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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촉의 멸망- 강유 이전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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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2-27 21:42:02

 

2-2는 현생의 여파로 3월 이후에나 적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탄식해 마지않는 삼국지의 '그 결말'

촉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과정은 후반기 역사가 대부분 통편집되는 연의에서도

비중있게 나오는 편이며, 종회와 등애에 의해 촉이 무너지는 과정은 잘 나타나 있는데

촉의 멸망은 단순히 외부의 침략만이 아닌, 산적해온 문제와 합쳐져 터진 것이었습니다.

 

촉의 최전성기는 단연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하는 그 리즈시절인데, 그 이후 촉에는

입촉 전후~이릉대전 전에 이르기까지 촉은 그동안 유비를 따라왔던 수많은 명신들이

차례로 숨을 거두는데, 간손미 브라더스라 흔히 불리는 간옹(생몰 미상), 손건(214)

미축(221)에 이어, 촉에서 모사로서는 제일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법정(220) 역시

사망합니다. 법정의 죽음은 촉에는 큰 타격이었는데, 제갈량은 연의에서의 천재

지략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국가의 틀을 잡고 행정과 보급, 대전략을 통한 큰 그림을

짜는 것에 능했지, 전투 쪽에 능한 전술가의 면모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고

이를 채워주던 것이 방통과 법정의 존재였는데, 방통은 다들 아시다시피 촉 정벌

도중 화살에 맞고 일찌감치 죽었고(214), 법정마저 떠나면서 모략가가 부족해졌습니다.

 

거기에 220년에는 맹달이 위로 투항한 이후 군을 이끌고 와서 유봉을 밀어내면서

상용이 위나라의 손에 떨어지는 연이은 참사가 벌이지는데, 상용은 보통 삼국지

게임에선 대부분 공백지로 남아있는 허접한 땅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중요한데,

땅 크기는 작지만 익주와 형주를 잇는 요충지였고, 한중에서 상용으로 병력을

보내서 양양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였으며 형주를 오에 빼앗긴 상황에서 옹양주

루트를 제외하면 위를 상대로 병력을 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였는데, 이를

빼앗기면서 북벌 루트가 하나로 한정되어 버린 셈이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황충(220) 역시 노환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사망했으며, 장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 정벌을 준비하며 부하들을 갈구다가  암살(221) 되었고;;;

촉을 대표하는 상장은 단연 관우와 장비였는데, 유비가 서천을 얻고 난 뒤, 한중왕이

되어 내린 사방장군 직위는 전장군 관우, 우장군 장비, 좌장군 마초, 후장군 황충이었고

여기서 일군을 이끌었던 건 유비를 평생 따라다니며 유비군의 핵심으로 뛰던 관우와

장비, 한중 공방전 당시 군을 이끌며 공이 으뜸이라 평가받은 황충, 그리고 입촉 이전

유비 휘하에 들기 전 조조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던 마초 외에는 없었습니다.

 

조운은 연의와는 달리 요직을 맡은 일이 없으며, 전선을 맡은 것도 제갈량이 북벌을

나설 때에서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관우, 장비, 황충이라는 상장을

셋이나 잃은 촉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출병하기 전부터 사령관 감을 모두 상실했고,

한중을 지켜야 하는 위연, 중앙을 지켜야하는 조운, 서북 방면을 담당하던 마초는

빼낼 수가 없었던데다, 마초는 이릉대전이 시작된 해인 222년에 4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쓸래야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홀대설/견제설은 신빙성이 낮음......)

