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최악의 임금들 6-1(능양군 인조)
오랜만에 글을 적어 봅니다.
인조(능양군)는 개인적으로 제가 뽑는 조선사 최악의 임금 TOP로
연산군과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투톱을 달리는 인물입니다.
제 이전 연재 시리즈인 광해군 시리즈와 병자호란 시리즈에 적은 내용도
많아, 그 부분은 간략하게 정리 하였습니다.
1. 능양군, 왕이 되다
인조는 15대 임금인 광해군을 몰아내고(인조반정) 조선의 1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의 5남인 정원군으로, 따라서 광해군과 인조는 삼촌과 조카의 관계였죠.
그러나 훗날 인조가 되는 왕자 능양군은 삼촌 광해군을 증오했는데, 자신의 아버지인 정원군이
인경궁을 증축하려는 광해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살던 집을 빼앗기고 이후 사망한데다 자신의
동생이던 능창군이 역모 사건에 휘말려 자살하면서 아버지와 형제를 모두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능양군은 복수의 칼을 갈면서 기회를 엿보았고, 이전에 반정으로 왕이 되었던 중종과는 달리
본인 스스로 반정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구굉, 김류, 신경진 등 반정 세력을 불려 나갔습니다.
유능한 지휘관이던 이괄을 포섭하고 궁궐 수비대장을 끌어들이는 등 반정을 진행해 나가던
능양군은 여러 차례 반정이 발각될 위기가 있었으나 당시 임금인 광해군의 방심과 운이 겹치며
반정을 성공시켰고 광해군은 폐위되어 조선의 임금 자리는 공석이 됩니다.
이 와중에 북인 잔당들의 반란 기도가 발생하고 곧바로 진압 되었는데,
이들은 인조의 즉위 과정에 명분이 없음을 주장합니다.
내용이 마땅히 먼저 서궁에 갇혀있던 소성대비를 받든 후그 명에 따라 임금을 정해야 하는데
금상(今上)은 스스로 왕위를 취했으니 옳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서궁에 유폐되었다 풀려난 소성대비는 광해군을 갈갈이 찢어죽여 살점을 가져와야 할 것이라며길길이 날뛰었으나 능양군과 반정공신들은 이를 극구 만류하며 임금을 폐하여도 주살하는
경우는 없다며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진정시켜 이를 철회하도록 만듭니다.
그 후 능양군은 왕위에 오른 뒤, 정식으로 명나라에 책봉을 받는 절차를 진행하게 됩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 임금이 충순(忠順)한데 왜 폐위시켰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중립외교로 비판을 받았으나 당시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여전히 충실하게 수행
하고 있었고, 때문에 반정으로 왕을 폐위한 인조의 사신단들은 명나라 신료들의 눈초리
및 박대를 당했습니다. 때문에 인조는 즉위 이후 22개월, 약 2년간 고명과 책인을
받지 못하여 정식으로 책봉 절차를 밟지 못했고 이는 정통성에 치명타였습니다.
때문에 인조와 조선 조정에서는 명의 고위 관료 및 수뇌부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거액의
뇌물을 사용해야 하였으며 이 와중에 가도에 주둔한 암덩어리 모문룡에게마저 도움을
요청하여 어떻게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는데 여기서 문제는 쓴 비용이 광해군 당시
명나라에 접대를 위해 사용했던 은의 총량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양이었고,
좋은 구실을 잡은 양아치 모문룡은 이를 이용하여 조선 조정에 끊임없는 갑질을 시전하며
북방에서 엄청난 행패를 부리는데 이를 막을 방도가 없어지게 되고 맙니다.
인조는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책봉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시작부터 순탄치
않던 인조는 외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내부의 문제도 맞이해야 했습니다. 반정 이후
논공행상으로 인해 촉발된, 이괄의 난이었습니다.
2. 이괄의 난
본래 인조반정 당시, 총대장을 맡기로 결정된 것은 김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류는
거사 당일 지각했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던 반정군은 유능한 장군이었던 이괄을
총대장으로 삼아 궁궐로 진격, 반정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반정을 성공시킨
이괄은 2등 공신에 한성 판윤을 제수받았고, 주요 공신들이 정승 판서 자리를 차지한 것을
본 이괄은 논공행상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 자리로 내쳤는데, 이괄은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쫓겨 가면서 본인을 모함한
공신들이 추가적으로 위해를 가할 것을 우려하여 병마절도사 직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이괄은 평안도 병마절도사이자 부원수로, 사실상 조선의 북방군을 총괄하는 직위에 있었는데
군권을 쥔 이괄이 공신들은 찜찜했으나 그가 성실하게 직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쫓아낼 명분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남은 대북과 소북의 무리를 숙청하던 서인 공신들은 이괄의
아들이 연루되었다는 것을 이용하여 이괄의 아들을 역모로 몰아 하옥한 뒤 이괄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는데, 금부도사가 본인을 잡으러 오자 이괄은 분노하여 금부도사를 죽인 후
그대로 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순식간에 안주, 평양, 황주, 개성을 함락시킨 뒤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쳤고 이괄은 그대로 한양에 입성합니다.
조선 역사상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수도 한성이 함락된 것은 이괄의 난이 유일무이하며,
이괄이 가진 군대는 조선의 북방 수비를 담당하는 정예군이었습니다. 도원수 장만이
경기도 광주에서 이괄의 군대를 대파하고 이괄이 부하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하며 난은
진압되었으나, 조선 북방 수비의 핵심이던 평안도 정예군이 이 난으로 인하여 사실상
와해되면서, 조선은 이후에 다가올 재앙을 대비할 방도를 잃고 맙니다.
3. 다가오는 재앙
오랑캐의 추장(누르하치)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
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 인조실록(인조 2년 3월 14일)
이는 집권 초기 인조가 당시 조선의 북방을 책임지던 장군들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한 발언으로, 인조가 당시 조선의 군사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누르하치의 후금 군대가 얼마나 강성한지도 파악이 덜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정충신과 남이흥을 비롯한 조선의 북방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명장들이었고, 그들이 상황을 브리핑하였음에도 저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저 발언이 나온 시기는, 이괄의 난으로 인해 북방군이 증발한 상황이라는 점.....
애초에 반정 명분이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었던 만큼
인조 정권은 후금에 대한 적개심을 강조해야 정당성이 확보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후금 적대 정책은 명과의 사생결단을 낼 각오로 싸우고 있던 후금의
불안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고, 재앙의 불길은 그렇게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6-2 에서 본격적으로 극딜을 때려 박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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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선조에서 능력을 뺀게 인조인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