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Free-Talk

조선사 최악의 임금들 5-5(광해군의 최후와 평가)

 
8
  2231
Updated at 2018-12-09 19:34:12

 

1. 대북을 견제하라

 

광해군은 옥사를 부추기며 동시에 본인의 의견에 찬동해 준 대북에게 신임을 몰빵했고, 그렇게

대북은 계속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인목대비를 유폐한 이후

서인과 남인의 주요 명신들을 모두 밀어내며 대북 정권을 연 대북은 기세등등했습니다.

 그런데, 세력을 너무 키운 나머지 주위의 두려움을 사게 되는데, 이는 왕인 광해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인 대북을 지원하여 힘을 실어주었지만, 막상

대북이 점점 강해지자 광해군의 의심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광해군은 끊임없는 옥사를 거쳐왔는데, 신경희의 옥(소북이 대북을 공격하기 위해 주작한 사건)

으로 연루자들을 처벌하던 도중 능창군(정원군의 아들이자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

이 연루되어 국문을 받게 되고,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어 온갖 학대 끝에 죽음을 당했는데,

광해군이 능창군을 정말 죽일 의도였는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으나 능창군 사후 조사를 통해

학대받다 죽은 능창군 죽음의 전말을 알아내고는 관계자를 전부 처벌한 것으로 보아 능창군은

임해군이나 영창대군의 경우와 달리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훗날 임금이

된 인조와 서인 정권이 광해군에게 인정없는 폭군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능창군 죽음의

책임도 덮어씌웠다는 이야기가 있고, 오히려 죽여놓고 악어의 눈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찌되었던 신경희의 옥은 대북의 수장격인 이이첨을 노린 소북의 공격이었고, 이이첨은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고산 윤선도가 이이첨과 대북의 전횡을 아예 대놓고

내지르는 상소를 써서 비판하는 패기를 보여주면서 이이첨을 공격했고, 이 일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이이첨은 자신의 적들이 많음을 깨닫고는 숨죽여 지내려 하였습니다.

 

그런 이이첨에게 광해군이 결정적으로 위협을 느끼게 된 계기는 허균의 죽음(1618)

이후였는데, 허균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 또 다른 면으론

이이첨의 가장 충실한 수하이기도 했는데, 영창대군 제거와 소성대비(인목대비)

폐서인에 결정적 역활을 했던 허균은 소성대비 암살을 기획하며 사람을 모으다 이게

발각되면서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에게 버림받았으며, 국문을 받게 되어 본인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광해군에게 '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 라고 소리쳤으나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왕의 어전에서 허균을 끌어내어

죽이는데, 이는 광해군에게 위협으로 다가왔을 뿐 아니라, 이를 지켜보던 타 당파

모두에게 상당한 위협 그 자체로 다가왔습니다.

 

대북마저 의심하게 된 그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상궁 김개시에게 의지하는데,

김개시는 이전부터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이이첨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었지만

이후로 점점 더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하는데, 김개시는 광해군 말기 역모의

움직임이 계속 보고되는데도광해군에게 그럴 일은 절대 없다며 광해군을

안심시켜 경계를 늦추게 만들었는데, 이는 광해군 최후의 전주곡이었습니다.

 

2. 사돈이 아닌 웬수

 

 광해군의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신하는 다름아닌 박승종이었습니다.

 5-2에서도 잠깐 적었지만, 박승종은 소북 중에서도 탁소북 출신이면서 광해군과 이이첨

 양측 모두의 사돈이었고,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하다고 정평이 난 인물이었습니다.

 

 빅승종이 영의정이 되자 대북은 기뻐 날뛰었는데, 이 기쁨의 얼굴이 굳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박승종은 영의정에 오른 뒤 자신의 복주머니에 항상

비상(사약의 재료가 되는,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독약)을 품고 다니면서 본인은

여차하면 자결할 것이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다녔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자신의 사돈이자 실세였던 대북의 이이첨과 정면으로 대치합니다.

 

대북이 싫다며 대문을 외문으로 고쳐 부르고(;;;;) 기존에 대북의 주도로 계속적으로

발생하던 옥사를 본인의 권한을 활용해 옥사마다 이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주작을

밝혀내며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차단, 대북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눌러엎었습니다.

 거기에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소성대비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는 한편

본인의 시종과 가솔들을 동원해 교대로 서궁을 살피며 대비의 안전을 사수하는 등

이이첨을 철저하게 견제하며 대북의 전횡을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이첨은 길길이 날뛰었으나, 박승종은 영의정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앉은 인물인

동시에 본인과 광해군 양쪽 모두의 사돈이기에 그를 찍어누를 명분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박승종은 책을 잡힐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평소에는 집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며

놀면서 아예 빌미를 줄 행위를 하지 않았고, 이이첨이 본인의 반대파를 찍어누르려 하면

부리나케 나타나 본인의 결정을 뒤엎어 버리니 이이첨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지만

이를 견제할 방법이 없어 이전만한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워져 갔습니다.