 

사방장군을 모두 상실한 상황에서, 유비는 결국 풍습을 사령관으로 삼고 촉 내부에서

유능한 신진 장수들을 주력으로 삼고 황권을 비롯한 자신의 휘하 노련한 장수들과 8만의

병력을 구성해,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운용하여 형주로 진격했고, 전쟁 초기에는 기세를

올리며 오군을 물리쳤으나 손환의 미친듯한 탱킹에 육손이 쳐놓고 기다린 그물에 유비가

걸려들면서 이릉대전은 대패. 유비는 가까스로 백제성으로 피신했지만 유비군은 대패하여

물자와 병력을 엄청나게 상실했고, 데려간 인재풀 역시 항복하거나 전사하면서 국가의

기반이 될만한 전력이 완전히 녹아내리는 대참패를 겪었고 유비는 상심하여 사망합니다.

(이릉대전 내용까지 적으려면 너무 내용이 방대해지고 길어지니 간단히 패스합니다.)

 

촉은 이미 이 당시부터 쇠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릉대전에서 날려먹은 인재풀은

유비가 익주, 형주를 얻으면서 그동안 길러왔던 인재들이었고 이미 형주를 상실한

상황에서 앞으로 얻게 될 인재풀은 익주 출신으로 한정되어 버린 심각한 상황,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대패해버리면서 그나마 있던 인재풀을 싸그리 다 날려먹고

형주도 되찾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유비가 자랑

하던 전설의 1세대들이 죽으면서 그 대를 이어받아야 할 2세대가 날아갔다는 뜻..........

 

황권과 함께 위에 항복한 것으로 기록된 사람이 무려 318명인데 그 중에 열후로 봉해진

사람만 해도 42명이고 장군 낭장으로 봉해진 것이 100명. 거기에 마량, 부융, 왕보, 장남

풍습, 정기, 이조 등 수많은 장수들이 날아갔다는 점에서 촉한의 인재풀은 거의 씨가

말랐다고 봐도 무방한 복구 불가능 수준의 참혹한 피해였습니다.

 

그러나 촉에는 제갈량이라는 사기캐가 있었고, 제갈량은 유선을 황제로 세운 뒤 본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답없던 촉을 일으켜 세우고 국가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

비단을 국가 지정 산업으로 장려하여 수출하고, 암염을 채취하여 고대에 귀중했던 소금을

조달하는 동시에 남만의 반란을 진압하여 남방을 안정화시키면서, 경제와 국방의 안정을

모두 가져오는 대단한 업적을 달성합니다. 촉의 화폐는 타국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신뢰도가

높았고, 작은 땅이었지만 비옥한 익주와 촉의 행정능력이 더해져 경제력 자체는 기대이상의

성과가 나왔지만, 익주에 갇혀서는 더 이상의 확장을 기대하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수없이 북벌에 나섰지만, 북벌은 안타깝게도 매번 실패하고 맙니다.

한중에서 옹양주를 점령하는 길은 진령산맥을 넘어 북으로 통하는 다섯 갈래의 길인데

맨 오른쪽부터 자오도, 당낙도(낙곡), 야곡도, 기곡도, 기산로.

 

 

 제갈량은 자오도와 당낙도를 제외한 세 갈래 길을 모두 이용했고, 대부분의 주공은 길이

 상대적으로 넓고 평탄해 군사를 운용하기 좋고 물자를 보급하기 쉬운 기산로를 이용했는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위 역시 방어를 한쪽에 집중하면 되니 편하다는 소리가 되는데, 그렇게

 매번 장기전을 유도하는 위의 전략에 말려 제갈량은 북벌 과정에서 몇 차례 성과를 거두긴

 하지만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하고 매번 물자 부족으로 후퇴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제갈량의 북벌 과정 역시 너무 길어져서 간단하게 생략합니다. 연의에도 나오고....)

 

 결국 234년,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촉의 북벌은 위축되었고 후임에는 장완이 임명됩니다.

 장완은 매번 옹양주 루트로만 진격하다 보니 위가 대응을 빠르고 신속하게 해버려서

 뚫기가 어려울 뿐더러, 선택지의 다변화를 꾀하고자 상용 공략 계획을 입안하고 이를

 준비하던 도중 중병에 걸려 쓰러지면서, 결국 상용 정벌 계획 역시 수포로 돌아갑니다.

