동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습니다.


킹 목사의 억누를 수 없는 호소력을 지닌 감동적인 연설과 비폭력 저항운동은 양심적인 백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1957년 2월 그는 타임지의 표지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28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민권운동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말콤 X를 비롯한 흑인우월주의 이슬람 과격 운동가들은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를 노예근성이라고 비웃으며 그를 백인들의 개라고 비난했지만 전국의 인권운동가들이 킹 목사의 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케네디와 닉슨이 박빙의 경쟁을 할 무렵 킹 목사는 사전허가 없이 시위를 한 죄목으로 감옥에 있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후보인 케네디는 킹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주도하는 운동에 공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전화 때문에 케네디는 일정 수의 보수 유권자를 잃고 진보 유권자를 얻었습니다. 대선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 간에 케네디는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고, 법무장관에 새로 임명된 로버트 케네디와 함께 신임 대통령은 킹 목사를 친구로 인정했습니다.


FBI의 후버 국장은 이전에 흑인을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흑인과 백인이 분리되어서 문제없이 수십년 동안 살고 있던 미국 남부에 킹 목사가 급부상해서 평화로운 일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은 후버에게 있어서는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는 킹 목사와 SCLC 대표들의 시위를 무력화시키기로 작정했습니다. 후버는 FBI 요원들에게 킹 목사의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고를 받은 후버는 크게 놀랐습니다. 킹 목사 주변에 모여든 많은 인물들 중에는 공산당원인 스탠리 레빈슨, 로버트 윌리엄스, 벤저민 데이비스 그리고 베이어드 러스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후버는 격분해서 SCLC 사무실을 도청하고 그 조직의 회의에도 몰래 침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후버는 FBI 국장으로 8명의 대통령을 모셨지만 그가 유일하게 마음속으로 복속했던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뿐이었습니다. 미국을 구한 전쟁영웅 출신에 보수적 마인드를 갖고 있던 아이젠하워의 임기 8년동안 후버는 마음껏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자 및 과격분자 등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당선된 대통령과 후버의 직속상관인 법무장관은 그가 가장 경계하는 인물인 킹 목사를 친구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케네디 시절 이후부터 킹 목사는 백악관에 정기적으로 드나들었습니다. 후버는 위험을 감지하고 케네디 대통령 형제들의 신상을 추적했고, 이 두 사람은 노골적인 비밀 성행위 장면이 사진에 고스란히 찍히는 등 여자문제 때문에 후버에게 크게 약점이 잡혔습니다.


1961년 흑백 분리적인 법률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흑인과 백인을 포함한 비폭력적 단체 ‘자유의 기수’는 버스를 타고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진입했습니다. 무장한 백인들이 자유의 기수를 공격하려 하자,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연방 보안관들을 보내 그들을 지켰습니다. 1962년 9월 제임스 메러디스는 연방 군대의 보호아래 미시시피 대학교에 처음으로 등교한 흑인 학생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한달에 25일 이상 집을 비우며 지속적으로 비폭력시위를 이끌었습니다. 킹과 그의 지지자들은 의도적으로 과격한 보안관과 공안국장이 버티고 있는 지역을 골라 시위장소로 선택했습니다. 킹은 길에서 죽겠다고 선언하고 민권운동에 뛰어든 리더였습니다. 그와 지지자들이 시위에 나서자 과격한 보안관과 공안국장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경찰을 앞세워 시위대의 머리를 깨뜨리며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진압했습니다. 그런 가혹행위는 킹 목사와 동행한 텔레비전 카메라에 일일이 포착되어 워싱턴, 뉴욕, 시카고, LA, 샌프란시스코에 남부 스타일의 인종차별 장면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날마다 수많은 백인 동조자들이 킹 목사에 동참했습니다. 1963년 8월 28일, 킹 목사는 미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 모인 25만 명의 인파를 상대로 킹 목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연설로 꼽히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vDWWy4CMhE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이 연설은 티비 중계를 통해 미국 전역에 메아리쳤고, 백악관에서 티비로 지켜보던 케네디의 마음을 움직여 후에 민권법을 탄생시켰습니다. 킹 목사는 남부 백인들은 물론 후버 국장에게도 깨끗한 승리를 거두는 듯싶었습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킹 목사는 그런 승리를 거둔 몇 시간 뒤에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었던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아직도 그 연설의 흥분이 넘쳐흐르는 상태에서 그의 일행은 워싱턴의 윌러드 호텔에 투숙했는데, FBI가 그곳에 설치한 도청장치가 킹 목사와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환락적인 성행위 장면을 녹음해버린 것입니다. 만일 지금처럼 카메라 기술과 통신이 발달된 시대라면 그 파급효과는 수만배 컸을 것입니다.


