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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최악의 임금들 5-2 광해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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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10-16 15:41:56

 

취준중에 쓰다보니, 너무 자세하게 쓰는 것은 생략했습니다.

다음 내용은 한참 뒤에나 적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피에 피를 부르는 옥

 

광해군은 명백하게 왕위에 즉위할 정통성을 가졌고, 백성들과 신하들 역시 모두 이를 인정하며

그의 즉위에 힘을 실었기에 선조가 승하한 이후 분쟁없이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즉위를 반대한 세력은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 일부 뿐이었기에, 광해군은 서인, 남인, 북인

할 것 없이 모두의 고른 지지를 받았고, 그랬기에 실권을 행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광해군은 세자시절 너무 많은 견제와 무시, 냉대를 받은 탓인지

피해의식이 강했고, 본인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의심이

많아 신하들을 믿지 못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광해군의 성향을 파악한 당시 집권 세력 북인, 특히 대북 일파에서는 이를 이용해

역모 사건을 상주하며 광해군의 불안감을 자극시킵니다. 시작은 임해군으로, 임해군이

역모를 꾸민다는 보고에 처음에는 자신의 형이 그럴 리 있겠냐는 반응을 보이는

듯한 임금이었으나, 이후 역모 사건에 대하여 묻을 것을 청하는 의견에는 심드렁하고

임해군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에는 기뻐하며 본인의 뜻을 드러냅니다.

 

임해군은 그렇게 귀양가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는데, 누가 죽였는가는 명확하지 않으나

광해군이 형을 살려줄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그래도 임해군은 워낙 행실이

노답이라 사서에 악평만이 가득하고, 동정하는 자조차 없었으며 사관조차 자업자득이라

평할 정도라 그냥저냥 넘어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역모라고 올라오는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광해군은 역모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직접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조를 비롯해 역모 사건을 친국한 왕들은 여럿 있었으나 광해군은 그 정도가 매우

심했는데, 밑에서 조사하여 위로 보고를 올릴 일임에도 본인이 직접 친국에 나서 역모에

관련된 자라면 용서하지 않고 처벌해버리는 피의 정치를 했다는 점입니다.

조선 왕가에서 친국 횟수가 가장 많은 왕이 다름 아닌 광해군이었습니다............

 

역모다 하면 친국을 통해 이를 눌러버리려는 광해군의 이런 행위는 아마도 세자 시절

자신을 위협했던 부왕을 비롯한 세력들에 대한 노이로제로 보이는데, 대부분의 역모

사건은 대부분이 과장되거나 허위로 조작된 사건임에도, 광해군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본인을 위협하는 것은 모든지 다 쳐내려고 애썼습니다.

 

이 피의 옥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억울하게 죽은 당사자도 많아

광해군의 잠재적 적들을 키워나갔습니다. 거기에, 광해군을 자극하여 옥사를 벌이게

만든 북인들은 옥사에 계속 찬동하여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고, 이를 토대로 세력을

계속 키워나가 결국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며 타 정파들을 밀어내 버립니다.

그렇게 밀려나간 서인, 남인들은 광해군과 북인에 대한 울분을 삭히며 후일을

기약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인조반정의 씨앗은 싹트고 있었습니다.

 

 2. 폐모살제

 

광해군을 비판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대목. 폐모살제는 광해군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데, 정변의 확실한 명분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서인과

남인의 명신들을 모두 날려버리며 힘의 균형이 무너져버리게 된 계기였습니다

 

선조는 광해군을 유영경 일파의 탁소북(류당)과 영창대군을 이용해 견제하며

본인의 권위를 지키려는 행위를 반복했는데, 영창대군의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유영경은 선조가 영창대군이 장성할 때까지

건강하다면 영창대군을 옹립할 꿈에 부풀어 있었고, 그렇게 자신의 일파와

함께 대놓고 영창대군을 밀었는데,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인 영창이

집권당인 대북과 세자 광해군에게 정적으로 찍히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선조는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습니다. 광해군이 전란 도중 보여줬던 능력과

인품이 워낙 출중해서 신하와 백성들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었고, 명나라에서도

공식 인정은 하지 않았으나 광해군을 세자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는 임란 도중

선조를 갈고 광해군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는 경향도 보였고, 만력제가 광해군을

칭찬한 조서에도 조선의 세자로 기록한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거기에 집권당인 북인 다수는 광해군을 절대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서인과 남인

역시 이에 동조했기에 늙고 병들었으며, 전란을 통해 강력했던 본인의 권위를

잃은 선조가 세자를 갈아치우기에는 명분도 힘도 부족했습니다.

