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MLB
/ / / /
Xpert

(번역)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 "악의는 없어요, 맹세해요."

 
17
  9589
Updated at 2024-03-28 14:24:11
https://twitter.com/ronaldacunajr24/status/1772971928371827071
3월 27일경,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슈퍼스타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의 트윗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 저는 여러분들이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여러분들이 '로날드 아쿠냐'라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기자들이 제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것들. 야구 부분뿐만이 아니에요. "

이건 제 이야기에요. 

 
친애하는 브레이브스 팬들에게:

저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베네수엘라의 라 사바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때, 저에게는 두 가지만 있었으면 됐었어요, 신문지와 테이프.

신문지 부분은 쉬웠어요. 할머니나 이모께서는 항상 며칠이 지난 신문을 저에게 주곤 했거든요. 하지만 다른 부분은... 테이프? 그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어요. 아마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테이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롤 테이프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저는 어머니의 도움에 의지했어요.

제 어머니는 근면성실하고 의욕이 넘치는 분이세요. 제 아버지는 미국으로 야구를 하러 자주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어머니는 일을 더 많이 하셔야 했고 제가 어렸을 때는 지역 복권의 추첨 번호를 파는 일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면서 마을의 거리를 왔다 갔다 걸어 다녀야 했어요.

그런데 저희 집 옆에 표를 인쇄하고 팔기 위해 작은 장소를 마련하고 난 뒤, 어머니는 그렇게 많이 걸어 다닐 필요가 없어졌고, 이는 어머니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저에게도 좋은 일이었어요! 

덕분에 어머니에게 잔돈을 달라고 조르는 것이 쉬워졌어요.
" 엄마, 나 돈 좀 줄 수 있어요? 제~~~발요! 제발!! 저는 테이프를 좀 사야 해요!!! " 늘 이런 식이었어요.

그리고 어머니에게선  "뭐 때문에?" 라는 말도, "왜 테이프가 필요해?" 라는 말은 들을 수 없었어요.

라 사바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때, 신문과 테이프를 합치면... 그게 우리의 야구공이었어요.
신문지를 공 모양으로 만들어서 테이프를 붙이면, 그게 어떤 모습이건 그것이 제 공이었어요. 저는 한 번에 15~20개씩 만들곤 했죠.

가끔 우리는 모든 공을 다 훑어보기도 했어요. 파울볼이 덤불 속에 들어가거나, 물에 젖으면 교체해줘야했죠. 그러면 저는 또 다시 어머니가 있는 가게로 달려가야했고 어머니는 저에게 또 다른 '외상'을 해주셨죠. 하지만 이게 제 어린 시절 일상적인 행동이었어요.

신문 몇 장과 좋은 테이프 한 통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마치 제가 세상의 왕이 된 것처럼 말이죠.

 

이것이 제 이야기의 첫 번째입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제가 여기서 여러분들께 주로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바로 저의 삶과 제가 어떻게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오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ㅡ 제가 사랑하는 고향, 메이저리그로 가는 길, 우여곡절, 어두웠던 시간들과 제가 직면했던 숱한 어려움들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라는 사람 전체에 대해서, 그리고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기자들이 제게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들. 야구 부분뿐만이 아닙니다.

"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

제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알고 싶나요? 

우리 부모님조차도 모르는 것. 이런 얘기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저는 신에게 저를 유명하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곤 했어요.

그것이 제가 실제로 기도하고 싶은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모두 야구를 통해서 이루어졌어요. 저는 야구를 위해 살았어요. 저랑 제 친구들은 해변가, 마을 병원 뒤의 거대한 부지, 길거리, 어디서든 게임을 했어요. 그게 우리가 하고 싶은 전부였어요.

평일에는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곤 했어요. 그러고 나서 친구들과 저는 오후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야구장으로 달려갔죠.

라 사바나에는 운동장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 크지도 않았어요. 운동장에는 작은 크기의 관중석만 있었죠. 운동장은 묘지 바로 앞에 위치했어요. 외야 중앙 바로 너머에 무덤들이 있었어요. 그 너머에는 바다와 나무들이 있었죠.
한 쪽에는 집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산과 정글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야구장이 있었어요.

전혀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것이었어요. 그곳은 우리의 '양키 스타디움'이었어요. 그리고 학교는 운동장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담벼락을 뛰어넘어서 야구를 하러 가면 됐죠.

우리는 야구장에서 2~3시간동안 야구를 했어요. 그리고 농구장에 잠깐 들러 공놀이를 한 뒤 우리는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가서 야구를 했죠. 때로는 밤 10시까지.

우리는 매일 이렇게 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엄마들이 거리나 운동장에 와서 우리에게 소리칠 때까지 계속 놀았어요.

엄마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을 때, 저는 항상 더 놀려고 노력하곤 했어요.
저는 엄마에게 " 저는 떠나기 싫어요! 여기에 있고 싶어요!! 저는 집에 가지 않을 거예요!!! " 라고 짜증을 내곤 했었죠.

결국 엄마는 밤마다 할아버지를 보내서 저를 데려오셔야 했어요. 할아버지가 중재자였거든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꾸중을 들을 때면, 할머니가 들어와서 도와주고 제 편이 되어주곤 했어요. 무조건적인 할머니의 사랑처럼 말이죠. 그러고 나서 할머니께서는 저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어요.
" 너희 엄마,아빠는 매일 열심히 일하신단다. 그들은 너를 사랑해. 네가 아침까지 놀고 싶더라도, 부모님을 위해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단다." 

