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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흑인 사회를 변화시킨 NBA와 선수들의 움직임 - 이미지, 그리고 환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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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1 10:31:37
* Meme 해석글을 올리다가 업무가 많아져 한달여간 올리지 못 했네요. 그래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우선 글을 쓸 여건이 되지 않아 이전에 올렸다가 사이트 서버 문제로 인해 날라가버린 글을 다시 올립니다. 나름의 사이트의 자료가 되리라는 생각에 남기는 것이 낫다 판단하였습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 미리 말씀 드립니다. - 이미 오래 지난 이야기의 내용이라 현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답니다. 감안하고 읽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시작 전에 드리는 말씀
매번 간결한 이야기를 전하려 하는데 내용의 전후에 발생하는 많은 참고 자료를 요약해도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개인 능력의 한계로 너무 긴 글이 탄생합니다.
많은 글을 읽는 입장으로서 그다지 효율성이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줄이지 못 하는 입장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긴 글을 정독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많은 자료를 공유해주시는 분들께 한결 같은 감사드립니다.
 

 
최근 들어 르브론 제임스와 크리스 보쉬가 전 소속팀과 지역을 향해 자기의 목소리를 내면서 본의 아니게 팬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데론 윌리엄스의 신인인 Gordon Hayword에 대한 패스가 이슈가 되었다. 이후 Kevin Garnett이 경기 중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소속의 포워드 Charlie Villanueva에게 cancer issue의 트래쉬토킹을 하여 문제가 되었다. 미디어와 친숙한 선수들은 코트 안팎에서 끊임없이 불손한 태도의 자신을 노출시켜 왔다. 그들은 완벽하게 성숙해지기 전부터 언론에 노출되어 미처 스스로를 잘 돌보기도 전에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리곤 했다. 그런 스타들의 행태는 자신들이 홍보하는 회사의 이미지마저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이키는 오레곤 본사에 시그네쳐 선수들의 이미지 관리를 연구하고, 학습시키는 기반 시설을 두었고, 아디다스 또한 그런 시설을 설치하며 소속 선수들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불필요한 언사와 행동으로 이슈가 된 리그내 올스타들,
(시계 방향으로 Kevin Garnett, Deron Williams, Lebron James, Chris Bosh)
 
 
 
 비단 NBA 선수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흑인 선수들은 미국 내에서 오랫동안 약자의 입장에서 살아 온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는 인물이 되었고, 그들의 입지를 높이는데 이바지해야 하는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지, 그것은 어느 사회에서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대중에 잘 알려진 인물들의 이미지는 곧 그가 속한 집단의 평가를 달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매체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야 하는 선수들은 이미지 관리를 위한 학습까지 받게 되었다. NBA 선수들이 이렇게 흑인들의 입지를 대변해주어야 하는 일종의 책무가 생긴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 했던 Michael Jordan의 위대함을 다시금 돌아 볼 수 있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분을 자세히 보면 Michael Jordan과 Lebron James의 사회적 영향력을 잘 엿볼 수 있다. 미국 사회가 흑인들에 대한 사고를 바꿔야 한다는 상황에 당면했던 시기, 흑인 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고민하던 시기에 맞물려 탄생한 Jordan이라는 인물의 영향력은 어떻게 미쳤을까?
 
 
Nike oregon campus의 전경
이곳은 나이키의 시그네쳐 선수들이 자신의 개인 신발 디자인을 논의하고, 예절 및 미디어 대처 교육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1. 16th March, 1991. What happened to Mrs. Soon Ja Du?
1991년 3월 16일, LA에서 상점을 하던 두순자씨와 16세 흑인 소녀, Latasha Harlins가 다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학교에서 마실 오렌지 쥬스를 사서 가방의 옆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돈을 지불하려 했던 이 흑인 소녀를 오인했던 두순자씨는 그녀에게 쥬스를 꺼내라고 다그쳤다. Latasha Harlins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둑으로 오인한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꼈고, 점점 싸움이 커지며 이 16세 소녀는 49세의 한국인, 두순자씨의 후두부를 세대 때렸다. 그리고, 소녀는 2달러를 지불하고, 가게를 떠나려 했다. 이렇게 가게에 돈을 놓고 나가려는 Latasha Harlins의 후두부에 두순자씨는 강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계산대에 놓아 두었던 권총을 소녀의 머리에 겨누었고, 소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13세 소녀, Latasha Harlins와 평소 강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힘든 지경이었던 한인 이민자, 두순자씨.
 
