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歷史] Finals 1948/49r
* 출처 : nba.com/History
* 연재 : seasons 매주 화요일, finals 매주 목요일
- "Mikan, Lakers Begin Championship Run"
NBA Finals | ||
Minneapolis 4, Washingt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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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동안 5번의 우승으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로 이끌었지만, 조지 마이칸은 전혀 (외관상)도미네이트해 보이지는 않았다. 금테 안경과 웨이브진 머리까지 한... 그는 차라리 책벌레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마이칸은 드폴 대학에서 경이적인 발전을 경험했다. 가공이 안 된 유망주는 보기에 대학농구 최고의 선수로 그리고 2차대전 기간 동안에 일류급 선수로 순식간에 변했다. 놀랍게도 그는 6'8"에서 6'10"으로 성장하는 동안 더 민첩해졌다.
"그는 처음에는 수줍은 어린아이였어요"라고 드폴 대학이 코치였던 레이 메이어는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커버렸죠. 나는 그를 보호하려했지만, 그는 재능이 넘쳤고 오로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어요. 슈퍼스타들은 다들 그런거에요. 그들은 안에 뭔가를 가지고 있어요."
BAA의 뉴욕 닉스 구단주였던 네드 아이리쉬는 마이칸이 막대한 상품 가치를 가진 것을 알았지만, 페이롤의 한계 때문에 그를 데려올 수 없었다. 마이칸은 NBL의 시카고 기어스와 사인했다. 하지만, 그 팀은 한 시즌 후 사라져버리고, 마이칸은 레이커스로 갔다.
마이칸은 NBL에서의 또 한해동안 플레이하면서 레이커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948/49시즌이 열리기 전에, NBL의 4개팀(포트웨인, 로체스터, 인디애나폴리스와 미네아폴리스)이 떨어져나와 BAA에 가입했다. BAA는 빅마켓을 차지한 것을 자랑거리로 삼아왔지만, 오랫동안 NBL이 비록 리그의 대부분 팀들이 중서부의 소도시이긴해도 최고의 선수들을 데리고 있는 리그라 여겨져 오고 있었다. 그것이 4개팀의 이동으로 단숨에 바뀐 것이다. NBL팀들은 BAA의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가 있는 서부 디비전에 들어갔고, 대신 볼티모어와 워싱턴이 동부로 다시 돌아가면서 (BAA는 다시)균형잡힌 12개팀으로 탄생되었다.
그들의 뛰어난 능력으로, 로체스터 로얄스와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는 최고의 기록을 합작했다. 로얄스는 45승 15패를 기록하며 44승 16패의 마이칸과 레이커스를 단 한게임차로 누르고 서부 디비전 타이틀을 차지했다. 동부 최고팀은 38승 22패로 마친 레드 아워바흐의 워싱턴 캐피털스였다.
레이커스는 원맨쇼를 펼치는 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프로에서의 그의 2번째 시즌에서 14.8득점을 기록한 스탠포드 대학 출신 스타 짐 폴라드를 데리고 있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선수였고, 키가 6'3" 1/2의 키 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덩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놀라운 탄력의 소유자였다. (대부분 연습에서.. 경기 중에 덩크하는 것은 1940년대에는 비신사적인 행위라 여겨졌었다.)
폴라드와 마이칸과함께 한 선수로, 유타 대학을 우승으로 이끌며 1949년 NCAA 토너먼트에서 가장 두드러진 선수로 지목된 23살의 올드 루키인 6'5"의 어니 페린이 있었다. 페린은 그의 첫 프로 시즌에서 7.3득점을 기록했다. 레이커스의 다른 공격 옵션은 10.4득점을 기록한 베테랑 험 쉐퍼와 9.3득점을 기록한 미네소타 대학 출신의 돈 칼슨이었다.
이런 선수들로 구성된 미네아폴리스는 1949년 플레이오프에서 강력함을 드러냈다. 리그는 이제 각기 6개팀으로 이루어진 2개의 디비전을 가졌고, 각 디비전 1위팀은 4위와 2위는 3위와 경기하는 공정한 플레이오프 시스템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것은 레이커스가 그들이 만나는 어떤 팀도 이길 수 있다는 것에는 아마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파이널에서 캐피털스를 만나기 위한 그들의 노선 상에서 각기 2경기씩만에 시카고와 로체스터 모두를 스윕했다.
캐피털스는 밥 페릭, 본즈 맥킨니, 존 놀랜더와 프레드 스콜라리로 이루어진 깊이있고 재능있는 팀이었다. 이 라인업에 아워바흐는 전 시즌 볼티모어가 우승하는데 기여한 6'8"의 센터 클레지 험슨을 더했다.
