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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착한 사람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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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8-22 20:26:12


남자아이는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41개월,

다행히 어린이집 가는 걸 아주 즐거워 합니다.


하지만 사교적이고 오지랖 넓은 것과는 거리가 먼 엄마, 아빠를 닮아서인지

수줍음도 많고, 적응하는데 시간도 좀 걸리는 편이고, 낯가림도 꽤 있죠.

또 뭔가 낯선 상황이나 위협적인 상황이면 잘 대처를 못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어린이집에서 한 살 어린 동생이 장난으로 밀거나 깨물거나 하면,

자기가 힘이 훨씬 쎈데도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다가 울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거겠죠.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유전자를 받은 탓이니 어쩌겠나 하면서

조금 더 크면 제가 그렇듯 이렇게도 불편한 사회생활이지만,

대강 잘 하는 척 흉내내면서 살아가겠거니 하면서 지켜보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의 맘이란 건 항상 조바심 덩어리,

아빠된 마음은 그러고도 마음이 안놓여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한 서너달 전의 일인 것 같은데

그날도 퇴근해서 어린이집 선생님을 통해 종종 듣던 아이의 근황을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던 중이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재혁이 아야 하게 하는 사람 없어요?"

"없어"

"요즘은 정준이 동생이 재혁이 깨물고 그런 일 없어?"

"없어"

"재민이 친구가 재혁이 툭툭 때리고 그러지는 않았나요?"

"아니"


지금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훌륭하신 분들이라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만, 

어린이집에서 일부 선생님들 이야기가 자꾸 나오던 때라 노파심에 그도 한 번 물어봅니다.


"선생님이 재혁이 아야 하게 하는 일은 없나요?"

"없어"


단답형으로 대답을 이어가던 아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빠가 왜 자꾸 그런 질문을 하는지 눈치를 챘다는건지

마지막 '없어'라는 대답 후에 잠깐 멈추었다가 곧이어 말을 하더군요.


"모두 다 착한 사람들이야"


레고블럭을 계속 하면서 무심한 듯이 툭 던지듯 하는 아이의 대답에서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 세살된 내 아들이 이런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다는데 놀랐고, 기특했습니다.

그리고 40개월도 안된 아이에게서 이미 내가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배운 인생의 지혜 몇 가지는 꼭 전달해줘야겠다,

그러면 행복하게 사는데 분명히 도움이 될거야 라는 생각으로 그런 내용들을 정리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조금은 다른 생각도 하나 머릿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

이미 아이는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고 또 깨닫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아이라는 이유로 가볍게 간과하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해야겠다는 점입니다.

그런 노력이 있어야만 제가 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아이와 함께 제대로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키울수록 정말 작은 하나의 독립된 우주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는 만난다는 건 부모라는 하나의 세계가 아이라는 다른 세계와 만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배우고, 느끼고, 기억합니다.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깝고 가장 많이 닮았지만,

분명히 나와는 다른 인격체이고 그에 걸맞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아이가 또 어떤 대화로 즐겁고 작은 충격을 줄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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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6-08-22 20:30:13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음이 따뜻해 지네요.

1
2016-08-22 20:48:10

너무 아이가 이쁘네요..

1
2016-08-22 21:16:17

이야 4살도 안된 아이가 저런 성숙한말을 하다니...

역시 어렸을때 부모의 교육이 중요하다는게 느껴디네요.

1
Updated at 2016-08-22 21:53:02

저도 감동받았네요... 아이의 그 순수한 생각이 오래도록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아이들의 생각이 획일화되요. 별나도 되고, 특이해도 되고, 튀어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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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2 22:12:01

좋은 아버지가 되실것 같습니다.
아이랑 행복하게 지내실것 같아 저까지 기분 좋아지네요.

2016-08-22 22:22:53

어렸을 적에 "삶을 따듯하게 만드는 100가지 지혜"와 같은 류의 책을 어쩌다 읽게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너무 빤하고 뻔해서 지겨울 정도였던 책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요즘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싶네요 낄낄낄)

1
2016-08-22 22:27:42

아이도 살다 보면 착한 사람만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꿈을 키워가는 어린 시절에만큼은 주변에 착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네요.
예쁘게 잘 키우시길!
1
2016-08-22 23:48:15

훌륭한 아버지시네요^^ 그런 아버지를 닮아 아이도 저리 예쁜 것 같습니다.

1
2016-08-23 00:36:47

애기가 저리이쁘면 아빠가 팔읍읍이 될수 밖에 없겠네요

1
2016-08-23 19:15:05

태생적 순수함은 학습적 지식보다 직관적이라는 말을 들는 적이 있는데 참으로 대단한 아이입니다.

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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