 
 
평소, 그녀와 남편은 이미 여러 차례 강도로부터 가게를 공격당해 왔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두순자씨와 그녀의 남편은 심지어는 자신들을 보호하려 사두었던 총기까지 도둑 당했다가 후에 경찰로부터 돌려 받을 수 있었다. 미국 이민 후 꾸준히 흑인 강도로부터 위협당했고, 강탈 당했던 그녀에게 흑인은 무질서하고, 위협적인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Latasha Harlins 또한 그녀에게는 한 흑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흑인은 무서운 존재였고, Latasha Harlins가 손에 쥔 것이 돈이라고 생각지도 못 했던 두순자씨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도에게 총을 발사했다 믿었다. 하지만 감시카메라는 이 16세의 소녀의 손에 쥐어진 지폐를 정확히 보여 주었다. 두순자씨는 재판에서 자신은 지속적인 강도 피해를 당했고, 자신이 오해했지만 절대 살인의 의지가 없음을 이야기 했다. 이는 판사에게 어필이 되어 검사의 무기징역 구형은 받아 들여지지 않고, 그녀는 집행유예에 사회봉사 400시간을 선고 받았다. (위의 사건은 50cent의 영화 "Get rich or Die tryin'"에서 비슷하게 그려진다. 검사는 흑인 사회의 파장을 고려하여 다소 무겁더라도 무기징역 구형을 요구했으나 담당 판사와 당시 배심원들은 두순자씨의 억울함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사회가 이 두 사람의 삶을 이렇게 만들었다.)
 
 
 
 
 
2. 오해의 총격이 남긴 것, 변화...
1991년 한 이민자의 착각으로 발생했던 이 사건은 이듬해 LA 지역의 한인 상점에 당시 한화 추산 4,000여억원의 재산 피해를 낸 흑인 폭동(LA riots : http://en.wikipedia.org/wiki/LA_Riots)의 불씨가 되었다. 흑인들은 누구나 자신 또한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Latasha Harlins와 같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두순자씨의 형이 너무 가벼웠던 것에 대해 극한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비슷한 시기 Rodney King이라는 한 흑인 운전수가 과속으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백인 경찰들로부터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했고, 이 경찰들 또한 배심원들에 의해 가벼운 처벌을 얻음으로써 흑인들은 자신들이 인종차별의 피해자로서 그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잿더미가 된 시내, 폭력과 약탈이 난무하던 무질서한 도시
이것은 영화의 한 장면도 치안에 취약한 어느 남미의 도시가 아닌 90년대의 LA의 모습이었다.
마지막 이미지가 빈곤층 흑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불타 무너지는 어느 상가를 지나는 흑인의 트롤리 안에는 자신이 훔친 공산품들이 가득하다. 인터뷰를 하는 뉴스 기자의 질문에 그들은 하나 같이 한국인들 것이니 아무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흑인들과 라틴계의 빈민 청년들은 LA내의 한인 타운의 90%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7명의 빈민층 흑인 청년이 사살되었고, 흑인들의 한인 증오와 사법 불신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두순자씨의 사건이 흑인 사회에 대한 법의 엄정한 처벌이 적용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방송을 하여 LA내의 많은 빈민층으로부터 한인 증오의 지지를 이끌어 냈던 ABC와 KABC tv는 자신들의 여론몰이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며 큰 피해를 야기하자 또 하나의 기사를 낸다. 두순자씨의 총기가 일전에 흑인 강도로부터 약탈된 적이 있었고, 강도는 두씨의 총기가 강도로부터 개조되어 발사 시 좀 더 위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빈민층 흑인 사회는 주춤거린다. 결국, 두순자씨의 가게에 강도 행각을 펼쳤던 이들도 자신들의 주변인이고, Latasha Harlins를 죽도록 만든 개조된 위험한 총 또한 자신들이 만든 일임이 기사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행위가 비록 무법천지에 무질서했지만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위한 반란이라는 명분마저 이런 기사로 인해 사라졌고, 순식간에 그들은 스스로가 밑도 끝도 없는 범죄자처럼 되어 버린 현실에 당황했다.
 