 

그러자 이이첨은 활로를 모색하는데, 그 모색한 활로가 다름아닌 친명정책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시도하고 있던 중립외교에 딴지를 걸면서, 철저한 재조지은의 명분 하에

명나라에 신의를 다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조선의 사대부 대부분이 동감하는

공통적인 생각이었고, 굳이 이이첨이 여론을 주작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논리 그 자체였기에 대북은 물론 타 당파에게도 이는 자연스러웠습니다.

 

대북은 집권당이면서 광해군의 지지세력이었음에도 중립외교를 극혐했는데, 당시

영의정인 박승종은 압록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제가 이전에 연재했던 병자호란

에피소드 참고) 이 내륙으로 들어오려는 시도를 할 시 즉각적으로 차단할 것을

주문하는 동시에 후금의 국서가 오면 국경의 장수들이 직접 후금으로 넘어가 이를

답례하며 국서를 전해 명나라에게 꼬투리를 잡힐 증거(양측에 국서가 오고간 사실)

를 남기지 않을 것. 이를 감시할 모문룡에겐 정탐을 위한 것이라 둘러댈 것을

주문한 사실이 비변사에 기록되어 있고 광해군은 이를 따랐다고 하는데, 광해군이

본인의 중립외교 구상을 박승종을 통해 구현한건지, 박승종이 이를 제시하고

광해군이 이를 따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둘의 생각은 공통적으로 같았습니다.

 

그렇게 박승종은 본인이 영의정이 된 것을 좋아하며 방방 뛰던 이이첨과 대북을

견제하며 광해군을 도왔는데, 이이첨은 손발이 꽁꽁 묶인 것처럼 힘을 쓰지 못하며

본인의 사돈에 의해 점차적으로 세력이 약해져 가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3. 조짐

 

사르후 전투 이후, 박승종은 본인이 광해군 초기 병조 판서로 재직했던 경험을 살려

각도의 정예병을 한 곳에 모아 즉시 주둔지를 만들고 훈련을 빨리 서두를 것을 주문하는

동시에 정충신, 장만, 남이흥을 비롯한 유능한 장군들을 북방에 배치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동시에, 수도인 한양의 군사를 담당하는 훈련대장엔 본인의 심복인 어흥립을,

한양과 가장 가까운 지역인 경기도 감사에는 본인의 아들인 박자흥을 임명해 놓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대책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개시에게 놀아나며 광해군이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는 사이, 어둠 속에서는

암약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1620년(광해 12년) 능양군의 외삼촌 구굉은 친구 이서와

친척인 구인후, 신경진, 최명길 등을 포섭해 반정을 계획하였고, 점차 세력을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구굉이 주도했으나, 정작 후에는 주모자인 구굉보다 다른

사람들의 활약이 더 커지며 주도자가 바뀌게 됩니다.

 

 신경희의 옥 당시 사촌형 신경희와 조카 능창군을 잃었던 신경진은 김류를 끌어들였고

 이후에 평산 부사였던 이귀도 합류했으며 훗날 가장 유명한 간신 중 하나가 되는 김자점

 이 합류하였으며, 거기에 제주목사로 일하던 중 능력을 인정받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막 임명되어 부임하러 가야 하던 인물이 있었는데, 춥고 먼 북방에 가기 싫어 밍기적대던

 장수를 포섭하는데 성공하는데, 그 인물이 다름아닌 이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명분이 되어 줄 것은 의리였는데, 폐모살제는 이미 충분한 명분이었고

 거기에 궁궐 공사를 비롯한 민생 파탄으로 폭군이 된 광해군에게 떠나가버린 민심은

 좋은 동력원이었으며 거기에 정변의 가장 큰 원동력이자 명분이 되어 줄 것은 바로

 서궁에 유폐되어 있는 인목대비, 그리고 광해군을 대신할 능양군의 존재였습니다.

 

 능양군은 정창군의 첫째 아들로, 정창군은 5-1에 언급되었던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의

 아들이었으나, 동복 형제인 의안군과 신성군이 모두 요절하면서 광해군 다음인

 선조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정창군은 워낙 개망나니로 유명해 후계 구도에 배제되어

 한량으로 사는가 했으나, 본인의 아들인 능창군이 역모에 휘말려 귀양가서 요절하고,

본인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에 광해군이 집을 빼앗아 궁궐을 건축.....(경희궁)하자

분노에 차 술만 마시다 홧병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와

동생의 최후를 지켜본 능양군은 광해군을 증오하며 기회를 엿보았고, 그런 그에게

힘이 되어줄 찾아 본인 역시 반정에 주도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중종은 가만히 있다 반정 공신들에 의해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것에 비해, 능양군은

본인이 스스로 반정을 주도하며 반정을 일으킬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작은 불씨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4. 인조반정

 

그렇게 1623년, 반정 직전에 평산 부사였던 이귀의 보고가 올라갑니다.