 

장완이 입안했던 상용정벌작전은 촉 내부에서도 회의론이 있어서, 이 당시 강유는

상서령이던 비의와 상의한 끝에 먼저 양주를 공략해야 한다며 유선을 설득해서

강유가 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 243년에는 진서대장군으로 승진해 양주 자사를

겸직하면서 강유는 강족과 연합, 기대 이상의 효과를 올리는 듯 했으나 장완이

중병에 걸리면서 이 역시 무산되고 마는데, 이 때를 틈타 244년 조상이 공격해온

낙곡대전에서 한중독이던 진북장군 왕평의 재치와 비의의 재빠른 지원으로

촉은 대승을 거두면서 10만에 달하던 위의 군대를 싸그리 날려버리는데 성공합니다.

한중독은 왕평, 장완의 공석은 비의가 채웠으며 비의의 공석을 강유가 채운 결과였는데

중병을 앓던 장완은 246년 사망했고, 비의가 그 뒤를 이어 대장군직을 승계합니다.

(낙곡대전은 전편, 위의 멸망과정에 서술된 부분을 참조하시길.........)

 

낙곡대전의 대승으로 위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졌지만, 밖으로 북벌의

길을 뚫지 못하면 익주에만 고립되어 있는 처지를 돌파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장완

사후 후임이 된 비의는 내실을 먼저 다지자는 신중론자였고, 비의 휘하에서 군사를

이끌게 된 강유는 적극적인 북벌을 주장하는 주전파였는데 비의는 강유의 군권을

허용했지만, 거기에 리미터를 붙여 일정 수준(1만) 이상을 동원할 경우 본인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고, 강유는 1만 이내로 군사행동을 벌이기엔 제약이 있었습니다.

 

강유는 강족들과 연결관계가 깊었고, 강족을 회유하면서 촉의 영향력을 서북 일대에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병력을 움직이며 각을 재고 있었는데, 이 시기 대촉 전선을

담당하던 사람은 사마의의 후임으로 들어온 곽회였고, 누구보다 촉의 군대와 옹양주

지역의 상황에 밝으며 잔뼈가 굵던 곽회는 방침을 바꿔, 사마의 시절 촉의 군대가

분탕질을 치거나 말거나 요충지를 점거하고 세월아 네월아 우주방어를 벌이던

기존의 전략에서 탈피해, 적극적으로 옹양주에 위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촉이 들어올

구멍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전에는 강하게 통제하지 못하던 서북에

위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노력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강유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강유와 곽회는 서로 서북지역에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소규모의 국지전을

벌여가며 싸웠는데, 249년에는 강유가 구안에게 명해 국산에 성을 쌓고 전진기지로

삼으려다 곽회와 진태에 의해 차단되면서 실패합니다. (연의에서는 강유의 첫 북벌

당시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비의 생전에 있었던 일........)

이 당시 옹주 방면 위의 방어담당자에는 사령관 곽회, 신임 옹주자사 진태, 거기에

남안태수 등애라는 강유 입장에서는 치를 떨만한 웬수들이 주둔해 있었고, 곽회는

강유가 군대를 많이 동원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해 병력의 우위를 확보하여 지속적으로

서북을 압박했는데 강유는 곽회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250년에는 서평 인근까지

나아가지만, 결국 곽회의 공세에 밀려 결국 밀리면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의가 전쟁을 피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강유에게 리미터를 걸긴 했지만

본인 역시 장완 사후 내실을 다진 뒤 249년 위의 사정에 정통한 하후패가 투항해오자

그를 중용하는 동시에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북벌 계획을 세우고, 252년에 부를 세우고

한중으로 나아가며 많은 장수들과 빈객의 환호를 받았고, 정벌 준비를 하던 와중에....

곽순이라 불리는 위의 항장에게 암살되면서, 촉에는 암운이 드리우고 맙니다.

