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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무장이야기. 가모 우지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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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01-25 13:55:06

1. 기린아, 노부나가의 사위가 되다.

 

<가모 우지사토의 초상화>

 

가모 우지사토의 가모 가문은 롯카쿠 가문의 중신으로서, 특히 할아버지 사다히데의 경우, 롯카쿠 가문의 내분도 조정하고, 주군인 롯카쿠 요시카타에게 돈을 빌려주는 등 가문 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1568, 가모 가문이 섬기던 롯카쿠 가문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불세출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가 쇼군을 모시고 상경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우미*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롯카쿠 가문이었지만 노부나가의 상승세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롯카쿠 요시카타는 자신의 거성이었던 칸논지 성(観音寺城)을 버리고 도주하게 됩니다.

 

*지금의 시가현

 

우지사토의 할아버지였던 사다히데와 카타히데는 이런 상황에서도 노부나가에 대한 항전을 결심했고, 농성을 준비하게 됩니다. 노부나가는 이런 둘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을 섬길 것을 권유했고, 이에 카타히데는 13살의 어린 아들 우지사토를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내고 복속했습니다.

노부나가의 인질이 된 우지사토. 인질의 신분에 불과했지만 능력자는 능력자를 알아보는 것일까요? 마치 10여 년 전 자신의 집에 인질로 납치돼 끌려 왔던 시골 출신 아이*를 엄청나게 아꼈던 것처럼 어린 우지사토 역시 매우 아꼈습니다. 노부나가는 우지사토를 아예 자신의 사위로 삼고 자신이 직접 관례까지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우지사토는 자신의 장인어른을 따라 어린 나이부터 여기저기서 활약을 이어갑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고작 13살에 관례를 치룬 우지사토. 그리고 이 관례와 함께 장인의 기타바타케 공략에서 첫 출진을 장식하게 됩니다. 이후 노부나가의 큰 전투마다 종군하며 활약합니다. 1570년의 아네가와 전투, 1573년의 아사쿠라 공격과 오다니성 공격*, 그리고 1574년의 이세 나가시마 공격과 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까지... 우지사토는 고작 20, 정말 어린 나이에 장인의 가장 큰 전투들에서 공훈을 세운 것입니다. 이런 활약에 우지사토에게는 기린아라는 명예로운 별명이 생겼고, 오다가 일문의 한 축이 됐습니다.

그러나 우지사토가 28(동갑내기야 축하한다...)이 된 1583, 자신이 존경해마지않던 자신의 장인,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목숨을 잃게 됐습니다. 우지사토는 우선 장인의 거성이었던 아즈치성(安土城)을 지키며 장인의 처자식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인 카타히데와 함께 자신의 성에 돌아가 노부나가를 배신한 아케치 미츠히데와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미츠히데 또한 엄청난 속도로 회군한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하고 도망가던 중 농민들에게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아자이 나가마사 편 참고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172849&sca=&sfl=wr_subject&stx=%EB%82%98%EA%B0%80%EB%A7%88%EC%82%AC&sop=and&scrap_mode=*

 

* 다케다 카츠요리 편 참고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153606&sca=&sfl=wr_subject&stx=%EC%B9%B4%EC%B8%A0%EC%9A%94%EB%A6%AC&sop=and&scrap_mode=

 

 

2. 너무 일찍 져버린 기린아의 꿈

 

역적 미츠히데를 제압한 히데요시. 오다 가문 내에서 히데요시의 발언권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그리고 우지사토는 노부나가의 뜻을 계승한 히데요시를 따랐습니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부터 키슈 정벌, 규슈 정벌과 오다와라 정벌까지 이번에도 히데요시의 정복 사업마다 종군하면서 계속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오슈 정벌의 결과로 1590, 우지사토는 히데요시에게 아이즈* 42만 석의 거대한 영지를 부여받게 됩니다. 대영주가 된 우지사토. 42만 석을 다스리는 우지사토의 나이는 이제 35였습니다. 여기에 계속 추가로 영지를 받고, 토지 정리와 개간 등으로 그 영지의 규모를 42만 석에서 무려 92만 석*의 거대한 영지로 성장시키게 됩니다.

