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밥 쿠지의 수십 년의 사랑, 그리고 긴 이별
밥 쿠지의 게임 플랜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마다 그는 먼저 일어나 부엌 테이블 위에 아내의 알약과 신문, 섬유질 바, 바나나를 올려놓았다. 그 뒤 밥 쿠지는 침실로 돌아가 아내를 깨웠다. 종종 아내가 따뜻한 이불 밖으로 나가는 걸 꺼려하면 쿠지는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다. 항상 그는 다정했다.
아내가 일어나면 쿠지는 그녀를 부엌으로 데려가 신문을 읽게 했다. 아내는 모든 기사의 문장에 일일이 밑줄을 쳤기 때문에 다 읽으려면 두세 시간이 걸렸다. 얼마 지난 뒤엔 쿠지도 밑줄 쳐진 문장을 읽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것은 그들이 공유하던 일상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행복한 삶을 리딩했어요," 그가 말했다. "게임 플랜의 일부였죠."
밥 쿠지는 게임 플랜에 대해 꽤 알고 있고, 그와 그의 아내 미시는 항상 팀이었다. 결혼 초기에 셀틱스 스타가 (원정 경기를 위해) 몇 주씩 집을 비웠을 때, 미시는 딸들에게 아빠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줌으로써 가정에 남편의 존재감을 만들었다. 몇십 년 후 미시가 치매 앞에서 천천히 무릎 꿇을 때, 쿠지는 그의 '신부'를 반드시 자신의 곁에 있게 했다. 그녀의 정신이 그가 따라갈 수 없는 곳을 헤매고 있음에도.
63년 동안의 결혼생활 끝에 밥 쿠지는 지난주 그의 신부에게 작별을 고했다. (* 역주: 이 기사는 작년에 나온 것으로 미시 쿠지는 2013년 9월 20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지인들은 그가 상실감에 빠졌고 슬픔을 가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인터뷰에 응한 것에 놀랐다. 왜냐면 쿠지는 미시만을 위해 10년을 넘게 지내던 남자였고, 한 번도 도움이나 동정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게임 플랜에 들어있지 않았다.
쿠지는 고교 시절 연인인 검은 머리의 미시 리터버흐와 결혼했다. 그가 1947년 NCAA 우승으로 이끌었던 홀리 크로스 대학을 졸업하고 난 지 6개월 뒤의 일이다. 신혼 첫날밤에 그는 셀틱스의 포인트가드로서 뛰었고, 며칠 뒤엔 2주간의 원정 트립을 떠나야만 했다.
매우 힘들었던 경기 스케줄이 그들의 신혼생활 첫 절반을 장식할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농구라는 게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나중에는 감독과 해설위원까지 하는 동안, 미시는 두 딸을 기르며 평화 운동과 사회 정의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딸들에게 주입시켰다. 영리하고 아름다우며 상냥했던 그녀는 새로운 셀틱스의 아내들의 멘토였고, 특히 빌 러셀과 조조 화이트 같은 흑인 선수들의 아내들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걸 스카우트 대표였으며 정원사였고, 살리스버리 스트리트에 있는 잉글리시 튜더 스타일 집의 잘못된 배관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 정치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는 지독히도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나는 애들 놀이나 하는데 바빴죠." 쿠지가 지난주에 두 딸 메리와 티샤와 함께 거실에서 앉아서 말했다. "나는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되돌아보니, 나는 좀 더 내 가족과 함께 지냈어야 했지요. 다행히 내 딸들은 가장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 손에서 자랐지만요."
오늘날 "쿠즈"라 알려진 셀틱스 레전드는 85세이지만 여전히 십년은 젊어 보인다. 아내에 대해 그리고 부부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더욱 커졌던 사랑에 대해 또렷하고도 품위 있게 말할 때면 그는 너무도 쉽게 눈물을 흘린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전통적인 결혼과는 다소 달랐어요," 그가 말했다. "대부분의 부부들은 초반에 가장 강렬하게 사랑하죠. 하지만 난 그 때 항상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결혼생활에서 가장 멋지고 낭만적인 순간을 후반에 가졌죠. 우리는 지난 20년간 말그대로 꼭 붙어있었어요."
미시의 인지력 감퇴는 12년 전부터 점진적으로 일어났다고 쿠지는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물어봤다. 그녀는 환각에 시달렸으며, 방향 감각을 잃었고 균형을 잡는데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남편을 알아봤고, 치매에 걸린 게 아니냐는 얘기를 들으면 화를 냈다.
그래서 쿠지는 한때 독립적이던 아내가 자기 스스로 여전히 건강하다고 인식할 수 있도록 매우 노력했다. 아내는 자신이 아직 운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는 그녀의 스테이션 왜건을 매년 겨울마다 플로리다에 있는 별장에 보내 주차시켜 놓고 그것을 아내가 볼 수 있게 했다. 그녀의 정원에는 생화 대신 빨간 조화들을 심었다. 모든 집안일을 하고 나선 아내가 집안일을 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생각하시기에 당신 스스로 완전한 어른이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셨어요," 딸 메리가 말했다. "정말 놀라웠죠."
부부의 사회적 삶은 미시의 증상이 악화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목요일 밤에 친구들과 어울려 나가거나 골프를 치러가는 대신, 쿠지는 모든 시간을 아내와 보냈다. 그는 미시와 "제너럴 호스피탈(역주: 1963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장수 인기 TV 시리즈)"을 보면서 끈기 있게 같은 질문에 답했다. 쿠지는 냉장고를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인 리스의 땅콩버터 컵스로 채웠다. 밤이 되면 그녀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그는 그녀의 팔을 어루만졌다.
"당신을 사랑해 여보," 그가 말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 미시는 항상 대답했다.
셀틱스를 6번이나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인 스포츠 선수는 병든 배우자를 하루 종일 돌보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좌절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내를 돌보는 것이) 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줬죠," 그가 말했다. "한 번도 귀찮은 일이었던 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녀도 날 위해 똑같이 해줬을 거란 걸 알았으니까요."
9월 7일에 쿠지는 아내를 우스터 컨트리 클럽에 데려가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미시는 심각한 뇌졸중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주 뒤 평온하게 죽었고 성 존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오늘날, 아내와 함께했던 기억과 그녀가 삶의 마지막 날까지 행복했다는 사실이 쿠지를 위로해준다. 언제나 훌륭한 사람이었던 그는 가난한 프랑스 이민자의 아들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운 좋은 삶 - 운동선수로서의 명예, 사랑하는 딸들, 손주들 그리고 그가 사랑하던 아내 - 을 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아내가 가장 그리울 때가 언제냐고 물었을 때만 그는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어했다.
"이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알약을 놓아줄 수가 없어요," 그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돌봐줄 수가 없어요."
그는 아직도 매일 밤 침대로 가서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밥 쿠지처럼 헌신적이고 변함없는 남자에게, 게임 플랜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두 분의 사랑의 모습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