그 당시 마틴 루터 킹의 유일한 약점은 그가 여자를 너무 좋아했던 것입니다. (아주 나중에 상습적 표절증이라는 또 하나의 약점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시위를 마친 후에는 매번 카리스마 넘치는 그에게 접근하려는 여자들이 줄을 서 있었고, 킹 목사는 그녀들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시위가 아닌 회의 목적으로 출장했을 때에는 창녀들을 불러서 회포를 풀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킹 목사의 주변에서는 이런 행위가 잘못된 거라는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킹 목사의 이런 약점을 전해들은 후버는 그를 더욱 증오하며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금욕적인 생활을 해온 후버의 입장에서는 목사라는 사람이 대놓고 간음을 하면서 계율을 어기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후버는 요원들을 시켜 워싱턴의 윌러드 호텔에서 녹음한 환락의 정사장면을 여러 개 복사해서 워싱턴의 주요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미묘한 시기에 그 테이프 내용을 보도하려는 신문사는 없었습니다. 테이프 내용이 진위도 불분명해서 잘못 보도했다가는 신문사가 존폐의 위기에 놓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후버의 기대와 달리 킹 목사의 유명세는 갈수록 더해져 타임지는 그를 1963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그 다음 해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후버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물이 타임지 올해의 인물과 노벨 평화상을 차지한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킹 목사 등의 영향으로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에 공공장소 등에서 흑백차별에 반대하는 연방법의 제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그 자리를 이어받은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안을 의회에 상정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남부 출신 의원들이 83일간 진행한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 법안은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이 법에 의하여 공공시설과 장소에서의 흑백 차별, 고용에서의 흑백차별, 선거에서의 흑백차별이 금지됐습니다. 민권법의 1장은 선거권을 규정했지만 남부지방에서는 여전히 ‘문맹검사’가 행해졌고 흑인들은 투표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해서 유명 인사가 된 킹 목사는 백악관으로 존슨 대통령을 방문해서 투표권법의 제정을 요구했습니다. 존슨은 복지법안을 구상중이라고 하면서 투표권법의 제정은 몇 년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강철 같은 의지의 킹 목사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민권법이 통과된 후 투표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1년의 상황은 작년에 상영된 에버 두버네이 감독의 명작 「셀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5428


존슨 대통령은 킹 목사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고 계속 시위를 통해 갈등을 부추기자 고뇌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남부출신인 그는 남부의 사정을 잘 알기에 투표권법이 제정되는 경우 남부는 민주당에서 완전히 이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후버가 킹 목사를 처리하기 위한 방안을 존슨에게 제안하고 존슨은 마지못해 동의합니다. 후버는 여태까지 녹음한 킹 목사의 난교장면과 음담패설을 하나의 테이프에 편집해서 킹 목사의 아내에게 보냅니다. 그것을 받은 아내는 대경실색을 하면서 남편을 심하게 추궁합니다. 아래의 대사는 영화 「셀마」의 장면입니다.


킹 목사는 아내의 추궁에 테이프의 목소리는 자신이 아니라며 극구 부인합니다. 그런 그에게 그간 자신이 겪어온 모든 고통을 쏟아내듯 토로하며 아내는 묻습니다. "나를 사랑해?" 킹 목사가 답합니다. "사랑해." 그에게 아내가 다시 묻습니다. "그럼 저 여자들은?" 킹이 답합니다. "아니."


킹 목사는 신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부정했듯이 모든 걸 이미 짐작한 아내 앞에서도 부정합니다. 한달에 25일 이상 집을 비우는 남편. 그리고 언제 길에서 죽을지 모르는 남편. 이미 킹의 아내는 남편의 절반 이상을 자신에게서 비운 상태였습니다.


