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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나라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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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9 21:46:51

지난 글에서 필자는 명나라가 몰락한 이유 중 하나로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락제 치세의 명암에 대해 다뤘다. 이번 글에서는 영락제 시대 이후에 대해 다루고자 하겠다.

 

선덕제는 영락제와 함께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힘을 얻기 시작한 환관들과 토목의 변

 

지난 글에서 필자는 정난의 변이 명나라 역사에 미친 영향력을 다뤘다.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 영락제는 기존에 건문제를 지지했던 사대부 세력과 척을 진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인 파트너로 환관들과 손을 잡기 시작했는데, 이는 명나라가 몰락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영락제가 눈을 감은 이후 황제가 됐던 인물은 아들인 주고치(홍희제)였다. 하지만 홍희제는 황제가 된 지 1년도 안 돼서 붕어했다. 새로운 황위에 오른 인물은 황태자였던 주첨기(선덕제)였다.

 

선덕제는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명군 중 한 명이다. 영락제는 선덕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원정에 대동했을 정도로 황태손을 총애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선덕제의 앞날은 탄탄해 보였다.

 

실제로 선덕제는 영락제의 차남인 한왕(漢王) 주고후(삼촌)가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를 초기에 진압하면서 큰 위기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조부와 달리 내정에 충실하면서 명나라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명군이었다.

 

그러나 선덕제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그의 수명이었다. 1399년생인 선덕제는 1435년에 사망했다. 만으로 환산하면 만 36살에 불과하다(316일생인 선덕제는 131일에 사망하면서 36번째 생일을 넘기지 못했지만, 계산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만 나이로 계산했다). 그가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명나라 황실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두 번째, 선덕제는 환관을 정치적 파트너로 선택한 할아버지인 영락제처럼 환관을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다. 그는 환관을 교육하는 내서당을 설립해 그 권한을 강화했다. 이는 훗날 명나라가 멸망하는 주원인 중 하나가 된다.

 

여기에 역대 명나라 황제 중 몇몇은 희한한 취미(대표적인 F4 황제 중 첫 번째 황제인 정덕제는 자기 자신을 장군으로 봉하는 11플레이의 달인에 희귀한 동물을 키우는 게 취미였고, 마지막 F4 황제인 천계제는 목수가 취미였다)가 있었는데, 선덕제는 귀뚜라미 싸움을 보는 게 취미였다. 그래서 각지에 싸움을 잘하는 귀뚜라미를 찾으라며 전국에 환관들을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환관들이 특혜를 얻는 바람에 각지에서 횡포가 있었다. , 환관들이 본격적으로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선덕제 붕어 이후 어머니인 장태후는 아들의 명성에 해가 될까 두려워 정사에서 선덕제의 귀뚜라미 싸움에 탐닉한 기록을 없애라 명했으며, 황실에 있는 귀뚜라미 항아리도 모두 치웠다. 그러다가 1993년 경덕진 어요청 가마터에서 대량으로 선덕제 시기의 귀뚜라미 관이 발굴되면서 선덕제가 귀뚜라미 싸움을 보는 것에 즐겼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러나 역시나 이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선덕제가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선덕제의 장남인 주기진이 1435년에 만 8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됐으니, 그가 바로 정통제(혹은 천순제. 정통제의 연호가 왜 두 개인지는 이 글에서 나온다).

 

 

정통제

 

비록 상술한 문제점이 있었지만, 선덕제는 뛰어난 황제였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선덕제는 아들을 위해서 삼양(三杨)’이라고 불리는 3명의 뛰어난 신하들을 남겨 놨다. 바로 양사기와 양영 양부 등이었다. 이들 3명은 어린 황제를 잘 보필하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는데, 정통제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먼저 황제의 곁을 떠났다는 점이다. 양영이 1440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후 양사기가 1444년에, 양부가 1446년에 눈을 감았다. , 어린 황제는 믿고 맡길 만한 신하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중국, 그중에서도 한족(漢族)들이 중심이 된 국가는 어린 황제가 통치하는 기간에는 외척과 환관들이 득세한다. 이는 정통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통제는 환관인 왕진을 총애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황제의 총애를 얻은 왕진은 전횡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명나라 황실은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명나라에 결정타를 날렸던 사건이 터지니, 바로 토목의 변이다.

 

명나라는 처음부터 몽골과 싸움을 벌였던 국가다. 홍무제 주원장은 강남 일대를 장악한 이후 북진하여 원()나라를 몰아냈고, 중국을 통일했다. 그의 삼남인 영락제 주체는 황제가 된 이후 고비 사막을 넘어서 무려 다섯 차례나 직접 몽골 원정에 나섰다. 그러다가 1406년이 돼서야 몽골 부족과 조공 무역을 승인했고, 이후 명나라는 비단과 의류, 식량을, 몽골은 말과 모피 등을 수출하는 관계(마시-馬市)가 됐다.

