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원한을 품은 여성 반역자
그녀의 본명은 배분남(裵粉男)인데, 일본식 이름인 배정자(裵貞子)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배정자는 1870년 김해 관리인 배지홍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세 살이던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한 후 배지홍은 민씨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 당했습니다. 가족들은 가까스로 사형을 면했지만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연좌제에 의해 모두 천민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장님이 되었고, 배정자는 밀양 관청에 기생으로 팔려갔고 그녀의 오빠와 동생은 머슴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때부터 배정자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인 조선에 큰 원한을 품었습니다.
배정자는 12살에 관기에서 탈출해 통도사에서 3년간 여승으로 수도활동을 하다가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밀양부사 정병화의 주선으로 1885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녀는 당시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안경수의 도움으로 여학교에 다녔고, 안경수로 인해 김옥균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경수와 김옥균에 의탁해 생활하면서 여학교를 마친 1887년, 17살의 배정자는 김옥균의 주선으로 일본의 총리대신이던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습니다. 이토는 그녀에게 전산정자(田山貞子, 다야마 사다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배정자의 정자는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빼어난 미모의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고 일본 상류층의 예절은 물론 승마, 사격, 수영, 서양예절 등을 배웠습니다. 그즈음 그녀는 일본 유학생이던 전재식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의 병사로 인해 평범한 삶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사별 후 배정자는 이토에게 돌아가 그에게서 배운 승마, 사격, 수영, 서양예절에 변장술까지 익히고 철저한 정보원 교육을 받은 후 1894년 스파이 임무를 띠고 하야시 공사의 통역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고종에게 접근했습니다.
당시 24살의 배정자는 타고난 미모와 애교에다 품격 있는 국제예절이 더하여 그야말로 최고의 지성미를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유교식 예절 교육만을 받아온 딱딱한 궁중 여인들만 보다가 웃음을 지으며 접근하는 미녀 배정자를 보자 고종은 그녀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고종을 손아귀에 넣은 배정자는 조선의 최고기밀을 빼내 이토에게 건네주는 등 일본의 특급 스파이 역할을 쉽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을미사변 직후 배정자는 일본 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과 재혼했습니다. 현영운은 소설가 현진건의 숙부입니다. 현영운은 딸 현송자를 얻은 후 배정자와 이혼했지만, 이혼 후에도 배정자의 도움을 받고 고속 승진하여 10년 만에 육군 참장 및 농상공 차관까지 올랐습니다. 현송자는 모친 배정자를 닮아 미인에다 일본 유학을 통해 지성미를 갖춘 사교계의 꽃으로 학무국장 출신 윤치오와 결혼하게 됩니다. 아래 사진은 현송자의 30대 모습입니다.
윤치오 가문은 우리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명문가입니다. 윤보선 대통령을 비롯해 3대에 걸쳐 장 차관급 이상만 15명을 배출했고, 의사를 무려 60명이나 배출한 불가사의한 가문입니다. 윤치오는 윤보선의 백부였으니까, 배정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큰할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배정자는 현영운과 이혼 후 일본의 고급 스파이 역할을 계속 해왔습니다. 1905년에 이토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이토가 한국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인생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천민으로 격하된 후 머슴살이를 했던 그녀의 오빠 배국태는 한성판윤(서울시장)으로, 동생은 경무감독관(경찰청장)으로 벼락출세했습니다. 배정자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이토에게 전달하고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을 정도로 권세가 막강했으나, 1909년 이토가 하얼빈에서 사살된 이후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이토와 함께 순사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1910년 한일병탄 후 배정자는 헌병사령관 아카시의 촉탁으로 매달 월급을 받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한 일본군 스파이 활동을 했습니다. 만주의 항일 독립운동 조직에서 배정자를 암살 대상자로 지정하자 그녀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조선과 상해 등을 다니면서 일본제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그녀에게 6백여 평의 토지를 주고 해방이 될 때까지 매월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50대 중반의 배정자 모습입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당시 나이 71살의 배정자는 일본군부와 조선총독부의 뜻에 따라 업자로부터 금품을 받고 100여명의 조선여인들을 송출하여 남태평양의 섬까지 데리고 가서 일본군의 위안부를 시켰습니다.
1945년 해방 후 배정자는 경기도 고양군의 야산에 숨어 지내다가 1949년 반민특위가 구성되자 특위에 의해 체포, 구속되었습니다. 그녀는 남녀 통틀어 1급 친일파에 속하는 인물로 분류되어 반민특위 활동 초기에 검거되어 마지막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재판에 끌려온 79세의 그녀는 어떤 벌을 내린다고 해도 달게 받겠다고 자신의 지난 죄를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곧바로 해체되었고 배정자는 풀려 나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83세의 나이로 서울시 성북구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19
2016-07-20 02:09:11
격동하는 역사의 희생자 입장으로 품은 증오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똑같이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했다는 점에서 동정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겠네요. 재미있는 건 배정자 스토리가 우리나라의 톱스타가 대거 출연한 가운데 두번 영화화 된 것입니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줄거리가 아주 엉뚱합니다. 그러고 싶었을까요?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2418
2016-07-20 19:44:47
...............
2016-07-20 07:31:57
반민특위가 아무것도 못한게, 우리나라가 친일파를 청산 못한게, 이나라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떠오르네요. 2
2016-07-20 07:55:31
저 정도면 친일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읽다가 위안부 부분에서 반전.. 저건 도무지 용서가 안되네요 성북동인지는 모르겠고, 성북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년에 그녀의 형편은 부족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았던 걸로 전해집니다. 배정자는 첫 남편 전재식과의 사이에서 전유화를 낳았는데, 배정자의 친일 행각에 비해 전유화가 받은 혜택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전유화는 배정자보다 먼저 사망했습니다.
1
2016-07-20 08:22:36
사연없는사람은없죠 이완용도... 4
2016-07-20 08:25:55
동정은 가지만, 과오가 너무 크기에 용서는 되지 못하는 인물인 듯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빨리 이런 분들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해서, 보다 나은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 졌으면 합니다. 최근에 뉴스에 우울한 기사들이 많은데 매니아 와서 좋은 글들 보면서 위안을 받습니다. 2
2016-07-20 08:39:47
동정 하기에는 너무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낸 책임을 그 대가를 치러어야 하는데 참 |
글쓰기 |
뭐랄까? 이해가 되는 친일파라고 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