후버의 음모와 존슨의 거부에 굴하지 않고 킹 목사는 투표권법의 제정을 위해 소위 ‘셀마행진’을 시도합니다. 셀마는 앨라바마의 도시로 인구의 절반이 흑인이었으나 투표권을 가진 흑인은 1 퍼센트도 안됐던 곳이었습니다. 1965년 3월 7일 킹 목사와 행진 참가자 600명은 그해 3월 7일 셀마에서 주도인 몽고메리까지 행진을 하기 위하여 에드먼드 페투스 다리 위에 도달했으나 주지사 조지 월러스의 명령을 받은 앨라배마 주 경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사망자를 비롯해서 무수한 부상자를 낳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백인들은 환호하면서 시위자들을 저주했습니다. 이는 일요일에 벌어진 유혈 사태라는 뜻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불리며 미국 역사의 중요한 날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킹 목사는 굴하지 않고 '2차 셀마행진'을 진행합니다. 앞서 벌어진 행진에서 앨라배마 주와 셀마 시의 공권력에 흑인들이 잔혹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속속 셀마로 모여들며 킹 목사를 중심으로 2차 행진을 계획합니다. 결전의 날이 밝자 킹 목사를 위시한 수천의 시위대가 1차 행진의 유혈 진압현장인 에드먼드 페투스 다리 위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이날 기도를 킹 목사는 말없이 돌아서서는 군중을 헤치고 셀마로 돌아옵니다.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무고한 시민의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직후 고뇌하던 존슨 대통령은 투표권법을 의회에 상정했고 어느 의원도 감히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의 흑인에게 완전한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남부지역은 민주당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8년 4월 테네시주의 멤피스에서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39살의 나이에 암살당했습니다.


2015년 3월 7일 50년전 셀마행진을 기념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50년 전의 당사자들과 손을 잡고 에드먼드 페투스 다리 위를 행진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인종차별은 아직 존재한다면서 “셀마행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진에서 오바마의 손을 잡은 여성은 50년전 남편과 함께 행진에 참여했다가 부상당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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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3-03 00:15:05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색정광이었다는건 몰랐네요

워낙 순교자 이미지가 강해서 
2016-03-03 00:26:26

저래서 재클린 케네디가 MLK는 사기꾼이라고 한 건가;

WR
1
2016-03-03 16:48:15

이런 육성 인터뷰가 있었죠

http://news.kbs.co.kr/news/view.do?ncd=2356985

4
Updated at 2016-03-03 00:28:32

킹 목사가 문란한 성 생활을 했었다니 신선하네요. 만약 지금 시대였다면 정말 엄청난 파급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상과 녹음 기술은 이전보다 훨씬 발전되었으니 말이죠. 성생활은 개인의 영역이니, 그의 인권운동과는 별개로 평가(혹은 비판) 받아야 한다 생각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되지를 않겠죠. 신기하게도 킹 목사의 이면에 대해 읽을 때 신선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겪는 각종 스트레스와 정치,사회적 압박을 그렇게 해소했을 수도 있겠네요. 물론, 좋은 일은 아니지만요...


+ 베일리님 언제나 양질의 글 감사드립니다!! 

3
2016-03-03 00:30:38

반면에 맬컴X는 아무리 털어도 아무것도 안나왔더랬죠

4
Updated at 2016-03-03 00:39:32

마틴 루터 킹의 여색 이야기는 꽤 유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 알려져 있더라구요. 예전에 루터킹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 여색이야기를 했더니 무슨 어디서 말도 안되는 음모론을 말하냐고 역으로 엄청 혼났던 기억이 있네요. 


 사실 마틴 루터킹을 목사라는 신분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죠. 목사가 간음을 하다니... 하지만 그에 비해 저처럼 목사라는 신분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으니 별 상관이 없구요.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행동하는 색정광" 뭔가 드래곤볼의 무천도사느낌이잖아요. 

 미국에서는 이 문제가 많이 알면서도 쉬쉬하는 그런거 같더라구요. 미국의 국경일로 지정된 인물의 치부문제다보니... 