 

그랬기에 선조는 현실적으로, 유영경 일파에게 힘을 실어준 건 광해군을 견제해

본인이 살기 위함이었으나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은 임금의 의중을 잘못 파악해

한 발 더 나가버렸고....... 선조는 현실주의자였고,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며 교활했던

만큼 이런 상황을 모를리가 없었고 이를 이용해 먹었으나, 딱 하나 본인의

건강만은 예측하지 못했고(사실 사람의 명줄을 누가 알겠습니까마는........)

 

 결국 죽음을 앞두고 선조도 자신의 행위 덕에 영창이 위험해질것을 직감했는지

광해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한편 동생과 새어머니를 잘 보살필 것을 신신당부

하면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미 정적으로 찍힌 상황에선 공염불이었습니다.

 

영창은 6살이 되던 광해군 3년(1611) 영창대군으로 봉해졌는데, 대북 일파는 잠재적

위협이 될 영창대군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유영경의 사례로 보듯, 영창대군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집권당인 본인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리기 위해

그들은 계축옥사란 사건을 일으킵니다.

 

광해군 5년(1613)에 벌어진 이 사건은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이 조령에서 은을

판매하던 상인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강도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대북에선

이를 이용해 영창대군을 제거할 계획을 꾸미고 사건을 조작하는데, 박응서에게

역모를 모의했으며, 훔친 은은 반란을 일으킬 무신들을 매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짓으로 증언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은 그렇게

영창대군을 옹립, 인목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도록 하려고 했다는 허위 사실을 고백

할것을 설득하며 대가로 박응서의 목숨을 구명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 결국 그렇게

옥사는 또다시 터졌고, 광해군은 이를 직접 친국합니다.

 

광해군이 직접 심문한 친국에서 판은 점점 커져 거짓 고변은 이어졌고, 때문에

인목대비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은 그의 세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영창대군은 죽음은 면했으나 강화도에 위리안치됩니다.

 

영의정 이덕형은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국왕이 법을 어기는 것이라며 처벌을

중지하고 자비를 베풀것을 호소하다 격노한 광해군에 의해 삭탈관직되어 쫓겨났고

이덕형은 고향 집에서 실의에 잠겨 숨을 거두면서(1613), 한음은 그렇게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고 맙니다.

 

야사에 의하면, 이덕형이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것에 이항복도 함께 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항복이 이를 거절하자 실의에 빠져 쫓겨난 뒤 사망했는데 죽어서도

뭔가 분하고 억울했는지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고, 문상을 와서 이를 보게 된

이항복이 ' 머지않아 폐모론까지 일어날텐데, 그 때 반대하다 죽는 신하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며 본인이 함께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자

그제서야 눈을 감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를 갔다가 1614년 9살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영창대군이 어떻게 죽었고, 누가 죽였는가는 그때그때마다 기록이 전부 달라서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고, 훗날 인조반정 이후 이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처벌하라는 요구를 인조도 화를 내면서 무시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조사 결과 살해되었다는 정황만은 확실하다는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광해군이 이를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분위기를 그렇게 유도했다는 것은 명백한데

귀양 간 영창을 죽이라는 빗발치는 상소에도 광해군은 본인이 직접 피를 보면서

악명을 얻기는 싫었는지 이를 받지 않고 방치했으나, 아래에서 알아서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처리하도록 만들었는데................

 

영창대군을 죽이자는 이정표의 권유를 거부한 별장 홍유의가 교체되고, 강화 부사 기협은

'강화 수령으로 있을 때 역적 의를 비호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며, 음식 공급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다' 는 이유로 파직되어 쫓겨난 것으로 보아 광해군의 의도는

분명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광해군은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를 섬에 귀양보내 죽게 만든 것은 과인의

잘못이 너무 크다며 본인을 탓하고, 눈물을 보이며 대군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명하는데,

이는 분명, 악어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잠재적 위협이 될 영창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광해군과 대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선조의 전 왕비이자 광해군의 새어머니

소성대비(옛 인목왕후, 인목대비는 널리 알려진 잘못된 명칭이고 인목왕후나

소성대비가 옳은 표현이지만, 편의상 널리 알려진 인목대비로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했는데,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했으며 이를 뒤엎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그녀의 가족이 모두 도륙나는 참사를 겪은 상태였습니다.

