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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열전 4. <위대했던 호랑이의 용맹한 아들, 다케다 카츠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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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12-11 20:38:19

안녕하세요.

저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항상 아버지를 동경해왔기 때문인지 오늘의 글을 쓰면서는 자꾸 감정을 이입하게 됐습니다. 이에 분량 조절도 잘 안됐고(한두번 일도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견해를 개입시킨 것이 아닌가 불안하네요

 

 

1.들어가며

 

<카츠요리의 초상화>

 

지난 글에서 위대한 양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대해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동시대 또 한 명이 위대한 아버지를 잇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갑양군감*에서 너무 강한 대장으로 평가받고, 적인 오다 노부나가 조차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능력에 대해 칭찬했던 호랑이의 아들. 그러나 카게무샤’*를 비롯한 많은 매체에서는 위대한 아버지의 열폭덩어리 아들로 나오는 존재다케다 시로 카츠요리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카게무샤 :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다케다 배경의 명작 영화

 

 

2.신겐의 후계자

 

스와(다케다) 시로 카츠요리는 다케다 신겐*4남이었습니다. 사실 맏형이 건재한 상황에서 카츠요리는 다케다의 성이 아닌 외가 스와 성을 쓰는 등 후계구도와 무관했습니다. 16세가 되던 1562, 카츠요리는 시나노 이나군의 군다이*로 임명되었고, 남시나노의 거점인 다카토성의 성주가 됩니다. 그리고 1년 후인 1563년의 고즈케의 미노와성 공격(또는 무사시 마츠야마성 공격)으로 생애 첫 출진 이후 꾸준히 아버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다케다-호조-이마가와 3국 동맹>

 

당시의 다케다는 호조, 그리고 이마가와와 각각 혼인을 맺고 오랜 기간 동맹 중에 있었습니다.* 동맹을 통해 다케다는 북쪽을, 호조는 동쪽을, 그리고 이마가와는 서쪽을 각각 노렸습니다. 이 때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1560, 이마가와가의 당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대군을 이끌고 상락*을 진행하던 중 오케하자마에서 당시엔 듣보잡 루키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 공격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이후 명문 이마가와를 이은 것은 요시모토의 무능한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였습니다. 한편 다케다 신겐은 북쪽 진출 과정에서 우에스기 마사토라(겐신)이라는 강력한 적을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이마가와의 영지였던 신겐이 그토록 바라던 바다를 접하고 있었고, 풍족한 땅이었습니다. 이에 신겐은 동맹이자 사돈인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스루가를 지배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반면 카츠요리의 맏형이자 신겐의 후계자였던 다케다 요시노부는 이 결정에 대해 반발하고 대립했습니다.결국 1565, 마치 신겐이 그랬던 것처럼 요시노부가 아버지를 쫓아내고자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자결합니다.그리고 이 쿠데타의 결과 카츠요리가 후계자로 지명된 것입니다.*

후계자 지명 후에도 여전히 카츠요리는 무공을 뽐냈습니다. 1569, 호조의 세력권이었던 무사시의 다키야마성을 공략할 때는 총대장을 맡아 최전선에서 싸우며 성곽까지 공격해 함락시켰고, 스루가 공략 중에는 호조의 이름난 무장들을 전사시키거나 적의 화살과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성문에 매달리는 등 말 그대로 전쟁터에서 날아다녔습니다.신겐의 상락 작전*에서도 부대의 대장으로 참전하여 미카타가하라 전투* 등 계속되는 전투에서 군공을 세웠지만 원정 도중 아버지 신겐이 세상을 떠납니다.

 

*다케다 신겐 : 가이의 호랑이. 라이벌 겐신과 함께 전국시대 때 손에 꼽히는 명장.

*군다이 : 郡代, 영주를 대신해서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

*호조의 딸을 이마가와의 후계자에게 보내고, 다시 이마가와의 딸은 다케다 후계자에게, 다케다의 딸은 호조의 후계자에게 보내는 혼인 동맹을 결성

*이마가와 요시모토 : 도카이도 제일의 무사로 알려진 영주로 당대에 천하인에 가장 가까운 무장이라는 평을 받았음.