 재미있는 것은 과격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말콤X는 또 역으로 성적으로 엄청나게 도덕적이었다는 거죠. 자기 스승인 일라이자가 혼외자식 문제를 일으키자 거기에 항의하다 갈라지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평화주의자는 사생활이 문란하고, 과격주의자는 사생활이 깨끗하고... 
1
2016-03-03 01:06:39

외적으로 평화주의자에겐 내적으로는 탈출구가 필요하고,


외적으로 과격주의자에겐 내적으로는 안락의자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2016-03-03 02:25:10

무천도사는 평생 독신이었으니 여자한테 집적거리고 변태짓을 해도 그냥 추잡한 색정이라고 개그캐릭터로 넘길 수 있지만.......


킹 목사는 목사라는 직책 외에도 가정을 지닌 가장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죠. 
4
2016-03-03 00:41:19

킹 목사의 업적을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이런걸 보면 미국이 영웅 만들기를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리 사생활이라고 해도 저 정도면 많은 사람들이 알만한데 마틴 루터 킹의 이런 면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네요. 미국은 대단한 업적이 있는 사람의 과는 어느 정도 덮어주는데 익숙한 것 같기도 합니다.

1
2016-03-03 02:06:26

링컨이 대표적이죠 독재자에 학살자인데 영웅으로 치장됬죠.

1
2016-03-03 09:32:22

독재자에 학살자라는건 너무 나가셨네요.


링컨에 대해서 조금만 알아도 그가 집권 초기에 자기 사람이 없고 지지기반이 약해서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전쟁 수행중에 언론탄압을 한것때문에 독재자라고  하시는 것일지 모르겠는데,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고, 미국이라는 국가의 명운을 좌지 우지 하는 사건이라 그걸 독재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분열 직전의 미국을 어떻게든 한 국가로 묶어든 사람이 링컨이고 그랬기 때문에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하다 소리를 듣는거지 단순한 영웅 만들기는 아닙니다.


영웅만들기에 대한 반감으로 기존 인물의 지나친 폄하도 피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이 되네요.



1
Updated at 2016-03-03 10:36:52

요새는 좀 덜하지만 몇년 전쯤인가 위인들의 재평가(라고 쓰고 무조건 깍아 내리기) 붐이 인 적이 있었죠. 그 주 타겟 중 하나가 링컨과 간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게 너무 심해서 무분별한 폄하까지 갔었고 이후 다시 이건 너무 나간거잖아 라는 식의 이야기가 다시 나왔죠. 키리코 규비님이 잘 써주셨지만 독재자에 학살자는 진짜 너무 나가셨습니다. 피펜재평가가 도가 지나쳐 조단과 피펜은 아예 동급이다까지 나간 느낌.
12
2016-03-03 00:48:13

아는 사람은 아는 그런 이야기이죠. 지금 같은 문제로 한국 기독교계의 자정능력이 도마위에 올랐습니다. 다행이 많은 분들이 건강하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쉽게 변하지는 않네요. 베일러님은 "신기하게도 킹 목사의 주변에서는 이런 행위가 잘못된 거라는 생각조차 없었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종교적인 이야기로 빠질까 길게 이야기는 못하지만 많은 잘못된 신앙이 목사나 특정 사람을 신격화하는 결과들을 낳아왔습니다. 머리로 이해는 안되지만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죠.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는 진리는 '인간에게 소망은 없음'인데 잘 어울리는 단편이라고 보여집니다. 
1
Updated at 2016-03-03 02:02:10

한 달 전쯤에 Damon님의 글을 읽고서 미국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정보를 찾았습니다. 미국 역사에 가장 빼놓을 수 없던게 흑인이었고, 그 중심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었죠. 그래서 본문에서 언급하신 셀마와, 3대 연설로 꼽히는 마틴 루터킹 목사의 연설도 찾아 들었습니다. 상당히 감명 받았고, 제 마음에 드는 몇 안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루터 킹의 좋지못한 단면도 알게되었죠. 하지만 저는 킹 목사의 좋은 단면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분리해서 보고 싶군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훌륭한 사람이다' 정도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밤의 대통령인 후버라는 사람에 대해 흥미가 자꾸 솓는군요.

2016-03-03 02:04:32

와 충격이네요. 그런 약점이 있었다니. 이런걸 보면 완벽한 위인이란 없는듯.

6
2016-03-03 02:42:22

킹 목사의 밤일 이야기는 유명하죠. 저는 인권관련 수업듣다가 교수님이 이야기 해주셔서 알았습니다. 


