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약속했던) 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내일 외국 출장이 있어 정신 없는 와중에 쓴 글이기 때문에 두서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학부시절 문과계열 전공이었지만 참 다양한 방면으로 수업을 듣고 공부했습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강요된 공부에서 벗어나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을 찾아서 수강하고 공부하는 방식이 너무 좋았습니다. 과학과 수학에 소질이 있다는 이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제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역사, 인류학, 언어학 그리고 문학과 예술이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고 그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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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수업과 책을 통해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을 접했습니다. 자연선택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아이디어로 최초의 무작위한 변이가 끊임없는 변화 압력에 노출되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냄을 말해줍니다. 자연선택은 시간에 따라 유기체를 설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과정이고, 적응적 복잡성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일 뿐 아니라 문화와 언어의 진화까지 잘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다시 과학에 매료되었습니다. 제가 과학에 매료된 가장 큰 이유는 인문사회학과 달리 과학에서는 서로 다른 분야의 설명이 서로 연결되어 수렴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심령학, 점성술 등 미신을 위한 빈자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저는 자연과학계통으로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지원해 합격했고 학위 마칠 때까지 장학금 지원도 약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지원하는 것이 일상다반사로 벌어집니다. 저는 계속 학계에 남고 싶었습니다. 학자가 된다면 아버지처럼 큰돈을 벌 기회는 주어지지 않겠지만, 당신에게는 별 쓸모도 없는 돈을 은행에 잔뜩 쌓아놓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을 시달리며 일과 사투를 벌이던 아버지의 모습은 저에게는 반면교사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보다는 나은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고, 내가 가진 최고의 자산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피는 못 속이는 건지, 결국 저는 아버지와 별로 다르지 않게 절약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단지 저 자신에 국한해서 절약하는 것이고, 가족들이 매우 풍성하게 소비하며 사는 모습에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대학원 입학 당시에 저는 메모 같은 것 없이 머릿속에 많은 것들을 집어넣고 그것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방식에 익숙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실험이 없는 순수이론분야를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몇 년 후 무난히 학위를 마쳤습니다.
학위 후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칠 때에도 현지 학생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학생들과 친했지만 미국식으로 쿨(cool)한 관계였지 서로에게 교감을 갖거나 제가 그들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학교는 해당전공 탑텐에 들만큼 명문이었지만 주립대여서 그런지 몰라도 학생들의 수준은 전혀 높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서 두 아이가 태어났고, 그러는 동안 제 처는 그 학교에서 통계와 컴퓨터 석사학위를 얻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년트랙 직장을 찾았고, 제 처도 일할 곳을 찾았습니다. 둘이서 한국과 미국의 여러 직장에 지원했고, 함께 살면서 일할 수 있는 직장에 자리 잡게 되길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그런 조건을 갖춘 몇 군데가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솔깃했던 곳은 서울의 직장이었습니다. 제 처에게는 대한민국 굴지의 H그룹의 금융 IT 계열사에서 과장대리로 채용하겠다는 연락이 왔고, 저에게는 다름 아닌 제 처가 졸업한 바로 그 학교의 그 학과에서 교수로 임용하겠다는 제안이 왔습니다. 저희 가족은 뒤도 안돌아보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처가 다녔던 학교의 그 학과로 부임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겐 꿈만 같았습니다. 당시 저의 외모와 정신연령은 한국의 대학생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기에, 학생들에게는 저 자체가 센세이션이었습니다. 보수적인 전통을 가진 그 곳에서 저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티 선생님처럼 행동을 해서 선배 교수님들을 큰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한국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저였지만, 교수님들은 제 처를 대부분 좋게 기억하셔서 그것 때문에 저는 많은 덕을 봤습니다.
제가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국내의 선배 학자분들과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저는 자연과 인간 이 세상의 만물 중에서 비속하다든가 품위가 없는 등 인간의 고상한 정신과 서로 용납되지 않은 모든 것을 제외하고서는 어떤 것에도 그에 대해 내가 모를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까지도 서로 다른 분야의 설명을 연결해서 수렴시키는 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사회과학에는 자연과학과 같은 불변성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는 비현실적(이상적)인 가정을 추가해서라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제가 재직하는 대학은 학생들이 성실하고 능력 있는 것으로 사회에서 유명했지만 자타공인 일류학교는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우수한 학생들이 있더라도 선뜻 학자의 길을 걷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학벌이 아주 탁월하거나 학계에 친지가 있어야 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서 좁은 방에 틀어 박혀 돈벌이와 소비를 희생하며 연구하는 삶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우수한 학부생들이 졸업 후 취업하거나 교사가 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저는 학생과 친해지면서 그들의 그러한 선입관을 바꿔주고 싶었습니다.