*이에 대해선 상락이 아닌 오와리 방면으로의 영토 확장이 목적이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마가와 우지자네 : 축국(발로 하는 공놀이) 덕후로 철포 대신 축국 서적을 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무능했음. 성격은 나쁘지 않았다고 함.

*2남은 맹인이었으며, 3남은 어린 나이에 사망

*미카와, 미노 방면으로의 세력 확대 목적이라는 견해가 존재함

*미카타가하라 전투 : 신겐과 이에야스가 맞붙은 전투. 이에야스는 여기서 인생 최악의 패전을 겪었고 두려움에 똥까지 싸면서 도망치게 됨.

 

 

3.나가시노 이전까지의 카츠요리

 

여러 세력에게 포위됐던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의 사망 소식 후 작전을 전개, 자신을 방해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하고, 대립하던 아자이, 아사쿠라 세력을 멸망시켰습니다. 쾌변에 성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영지 내 다케다 세력들을 포섭해나갔습니다.

 

<나가노 지역의 유명한 스키장 슬로프 지도>

 

한편 다케다의 본거지인 가이와 시나노는 각각 지금의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입니다. 모두 산지로 나가노 같은 경우는 심지어 동계올림픽까지 열렸었죠. 그만큼 눈도 많고 산도 험해 땅이 척박했습니다. 그나마 황금 광산이 많았고, 아버지 신겐 때부터 이 광산을 엄청나게 운영하여 군자금을 모을 수 있었지만 점차 광맥은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다케다 가신단은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못한 가신, 그리고 가이-시나노 지역 호족 출신들의 연합체였습니다. 이것을 다케다 신겐이 자신의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휘어잡고, 영토 확장을 통한 이권 보장을 통해 가문을 이끌어가고 있던 것입니다.* 이에 더해 오랫동안 카츠요리는 스와의 성을 써왔는데, 자신들이 지배한 스와에 대해 기본적으로 본국인 가이에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컸습니다.상황과 정통성 모두 이미 카츠요리의 지배력은 아버지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내부 장악을 위해 카츠요리는 아버지가 정복사업에 매진했습니다.

먼저 1574, 오다의 영지인 미노에서 가신 아키야마 노부토모*가 함락시켰던 이와무라성을 거점으로 침공을 시작합니다. 카츠요리의 공세는 거침없었습니다.순식간에 아케치성 등 성을 무려 18개나 함락시키고 미노 동쪽을 유린했습니다. 미노 침공 다음에는 이에야스의 영지인 미카와 북부와 도토미 동편을 공격해 도쿠가와 군을 무찔렀습니다. 결국 아버지인 신겐조차 함락시키지 못했던 도토미의 난공불락의 성, 다카텐진성도 함락시키고 자신의 지배하에 두게 됩니다.

이런 거침없는 행보에 반해 카츠요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즉 외교전이라는 카드를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아버지 신겐은 엄청나게 배신을 많이 했지만*, 항상 외교적 안전망을 확보해둔 이후에 움직였습니다. 상락을 진행할 때도 숙적 우에스기를 묶어놓기 위해 우에스기와 적대하는 일향종*과 제휴하거나, 여기에 동맹인 호조가 배반할 것을 걱정하여 호조의 적인 사토미 요시히로와 제휴를 맺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해전을 대비하여 이세나 스루가의 해적들과 교류했고요. 이렇게 신겐이 만들어놓은 다양한 외교적 채널들을 자신의 용력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카츠요리는 활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575, 미카와의 호족 오쿠다이라 사다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의지해서 카츠요리를 배반하고 카츠요리의 영지인 나가시노성을 탈취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카츠요리는 15000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시노성을 포위했고, 이에야스는 동맹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신겐의 죽음과 주변세력의 정리로 힘을 비축한 노부나가는 다케다 군과 제대로 맞붙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본인이 직접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참전합니다.

 

*센고쿠 다이묘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영지 확대를 통한 은상의 제공이 필수적

*아키야마 노부토모 : 토라시게라고도 함. 다케다 24장 중 하나로 뽑히는 중신.

*물론 계속되는 배신 때문에 다케다에 대한 타국의 신뢰가 낮은 편.

*일향종 : 불교 종파의 하나로 거듭 반란을 일으켜 영주들과 대립. 한편 이 시기 일향종 집단의 정점이었던 겐뇨의 아내는 다케다 신겐 아내의 동생으로 형님-동서 사이였음.