킹 목사의 일화를 들을때마다 저는 그의 아내가 제일 안쓰럽더라구요. 그 밤일을 다 알면서도 참고 넘어갔죠....... 남자의 밤일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예로부터 정당화시켜주는 경우가 많은데(남자가 바깥일 하다보면 그럴수도 있지!)  같은 경우의 여성에게 쏟아지는 온갖 경멸과 사회적 배제를 생각해보면, 이 사례 또한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킹 목사가 흑인인권을 위해 바친 헌신은 놀랍고 존경스럽지만, 그의 이면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또 다른 차별을 보는거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2016-03-03 06:56:26

혹시 제시잭슨 목사는 킹이랑 관련이 있니요?
비슷한 이미지에 비슷한 약점이 있네여..

WR
2016-03-03 16:45:21

제시 잭슨은 킹 목사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1
2016-03-03 07:02:47

오늘도 흥미로운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색정광이었다는건 오늘 처음 알았네요. 우리나라 목사들 중에도 본인의 위치를 이용해서 간음을 행하는 분들이 계셨고 계시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목사가 아니었다면 아인슈타인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1
2016-03-03 07:22:42

암살당하기 전 날에도 질펀하게 놀고 갔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목사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그렇지 목사와 인권운동가는 전혀 다른 직업이죠. 매일같이 창녀와 자면서 하나님을 전파한다면 위선자지만 창녀와 자면서 인간이 평등하다고 전파하는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2016-03-03 07:51:52

여러가지 출판물들을 통해 루터킹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 놀랍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한 후버의 반응이 참 재미있네요. 완벽에 가까운 도덕적결벽증을 가진 불의한 권력와 사회의 불의에 맞서는 색정남 성직자라니... 후버의 캐릭터도 참 만만치 않군요.

2016-03-03 08:09:33

진짜 역겨울정도네요.
본인이 한일에 대한 보상이나 회포정도로 생각했다는건데..어처구니가없을정도네요.

2016-03-03 08:20:20

구독 잘하고 갑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 되겠네요.
본문중이 말콤X가 나오던데요, 영화 제목으로 본 기억이 있네요.

추후에 여유 시간이 되신다면 말콤X에 대해서도 부탁드립니다.

덕분에 출근시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구독자들을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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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3-03 08:43:28

글의 내용이야 중립적이지만, 저정도 영웅은 그정도 혼외정사는 괜찮다는 용인을 조장할까봐 우려스럽네요.

사실 혼외정사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본인이 자신있게 혼외정사를 할거면 안 그런척 아내를 속이는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성생활에서 리버럴한 남자들은 이 면에서 비겁한 경우가 많아요. 누군가에게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을 기만하면서 후세는 영웅담정도로 기억하죠. 마틴루터킹도 예외는 아니었나보네요.
2016-03-03 11:33:19

그냥 가십거리군요. 재미있네요.

2016-03-03 12:43:48

본문에 언급하신것처럼 색정광인것보다 표절문제로 실망스러운 인물이죠.

킹의 부정적인 부분을 말하는게 워낙에 터부시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묻히고있죠

1
2016-03-03 12:59:15

실은 후버의 뒷편격 이야기인데 화두는 전부 루터킹의 성취향으로만....

목사라는 타이틀때문에 문제가 되었던거지, 기본적으로 인권운동가는 정치인이죠. 인기있는 정치인(더 넓게 말하면 샐럽들)이 여자끼고 노는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죠. 이건 루터의 부인이 성인군자라고 말을 해야할 듯 합니다. 요즘 세상으로 따지면 위자료로 재산 거덜내고도 남았을만한 사안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6-03-03 13:19:36

이 얘긴 나름 유명하죠.. 오늘도 글 잘봤습니다 베일리님

1
2016-03-03 13:52:13

후버도 동성애자라는 의심을 받아서 약점이 많았을건데요. 뭐 자기 약점은 안잡히면 되니 상관없긴 하겠네요.

WR
2016-03-03 16:41:56

많은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생각도 여러 댓글들의 내용이 혼합된 느낌입니다.

Updated at 2016-03-03 18:17:37

마틴루터킹에 대한 크리스 락의 멘트도 인상적이죠...

https://youtu.be/7hJxWr1TKK8


진지한 분위기에 죄송합니다...



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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