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선수』미들점퍼의 마스터, 자존심과 자신감 그 사이에서.j
"최고의 선수"라는 타이틀을 달기 위해서는 두 가지만 잘 하면 된다고 합니다.
"공격", 그리고 "수비"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날에는
우수한 선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최고의 선수는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엄청난 공격력을 가졌음에도
수비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팀에서 중용되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았고,
반대로 탄탄한 수비력을 가졌음에도
공격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스타 플레이어로 발돋움하지 못했던 선수들도 많았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전자에 해당하는 선수였습니다..
이 선수의 공격력은 이미 고교시절부터 전미에 그 명성을 떨칠만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대학시절의 이 선수는 가히 "괴물"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의 파괴력을 선보이며
일찌감치 NBA 팬들을 설레이게 했으며..
이 선수가 드래프트를 통해 처음으로 팀에 합류했을 때,
프랜차이즈의 팬들은 그를 savior 라고까지 불렀다고 합니다..
NBA에 입성한 뒤에도 그의 득점포는 불을 뿜었고,
특히 그의 미들점퍼는 기계와 같은 정확도를 자랑했습니다..
당시 그랜트 힐과 함께 NBA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몰 포워드였던 이 선수..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미들 점퍼의 주인공..
끝없는 자신감과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을 가졌던,
하지만 그 만큼 위력적이었던 공격수..
오늘 『그 때 그 선수』의 주인공은 바로..
글렌 로빈슨(Glenn Robinson) 입니다!!
1. Big Dogg in the House
인디애나 최고의 고교 농구 선수였던 글렌 로빈슨.
맥도날드 올스타를 당연스레 거치며 퍼듀 대학으로 진학했던 그의 대학시절은
가히 "전설"과도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사실 글렌 로빈슨은 3학년을 마치고 NBA에 데뷔를 했음에도
대학리그를 두 시즌밖에 소화하지 못했는데,
그의 학업성적이 너무 나빴던 탓에 신입생 시절 경기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소포모어가 되면서 처음으로 NCAA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파괴력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Big Dogg 이라는 그의 닉네임은 대학시절 붙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학교 농구부 관계자가 연습 도중 볼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로빈슨을 보면서..
"Big Dogg을 건드리면 다치니까, 그냥 비켜줘라" 며
농담을 했던 것이 굳어지면서 NBA에서까지 불리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Big Dogg"이 3학년이 되던 해,
두 번째 대학시즌을 맞이한 로빈슨은
무려 평균 30.3득점, 10.1리바운드를 기록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NCAA는 NBA와는 달리 한 경기가 48분이 아닌 40분짜리 경기라는 점이죠..
실제로 당시 그의 평균 플레잉 타임은 34분 정도였는데..
정리해보자면 로빈슨은 매 경기 평균 34분을 뛰면서 30-10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NCAA에 남아있기엔 너무나 커져버린 로빈슨은 NBA 드래프트에 참가를 신청합니다..
당시 조던의 은퇴와 함께 새로운 스타를 찾기에 고민을 거듭하던 NBA측에서는
새로운 "괴물"의 등장에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1994년 드래프트, 1번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밀워키 벅스는
당연하게 글렌 로빈슨의 이름을 호명했고..
그렇게 로빈슨의 NBA 커리어가 시작됩니다..
2. 자신감, 자존심 그 사이에서
토드 데이, 에릭 머독이 이끌던 백코트에
유망주 파워포워드 빈 베이커가 버티고 있던 밀워키 벅스..
거기에 글렌 로빈슨이 가세한다는 소식은
프랜차이즈에 엄청난 흥분과 기대감을 갖게 했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글렌 로빈슨이 팀과의 계약에 있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로빈슨이 요구했던 계약은 13년간 1억달러..
그는 자신의 가치는 충분히 그 만큼의 것이며..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유럽에서 뛰다가 NBA로 돌아올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으름장을 놓았던 것입니다..
밀워키 벅스에 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로빈슨과 벅스는 10년간 6천 8백만 달러에 계약을 하기로 합의를 합니다..
(로빈슨의 계약건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루키 계약"의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커다란 헤프닝 끝에 팀에 합류한 로빈슨을 바라보는
언론과 선배 선수들의 시선이 고울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빈슨은 끝까지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은 충분히 그 만큼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과
고교시절부터 최고의 수퍼스타였던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이 그의 뒤를 받치고 있었습니다..
3. 밀워키 벅스, Big 3 결성
힘들게 팀에 합류한 글렌 로빈슨은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입니다..
루키시즌 총 80경기에 출장하면서 평균 21.9득점 6.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활약을 펼칩니다..