*수치에 대해선 이견이 있지만, 이 글에선 신장공기의 기록에 따라 기술

 

 

4.나가시노 전투

 

카츠요리는 나가시노성을 단숨에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주인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의 활약으로 함락에 자꾸 시간이 지연됐습니다. 성을 함락하지 못한 상황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38천의 대병력이 나가시노의 시타라가하라에 도착했고, 진을 구축합니다. 이에 카츠요리는 총 15000의 병력 중 3000의 병력을 나가시노성을 포위하기 위한 거점인 도비노스 산의 성채에 남겨놓고 시타라가하라로 향하게 됩니다. 야마카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후사*, 나이토 마사토요* 등 많은 중신들은 철군을 제안했습니다.

당시엔 다케다 병사 1명이 오다 병사 3명을 능가한다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전까지의 소규모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뒀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가시노 전황이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개전 전날인 520일 밤, 도쿠가와군의 사카이 타다츠구, 오다군의 카나모리 나가치카가 이끄는 4000의 병력이 은밀히 강을 건너 도비노스 산의 성채를 공격합니다. 성채의 방어는 탄탄했지만, 후방의 나가시노성에서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가 이끄는 병력까지 참전했고 결국 성채를 지키던 카츠요리의 삼촌, 카와쿠보 노부자네를 포함한 다케다 군이 몰살당했고 다케다군의 퇴로가 차단되기에 이릅니다.


<나가시노 전투 그림*>

 

결국 521, 퇴로를 차단당한 카츠요리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의 결전을 선택합니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만든 방책의 앞으로 다케다군이 돌격을 감행합니다. 8시간이나 계속된 처절한 전투의 결과는 카츠요리의 참패, 아니 다케다군의 궤멸이었습니다. 다케다군은 총 병력 15000명 중 12000명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겐을 따르며 다케다 가문을 이끌어 왔던 수많은 유력 무장들을 이 전투에서 잃게 됩니다. 다케다 군의 정예부대인 아카조나에(赤備)를 이끌던 무장 야마카타 마사카게는 온몸에 총탄을 맞아가면서도 입에 문 지휘봉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며, ‘오니 미노라는 별명과 함께 적들들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바바 노부후사도 카츠요리의 퇴로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했습니다. 사천왕의 하나인 나이토 마사토요, 하라 마사타네, 츠치야 마사츠구, 사에구사 모리토모(성채에서 전사), 그리고 마사유키의 형들인 노부츠나와 마사테루까지 다케다 24장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수많은 장수들이 전투와 퇴각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카츠요리는 불과 무사 몇 기의 호위만 받으며 비참한 꼴로 퇴각했다고 전해집니다.

 

*야마가타 마사카게 : 다케다 중신. 다케다가 사천왕의 하나. 다케다군 최정예인 아카조나에를 이끌던 무장. 7편의 주인공.

*바바 노부후사 : 다케다 중신. 다케다가 사천왕의 하나. ‘귀신 미노라 불린 맹장.

*나이토 마사토요 : 다케다 중신. 다케다가 사천왕의 하나. 신겐의 신뢰를 한 몸에 받던 부장.

*다케다 기마대, 오다의 3000정 철포 등은 후대의 창작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5.호조와의 대립

 

<카츠요리의 동상>

 

나가시노 전투 이후 다케다의 영지들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의해 공격받게 됩니다. 미카와에선 다케다 세력권을 모두 상실했으며, 미노에서는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이끄는 병력에 의해 이와무라성을 잃고, 성주였던 아키야마 노부토모는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한편 북쪽에서는 겐신이 급사했습니다. 겐신의 후계분쟁에 개입한 카츠요리는 미온적 태도를 보이다가 우에스기 카게카츠와의 화친을 결정합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호조의 계속되는 소극적 태도에 실망한 카츠요리의 결정이었다는 설도 있고, 카츠요리의 측근이 카게카츠 측의 뇌물을 받고 동맹을 서둘렀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여튼 카츠요리의 행동에 분노한 호조는 오랜 동맹을 끊고 도쿠가와와 손을 잡아 다케다의 영지인 스루가를 협공했습니다. 