 
 
 
 
3. 흑인 사회에 필요했던 리더, 그들의 변화 그리고 사회의 움직임.
1993년 2월, 그러니까 LA내의 흑인 폭동이 일어 난지 약 10개월이 지난 후, Virginia州의 Bathel high school의 미식축구의 쿼터백이자 농구 특기 고교생인 앨런 아이버슨이 볼링장 패싸움으로 인해 자신의 진술을 펼치지 못 하고, 수감된다. 이 사건은 100%,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백인 학생들의 진술을 토대로 재판이 진행되었고, 아이버슨이라는 다양한 운동 능력을 지닌 한 학생의 수감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흑인들은 쉽사리 다시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위해 큰 소리를 내지 못 한다. 이미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문제가 연관되어 발생한 일에 대해 큰 소리를 내며 예상치 못 했던 큰 피해를 내며 스스로의 입지를 더 줄어들게 했기 때문이다.
 
 17세 소년, Allen Ezail Iverson
17세 소년, Allen Iverson과 그의 African-American 친구 3명은 집단폭행으로 인한 상해(the felony charge of maiming by mob)라는 죄목으로 성인들이 받는 처벌을 받았다. 집단 몸싸움이었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향후 10년간 법정 판결 보류 선고였으니 좌측 하단 사진의 주인공인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시장이자 첫 흑인 의원이었던 Douglas Wilder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이버슨은 아마도 재작년쯤 출소한 범죄자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던 갱스터 랩퍼들은 더욱 더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고, 그들의 사회적 입지를 높혀 주는 흑인을 그들은 간절히 열망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계기로 2Pac과 Notorious BIG라는 불세출의 래퍼가 동서부의 힙합씬에서 순식간에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African-American 정치인은 하나, 둘 늘어나며 그들의 입지와 권리를 목소리내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는 미미한 외침에 불과했다.)
 
 
 
上 : Martin Luther King Jr.
下 : Malcolm X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일어나 국가적 신조의 진정한 뜻을
실천할 날이 올 것이라는 그런 꿈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언덕 위에서 노예였던 자들의 후손들과
노예를 소유했던 자들의 후손들이
형제애로 함께 한 식탁에 모여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꿈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미시시피 주 또한
불의의 억압의 열기로 지친 사막의주에서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바뀔 것이라는
그런 꿈 말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명의 아이들 또한
언젠가는 피부색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닌
그들의 개성으로 판단되는
그러한 나라에서 언젠가는 살게 될 것이라는
그런 꿈 말입니다.
- 1963년 8월 '워싱턴 대행진'의 출발 직전 기념식에서 가졌던 연설로
전세계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도 이미 유명해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의 일부..
 
 
오랫동안 미국 대륙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 받지 못 했던 흑인들에게 1960년대가 되어서야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Martin Luther King Jr.와 Malcome X이다. 그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흑인들의 인권 조례에 대한 법 제정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고, 덕분에 흑인들은 1965년 통과된 투표권법을 근거로 투표권을 부여 받았다. 이렇게 근대 미국 사회의 흑인 지도자들은 종교 지도자가 전부였다. (마틴 루터 킹 - 개신교, 말콤 X - 이슬람교)
 
생존을 위해, 평등한 대접을 위해 투쟁을 거듭해야만 했던 사회의 흑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변화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그들은 서서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망 이후, 흑인 사회에서는 자신들의 권리와 사회적 입지를 이야기해줄 인물을 잃게 되었다.
http://www.crmvet.org/info/votehist.htm >
                                     
 
 
 
 
