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지기 친구랑 절교했습니다(좀 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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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8-22 23:53:02
벌써 한 20년 알고 지냈고, 정말 중학교 때부터 절친이고 한번도 싸운적 없는 영혼의 단짝이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정말 제 인생에서 가장 아끼는 친구였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이 친구가 4년전에 다니던 대기업 때려치우고(이미 결혼까지 했고 얘도 있었죠), 갑자기 뜬금없이 파일럿을 하겠다며 있는 돈 다 쌓들고 미국으로 비행연수 떠나면서 아주 천천히 시작되었습니다.
본인은 대기업의 회식문화와 파벌문화가 싫고, 쳇바퀴 굴러가는 삶이 싫고, 하는 일 지겹고, 언제 정리해고 될지 모르는 삶이 싫다며 윗대가리들 핥지 않아도 되는 전문직이고 자기 일만 하면 되는 억대 연봉인 파일럿에 꽂혀버려 장미빛 꿈을 안고 그렇게 미국으로 4년전 떠나버렸습니다. 제가 볼 때는 슈퍼 갑에서 맨날 협력사 접대 받으며 행복해 보였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평양감사도 싫으면 그만이고 속사정은 제3자는 모르는 거라죠...
이후 아이 육아와 생활비 버는 일은 간호사였던 와이프가 고스란히 떠 안게 되었습니다. 와이프는 남편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일과 양육을 병행하기 힘들어 부모댁에 다시 들어가 살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부모님 계시는 지역 지방 병원에 나갔습니다.
생각보다 연수가 길어지고, 불행이도 생각보다 이 파일럿 지망생들이 너무 많아 공급과잉이 되면서 파일럿이 되는 사람보다 떨어져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뉴스에도 나더군요 '비행낭인 매년 1,000명씩 쌓여...'라고... 점점 불안해지고 스트레스 받으며 돈은 돈데로 쪼들리며(몇년 동안 연수한다고 한 몇억 까먹은 거 같습니다.) 이 친구는 점점 심적으로 피폐해져 갔습니다. 이 기간에 제가 아이 생일에 보태라고 50만원 그냥 준 일도 생각이 나네요.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연수 중도 탈락하지 않고 1,000시간 넘게 비행시간 채우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대한항공 응시에 나섰는데 결국 최종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이전부터도 와이프와 처가댁에 눈치가 안 좋았었는데 제가 볼 때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와이프와 처가댁으로부터 완전 무시당하는 처지에 처하면서 온갖 원망과 책임추궁을 받게 된 것 같았습니다. 정말이지 대기업 다니던 자랑스러운 사위에서 눈치밥 먹는 백수 육아 대디가 되면서 영혼이 피폐해져 갔습니다. 하다 못해 집에 와이프가 있을 때는 저와 통화도 마음대로 못하고, 어디 누구 만나러 가려고 하면 "쓸데 없는 짓 하지말고 얘나 봐라."고 핀잔을 듣는 등, 아예 바같 활동이 금지 되버리더군요. 아침부터 아이 밥먹이고 씻기고, 어린이집 모셔다 주고, 기다렸다 모셔오고... 이게 아빠인지... 무슨 가사도우미인지... 집에 들어 갈 때마다 마치 휴가복귀하는 군바리처럼 저한테 전화에 대고 얘기하고 있는데 듣는 제가 다 화가 나더군요...
중간 중간 나름 장사수완이 있어서 어디서 장난감 사다가 품귀현상 벌어질 때 팔아서 짭짤하게 월 몇백씩이문도 챙기고 했습니다. 전 그런 거 처가댁에 얘기해서 안심을 시켜줘라 했는데, 친구는 쪽팔리고 부끄러운 일이라 처가댁엔 말도 못한다고 하더군요. 아니 한달에 몇백씩 순수 이익이 나는데 뭐가 쪽팔리고 부끄러운 것인지 전 도무지 그 집안이 이해가 안 됬습니다.
뭐 사는게 살다보면 힘들수도 있고 저러다 결국 잘 되는 경우도 엄청 많습니다. 근데 문제는 이 친구가 사상적으로 계속 한 쪽으로 급격하게 쏠리더군요. 근래에 들어 대한항공에서 일어난 '땅콩항공'사건이라던지, 최근의 조회장과 노조간의 갈등이라던지 등의 사건에 과도하게 몰입하며 노조 찬양론자 & Kill the 재벌주의자가 되어 입사하면 바로 머리에 띠두루고 회사를 뒤엎을 투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도 절친인지라 그냥 넘어가려다 "제발 너 입사하면 그런 거 신경끄고 비행에만 몰두하며 안정 찾아라. 너 그러다 또 그만두고 나올 생각이냐?" 등등 잘 설득해 보려고 했는데, 이 친구는 매우 공격적으로 저에게 "너는 꼰데다."며 말 하더군요. 같은 동갑내기한테 꼰데소리를 들으니 좀 얼얼했습니다. 30대 중반에 말이죠.
아무튼 전 처가댁에 갑질 당하는 처지인 그 친구가 이해가 됬습니다. 충분히 기득권과 권위주의에 분노가 많았겠고, 해도 안되는 본인 처지가 분노할만 하다고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30대 중반 친구가 인터넷에 떠도는 '헬조선 타령', '더 노력하라 말하지마라', '오늘날 이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은 다 어른들 탓이다.' 등등 소리를 맨날 들으니 저도 지쳐갔습니다. 그 말들이 사실이든 아니든이 중요한게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에 몰두하는 친구가 너무 낯설고 상대하기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저도 매니아에서 이런 얘기들 나오면 과민반응 했던게 이 친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결혼을 아직 안 한 저에게 계속해서 "넌 절대 결혼하지 마라.", "총각일 때 최대한 많은 여자랑 즐겨라.", "결혼하더라도 얘는 절대 낳지 마라." 와 같은 결혼에 대한 갈때까지 간 회의적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이 친구가 예전에 내가 알고 좋아하던 그 친구가 아님을 점점 느껴갔습니다.
여기서 이 때쯤 사실 제가 오지랍을 꺽고 그냥 관망했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저는 정말 이 친구를 아끼는 마음에 계속 도와주려고 했던게 오히려 화근이 되었습니다. 처가댁과 집안 문제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다음 파일럿 응시 때까지 차라리 와서 제가 하는 사업이나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길이 이 친구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워주고 다시 사회에 대한 감도 찾고 자꾸 생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친구의 반골적인 기질과 분노조절 장애가 폭발하며 같이 일하며 생기는 사소한 트러블을 넘지 못하며 연락 끊고 잠수 타버린지 벌써 3개월이네요.
부디 나중에 꼭 공항에서 유니폼 입은 모습으로 봤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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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분 물론 악전고투 하셨겠지요. 하지만 글쓴님 역시 고생 많으셨습니다. 참으로 인생이란 인간의 극장이지요..
(추가) 피츠제럴드가 한 말이라는데, 인상깊어 기억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30대가 되면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원한다. 그리고 40대가 되면, 친구 역시 사랑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