이에 대해 카츠요리는 여동생인 키쿠히메를 카게카츠와 혼인하게 함으로써 우에스기와의 동맹을 결성합니다. 여기에 호조와 대립하던 사타케가, 그리고 사토미가 등과 연계하여 대항했습니다물론 이 시점에도 카츠요리는 굉장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호조 우지마사와 스루가에서 대치하는 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방을 공격하자, 재빠르게 회군하여 이에야스군을 퇴각시켰습니다. 자신들이 포위를 한 상황임에도 카츠요리의 재빠른 움직임에 호조군은 추격을 할 생각조차 못했다고 합니다.

사타케 요시시게*와의 연합작전으로는 호조의 영지였던 고즈케의 동쪽을 유린하고 젠성을 함락시키는 등 사타케와 함께 호조를 몰아붙입니다.이런 카츠요리의 계속되는 공략에 지친 호조 우지마사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라씨와 나가오씨가 사타케 측으로서 출병했다. 이대로라면 조슈는 카츠요리의 것이 되어 우리는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이 때 아내였던 오츠야노카타와 함께 처형을 당했는데, 오츠야노카타는 오다 노부나가의 숙모였습니다.

*사타케 요시시게 : 관동의 패권을 놓고 호조와 경쟁하던 히타치국의 영주로 관동 제일의 무사라고 불린 명장. 6편의 주인공.

 

 

6. 명문 다케다 후예의 최후

 

그러나 다케다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습니다.카츠요리는 다이묘 중심체제의 중앙 집권화를 목표했습니다. 하지만 호족 중심의 기존 체제에서 이는 가신단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할아버지인 노부토라가 추방당한 이유 또한 중앙 집권화였던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반발은 컸을 것입니다.

여기에 도토미의 거점인 다카텐진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 함락과정에서 성주인 오카베 모토노부는 무려 3년 동안 성을 지키며 카츠요리에게 지원 요청을 했지만, 카츠요리는 구원 병력을 보내지 않았고, 결국 성주 이하 900의 병력이 전멸했습니다. 이 카츠요리의 결정에 대해 일문*들은 더욱 반발했고, 다케다 가문의 위신이 땅으로 추락했습니다. 물론 이 당시 카츠요리의 결정에 있어서는 노부나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카츠요리는 우군인 사타케 요시시게를 통해 오다가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전혀 의미가 없었고, 가신단의 이탈을 막지 못했지만요.*

그리고 카츠요리는 장래에 발생할 수 있는 오다-도쿠가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본국인 가이에 신푸성을 새로 지어 방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군을 재편성하고자 합니다. 세력 확대 및 영지 확보를 위한 계속되는 전쟁과 군자금에 다케다 가의 경제력은 급속도로 악화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카츠요리는 가신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릴 수밖에 없었고 반발은 커져갔습니다.

1582, 신겐의 사위이자 카츠요리의 매제인 키소 요시마사가 카츠요리를 배신합니다. 분노한 카츠요리는 키소 요시마사의 장남과 어머니 등 인질들을 주살하고 그의 영지로 쳐들어갔지만 험준한 산지를 바탕으로 한 키소군의 공격에 농락당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틈타 오다-도쿠가와-호조 세 세력의 다케다 영지에 대한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의 카츠요리의 최후>

 

이 침공에 대해 저항다운 저항을 한 것은 카츠요리의 동생이었던 니시나 모리노부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 유명한 무장들은 모두 항복했고, 심지어 사촌인 아나야마 노부키미마저 자신이 다케다 가문을 잇는다는 조건으로 이에야스와 내통해 카츠요리를 배신했습니다. 결국 포위된 카츠요리는 가이를 탈출하고자 합니다. 고립무원의 카츠요리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일문이었던 오야마다 노부시게, 그리고 사나다 마사유키였습니다. 카츠요리는 오야마다 노부시게에게 갈 것을 결정했지만 오히려 그의 배신으로 도망갈 수 있는 앞길조차 막히고 말았습니다. 끈질긴 추격에 덴모쿠산으로 향한 카츠요리는 아내, 그리고 아들 노부카츠와 함께 36세의 나이로 자결하였고, 다케다 가문은 멸망하게 됩니다. 한편 이런 카츠요리의 비참한 최후를 전해들은 오다 가의 장수, 하시바 히데요시는 일본 최고의 대장인데 참으로 안타깝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주로 가신단은 일문, 후다이, 도자마로 이루어집니다. 간단하게 일문은 영주와 혈연 또는 인척 관계에 있는 집단이며, 후다이는 오랫동안 가신으로서 영주를 섬겨온 경우, 그리고 도자마는 일정 시기 이후 편입된 세력을 말합니다.