4. 리그 내에 불게 된 변화의 목소리
60년대에 명실상부한 흑인 종교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X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흑인 사회는 변화가 생겼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타고난 실력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쥔 인사들조차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여전히 있었을 정도로 흑인의 입지는 위태롭고, 부족했다. 흑인들에 대한 사회의 실질적 이미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사회로부터 자유를 획득한지 오래 되지 않았기에 교육 받지 못 했고, 그렇기에 직업을 가지기도 쉽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빈곤에 처해 있었고, 여전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마약을 길거리에서 팔았고, 매춘을 했다. 그렇기에 주류 사회의 흑인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냉대기류가 강하게 흘렀다. 물론, 사회의 이곳, 저곳에서 흑인들의 변화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삶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거대한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전달하기에 쉽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많은 아이를 낳고, 그 중 하나라도 스포츠 선수로서 성공하기를, 혹은 뛰어난 아티스트로 성공하기를 기도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 간다. (이런 빈곤 속에서 자란 선수들 중 성공한 케이스는 경제적 관념이 적어 파산하는 경우가 많다. 앤트완 워커, 라트렐 스프리웰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흑인들은 여전히 마트의 점원으로, 혹은 청소부로, 사회의 가장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태반이다. 생존을 위해서 살아 가던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사고와 언어가 나오기 힘들었다.
 (그러한 상황은 African-American Vernacular English, 소위 말하는 흑인식 영어를 더욱 굳건히 하게 만들었다. 그들만의 문화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것은 미국사회의 부끄러운 현실이었으며 미국내 흑인들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여전히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그들은 흑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줄 어떤 특별한 인물을 꿈꾸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필요했고, 그들에게는 또 다른 말콤 X가 필요했다.
 
 
 
 
※ 왜 2Pac Shakur는 사랑을 받았는가?
 
스물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 서부 힙합씬의 1인자, 2Pac Shakur
그의 랩에는 비참한 흑인들의 현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요즘 주류가 되어 가는 즐기자는 힙합과는 다른 비참한 사회의 잔상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치를 돌아볼 수 있게끔 하였다.
사랑가도 좋고,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흑인 사회에는 이런 슬픈 현실을 꺼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그런 African-American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이였다.
 
 
Michael Jackson의 아름다운 선율은 백인, 흑인, 황인할 것 없이 공감할 수 있었다.
평화, 사랑, 평온함...
그런 추상적인 것들은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이야기해주지 못 한다.
당시 흑인들에게는 자신의 삶이 이야기되어져 변화가 일어나길 바랬다.
유신정권을 지나 계엄령이 넘쳐나던 근현대 대한민국에 민중가요가 넘쳐나듯 말이다.
 
 
 1편끝...
  
 
※ 드리는 말씀
좋아하는 것을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보장된다는 것은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좋아하는 NBA 관련 정보와 자료를 사려 깊게 남겨 주시는 분들의 게시물을 보는 것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몇몇 뛰어난 분석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주시는 분들과 지나간 선수에 대해 재조명해주시는 분들, 그리고 다양한 영상 자료를 나눠 주시는 분들 모두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서 올려 주시는 유익한 정보들과는 조금 다른 분야에 흥미가 있고, 나누길 원합니다.
오늘 작성한 글이 너무 길어서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올린 글을 보니 NBA 관련 내용이 거의 전무하네요.
NBA 관련 정보를 기다리신 분들께서 읽으시면 다소 섭섭하실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지는 글에는 충분히 포함될 것입니다.
매번 요약 불가능한 방대한 글을 읽어 주시고, 의견 나눠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Pac의 Life goes on이라는 곡의 내용을 보시면 왜 2Pac이 당시 흑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는지 잘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노래와 가사를 링크를 걸거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제 생각에서는 달리 방법을 찾지 못 해서 제 싸이의 쥬크박스에 올려 놓아 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한번 들어 보시고, 그 내용을 보시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어서 본의 아니게 그리 하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우격다짐식으로 넣으며 더 많은 것을 전해드리려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만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2Pac의 노래를 들으실 분께서는 www.cyworld.com/newyorkerhaha에 들어 가셔서 jukebox 코너의 음악 게시판에서 pop 가사 코너에 올려 놓았으니 한번 들어 보세요.
매번 이것, 저것 긴 글 읽어 주시느라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
Comments
2013-07-11 10:33:37
느바 메메글을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고있었는데
요즘 안보여서 아쉬웠습니다
 