1994-1995시즌의 신인왕은 그랜트 힐과 제이슨 키드에게 밀려 놓치고 말았지만,
1995 올 루키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리며 그 활약을 인정받습니다..
(저는 아직도 글렌 로빈슨이 신인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시즌에서는 82경기에 모두 선발출장하면서 평균 20.2득점 6.1리바운드를 기록,
2년 연속으로 20-6을 달성하며 본인의 실력을 입증합니다..
당시 팀 동료였던 유망주 파워포워드 빈 베이커와의 조합은
리그에서도 주목받는 영건 콤비였고,
기대만큼, 그들의 활약도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밀워키 벅스는 그 외의 포지션에서 취약함을 드러내며
성적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1996 드래프트에서 스테판 마버리를 픽 업 한 뒤,
레이 앨런과 트레이드 하면서 그를 팀에 합류시킬 수 있게 됐고,
로빈슨-앨런으로 이어지는 원투펀치를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98-1999시즌 도중
트레이드를 통해 샘 카셀이 팀에 합류하면서..
마침내.. 지금도 간간히 회자되고 있는
전설의 밀워키 벅스 Big 3 가 결성되기에 이릅니다..
4. 공격! 공격! 공격!
Big 3 가 결성되었던 1998-1999시즌은
글렌 로빈슨이 팀에 합류한 이 후 최초로 5할+ 승률을 기록한 시즌입니다..
점차 동부의 젊은 강호로 떠오르던 밀워키 벅스에서 글렌 로빈슨의 입지는 단단한 것이었습니다..
드래프트 동기였던 그랜트 힐과 함께
리그내 최고의 영건 스몰포워드로 손꼽히던 글렌 로빈슨은
Big 3 안에서도 꾸준히 20+ 득점을 기록합니다..
글렌 로빈슨의 득점패턴은 그 다양성이 무궁무진했습니다...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를 가리지 않았고
NBA에서도 최정상급 레벨이었던,
예술의 경지에 이르른 풀업 점퍼는 상대팀에게 치명적인 무기였습니다..
화려한 슬램덩크는 물론이고,
먼 거리에서도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 슈팅이 가능했을 정도로
세련된 슈팅기술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습니다..
완벽에 가까운 슛터치와 재빠른 릴리즈 타이밍은
알고도 당한다는 말이 절로 나올만큼 위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대로 수비에서는 약점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경력이 쌓여가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픽&롤 수비나 팀 디펜스 응용력이 조금은 떨어졌습니다..
1:1 수비에서는 팀의 약점으로까지 취급받진 않았지만 훌륭한 수준은 분명 아니었으며,
주로 매치업 되는 상대들이 리그의 3번들이었음에도
상대 공격수의 외곽슛을 봉쇄하는 방법에 서툴렀습니다..
패싱레인을 읽는 눈도 좋지 않아서 문제가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혼자서 공격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한탓에 무리한 슛을 남발하는가 하면..
홀로 공격을 진행하려는 도중 발생하는 턴오버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훌륭했던 득점력에 비해 어시스트 갯수는 상당히 적은 수준이었는데
11시즌의 커리어 동안 평균 실책 갯수보다
어시스트 갯수가 많았던 시즌은 단 세 시즌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화려하면서도 꾸준한 득점포는 분명 팀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고..
공격적인 팀컬러로 경기를 풀어나갔던 밀워키 벅스와 글렌 로빈슨의 궁합은 굉장히 좋은 것이었습니다..
밀워키 벅스의 Big 3 는
그 옛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Run TMC 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위력이었고..
젊은 세 선수들을 주축으로한 벅스는
동부의 새로운 다크호스가 되어 리그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만난 1998-1999시즌,
드디어 밀워키 벅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현재 벅스의 에이스 플레이어인 마이클 레드가 2라운드에서 팀에 합류했던 2000-2001시즌은
그들이 가장 높이 비상했던 시즌입니다..
그 시즌의 플레이오프에서 밀워키 벅스의 포스는 굉장한 것이었고..
1라운드에서 티 맥의 올랜도를 3승 1패로..
2라운드에서 매쉬번과 배런 데이비스의 샬럿 호넷츠를 4승 3패로 꺾으며
동부컨퍼런스 결승에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진 동부컨퍼런스 결승에서
그들은 제가 눈으로 지켜봤던 시리즈들 중 손에 꼽히는 불꽃 시리즈를 연출합니다..
비록 앨런 아이버슨과 레이 앨런의 "앨런 vs 앨런" 대결구도가 흥미진진했던
필라델피아와의 시리즈에서 4승 3패로 아쉬운 패배를 당하고 말았지만..