*실제로 어떤 학자는 나가시노 전투보다 호조와의 동맹 파기+다카텐진 성 포기 이 두 가지가 다케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6.마치며

 

카게무샤로 대표되는 이전까지의 미디어에서는 카츠요리에 대해 대부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둔재, 또는 무턱대고 혈기만 왕성해 다케다를 멸망시킨 장본인 등 부정적인 시각에서 그려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카츠요리에 대해 역사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를 했으며 능력 역시 보유한 것으로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나마 이와 같은 재평가의 덕분이랄지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마사유키를 위해 인질들을 풀어주는 대인배의 모습이 나타나며, 게임 전국무쌍에서도 마음씨착한 다케다의 아들로 나오는 등 최근에는 책임감이 강조가 되는 모습입니다.

 

<게임 '전국무쌍'에서의 카츠요리. 정말 순해(존재감 없어)보인다.>

 

물론 정치·외교적 감각이 아버지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개인의 카리스마나 가신들을 휘어잡는 통치력마저 아버지와 비교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츠요리가 갖고 있던 재능들, 특히 군사적 재능들은 비범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처지를 반전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던 사람이 카츠요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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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Updated at 2017-12-03 10:14:56

너무 슬프자나  카츠요리에 대한 글을 보면 그냥 슬픕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 너무 훅 가버리게 됩니다.

WR
2017-12-03 10:55:59

본인의 정치적 역량 자체도 상황을 뒤엎을만큼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 상황 자체도 정말 나빴다는 생각입니다.

2
2017-12-03 10:24:27

정말 나가시노 전투는 안타깝습니다.. 좋아하던 다케다가의 중신들이 너무 처절히 전사해서 이 대목에 올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어렸을 땐 그래서 가츠요리는 무능하고 다케다를 망하게한 인물이라고 마냥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재조명된 뒤에 보니 자신의 최선을 다하다 안타깝게 끝이났구나.. 란 생각이 드네요. 역시 후대에 한 역사적 인물을 온전히 평가하는 건 어려운 것 같습니다.

3
2017-12-03 10:28:09

늘 다케다가의 멸망엔 항상 나가시노 전투에서 가신단의 와해라는 주요원인이 붙어있어

가츠요리를 무능하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최근 재조명을 보다보면 그냥 슬픕니다.

WR
3
2017-12-03 10:57:41

맞습니다 문자 그대로 처절하게 사망해가는데, 실제로도 그랬고 미디어에선 그 부분이 더욱 부각이 되니 정말 안타까울 뿐이죠. 저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의욕대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계속 보다 보면 다른 부분이 보이더라구요. 확실히 한 인물, 한 사건을 조명할 때도 보는 상황과 방식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니 역사는 너무 어렵습니다.

1
2017-12-03 10:39:04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케다가 좋아해서
가츠요리 얘기가 가장 재밌어요
아쉽기도 하구요

WR
2017-12-03 10:58:24

감사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카츠요리 개인보다 상황을 더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2
2017-12-03 10:56:27

신겐의 아들만 아니었어도 성공한 다이묘가 되었을 재목이라고 봅니다 .
다만 아버지 이름 너무 컸어요 .......

WR
3
2017-12-03 10:59:44

차라리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할아버지 노부토라와 비슷했을거라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센고쿠였지만, 개인의 용력과 군사적 재능보단 정치력과 외교력이 더 중요한 시기가 되었으니까요. 오다 노부타카나 시바타 카츠이에의 몰락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입니다.