 

대북은 폐모론을 주장하는데, 광해군은 자신의 뜻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았으나 행동을

통해 또다시 졸렬하게 본인의 뜻을 펼치는데, 겉으로는 북인의 폐모론에 반대하면서

신하들 중 폐모론에 반대하는 자는 귀양 보내고, 찬성하는 자는 힘을 실어주는

행동을 하는데 자연스레 찬성파인 대북에게 힘이 실리게 되었고................

 

위에 나온 야사처럼, 폐모론에 가장 강경하게 반대를 표명한 사람은 당시 서인 일파의

거두이자 병조판서를 여러 번 역임하여 조선의 군사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했으며

영의정도 지냈던 오성 이항복이었습니다. 그러자 대북은 이항복을 모함하며 공격해

실각시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당시 나이로 60이 넘은 고령에 중풍까지

앓고 있던 그에게 험하디 험하며 추운 북청으로의 유배는 사실상 죽으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고, 결국 오성 역시 유배 간 지 5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했고.......

이원익 역시 이에 반대하다 홍천으로 유배를 가버리면서 남인과 서인을 대표하던

명신이자 중추 대신들이 대부분 밀려나가고 대북이 정권을 완벽히 장악하게 됩니다.

 

 <sub>

 이항복은 당시 서인의 핵심으로, 그의 문하에는 정충신, 김류, 최명길, 이시백 등

광해군의 북방외교의 핵심 인물이던 정충신은 물론, 훗날 인조 시기 중신이 되는

신료 다수가 포진해 있었던 만큼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가진 대신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인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영의정만 무려 네 명을

배출했으며, 그의 직계 10대손은 6형제인데, 모두 독립 운동에 힘쓰다 다섯 분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한명만이 외롭게 돌아와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눈치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장남 이건영, 차남 이석영, 삼남 이철영, 사남 이회영, 오남 이시영, 육남 이호영

조선 최고의 명문가라는 평판을 더럽히지 않고, 국내 최고의 부자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마저 포기한 채, 망한 본인들의 조국을 위해 사명과 의무를

다하다가 쓰러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자 영웅들.

과연 그 시조에 그 후손이라 할만한 진정한 명문가의 사나이들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반대의견을 표하던 중요 대신들이 모두 밀려난 상황에서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폐모론에 반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광해군은 명분을 위해 폐모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의견을 묻기 위한 투표를 통해 의견을 물었으나 이미 대신들이 날아가는 분위기에

대북 일파의 여론 조작이 더해지자 결과는 사실상 정해진 것과 똑같았습니다.

 

폐모론이 다수가 나오자 인목대비는 서궁(현 덕수궁)에 본인의 딸 정명공주와

함께 유폐되었고, 광해군은 어머니를 가두었으나 본인이 스스로 이를 행하지는

않겠다는 듯 조서를 내려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기에 명백하게는

'폐모' 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상 그런 것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 폐모살제가 문제가 된 것은, 당시 유교 사상이 뿌리박힌 조선에선 있을 수가

없었던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임해군의 경우 워낙 악평이 높아 죽이는 이유가 석연찮고 의아한 과정을 거쳐

죽었지만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었기에 그냥저냥 넘어갔지만........

영창대군의 경우 부왕의 유언을 무시하고 어린 아이를 사실상 죽게끔 유도하여

살해되도록 방치하였지만 전왕인 세조나 중종도 그랬고, 후에 영조나 정조도

그랬던 만큼 자신의 왕족 친지를 죽이는 일은 있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으나

 

어머니를 폐한다는 것은 지금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당시에는 '패륜' 그 자체였고, 엄청난 무리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북인을 제외한 신하들이 전부 반대하는 걸 쳐내면서까지 이를 시행했는데........

이 때문에, 북인이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해버리고 타 정파들은 밀려나며

광해군은 완전히 고립되고 맙니다.