당시 밀워키 벅스가 보여준 공격 농구는 엄청난 것이었으며,
그 한 가운데 글렌 로빈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2001-2002시즌,
여전히 Big 3 는 건재했고, 마이클 레드는 기대주로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41승 41패를 기록하며 5할 승률 달성에 성공하지만,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한 경기차로 동부 8위자리를 내어주며
당시 동서부를 통틀어 5할 이상 승률을 기록한 팀들 중
유일하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팀이 됩니다..
밀워키 벅스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는 레이 앨런을 팀의 중심으로 성장시키려 했고,
이 과정에서 글렌 로빈슨은 애틀란타의 토니 쿠코치와 트레이드 되면서 애틀란타로 이적하게 됩니다..
밀워키에서의 마지막 시즌, 글렌 로빈슨은 평균 20.7득점 6.2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5. 트레이드, 상처받은 자존심
비록 글렌 로빈슨이 밀워키 벅스에서
레이 앨런에게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를 기다리던 애틀란타에서는 나름대로 글렌 로빈슨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애틀란타에는 샤리프 압둘라힘, 제이슨 테리가 버티고 있었고
그들은 글렌 로빈슨을 영입하며 새로운 Big 3 를 결성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글렌 로빈슨은 언제나처럼 20+득점을 기록했지만
애틀란타는 35승 47패의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던 것입니다..
결국 애틀란타는 단 1년만에 글렌 로빈슨을 포기하며
그를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시키기에 이릅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밀워키를 꺾고 파이널에서 준우승을 한 이 후,
아이버슨에 이은 제2옵션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글렌 로빈슨이 그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자신과 밀워키 벅스 Big 3 의 전성기를 무너뜨린 장본인,
아이버슨의 파트너로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무렵의 글렌 로빈슨은 의욕이 사라진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래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팔꿈치, 발목 등의 부상과
어느 덧 서른줄을 넘긴 나이는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자존심이 크게 상처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제나 최고였고 당당했던 그가 레이 앨런에게 밀리며 친정팀을 떠났고..
새로 합류한 애틀란타는 1년만에 자신을 버렸고..
그렇게 찾아온 필라델피아에서는
대놓고 아이버슨의 뒤를 받치는 제2옵션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필라델피아가 파이널에 진출했던 것은
수비 위주의 팀컬러로 해냈던 것이었는데..
아이버슨의 뒤를 받칠 선수로 글렌 로빈슨을 영입한 것 자체가
서로에게 마이너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글렌 로빈슨의 수비는 필라델피아를 힘들게 했고..
로빈슨의 공격력은 아이버슨에게 밀려
그 위력을 발휘해 볼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습니다..
부상으로 결장하는 경기가 늘어날 수록 돌아오는 건 홈 팬들의 야유였고,
이제껏 크게 문제시 되지 않았던 수비력 부재 등의 문제들이 터져 나오면서
팀 내의 입지는 좁아져만 갑니다..
결국 필라델피아마저 단 1년만에 로빈슨을 포기하게 되고..
그를 뉴올리언즈로 트레이드 해버리지만..
당시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리빌딩에 들어간 뉴올리언즈는
로빈슨을 바로 방출해버리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소속팀도 없이 방황하던 로빈슨에게 손을 내민 것은
샌안토니오 스퍼즈였습니다.
2005년 4월, 플레이오프에 대비하여
베테랑 스코얼러를 필요로 하던 그들은 글렌 로빈슨을 영입했고..
결국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4승 3패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글렌 로빈슨은 그렇게 우승반지를 차지하며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
NBA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분명 아직은 달리고 뛰어오르며 득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벤치에 앉아있는 베테랑 교체 멤버로써의 역할은
아마도 로빈슨 본인이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대학시절,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단연 전미 최고의 공격수이자 스타 플레이어였던 글렌 로빈슨..
인디애나의 빈민가에서 자라나 힘들게 살아온 그에게
농구는 삶의 전부였고..
힘든 세상 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모두를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지나치다 싶은 자신감과 자존심은 어쩌면..
언제나 최고였던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모습이 투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가 수비에 관심이 없이 공격만을 계속했던 것도
농구에서만큼은 공격받기보다는,
공격하고 공격하는 강자의 모습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에게 있어 득점은 힘든 세상을 향한 분노의 표현이었고,
어둡고 힘들었던 삶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생존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농구라는 세상 속에서..
더 이상 강자가 아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자..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풀업점퍼의 마스터, Big Dogg..
글렌 로빈슨이었습니다..
Glenn Robinson (1995-2005)
생애통산 688경기 출장(668 선발) 평균 20.7득점, 6.1리바운드, 2.7어시스트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이름은 많이 들어 본 선수였지만 정작 아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는데 덕분에 많이 알고 가게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