3
2017-12-03 11:02:22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시대도 그렇고 상황이 하필이면 저 주변에 이리들이 너무 역대급 똑똑이들이었죠

3
2017-12-03 11:20:41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가 좋은 예인거 같아요. 전투는 도쿠가와가 이겼지만 정략에서 히데요시가 한 발 앞서서 결국 파워게임에서 이겼으니.. 점점 세력들이 정립되고 나면 명분 쌓기를 위한 눈치코치 싸움이 더 많아져서 삼국지도 전국시대도 초기에 여러세력으로 갈라져 치고박고 하는 게 더 재밌네요.

WR
1
2017-12-03 11:37:10

맞습니다.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이후의 양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회전에서의 승리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겠군요. 결국 고립되고 복속해야했던 삿사 나리마사의 사례도 있을테고요.

군소세력들이 난립하던 시기엔 개인의 능력과 이합집산에 따라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면, 아무래도 축들이 생긴 후엔 그런 세력 불리기의 영향이 커지는건 동서고금에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아테네-스파르타의 대립도 그렇고요.

3
2017-12-03 12:43:39

불굴의 등산왕 삿사 이야기는 너무 슬픕니다.

나는 원숭이가 싫어!!!!!!!!!!!!

그럼에도 복속해야했던..

그리고 뒤통수를 뙇

2
Updated at 2017-12-03 11:04:50

신장의 야망 창조를 재밌게 한 기억있어서 전국전도 생각나고 캐릭터의 얼굴도 생각하며 재밌게 읽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시마즈 가문과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에 대해서도 적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1
2017-12-03 11:12:33

창조 +_+ 제 350시간을 뺏아간 작품이죠.. 축성이나 건설 파고들게 너무 많아요. 전국전 저는 도쿠가와하고 사나다 남았네요. 후기시대 전국전이 어렵고 괜히 씁쓸해서..

1
2017-12-03 11:35:33

저도 후반기에 있는 전국전들을 하고나면 너무나도 강한 히데요시 가를 이길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대부분 포기를...ㅜㅜ 저는 그래서 종종 전국전을 포기하고 스즈키가로 통일하는 재미를

WR
2017-12-03 11:40:17

그럴 땐 쿨하게 도쿠가와를 잡으시면 회전 한 방에 쓱쓱이라는 꿀잼을 느끼실 수 있는...

WR
1
2017-12-03 11:39:41

창조 PK는 정말 명작이죠 흐흐. 대지가 나와서, 그리고 아키야마 노부토모와 니시나 모리노부의 신일러가 나와서 대지로 전향할까 하다가도 안하고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사나다는 정말 어렵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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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12-03 12:55:07

지금 실황 하나 잡아서 보고있는데, 내정과 정치가 분리 됐고, 병농 조정 시스템 같은 게 있네요.  전반적인 맵 구성이나 진행은 창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드는데 새로운 시스템들은 적응을 해야겠네요.

WR
2017-12-03 16:21:01

평가가 너무 갈리는데 저도 조만간 잡아볼 계획입니다. 물론 코에이 특징 상 PK까지 참는게 낫겠지만요.

WR
2017-12-03 11:38:27

시마즈는 일단 챕터 3에서(현재 챕터 1 진행 중입니다.) 시마즈 요시히사가 계획 중에 있고, 다테 마사무네는 다음편과 다다음편에서 까이는 모습으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1
2017-12-03 13:40:49

감사합니다~ 시마즈 4형제들은 다 매력적이라서

1
2017-12-03 14:58:00

곧 연어님의 등장이 있는건가요?

WR
2017-12-03 16:21:14

다음 편입니다.

3
2017-12-03 11:29:02

일군의 대장으로서는 뛰어나지만 일국의 수장으로는 부족함이 있었던 것 같네요. 어쨌든 끝까지 살아남은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비해 큰세력을 결국 오래 유지못하고 좌충우돌하다가 배신으로 최후를 맞이했으니 말이죠.
근데 본문에 '이마가와의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라고 나오는데 스루가 토토우미의 영주 아닌가요? 조심스레 여쭤봅니다

WR
1
2017-12-03 11:42:01

야불휘님 평가가 가장 적절할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상황의 카게카츠는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았고, 가문을 규합하는데도 성공했다는 점에서 또 비교될 수 있겠고요.

아 이마가와 가의 당주라고 적으려던걸 영주라고 썼군요.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
2017-12-03 17:03:52

본문을 읽다 보니 일반적인 가쓰요리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에는 아직 요원해보입니다.