 

253년, 비의가 사망하자 촉이 오에게 북벌을 멈추라고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

비의는 오와 함께 공동으로 군대를 움직여, 양면으로 위가 군대를 동원해 막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병력분산을 유도하려던 입장이었던 것이 거의 확실한데, 오는

이 무렵 제갈각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는 점을 보면 신빙성이 높다 보입니다.

그런데 비의가 암살되면서 동시 진공 계획은 허사가 되어버린 것.

 

 원래 곽순의 목표는 황제 유선이었으나 기회가 없자 비의로 방향을 선회한 것인데,

원래부터 촉에는 하후패처럼 위에서 투항해오는 사람이 많았고, 그랬기에 비의에게

혹시 모르니 주의를 기울이란 당부가 있었으나 비의는 넉살좋게 이들을 상대하다가

뜻밖의 변을 당한 것이었고, 촉은 이미 죽은 동윤(246)까지 포함해 사상이라 불리던

네 명의 재상급 인재, 제갈량, 장완, 동윤, 비의를 차례대로 잃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는데............................

 

강유는 비의 생전이던 246년 곽회와 하후패(이때는 아직 귀순 전의 일이었다)를 농서에서

꺾으면서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로 승진했고 247년에는 위장군이 되면서 내정&군사 양쪽에

모두 실권을 행사할 지위에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밖에 나가있어 내정에

참여할 일이 없었기에 대장군으로 승진해 한중에 있어야 할 비의의 상서령 자리는 진지가

승계하며 진지가 비의의 대타로 내정되면서 진지가 성도에 머물게 됩니다

 

비의가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후임이 될 사람이 필요했는데 원래 제갈량, 장완, 비의가

내정&군권을 모두 쥔 것에 비해 비의의 자리이던 대장군과 익주자사는 그대로 공석이 되었고,

위장군&녹상서사였던 강유가 신권 1인자였으나 내정에는 참여했던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내정은 성도에서 계속 담당해 왔던 진지가, 군권은 강유가 쥐게 되는 이원화 구조로

실권이 나뉘어지게 됩니다. 이 점은 촉의 멸망을 가져오는 스노우볼이 되는데..........

 

진지는 능력에 있어서는 두말할것 없이 뛰어난 인재였고, 친화력이 좋고 온화하며

부드러운 성품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평이 좋았고 유선 역시 그를 믿고 신임하며

중용했는데, 문제는 진지가 어려서부터 환관들과 어울려 친밀하게 지냈고 그 중

만악의 근원인 황호와도 친밀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촉의 사상 중 한명이던 동윤은 엄정한 성품으로 환관들의 정치 개입을 철저하게

차단했기에 동윤 생전에 황호는 숨죽여 살아야 했지만 동윤이 과로사해버렸고(246)

비의 생전에도 황제 유선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황호가 그 수혜를 입긴 했지만

비의가 워낙 탁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통제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비의 사후 진지가 내정의 실권을 잡으면서, 황호는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데

진지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황호를 견제하는 것보다 풀어두는 쪽을 선택했고,

황호의 영향력은 강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진지가 엄연히 내정의 실권자였기에 진지의

생전까지는 황호를 통제해 낼 여력이 있었지만, 훗날 진지마저 사망(258)하면서 황호를

안에서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사라져 버렸고, 이는 종말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촉 군부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이미 위연(234)이 내분 끝에 죽었고, 오의(237)도 사망했으며 231년 이후 오반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반도 사망했을 것이고(사마의의 꾀에 빠져 죽는 것은

연의의 창작), 연의에서는 나름 임팩트 있는 마대는 정사에선 기록이 세줄밖에;;;

존재하지 않는 쩌리인 동시에 235년 패전 이후 기록이 없고...........

 

비의에서 강유로 이어지던 시기에 각각 촉의 북과 남의 방패였던 왕평(248)과 마충(249)이

차례로 사망한데 이어 등지(251)도 사망. 갈수록 장수풀은 씨가 말라갔고.........