미국의 일류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저로서는 그곳의 학생들이 학자나 해당분야 최고 전문가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그들의 우수해서라기보다는 다른 곳의 학생들보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정도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대부분의 일류 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성이나 금전적 이익이 아니라 그들이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심리적 이익입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는 그러한 경험을 나타내기 위해 몰입(flow)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개념을 사용하면 저는 학생들을 몰입의 세계로 이끌고 싶었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대학원생을 대거 연구원으로 등록해도 돈이 남아돌아서, 3학년 학부생 10명을 2년짜리 연구원으로 추가했습니다. 저는 평생에서 가장 열의와 정성을 다해서 그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금융이론을 제 전공에 추가로 집어넣는 시기였기에, 그중에 절반이 학생들이 저와 함께 금융을 공부했습니다. 금융은 저에게도 낯선 주제였기에 제가 가르쳤다기보다는 함께 공부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들은 2005년 졸업 후 각각 학자나 전문가의 길을 걸었고, 현재는 최고명문 S, K, P 대학의 최우수 학생들과 견주어도 해당분야에서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그 10명의 학생들 중 8명은 여전히 저와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고, 가족들 다음으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래의 글들은 그동안 그 제자들에 대해 쓴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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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연구비를 지원받고 순수이론이나 금융이론을 전공한 본교 대학원생들도 대부분 잘 풀렸습니다. (제가 조교로 데리고 있었고, 본교 대학원에서 학위 마친 후에는 포닥으로 3년간 연구비를 지원했던 학생은 지금 금융 분야의 최고명문대학인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캠퍼스 경영학과에서 금융전공 정년트랙교수이고 정년보장이 되기 직전입니다.)
제자들에게 쏟아 부은 정성과 그 결과로 얻어진 성공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기 학부생과 대학원생들 이후 새로운 학생들에게는 그만큼 정성을 쏟을 수 없었고, 학생들도 제가 바라는 만큼의 집중도와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제가 첫 번째 학생들에게만 너무 큰 열정을 쏟아 부어서인지, 첫 번째 학생들이 이례적으로 특출나게 우수해서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 저의 열정도 차츰 식었고 학생들과는 여전히 친했지만 그들에 대한 기대감은 해를 거듭할수록 낮아졌습니다.
2006년 중반부터는 제가 터득한 금융이론을 실생활에 적용하고자 각종 은행과 증권사에서 자문을 하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안으로 향해 있던 열정이 밖으로 분출된 시기입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유사한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개인투자를 하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십니다. 반면에 저는 개인투자를 안하기 때문에 그분들이 만족할 만큼의 자문과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짐했던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만족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조금도 돈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지만, 벌어들이는 액수도 제가 생각하기에 넘쳐날 정도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해서 몸이 상할 뻔 했습니다. 이제 복직하면 조금 쉬엄쉬엄 일을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졸업한 학과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저의 복이었고, 성실하고 훌륭한 학생들을 만났던 것이 저의 또 다른 복이었습니다.
이론과학은 아무리 열정이 넘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에게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학생들에게 고등학생이 배워야 할 내용을 가르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문계열은 대학 학습에서 자연계열만큼 기초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학교에 부임하든 열정과 인내로 교육적 이상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연계열 학문에서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려면 일단 부임하는 학교가 중요합니다. 순수이론을 전공으로 하는 경우와는 달리 실험전공은 최초로 부임하는 학교에 따라서 향후 연구실적이 부익부 빈익빈으로 갈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험전공 학자가 연구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처음 부임하는 학교가 반드시 대학원이 활성화 된 곳이어야 합니다. 대학교에서 임용되길 기대하시는 후배 학자분께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제 처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한국전쟁 때 단독 월남자여서 가족도 없습니다. 아내는 중학교 때부터 소녀가장으로 학업과 일을 병행했습니다. 대학졸업 후 큰 병을 앓아서 저와 결혼하기 전까지 2년 동안 병상에 있었습니다. 저희 신혼은 미국에서 차렸는데, 결혼 직후 장모님을 미국에 모시고 가서 지금까지도 함께 살고 있습니다. 장모님이 함께 살기 때문에 귀국직후에도 제 아내는 아이들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직장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제 처는 직장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현대그룹에서 과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삼성그룹 금융 계열사가 차장으로 스카웃했습니다. 아내가 삼성에서 데이터 마이닝과 CRM을 담당하던 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40살 생일이 갓 지났을 때, 외국의 대형 금융사에 임원으로 스카웃 되었습니다. 현대와 삼성 시절에 최우수 사원으로 받은 상장과 트로피가 책상의 절반을 채울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무런 배경이 없어도 본인이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남녀 구별 없이 그만큼의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저는 가족과 제자 그리고 지인들을 통해서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출장 다녀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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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한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