물론, 같은 이유로 마쓰나가든, 미요시 같은 무장도 연구성과와는 다르게 일반적인 인식은 마찬가집니다만.

 

외교적인 면에 대한 반론을 하자면, 신겐대의 동맹세력과 가쓰요리대의 동맹세력의 거리가 다르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거기다가 오다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그 동맹세력이 신겐대보다는 확실히 연락을 취해 일사분란한 행동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저는 가쓰요리가 명장론이라고 불리는 소위 과한 평가는 자제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부분에 비해서는 많은 부분이 과소평가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심지어 다케다 연구자 중 한 사람의 책에서는 아버지의 노선 변경에 따른 희생자(!)로 보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1560년대 이전까지는 남북방향의 공략 때문에 이마가와씨의 배경을 가진 장남 요시노부가 적장자로서 딱이었겠지만, 이 정책이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급변하면서 남북방향에서 동서방향으로 정책전환이 이뤄지고 그에 따른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 가쓰요리. 처음부터 후계자로 지목될 이유도 없었고, 그 당시까지만해도 후다이급 정도의 취급을 받던 아들(이면서 동시에 실권도 주어지지 않은...)에게 다케다의 미래를 맡기고 급사해버린 신겐의 후계자 변용에 따른 신겐의 책임은 분명히 큽니다. 심지어 후계자가 병신이라고 욕먹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조차 30대 후반에는 장남 우지자네에게 공동지배권을 허락하고 가신단 체제의 공고한 연결을 시도했는데, 신겐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었고, 가쓰요리도 위대한 아버지의 위명을 이어야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한 것으로 보이죠.(형 요시노부와 관련된 사료를 보면 형에 대한 어떤 질투심이랄까 선망이랄까 그런 느낌도 듭니다)

 

그리고 다케다씨 가신단은 다케다씨의 멸망 원인을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는 나가시노 전투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케다가 멸망한 뒤에 가신의 일부가 남긴 기록을 보면 대부분 1578년 호조씨와의 외교노선 변경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여기에 1582년에 다케다씨 멸망도 당시 사람들이 급작스럽다고 할만큼 놀랐다고 하는 걸 보면 다케다씨가 나가시노에서 파괴력은 상실했을지언정, 여전히 강하다는 느낌이었다는 것이죠. 저도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소위 커뮤니티에서 언급되는 가와나카지마 전투와 나가시노 전투에서 수많은 능력자(부하)를 잃어서 다케다가 크지 못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후에는 노선이 바뀌면서 도카이도와 북 간토에 대한 지배권과 침략이 강화되었고, 나가시노 이후에 다케다 최대 판도를 달성한 것은 다름 아닌 가쓰요리입니다. 망해간다는 느낌과는 반대로 오히려 세력확장과 강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신겐대의 다케다가 판도가 최대라고 생각하시는 것과는 반대로 1577~79년에 가쓰요리가 이룩한 판도가 최대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저는 가쓰요리가 아직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에는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평가나 기록은 싹 무시되고, 멸망 이후에 가이국 백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탕발림한 말이나 결과만을 보고서 평가하는 경향이 크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랜 기간 다케다를 보다보니 쓸데없이 길게 쓴 거 같네요...

WR
2
Updated at 2017-12-03 17:44:57

우선 긴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 딴에는 로즈님 말씀하신 것과 같이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여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한 번의 패전이 아닌, 이후의 상황이 카츠요리를 점차 무너뜨린 것이라고 적고 싶었는데, 글 재주도 지식도 적어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카츠요리에 대해 신겐이 취했던 정책들의 폐해가 이어진 결과라는 연구에 대해 저도 읽어본 바 있습니다. 음... 저는 카츠요리의 외교적인 성과가 이리저리 제2+제3의 경우의 수까지 생각해서 보험을 만들던 신겐의 그 것보다는 떨어진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이 글을 작성하면서 이리저리 찾거나 생각하면 할수록 외교적으로도 할 수 있는만큼 했고, 일반에 비하면 준수했다고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호조 측의 기록을 봐도 다케다 가문 자체에 대한 불신도 있던 상황에서 사타케와 연계해서 호조를 밀어붙이고 오다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우에스기와 동맹을 이끌어낸 것 역시 높게 평가합니다. 카게카츠가 이끄는 우에스기의 세력이 많이 무너졌고 이전만큼의 영향력을 보일 수 없던게 안타까울 뿐이죠.