호랑이 한마리를 잡아 그 가죽을 광해군에게 진상한 뒤, 주청을 하는데

호환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나 경계 지역을 넘어서 쫓아갈 수가 없으니, 호랑이

사냥을 위한 착호갑사(대 호랑이용 특수부대)를 경기도와 황해도일대에도 파견

가능하게 허가를 내주십사 요청했고, 광해군이 이를 허가하자 이귀는 장단 부사

이서의 부대와 합류했고, 그러자 이귀가 역모를 꾀했다는 보고가 올라갑니다.

 

이귀는 이에 역모를 고변한 자와 대질 신문을 해줄 것을 요구하며 버텼고, 대북은

이귀를 끊임없이 탄핵하려 했지만 이미 대북에 대한 신뢰를 잃은 광해군은 이를

거부한채 이귀를 비호하며 첫번째 신호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인조반정 바로 전날, 반정 세력이 포섭했던 이이반이라는 자가 김신국과

함께 찾아와, 이후배, 이후원이라는 자로부터 인조 반정 사실을 듣게 되고 이를

고변해버리자, 박승종의 머리 회로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영의정 박승종은 즉각 추국청을 설치, 이후배를 잡아들여 추궁한뒤

역모 관련자를 모두 잡아들이고자 광해군의 재가를 받으러 향했는데.............

 

그런데 이 때 광해군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김자점이 매수한 후궁들과 술을 퍼마시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광해군은 결정적인 신호마저 놓치고 맙니다.

 

박승종은 이에 황급히 자신이 임명한 훈련대장이자 심복인 이흥립을 불러내

김류, 이귀와 모반을 꾀했는가를 추궁하는데, 이흥립은 남우주연상급 연기력을

선보이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이 설마 공을 배반하겠나이까' 라고 대답했고

믿고 부리던 심복의 대답을 믿은 박승종은 이를 믿었으나, 한편으로는 아들인

경기 감사 박자흥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고, 이에 소식을 들은 박자흥은

즉시 사방으로 연락을 띄워 경기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때는 늦어 능양군은 1623년 음력 3월 12일 밤, 홍제원에서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이귀를 호위대장으로 삼아 진군할 채비를 마쳤는데, 정작 대장인 김류가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나오지 않자 급한대로 유능하다고 알려진 포섭한 무장 이괄을 대장으로

삼고 궁궐로 쳐들어갑니다.

 

그러자 이미 내통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이 순순히 창의문을 열어주면서 반정군은

그대로 궁궐에 입성,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 순식간에 박살나며 반정은 성공합니다.

급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광해군은 급히 몸을 피해야 했는데, 그가 남긴 한마디가......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  -광해 15년(1623) 3월 12일)

 

광해군이 역모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이이첨일만큼, 광해군 머릿속에

이이첨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인데, 정작 광해군 본인은

생각치도 않은 능양군과 서인 반정 세력에 의해 몰락해버리고 만 셈이었습니다.

 

광해군은 급한대로 의원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정변은 이미 성공한데다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소성대비(인목왕후)가 반정 세력에 의해 풀려나면서 명분은 결국

완성되었고, 대세가 결정되버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밀고자에 의해 숨은 위치가

발각되어 체포되면서, 광해군은 그렇게 폐위되고 맙니다.

 

광해군은 폐서인되어 부인, 자식들과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소성대비(인목왕후)는

광해군과 그 아들놈의 살점을 씹어먹기 전엔 책봉따위 없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능양군과 반정공신들은 천하에 신하들이 임금을 폐한 경우는 있어도 주륙한 경우는

없다고 이를 만류하자 결국 권력이 없어 이를 행하지 못합니다.

 

강화도에 있던 광해군은 폐세자된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가 탈출시도를 하다 실패하고

자결하며 아들 내외를 잃었고, 이에 상심한 자신의 부인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으며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의 뜻이던, 자신의 뜻이 아니던 수없이 많은 복위

운동에 휘말렸으며, 병자호란 직후 민심 이반을 느낀 인조와 서인 정권에 의해 후환을

없애자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지를 바꿔지게 되는데, 제주도로 가게 된 광해군은

도착한 직후 이곳이 제주도라는 소식을 듣고 크게 좌절하며 비통해했으나, 제주도에

갇힌 이후에는 감시하는 계집종이나 군사들에게 영감이라 불리는 굴욕을 겪으면서도

아예 달관한 듯 별 대꾸를 하지 않으며 살다가 67세로 한많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왕위에 재위한 기간보다 유배지에 있던 기간이 더 많았던 비운의 임금이었습니다.