 

아버지인 선조가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내치에는 유능했던 것은, 신하들을

골고루 배치하는 한편 서로 견제시키고, 너무 컸다 하면 당파를 숙청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본인의 왕권을 유지하고 신하들 간 힘의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인데

 

광해군은 자신의 뜻에 찬동하는 대북 일파에 힘을 실어주면서 대북이 정권을

장악했고,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같은 명망높은 대신들이 모두 쫓겨나면서

막나가는 대북을 견제할 세력도 없어져 버렸으며 때문에 북인으로 완벽하게

장악된 정권에서 광해군은 오히려 자신의 권위와 힘이 약해졌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권위와 힘을 지키기 위해 폐모살제를 행하고 반대파

대신들을 쫓아냈지만, 오히려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 대신들의 파워가 너무

강해져 본인조차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나아가 버리기 시작합니다.

 

광해군은 실제로 이 때문에 이이첨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전에는

그리 돈독하던 이이첨과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고, 의심병은 한층

더 진화하며 대북조차 믿지 못하게 되는 지경으로 점점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광해군은 자신이 누구보다 신임한

상궁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는데, 그 상궁이 바로 광해군하면 등장하는

이이첨, 대북, 폐모살제, 중립외교, 대동법과 함께 중요한 키워드인

상궁 '김개시' 였고, 김개시는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전횡을 부리며

더더욱 상황을 악화일로로 몰고 가버리면서 광해군은 훗날 다가오게 될

최악의 파국을 맞이하게 되고 맙니다.

 

아버지인 선조에 비해 너무나 형편없는 용인술.

사람을 쓰는 것에서 광해군은 낙제점에 가까웠습니다.

 

자신의 불우한 세자시절에서 비롯된 피해의식과 불안감, 그리고 쌓아왔던 울분은

자신의 자리와 권위를 사수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바뀌어갔고 그는 점점 그렇게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람을 쓰고 부리며 이용하고 버리는 것에 능했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본인의 뜻에 찬동하는 대북에게 힘을 몰아주며 본인은 손대지 않고

뜻을 이뤄내는가 했으나 괴물이 되어버린 북인에게 먹히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을 파국으로 몰고 가게 된 원인 중 하나인 대북은

어떤 조직이었는지 간단하게 보면.......................

 

3. 북인과 삼창

 

북인은 원래 동인 출신으로, 동인 중 강경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조와 정철의 합작품인 기축옥사 사건 당시 동인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밀려난 뒤

후의 대처에서 우리도 똑같이 돌려주자는 강경파(북인)와 피해는 입었지만 조용히

후일을 기약하자(남인)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져 당파가 갈렸는데, 초기

북인의 영수는 아계 이산해였고, 남인의 영수는 서애 류성룡이었습니다.

 

북인은 임란 도중 의병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당파로, 임란 말기 류성룡이 이제는

일본과 화의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 그를 맹렬히 탄핵하여 실각시키며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 선두에 선 것은 정인홍으로,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자 의병장이던

그는 강직하고 배타적인 성품으로 유명했고, 북인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서인은 정철, 성혼, 윤두수를 비롯한 중추적 역활을 하던 대신들이 차례대로 사망하며

이항복을 제외하면 중심에 나설만한 사람이 부족했고, 남인은 이덕형과 이원익같은

중추 대신들이 남아 있었으나 이들은 당색이 옅었고, 류성룡이 탄핵된 이후

남인 내부에서도 이를 두고 화평을 구걸했다며 내분이 벌어지며 제정상이

아닌 상태였습니다.

 

북인은 정권을 잡았으나 영창대군 문제로 갈라지는데,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뉘었으며, 소북에서도 영창대군 옹립을 강하게 민

유영경 일파(탁소북)과 그래도 광해군에 우호적인 편인 청소북으로 나뉘었습니다.

 

광해군 즉위 후, 교지를 집에 숨기며 왕실을 능멸한 것이 발각된 유영경은 숙청되었고

유영경을 따르던 탁소북 역시 정리되었습니다. 그 후 영의정에는 남인이지만 계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며,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한 오리 이원익이 임명됩니다.

 

이원익 후의 영의정으로는 역시 남인인 한음 이덕형이 임명되지만, 실질적인 정권은

북인이 주도하였는데, 의외로 광해군 초기 정국을 주도했던건 소북이었습니다.