하루 빨리 다시 보고싶네요
WR
2013-07-11 21:14:48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째웅님 :) 이제 업무에 대해서도 여유가 조금 생겨서 다시 기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

1
Updated at 2013-07-11 11:29:16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일찍 죽어서 아쉬운 2pac과 biggie...

유튜브 영상 링크 올리는 법은 간단합니다. 그대로 유튜브 링크 주소 긁어오면 자동으로 재생 창이 만들어지거든요. 가령...



2013-07-11 13:44:40

2PAC 랩스킬은 정말 지금 들어도 장난 아니네요. Life goes on을 예전에 참 많이 들었는데....2PAC 살아있었다면...지금 JAY-Z +NAS 의 위에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을텐데요...

WR
2013-07-11 21:18:46
2Pac이 살아있었다면, 그리고 Biggie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P. diddy나 Jay-Z 혹은 Nas만을 열광할 일은 없었으리라 감히 생각해봅니다. 물론 그들이 생존해 있다해도 이 래퍼들은 자기들에 대한 열렬한 지지는 이끌어 냈을 수 있었겠지요. 그런 능력이 있는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대접이나 평판과는 달랐을 것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WR
2013-07-11 21:16:57
 
늘 긴 글임에도 읽어주시고 관심 어린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에 타 사이트에 올린 글인데 당시 우리 마니아처럼 유튜브 url만 적으면 자동 재생되는 것이 아니고, 유튜브 영상 변환의 방법에 대해서도 부지했네요. 지금은 글만 긁어 옮겨서 못 했구요. 감사드려요. 좋은 밤 되세요.
2013-07-11 12:34:57

이야.. 이 글 처음 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요...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WR
1
2013-07-11 21:19:39

저 이 글 긁어오려는데 로즈님 댓글이 마지막이라서 읽으며 왠지 다시 남겨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 반갑더라구요. 늘 관심가져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로즈님 좋은 밤 되세요. :)

Updated at 2013-07-11 16:21:08

글 자체에 몰입도가 있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WR
2013-07-11 21:20:48

아무래도 관심을 두신 분야라 글 즐거이 읽어주실 수 있으신 것 같아요. 워낙 긴 글이라 늘 올리며 생각합니다. 좀 더 간결하게 잘 적을 수 있다면... 그럼에도 이렇게 즐거이 읽어주셔서 올린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

2013-07-11 17:05:24

헐....흑인  쪽에서 1960년 대에야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왔다라..

MLK나 Malcolm X가 기념비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맞지만,

노예였으면서 동시에 흑인 해방 운동의 지도자였던 Frederick Douglass 라든가 Booker T. Washington과 같은 educator, 현재의 African American studies 의 기초를 닦았던 W. E.B. Du Bois나 기타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d of Colored People (NAACP) member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하네요.

WR
1
Updated at 2013-07-11 21:22:01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Sam Hose가 당했던 Lynch (Lynch mob)과 같은 폭력성을 띈 흑인에 대한 차별과 공격적인 사회적 성향으로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발생한 것은 Willam W. Du Bois로 하여금 그가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 행동주의(activism)에 영향을 주어 혁신적인 movement를 사회 전반에 환기시킨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합니다. 그가 미국 흑인지위 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의 공동 창시를 하며 흑인 인권 향상의 기반을 닦은 것을 보자면 당연히 그와 더불어 언급하셨던 프레드릭 더글라스와 함께 가장 위대한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한 위인이라 하기 맞습니다. (그러니까 중, 고교 시절 권장도서에 그들의 일대기를 그린 서적이 늘 포함되겠지요.)
 