 

 

5. 평가

 

광해군은 왕자 시절 엄청난 위기 대처 능력과 인내심, 참을성을 보여주었으며 능력도

출중해 아버지인 선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히 군왕의 자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에 따른 기대치도 높았으며 이를 받쳐줄 기반 역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성장과정과 아버지의 견제에 의해 쌓여온 의심병과 화를

억누르지 못했고, 자신의 권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동시에 자신을 위협하는 자라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고 광폭한 피의 정치를 하여 정적을 대거 양산했으며, 자신의

뜻에 따라오는 대북에게 힘을 몰빵해 버리며 힘의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폐모살제를 통해 명신들을 축출하며 너무나 형편없는 용인술을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본인들의 생존에 위협을 느낀 신하들이 자신들이 당하기 전에 먼저

선빵을 치기로 결의하면서, 결국 본인의 몰락을 가져오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명, 청 교체기의 긴박하고 살얼음을 걷는것 같은 위기 속에서, 중립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고 양측에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동시에 성곽을 보수하고 군사를

배치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하여 전쟁을 막아낸 공로는 광해군 최고의 공적이며,

유능한 외치로 지금까지 고평가되는데, 이는 후대의 인조가 답없는 대처로

두 차례의 호란을 거쳐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 사례와 너무도 차이가 컸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풍전등화의 위기로 병력이 징발당하고 백성의 노동력을 쥐어짜는

와중에도 광해군 본인의 욕심 때문에 궁궐병에 걸려 백성들을 착취하고 쥐어짜는

행위는 가히 폭군이라는 이름이 걸맞는 최악의 짓이었으며, 이에 대해 반성은 커녕

오히려 더했다는 점에서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내치에서는 혼군 그 자체였습니다.

 

유능한 외치, 무능하고 답없는 내치.

아버지인 선조의 평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 아들.

후대 임금인 인조는 정말 욕을 사발로 쳐먹어도 모자랄 정도로 최악이지만,

광해군이 임금에서 쫓겨나야 할 명분은 충분했습니다.

 

최악의 임금을, 더 최악의 임금으로 교체한 것이 조선의 불운이었던 것이겠죠.

 

박시백 화백의 광해군에 대한 평이 워낙 인상깊어서 이로 마지막을 대체합니다.

 

 "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은 열린 이성과 현실감각, 그리고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을 거두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


 

 다음에는 제가 뽑는 모든 조선의 임금들 중 TOP인 인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10
Comments
1
2018-12-09 19:29:2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중에 영의정 이름이 박승종 <->박승동 왔다갔다하는 것 같습니다.

WR
2018-12-09 19:29:48

아 맞네요. 빠른 수정 들어가겠습니다.

1
2018-12-09 19:30:42

조선 최고의 키보드 워리어 윤선도의 등장이군요 정충신 등을 통해 계속 외부 정세를 파악하고자 한 의도는 좋았지만, 정작 문제였던 전후 복구 사업에서 민생을 너무 무시했지 싶습니다. 그리고 인조 정권이 어떤 사상적 구심점이 없어 계속 흔들린 이유도 알겠고요.

WR
2018-12-09 19:32:46

처음에는 그저 문학에서 나오는 인물로만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물입니다.

대북과 이이첨을 때린 것도 모자라, 서인 정권도 가차없이 때린 최고의 키보드 워리어.....

Updated at 2018-12-09 19:36:19

그래서, 결국 정치도 사람의 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다만 그 정치의 결과는 너무도 많은 다른 사람들이 진다는 게 슬픕니다.
인조편은... 제가 차마 못 볼 수도 있겠습니다

WR
1
2018-12-09 19:42:53

세습제에서 선출제로 바뀌었는데도, 언제나 참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정치의 결과가 너무도 많은 다른 사람들이 진다는 말이 정말 와닿네요.

2018-12-09 21:00:53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1
2018-12-09 21:41:58

세자로서는 최고였으나 임금으로는 최악이었죠. 그런대 드라마 영화로 너무 띄우는 바람에 정치논리로 희생된 비운의 군주로 추앙 받는걸 보면 다시한번 제대로 된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낍니다.

2018-12-10 08:35:04

와....글쓴이께서 뽑으신 최악의 임금 TOP3가

명말청초이자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는, 동아시아 최대 혼돈의 시기에

3연속으로 등장하는 건가요?

3연벙도 아니고 이건 너무하네요~

2018-12-11 08:36:08

노산군일기,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는 사실 좀 걸러봐야하지않나싶어요. 쿠테타 일으키는 쪽이 뭐 좋게 쓰겠습니까. 중립외교도 의리없고 박쥐같다고 남겨놓았을지도 모르죠.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