그렇지만, 워싱턴은 두 자릿수 득점원인 페릭이 무릎부상으로 인하여 출전하지 못하면서 플레이오프에서 전력손실이 발생했다. 그리고 동부 디비전 결승 뉴욕과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스콜라리는 (파이널에)겨우 돌아왔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미네아폴리스 홈구장 오디토리움에서 시리즈가 열리는 4월 4일에 승부에 나서야했다. 마이칸은 42점을 기록하며 경기에서 위력을 떨쳤지만, 1분보다 더 적은 시간이 남았을 때 점수는 84-84 동점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칼슨이 마지막 자유투 2구를 모두 성공하며 88-84로 이기면서 레이커스가 시리즈를 앞서 나가는데 기여했다.
4월 6일 2차전에서, 아워바흐는 마이칸이 볼을 갖지 못하게 하는 변칙수비를 들고 나왔다. 그 전략은 코트에서 9개의 슛을 던지는 동안 단 10득점만 기록하도록 마이칸에게 작용했다. 그러나, 레이커스의 다른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수비에서 풀려졌다. 칼슨과 쉐퍼는 16,13점씩 기록했다. 미네아폴리스는 76-62로 승리하면서 2경기를 가져갔다.
워싱턴의 U라인 아레나(약 4000명 수용)로 이동한 시리즈는 4월 8일 3차전이 열렸다. 마이칸은 또다시 경기를 지배하며 35득점을 기록하며 94-74로 레이커스를 이끌었다. 그는 4차전에서 27득점을 기록했으나 마이칸이 경기 후반 손목이 뿌러진 이후 83-71로 워싱턴이 이겼다.
"클레지 험슨은 내가 속공 상황에서 점프를 했을 때 날 쳤어요"라고 마이칸은 회상했다. "내가 프리드로우 라인 즈음에 있을 때 클레지가 쳤고, 관중석 첫째줄에 부딫쳤어요. 나는 뒤에서 맞았고, 그건 태클이었어요"
"레드는 코트에서 날 끌어내라고 그들에게 말했고, 게임은 그렇게 진행되었어요."라고 마이칸은 웃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험슨은 그렇게 한 후 당연히 파울아웃되었고, 그것은 스포츠에서 응보와 같은 것이죠. 당신이 반드시 누군가를 돌려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당신의 팀 메이트일 것이다."
미네아폴리스 태생의 험슨은 시리즈가 미네소타로 돌아간다면, 고향 관중들이 마이칸의 부상을 일으켰던 파울을 한 그에게 린치를 가하길 원하리란 생각에 무서워했다. "그는 목숨에 위협을 느꼈어요"라고 맥킨니가 말했다.
그러나 마이칸은 워싱턴에서의 5차전이 열리는 이틀 후 밤에 깁스를 한 채로 나타났다. "깁스가 벽돌처럼 단단했어요. 그것은 그의 팔뚝에 딱 들어맞았죠."라고 맥킨니는 떠올렸다. "그건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그의 슛팅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못했어요."
깁스를 한 채 마이칸은 5차전에서 22점을 기록했지만, 워싱턴은 74-66으로 이기면서 시리즈를 쫓아갔다. 그렇지만 캐피털스는 환호성을 올릴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6차전을 위해 미네소타로 돌아가야했기 때문이다. 연중 스포츠행사로 인한 스케줄 충돌로, 경기는 미네아폴리스에서 세인트폴리스로 옮겨져야 했다. 자매도시에서의 경기에서 레이커스는 여전히 관중을 불러모았고 77-56으로 손쉽게 이기면서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마이칸은 플레이오프 10경기에서 전례없는 303득점을 기록했다.
피버's Comment
마이칸과 레이커스의 첫 우승입니다. 아니 사실은 BAA로 오기 전에 NBL에서 우승을 했지만, 레이커스의 NBA우승 기록에는 포함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레이커스의 통산 우승 횟수는 14회입니다. 그 유명한 감독 레드 아워바흐는 마이칸에 막혀 준우승에 그치고 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인트로듀스에서도 소개했지만... 레이커스 영구결번 명단에 마이칸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찾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만(아니라면 낭패;) 마이칸 같은 이가 영구결번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앞으로 영구결번이 될까요?
마이칸은 NBL에서의 2년, BAA(이후 NBA0에서의 9년을 플레이하여 총 11시즌을 뛰었습니다. 그가 만약 30대초반의 나이에 무릎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한 5년은 더 뛰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빌 러셀과 체임벌린의 시대는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죠.
모범생 마이칸. 왠지 해리포터 필 나는군요. 마법으로 키를 키운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