 

그러다가 이 규모가 점점 커져 버리면서 무역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져 버렸다. 또한, 오이라트는 실제 말 숫자보다 명목상의 말 숫자를 늘리는 형식으로 말값을 몇 배로 올려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밀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부담을 느낀 명나라 조정은 무역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사실 예로부터 중국과의 조공 무역은 중국이 아니라 상대가 경제적으로 좀 많이 이득을 봤다. 이는 조공을 온 사신들에게 조공 이상의 포상을 해줬던 점도 있고, 결정적으로 사신 한 명, 한 명마다 포상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조공하러 온 국가는 더 많은 인원과 더 자주 보내기를 바랐고, 반대로 중국의 국가들은 사신단이 덜 오기를 바랐다)


이러한 조치에 분개한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는 1449년에 명나라의 산시성을 공격한다. 명나라의 방어 전선은 오이라트의 공격에 무너졌다.


오이라트의 맹공은 명나라 조정에 위기를 알리는 신호였다. 1부에서 얘기했지만,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은 언제든지 북방 민족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에 노출된 곳이다. 명나라의 북방 방어 전선이 무너진다면, 북경도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환관 왕진은 정통제에게 친정을 주장했고, 황제는 친정에 나선다.


 

하지만 명나라의 군대는 오이라트에 무너진다. 선발대는 처참하게 패배한다. 이에 왕진은 더 큰 손실을 피하고자 회군을 결정한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회군을 하려면 왕진의 고향인 울주를 경유하게 된다. 이에 왕진은 자신의 고향을 군대가 통과할 경우 입을 피해를 우려하여 철수하는 길을 우회하자고 한다. 결국, 명나라 군대는 요충지인 회래성이 아닌, 토목보라는 곳에서 포위된다. 그리고 대패한다. 결국, 왕진은 근위대 장군인 번충의 철퇴에 맞아 죽고, 정통제는 적의 포로가 된다.

 

많은 군사가 죽었고, 황제가 포로가 되자 명나라 조정은 대혼란에 빠진다. 명나라 수도인 북경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수도를 북경에서 다시 남경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병부상서였던 우겸은 송()나라의 사례(정강의 변)를 들며 북경을 사수하자고 한다.

 

토목의 변은 명나라의 황실의 정통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다. (명나라 황실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통성 문제로 황제와 신하들이 갈등하게 된다) 황제가 포로가 됐으니, 당연히 명나라는 황제가 없다. 명나라는 한족(漢族) 국가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황권을 가진 국가였고, 당연히 황제를 중심으로 나라가 돌아갔다. 그런 역할을 하는 황제가 포로가 됐기 때문에 이를 대신할 인물이 필요했다.

 

경태제


마침 명나라 황실에는 선덕제의 차남인 주기옥이 있었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그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여 북경을 사수하는데, 그가 바로 경태제다. 또한, 병부상서 우겸은 강남의 병력과 무기를 총동원하여 방어 전선을 구축했고, 오이라트의 침략에 대비했다.

 

오이라트는 정통제를 앞세워 명나라와 협상하고자 하지만, 명나라 조정은 이미 경태제가 있다며 오이라트의 요구를 거절한다. 이에 분노한 에센 타이시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친다.

 

하지만 북경은 요새화된 도시였으며, 우겸이 착실하게 준비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이라트는 북경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여기에 북경을 구원하기 위한 지원군까지 오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에센 타이시는 결국 회군했다. 이후 오이라트는 정통제를 내세워 송환 문제를 포함한 협상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명나라는 이미 자신들에게 황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협상은 잘 이뤄지지 않았고, 정통제는 1450, 포로가 된 지 1년 만에 조건 없이 석방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에센 타이시가 정통제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는 점이다. 그가 왜 정통제를 조건 없이 석방했겠는가? 정말 정통제가 쓰임새가 없어서? 절대로 아니다. 정통제는 어디까지나 협상에서 가치가 없었을 뿐, 확실한 쓰임새가 있었다. 바로 그가 명나라로 돌아갈 경우 명나라 황실이 내분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에센이 노렸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경태제를 추대했던 우겸


실제로 정통제의 귀환은 경태제에게 엄청난 타격이었다. 사실 경태제는 황제가 될 사람이 아니었기에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을 뿐만 아니라, 제왕 교육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명나라 황실은 정난의 변으로 황제가 된 영락제 시절부터 다른 황자들, 혹은 황위 계승권자들을 견제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경태제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던 경태제가 우겸의 추대로 인해 황제가 됐고, 이제야 가까스로 자신의 세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기의 세력을 본격적으로 확장하려는 그 순간에 전임 황제인 정통제가 돌아온 것이다.

 

비록 토목의 변 때문에 온갖 치욕을 겪었던 정통제였지만, 그는 정통성을 가진 어엿한 황제였다. 여기에 황태자인 주견심(훗날 성화제)도 있었으며, 정통제를 지지하는 세력도 조정에 많았던 까닭에 명나라 조정은 명목상 태상황인 정통제와 현재 황제인 경태제 파로 나뉘어 갈등한다, , 에센 타이시가 노렸던 명나라 조정의 분열이 정말로 이뤄진 셈.