 언급하신 인물들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으시다는 전제조건 하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NAACP의 장기간에 걸친 법정투쟁으로 당시 만연해있던 Lynch mob과 같은 불특정 다수의 흑인에 대한 폭력적 행위에 대한 법적 처벌과 암묵적인 관용의 철퇴를 맞은 것은 흑인 인권사에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남부의 주 의회들이 다양한 입법을 통해 Brown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 미국사, 2004년 서적으로 기억, 관련 구문은 차후에 책을 찾아 다시 기술하겟습니다.)의 집행 자체에 꾸준한 방해를 하였습니다. 이 판결이 1954년에 내려지게 되면서 1890년대 후반에 공식적인 흑백차별의 당위성을 부여하였던 플래시 대 퍼거슨 판결의 위법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면서 남부 주의 전역의 극렬한 저항을 보였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두 가지 판결의 시기는 대략 60여년의 시간적 간극이 있었습니다. 법의 심판과 판결에 기대며 법정투쟁을 펼쳤던 NAACP의 변화에는 시기적 정체성이 있었지요. 흑백 평등을 위해 법의 심판과 판결에 기대는데는 다소 한계가 있다고 느낀 흑인들의 능동적, 법의 태두리 안에서 움직임을 나서기 시작해야 겠다는 각성을 전해준 momentum이라 생각합니다. - 사견)
 
이 중간 시기에 흑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왔던 NAACP와 여타 단체들이 법정투쟁을 통해서 개선의 방법을 강구하는 수동적 입장에서 그쳤다는 점에서 저는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에게 좀 더 계몽과 혁신적이고 능동적, 그리고 비폭력적 행위을 요구하며 움직이도록 하는 전술을 권장하기 시작한 인물들을 좀 더 적극적이고 영향력있는 인물들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MLK, Malcolm X를 제대로 된 인물이라 묘사하였구요.)
 
MLK 목사가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African American)들의 분리관행 자체의 근간이었던 억압감을 떨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 집단 항의를 권고하며 자발적 행위가 담긴 운동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저는 본격적이고, 가시적 변화가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모든 행위는 언급하신 인물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과 변화를 위한 movement 자체가 근간이 되어 일어난 것이기에 말씀하신 Du Bois, Booker Washington, Frederick Douglas와 같은 인물들을 각각의 계몽, 인권신장 지도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나 제 개인적 관점에서는 움직임을 장려하며 기존의 불평등 개선에 관한 방법론적 변화를 이끌게 된 저 두 인물에 대한 묘사로 '제대로 된 지도자'가 옳다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이 글 자체는 nba 주제가 주가 되기 때문에 이 이상의 역사적 바탕글로 자칫 주제의 핀트가 완벽히 빗나가게 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생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글에 사족이 될 수 있는 흑인인권 신장에 대한 지리한 내용 첨가 자체가 글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글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에 대한 관점의 차이, 특히 ATL님과 같이 이 분야에 대한 식견을 갖추고 의견을 나누실 수 있는 분과 대화를 하면서 좀 더 적절한 표현, 묘사 방법을 알 수 있겠지요. 어떤 의견이시고 제가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았을까 정도는 전해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기로 '헐'이라는 단어나 상대방의 말에 '~했다라...'라는 말들은 자체가 기가 차거나 어이 없는 상황이나 상대의 행위에 대해 사용하는 다소 경멸적이고, 무시하는 어감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단어를 사용하신 것 자체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네요. 물론, 의도가 그러시지 않으셨을테지만 wording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사용자의 의도를 청자가 알 수 없기에 늘 receiver의 입장에서 맞춰야 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했을 때 아무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13-07-11 21:39:39

1. 아, MLK와 Malcolm X 외에 Black activists는 사람이 아닌가 싶었죠. 때문에 전 님 글쓰신게 White-middle class-centered 라고 느꼈습니다. 솔직히 님 본문의 글만 봤을 때 주장 자체가 진짜 황당했습니다.