 

*지금의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

*보통 10000석 당 250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으니, 거의 20000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실제 석고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 그리고 모리 데루모토 등 거대영주들 다음 수준

 

<우지사토가 개축한 아이즈의 츠루가성>

 

자신의 영지에 상인을 모으고, 수공업도 장려하는 등 영지 개발을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던 우지사토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상황을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집니다.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우지사토는 아이즈의 거대한 영지를 받게 된 후 비록 큰 영지더라도 이곳과 같은 시골에서는 나의 꿈을 펼칠 수가 없다. 작더라도 수도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천하를 노려볼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부터 천재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던 우지사토의 꿈 또한 고작(...) 대영주가 아닌 천하를 다스리는 천하인이었던 거죠.

어느 날, 히데요시를 이어 천하를 다스릴 사람이 누구일까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우지사토는 거침없이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자리에선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 나중에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히데요시의 친구이자 당대 NO.3였던 마에다 도시이에 등이 거론되었다고 합니다. 히데요시의 조카 히데츠구에 대해선 그런 멍청이를 따를 사람이 없다.”, 이에야스에 대해선 쪼잔해서 천하를 다스릴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마에다 도시이에에 대해선 그 분은 늙어서 어려울 것이다.라고 세 사람에게 무참한 팩트폭격을 가한 뒤 만약 그들이 천하를 얻지 못한다면, 내가 얻어야겠다.라고(!!!) 스스로를 자신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가모 우지사토는 본인의 수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에 걸맞는 천하인의 사위라는 엄청난 배경과 본인의 타고난 능력까지. 사실상 로열로더로서의 자격을 완벽하게 갖췄던 가모 우지사토였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1592, 조선으로의 출병을 위해(네 임진왜란입니다.) 전진기지였던 히젠 나고야 성(名護屋城, 주의 : 주니치 드래곤즈의 연고지가 있는 나고야 아닙니다.)에서 진을 치고 있던 중 우지사토는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1년 후 영지로 돌아가 요양했지만, 결국 병을 떨쳐내지 못한 우지사토. 천재는 요절한다고 했나요? 우지사토 역시 다른 사람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할 40세의 나이로 장인의 곁으로 떠나게 됩니다.

 

  

3. 만능캐 가모 우지사토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의 우지사토>

 

우지사토가 인질로서 노부나가를 섬기고 있던 시절의 일화입니다. 13살 어린 나이로 노부나가를 따르게 된 우지사토는 시동으로서 노부나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부나가는 중신이었던 이나바 잇테츠와 함께 시동들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합니다. 밤이 늦도록 이어지는 옛날이야기에 다른 시동들은 점점 졸거나 지루해했지만, 우지사토만큼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그것을 전부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우지사토의 모습에 노부나가와 잇테츠는 저 녀석 100만 석의 다이묘가 될 듯?”이라며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지사토가 죽기 직전 다스리던 영지는 92만 석이었으니... 노부나가 성지력 무엇..?

 

불지 않아도 꽃은 질 것을, 마음이 조급하구나 봄 바람이여.’

 

저는 일본 문학에 대해선 아는 게 1도 없지만 뭔가 그냥 멋있어 보이는 위의 시는 가모 우지사토가 죽기 직전 남긴 사세구라고 합니다. 이제 한창인 때에, 자신이 보기엔 충분히 천하를 노려볼만하다 여겼을 시기에 병으로 꿈을 접게 된 슬픔이 절로 느껴집니다.실제로 저 시는 일본의 많은 사세구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고 합니다. 시에 능했던 우지사토는 다도인으로서도 매우 유명했다고 합니다.그 유명한 리큐 칠철의 하나로, 그중에서도 필두로 뽑혔다고 하니까요. 시와 다도. 전투 뿐 아니라 풍류 역시도 즐길 줄 아는 우지사토는, 어쩌면 노부나가의 아들들보다도 오다 노부나가를 닮은 사람이었지 싶습니다.

 

그리고 노부나가보다 성품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인에 가깝습니다.리얼 생또X로 유명했고 또 그런 인성갑들을 좋아했던 노부나가와 달리, 우지사토는 여러 다이묘들에게도 인망이 두터웠으며 가신들을 끔찍이 아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가신이 공을 세웠지만 봉록으로 그 공을 치하할 수 없을 때는 자신의 자택으로 그 가신을 불러 목욕물을 직접 지펴가며 목욕시켜주고 대접했다고 하니 가신들은 그런 우지사토의 진심 어린 태도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겠습니다. 여기에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온 자객*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며 본국에 보내준 훌륭한 인격과 관련한 이야기까지 남아있습니다.