 

이에 경태제는 정통제를 남궁으로 유폐시키며,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인 주견심을 패하고, 자기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함으로써 후계 구도에 문제가 없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주견심이 병에 걸려 1453년에 요절함으로써 경태제의 계획은 무산된다.

 

그리고 경태제마저 1457년에 병에 걸려 쓰러진다. 이때 황제는 자신의 후계자를 내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정통제를 지지했던 환관인 조길상과 석형, 서유정 일당은 태상황인 정통제를 내세우고 정변을 일으켰고, 경태제는 결국 폐위된다. (경태제는 한 달 후에 병사한다. 또한, 경태제를 옹립했던 우겸 역시 석형과 서유정 일파에 의해 사형에 처한다. 본래 천순제는 우겸을 살려주고자 했지만, 두 사람에 의해 마지못해 사형 처분을 내린다. 이에 우겸은 “"이건 억울하고 아니고의 문제도 아니고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네라며 담담히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복위에 성공한 정통제는 연호를 천순으로 바꾼다. (그래서 정통제는 정통제와 천순제로 불린다)

 

그러나 다시 황제가 된 천순제는 이번에는 조길상 일파에게 휘둘린다. 당시 태감이었던 조길상은 태감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인 사례태감으로 승진한다. 또한, 그의 양자인 조흠과 조카인 조현, 조탁, 조예 등은 모두 도독으로 임명돼서 병권을 장악한다. 이후 조길상과 석형, 서유정 일파는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목숨을 잃는다.

 

이처럼 토목의 변은 명나라 황실에 어마어마한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정통제와 경태제 시절에 있었던 정통성의 문제와 환관들의 전횡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거대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명나라 역사를 쭉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점들이 계속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만약 당신이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명나라 황실은, 아니, 왜 한족(漢族)들이 중심이 된 국가들은 이런 문제점들이 반복됐음에도 계속해서 환관들을 중용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따로 글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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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0-04-09 22:33:21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WR
2020-04-09 22:44:48

감사합니다

2020-04-09 22:48:23

중국역사에 좋은 평가를 받던 환관이 있었나요?
대중매체에 나오는 환관들은 대개 부정적으로 나오는데 말이죠.

2020-04-09 22:50:56

정화도 환관이죠.  그리고 조조의 할아버지가 떠오르네요 

WR
Updated at 2020-04-09 22:52:43

조조 할아버지가 대표적이죠. 이거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1
2020-04-09 23:18:5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WR
2020-04-09 23:23:22

감사합니다

2020-04-10 01:21:52

신권과 왕권의 대립이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카드가 환관인 것이겠죠. 뭐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WR
Updated at 2020-04-10 01:36:42

그런 이유도 있지만, 천자라는 단어에 의미를 두는 게 옳다고 봅니다. 천자는 뜻 그대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하늘은 정말 구름 이외에 아무것도 없죠. 그만큼 고독한 자리고, 동시에 자기의 영원한 편이 없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가족들이 자기를 언제 배신해도 이상하지 않을 자리인 만큼 매우 고독하기 그지 없는 자리고, 결국에는 자기 비위 맞출 수 있는 사람으로 옆에서 오랫동안 함께 했던 환관들을 선택하는 거죠. 특히, 한족들의 국가인 한나라와 명나라는  황제가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 황제를 보필했던 환관들이 나중에 황제가 어른이 되고 난 이후에도 믿고 의지하는 측면이 크고요.

2020-04-11 02:50:08

저 시절부터 명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설도 많기는 한데, 그러기엔 홍치제 시절이 이 뒤에 있죠. 물론 홍치제도 젊은 나이에 갔습죠만... 명대에 유독 (다른 왕조에 비해) 내치에 유능했던 황제의 치세가 유독 짧았지요.

사실 저는 환관 득세가 명 몰락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진 않는 게, 그 시절 사족들이라고 환관보다 크게 낫지도 않았죠. 전 명조의 유명한 관료 중 장거정을 제일 높게 평가하는데 그 양반도 "사족들이 국력을 갉아먹는다" 비슷한 말을 남긴 것으로 기억합니다.
뭐 그 양반 사후 위충현이 망국 테크 엑셀을 세게 밟은 건 함정... ㅎㅎㅎ

WR
Updated at 2020-04-16 15:45:22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인데... 저는 명나라 단명한 황제들 어전 보면서 느끼는 게 저 사람들이 어쩌면 과체중이나 심각한 비만이 아니었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비만 같은 게 심각한 문제인 게 체중이 많이 나가서 일어나는 문제점보다 그에 따른 합병증, 그중에서도 혈관성 질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 선덕제와 홍치제처럼 내치에 능했던 황제들이 이런 건강 문제를 겪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홍치제인 경우 또 너무 어린 나이에 온갖 고생을 하다 보니 그에 따른 후유증 때문에 오래 못 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근데 막상 적고 나니까 정통제랑 성화제도 오래 산 케이스는 아니네요.

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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