유영경의 탁소북이 숙청된 이후 실권을 잡은 것은 청소북의 영수이던 유희분

이었는데, 유희분은 소북이었지만 광해군의 처남이었기에 문창 부원군

이라 불렸고, 남인계열과 함께 광해군 초기 정국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대북은 광해군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며 내부에 응어리진

그의 성장 과정에서 쌓였던 의심병과 울화를 계속 충동질했습니다. 끊임없는 옥사가

이어지며 옥사에 찬동한 대북은 광해군의 신임을 얻고 계속 성장했으며, 그들은

그렇게 정권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선 자가 바로 이이첨이었습니다.

 

이이첨. 광해군을 이야기할 때 빼먹을 수 없는, 대북의 아이콘이자 유명한 권신.

이이첨은 원래 간신과는 거리가 먼 민생을 염려하던 몰락 가문의 선비였습니다.

그는 무오사화 사건을 일으킨 이극돈의 5대손이었는데, 갑자사화 당시 집안이

몰락하고, 본인은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 어디에도 줄을 대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이첨은 대북의 정신적 거두인 정인홍을 찾아가 그의 신뢰를 얻어내며

지지를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인홍이 경상남도에 있던 선조 말기의 기간동안

조정에서 대북을 이끄는 행동대장으로 있으며 광해군과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어갑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이이첨은 광해군이 전면에 나서기 꺼려하는 태도를 가졌음에도

불안한 즉위 기반 때문에 반역을 경계하는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계속해서 역모 사건을 일으키며 정권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역모사건 주장- 광해군 처벌 반대- 이이첨 대북파와 상소- 광해군 반대- 이이첨 더

강경하게 나감- 광해군 처벌 허용- 이이첨 더 강경한 조치 요구- 광해군 수용..........

 이 패턴이 이어지며 이이첨은 조정 내 실세로 자리잡았고, 영창대군과 인조의 형제인

능창군을 이렇게 몰아서 죽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것 역시 이이첨이엇습니다.

 

남인과 소북 위주로 돌아가던 정권이 대북 위주로 붕괴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영창대군과 인목왕후의 처리 문제였는데, 영창대군을 사사하는 것에 반대하다

영의정 이덕형이 날아가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것에 반대하다 서인의 중추인

이항복과 전 영의정 이원익이 함께 날아가면서, 조정은 북인 위주로 재편됩니다.

 

영의정에 기자헌, 좌의정에 정인홍이 임명되며 본격적인 대북 정권이 열렸지만,

기자헌은 대북이면서도 인목대비 폐비에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이었고

이는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에게 공격받을 빌미를 제공, 결국 물러나게 되면서

영의정에 박승종이 임명되는데, 박승종은 소북 출신이지만 광해군의 사돈인 동시에

(손녀딸이 광해군의 세자빈) 이이첨의 사돈이었습니다(장남이 이이첨의 딸과 결혼)

 

그렇게 조정은 삼창이라 불리는 세 명의 부원군이 잡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광창부원군 이이첨(예조 판서 겸 대제학), 문창부원군 유희분(대사간-도승지)

밀창부원군 박승종(대제학-정승) 세 사람을 묶어 삼창이라 불렀습니다.

 

 박승종은 소북, 그 중에서도 탁소북 출신이었으나 청소북의 유희분과 손을 잡고

유영경 일파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광해군의 세자빈 책봉 당시 대북과 소북의 타협으로

평판이 좋고, 온건파여서 분란을 일으킬 여지가 적은데다 본인 역시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유명해 다루기 쉽다고 판단되어 그의 손녀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렇게 광해군과 이이첨 양쪽의 사돈이면서, 우유부단한 박승종이 영의정이 되어

대북은 기쁨에 넘쳤습니다.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 일파는 그렇게 본인들이

정권을 쥐고 쉽게 흔들 것이라 생각했고, 누가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변이 벌어집니다. 우유부단이란 가면에 숨겨진, 박승종의

본 모습을 대북은 이때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내용이 너무 길어져 광해군의 마지막 이야기는 5-3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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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8-10-06 06:23:04

너무 재밌어서 밤새 시리즈 다읽었내요. 필력 대단하십니다

2018-10-06 11:22:09

너무 흥미로워서 읽고 또 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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