 

*자객을 보낸 것은 전국시대 4대 인성 파탄자 중 하나인 다테 마사무네

 

<가모 우지사토가 입던 갑주. 투구가 유명하다>

 

우지사토의 훌륭한 인격은 그 리더쉽에서도 나타납니다. 우지사토는 전투에서 항상 자신의 메기꼬리 투구를 쓰고 선두에서 서서 분전했다고 합니다. 보통 이 시기의 영주들은 군영에 앉아 지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지사토는 자신이 앞장서서 안전을 확인시켜줄 때 가신이 따라올 수 있다.’며 최전선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봉록과 충성은 두 바퀴와 같다며 가신들을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아이즈로 영지를 옮긴 후 우지사토는 가신들에게 봉록 인상을 원할 경우 서면을 제출하라 명했습니다. 당연히 그 시기 또한 돈이 제일 중요한 시기. 가신들은 앞다투어 가증을 원했고, 이 요구를 전부 들어줄 경우 100만 석을 넘게 됐습니다. 이에 가로들은 무리라며 우지사토를 말렸지만, 우지사토는 태연하게 괜찮다. 가신들을 위해서니 어떻게든 마련하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가신들 역시 당연히 우지사토의 진심을 깨닫고 감동을 받은 채 자신의 가증을 포기했고요. 물론 우지사토는 그런 거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을 무려 9만 석이나 깎고 최대한 가신들이 원하는만큼 줬다는 후일담입니다.

 

*오다 노부나가 또한 최전선에서 싸운 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의 우지사토. 메기꼬리 투구를 썼음>

 

물론 과장도 있을 테고, 허구도 섞였을지 모르지만 가모 우지사토의 여러 가지 미담들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실천하는 리더쉽의 전형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한 높은 자존감과 긍지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 또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전국시대 무장 열전 간사이-긴키편의 마지막 주인공, 가모 우지사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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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2018-01-25 12:51:37

 가모가 주인공인 글을 보는 순간 외눈 녀석은 오늘 또 까이겠구나 싶었습니다

WR
Updated at 2018-01-25 13:42:05

부족한 글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그래도 다테 마사무네가 한 행동은 언급안했으니까요 아무래도 다음 관동 챕터에서 다루긴 다뤄야 할 것 같아요. 하도 까다보니 정이 생겨서 비슷한 이유로 큐슈편에서 어떤 미쳐도 단단히 미친 X 한명 다뤄볼까 합니다.

2
2018-01-25 12:55:37

 기린아 메기투구 군요! 확실히 이에야스가 평소에도 기름불도 아끼고 화장지 일화도 있고 쪼잔한 구석이 있긴한데 대신 수명과 인내심이 있었으니 결국 천하를 잡았죠.  안타깝게도 우지사토에겐 없었던 수명이었으니..

WR
1
2018-01-25 13:41:27

부족한 글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봉록도 짜게주고 짠돌이긴 했어도 능력도 있고, 그만큼 숨길줄도 인았겠죠. 우지사토는 사후 가모 집안이 겪는 고통도 그렇고 많이 안타깝습니다.

2
Updated at 2018-01-25 13:43:51

히데요시가 우지사토가 불만을 품지 않을 정도에 큰 영지를 주고 시골로 쫒아 낸것에 대해 

정말 머리가 잘 돌아 가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WR
2
Updated at 2018-01-25 14:09:44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맞습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분명 동생이 죽기 전까지의 히데요시는 보통 머리가 아닙니다. 비슷한 시점에 이에야스도 무려 200만 석이나 주고 관동으로 보내버렸거든요.
우지사토 케이스는 단순히 보낸 것 뿐 아니라 모가미-다테 등 히데요시가 견제하던 세력의 대비 역할까지 맡겼으니까요. 여기에 우에스기로 가모를 감시하고, 다시 우에스기는 마에다로 감시. 이에야스는 자신의 가신들을 옛 이에야스의 영지에 배치시켜서 견제.</p>
<p>비슷하게 거대한 영지와 가문 내 결속력을 자랑했던 모리 가문은 쪼개버렸습니다. 모리 집안은 모리 본가를 깃카와-고바야카와의 두 분가가 지탱하는 체제였는데, 아예 고바야카와에게 시코쿠나 큐슈에 엄청난 영지를 주면서 이 체제를 끝내버렸습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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