254년에 적도로 출병했다 위기에 처한 강유를 구하고자 늙고 병든 몸으로 서질과 싸우다

장억마저 전사(254)하면서, 촉서에 이름을 남긴 명장들이 대부분 사라져 버린 셈.

왕평의 자리였던 한중독의 자리는 호제가 승계하게 되는데, 이 당시까지만 해도

이것이 어떤 대참사를 낳게 되리라곤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2에서 강유의 고독한 싸움과 삽질, 그리고 등산왕의 전설, 촉의 멸망을 적어보겠습니다.

 

16
Comments
2019-02-27 21:23:00

어딜가나 환관이 문제네요

영제 - 십상시

유선 -황호

손호 - 잠혼

진나라 - 조고

명나라 천계제 - 위충현

등등

WR
1
2019-02-27 21:25:16

환관이 황제와 친하기 때문에 황권 강화에 도움되는 요소가 있는데,

황제가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망조가 드는 거죠.........

그리고 잠혼은 환관이 아니었습니다. 연의에서 고자로 만들었어요

2019-02-27 21:33:33

잠혼이 환관이 아니었던건 처음알았습니다

정보감사합니다

1
2019-02-27 21:59:08

그런데 환관이 절대적인 악이다는 또 아닙니다. 결국 황권/왕권의 대변자기도 하고, 신하의 권력 (신권)에 대한 견제가 되기도 하죠.

환관에 대한 한 유투버의 견해인데, 동의하는 부분이 많아 올립니다.

https://youtu.be/XegbjOVIehY

1
2019-02-27 23:06:10

이런관점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군요 영상잘봤습니다

2019-02-27 21:25:43

결론 :텐백 전술엔 답이 안 나온다..

2019-02-28 08:56:00

조조가 두골 넣고 텐백 걸어잠구기ㅠ

2019-02-27 21:35:11

없는 인재풀도 계속 죽어버리고 결국 인재풀은 고자가 되버리고,

내부는 고자가 휘어잡기 시작하고...

위나 오도 후반기 인재풀 상황이 비슷했나요? 촉은 인재풀 쥐어짜고 짜도 다 죽어 말라비틀어진 느낌 

WR
1
2019-02-27 21:42:49

위는 나은 편이고, 오도 나중에 쓸 예정이지만 손권이 정줄 놓으면서

이궁의 변 여파로 많이들 터져나가죠........

2
2019-02-27 22: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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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02-27 22:27:28


2019-02-27 23:53:15

저 호제는 250년대인걸 보니 길치 호제를 말하는 것 같군요. 두 호제 미스테리는 진짜 해결안될 미스테리같아요.

2019-02-28 00:01:34

사실 기본 체급 차이가 너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과학, 경제의 중심이 다 중원쪽에 있었고, 게다가 중원은 훌륭한 기마병을 양성할 조건이 되지만, 촉이나 오에는 말이 자라지 않습니다. 촉이 있던 사천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교류하기가 힘든
지리환경이라 경제적으로도 많이 낙후되어 있는 환경입니다.

당대에 기마병은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인재들도 변두리인 촉보다는 중원을 훨씬 선호했을테구요.

2019-02-28 00:31:01

날아가는 인재풀들을 보니 진짜 안타깝네요. 황충이야 나이도 그러니 그렇다치고, 관우도 형주공방전에서 전사한거지만 허무하게 죽은 장비나 마초, 법정은 너무 아쉽네요. 맹달이 배반하지 않고 그들이 살아있었으면 어땠을지...

2019-02-28 00:49:43

 없다없다 하는 장수들이 계속 죽어나가기만 하고 신진 장수들이 거의 없으니

나라가 망할수밖에요...

촉은 여러모로 마음이 갈수밖에 없는 나라인것 같습니다.

 

2019-02-28 01:03:08

황권이 위에 투항한게 너무나 뼈아팠죠.

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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