결국 가신단을 규합하지 못한게 어쩌면 가장 큰 문제였겠죠. 여기엔 말씀하신 것처럼 스와 출신이라는 기본적 반감+가신 취급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테고요.

저는 이 다양한 요소들을 카츠요리가 처한 '상황'으로 인식했고, 카츠요리의 결정에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반강제적인 역할들을 담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카츠요리가 내린 결정들은 가장 효율적이고 옳은(오다테의 난 당시의 결정에 대해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만요.)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긴 답글을 달면서 혼자서 생각을 해보면 오다테의 난 때도 카게카츠를 돕는게 어쩌면 정책 결정에 있어서 현명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오다의 강세로 서쪽의 진출은 매우 어렵게 된 상황. 마찬가지로 도토우미-미카와는 오다의 동맹인 도쿠가와의 영지로 오다에 대항하게 되는 상황. 히다로의 진출은 산지라 어려운 상황. 결국 고즈케+무사시라는 동쪽 방면으로의 영역 확대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었겠다라는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3
2017-12-03 18:01:09

마지막 부분과 관련해서는 전에는 호조씨를 견제하기 위해 우에스기씨를 지원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저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최근에 가쓰요리 관련 책을 보면, 가쓰요리는 새로운 3국동맹을 가정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시당초 가쓰요리는 호조씨를 저버릴 생각도 없었고, 단지, 우에스기씨를 오타테의 난이라는 기회를 계기로 끌어들이기 위해 먼저 우에스기씨와 연휴한 뒤, 아내의 연줄인 호조씨를 끌어들이면 (노력을 무지해야겠지만) 적어도 동국 3강이 오다씨를 막을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가쓰요리가 우에스기씨와 함께 오다에게 항복 아닌 항복같은 형식으로 휴전 또는 동맹을 제시했지만, 오다는 싹 무시해서 전부 나가리됬었던 것이지만...

 

그리고 오가 야시치로 사건에서도 드러나듯이 가쓰요리가 머리가 나빴다고 보기에도 참 애매합니다. 사실 이 사건은 도쿠가와씨가 양분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었고, 이에야스의 강짜로 겨우 매듭지어진 사건인데다가, 이 과정에서 아내와 장남 모두 죽여야(!,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했습니다. 거기에 장남을 따르는 고쿠진들도 강압적으로 잠재워야 했고...

 

전문잡지를 보면, 대체로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까지의 간토상황이 연구성과가 미비하고, 좀 더 진행이 되어야 판단할 수 있다는 코멘트를 봐서는 연구자들도 이 시기의 정황이 좀 더 연구진척이 이뤄져야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보류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기사, 최근에는 호조 우지마사도 정당한 평가가 이뤄져서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암군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기존 인식이 얼마나 특정 세력이나 인물 위주로 된게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게 합니다. 물론 그 세력이나 인물은 에도시대까지는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WR
3
2017-12-03 18:50:21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다케다-호조-우에스기로 이어지는 갑상월 동맹이라 해야할까요? 카게토라가 호조 가에서 사실상 버림받은 존재이긴 했지만... 계획 자체는 컸지만 어려울 수 있었겠네요. 만약 그게 가능했다라면 어떻게든 오덕 동맹에 대해서 대항이 될 수는 있었겠습니다. 최소한 우에스기나 호조에 의해 후방이 위협받는 일은 없었을테니까요.

 

저도 카츠요리가 머리가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신단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는 별개로 감각은 분명 있었다고 생각해요. 창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부야스 사건을 하마마츠파와 오카자키파의 파벌 싸움의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으니... 그 안에 개입해서 갈등을 야기시키고 미카와에 동요를 일으켰네요.

 

신겐에 대해서는 고신을 정복한 이에야스가 정책적으로 더 띄워주기에 열심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도리어 자신이 대립하던 카츠요리에 대해선 깎아내렸을 것 같기도 해요. 마사카게에게 '나이가 들어도 목숨이 아깝냐'며 빈정댔던 일화도 후세의 창작일 가능성이 더 높은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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