2. 더불어 덧글 봐서도 황당한게 그러면 저 두 사람 외에 제대로 된 지도자가 아닌가요? 죄송하지만 님 글 쓰신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예를 들면,

" Du Bois, Booker Washington, Frederick Douglas와 같은 인물들을 각각의 계몽, 인권신장 지도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나 제 개인적 관점에서는 움직임을 장려하며 기존의 불평등 개선에 관한 방법론적 변화를 이끌게 된 저 두 인물에 대한 묘사로 '제대로 된 지도자'가 옳다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저 이 말 무슨말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두보이스, 워싱턴, 더글라스 같은 사람이 '계몽' '인권신장' 지도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나인데 그럼 계몽과 인권신장과 관련된 세 사람은 아무런 political actions을 취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actions을 취하지 않으면서 enlightment나 human rights 쪽을 신장시키는 게 가능하죠? 원인이 되는 actions없이 change가 있을 수 있나요?

더불어 Black edu 분야에서 Du Bois와 Washington 간의 '흑인에게 vocational edu와 academic edu'중 어느 쪽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쟁이라든가 Du Bois의 double consciousness에 대한 conceptaulization이라든가 Douglass가 목숨 걸고 흑인 노예들의 counternarratives를 퍼뜨린 일들은 actions이 아니었고 leadership의 발현 아니었나요? 하다못해 님이 예를 드신 Plessy v. Ferguson (1896) 같은 경우도 Plessy가 적극적 actions을 취했기 때문에 해당 사건을 controversial issues로 만들 수 있었던 것 아니었나요?

더불어 60년의 갭이 있었기 때문에 NAACP의 노력등을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을 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노예 생활에서 풀려났다 하더라도 30일 만에 직업을 구하지 못하면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처벌받게 때문에 원주인의  plantation으로 갈 수 밖에 없다든가 rural이 경제적으로 무너지면서 farm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대거 urban으로 몰려가 저임금 노동자로 밖에 살 수 없었던 현실에서 60년 걸려 Brown v. Board of Edu at Topeka 까지 끌어낸 건 나름 대단한 일 아닌가요?

무엇보다 그 60년 갭동안 미국은 공황과 두 번의 세계 전쟁을 겪지 않았나요? 그 와중에서 흑인들이 제목소리 내는 것도 힘들지 않았나요?

전 한 집단의 노력을 "너희 집단엔 제대로 된 지도자 둘" 이라 폄하하는 것이 굉장한 오만이라 생각하는데요?


WR
2013-07-11 21:41:56
음, 그렇네요.
저의 알량한 표현 방식이 ATL님을 불쾌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black edu를 논할때 Du Bois나 Washington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으며 계몽에 관해서도 언급하신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도 없음에 제가 식견과 글을 적는 솜씨가 부족하여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미 길어 질 글에 사족이 될만한 이야기를 다 담기 힘들어 줄이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wording과 표현 방식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노력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가며 Du bois를 포함한 여타의 인물들에 대한 노력에는 더욱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구요. 그들을 흑인 인권 신장의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들로서 존경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부족한 표현 방식이 자칫 읽으시는 분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게 만들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나 오만한 태도로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연이은 강성적 발언에 당혹스럽습니다만 정확히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앞으로 의견 개진에 있으셔서 좀 더 정중하게 발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부족한 식견이 발견되면 잘 알려주실 수 있는 지식으로 수정해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누는 글에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남기시는 걸, 실례 아닌가요? 더군다나 저하고는 일면식도 없으신데 말이죠.
Updated at 2013-07-11 21:54:04

주장하신 바가 너무 황당해서 놀랐을 & 어이없었을 뿐 비아냥은 없었습니다만 그리 느꼈다면 죄송합니다.

2013-07-11 21:42:44

더불어 African American studies 나 race, gender, class간의 intersectionality에 관심있으시다면 이 책 추천드립니다:

http://www.amazon.com/Gender-United-States-seventh-Rothenberg/dp/B00DT66QNC/ref=sr_1_11?s=books&ie=UTF8&qid=1373546474&sr=1-11

origianl doc들을 모아 놓은 책이니 참고하시는 데 도움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최소한 그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이 '놀지 않고 있었다'라는 걸 아실 정도는 되리라 생각합니다.

2013-07-11 23:56:1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3-07-12 10:27:51
ㅎㅎ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2013-07-13 10:55:1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습자지같은 제 지식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3-30 11:54:58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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