할머니는 저를 일깨워주셨고, 지금까지도 제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가끔 혼자 있을 때 할머니와의 대화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왜냐하면 우리 가족 모두가 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저도 그들을 사랑해요.

하지만 네, 제가 그 운동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의 항상 팀적인 노력이 수반됐어요. 우리 가족 모두가 역할을 가진 연극처럼 말이죠.

그리고 연극은 매일 밤 벌어졌습니다.


 저랑 제 친구들은 야구를 하지 않을 때면 구석에 모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우리는 25명 정도 되는 크루였어요.
 우리는 돈이나 걱정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우린 그저 꿈을 함께 꾸곤 했죠.
" 내가 빅리그에 가면 엄마에게 차를 사줄거야!", " 나는 정말 멋진 차를 살거야!" 항상 이런식이었어요.

모든 아이들이 아이패드를 갖고 있고 하루 종일 TV를 보고 싶어 하는 오늘날과는 달랐어요.
우리는 그저 이야기를 하고, 팽이를 돌리고, 구슬치기를 하고, 깡충깡충 뛰며, 자전거 최대한 빨리 타기를 했어요.(제 자전거는 반은 파랑색, 반은 흰색의 그레코였고 사람들이 탈 수 있는 20인치의 바퀴와 발 받침대가 있었어요. 그건 작았지만 정~~~말 빨랐어요. 그게 제 람보르기니였어요!)

그리고 우리는 행복했어요.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정말 행복했어요.

그때를 돌이켜보면, 라 사바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저에게 있어서... 마법 같았어요. 그곳은 마치 신이 만져놓은 곳 같았어요.

집 대부분이 콘크리트 블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폭우가 오는 날이면 물이 새는 아연 지붕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어요.(우리는 물을 받기 위해 바닥에 양동이들을 깔았어요) 작은방이 있는 작은 집에는 보통 대가족들이 많이 살았어요. 저희 집의 경우에는 할머니가 아래층에서, 저랑 엄마, 남동생, 여동생은 위층에서 살았죠.

그곳엔 부자가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저희는 유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지 알고 있었죠. 라 사바나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보내기에 최고의 장소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아이들, 우리 모두는 더 많은 것을 꿈꿨어요.

엄마 가게에 달려가 테이프를 사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마다 늘 똑같이 말했어요. 마치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어머니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

" 엄마, 약속할게요, 제가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제 돈이 생기면 엄마는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

때때로 어머니는 그 말을 들으면 우시곤 했어요.

아마도 어머니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제가 헛된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저는 진심이었어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테이프를 살 수 있는 잔돈을 쥐어주셨죠.

16살이 된 어느 날, 저는 제 꿈을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었어요. 아니면 꿈이 사라지도록 놔버리던가.

저는 무엇보다 프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15살쯤 되었을 때 프로계약 맺기를 희망하며 여러 팀들과 테스트 경기를 뛰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매번 결과가 똑같았기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어요.
제가 공을 잘 치고, 잘 던지고, 빨리 뛰고 나면 항상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어요. " 계속 열심히 하세요! 계속 나아지면 우리에게서 연락이 올 거예요! 우리가 꼭 전화할게요! "

그러나 그들에게서 전화는 결코 오지 않았어요.

저는 실력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저랑 제 친구들은 제 사촌 켈빔 에스코바르 야구학교에서 뛰었고, 미국 최고의 팀들과 경기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저는 오쿠마레 델 투이의 바르키시메토에서 뛰었고, 전국 대회에 진출하기도 했어요.

그들은 저에게 개인 사물함, 개인장갑, 심지어 뒷면에 제 이름이 적힌 유니폼까지 줄 정도로 저를 대우해 줬어요. 제 이름이 박힌 저지를 보고 저는 '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런 저지의 사진들을 많이 찍었어요. ( 저는 지금도 그 일을 해요. 저지 뒷면에 새겨진 제 이름을 보면 특별한 느낌이 들어요. 무슨 느낌인지 아시겠어요? ) 

제가 생각했던 건 다음 유니폼을 입고 프로 선수로 뛰는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얼마 후, 팀들의 거절은 저를 지치게 만들었어요.

저는 똑같은 말을 듣는 것에 지쳤고, 전화기는 절대 울리지 않았어요. 언젠가 저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테스트를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점점 심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바로 그즈음에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롤란도 프티라는 스카우터가 저에게 연락을 했어요. 그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카라카스로 오세요. 당신과 계약할게요. " 그리고 저는 기억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믿지 않았어요.

" 롤란도 씨, 저는 사람들이 저에게 하는 말에 지쳤어요. 아무도 저와 계약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전화를 줄 것이라고 말하고 아무도 전화하지 않았어요. " 

" 그냥 오세요. " 그가 말했어요. " 곧 알게 될 거예요. " 

그래서... 한 번 더 해봐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아서, 야구장에 가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고 공도 잘 쳤어요.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죠.
테스트가 끝나고, 이른 오후에, 롤란도 씨가 저에게 말했어요. 

" 오늘 밤에 돌아오세요. 우리는 여기 카라카스에서 당신과 계약하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의심했어요.

하지만 저는 몇 시간 동안 라 사바나의 집으로 갔다가 몇 명의 사촌들과 함께 카라카스로 돌아가는 대중교통을 탔고, 그다음에는 마침내 제가 프로 야구 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날 밤, 제가 집에 늦게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행복해하셨어요. 어머니는 저를 보자마자 바로 울기 시작했죠. 이모들도 거기 계셨고, 이모들도 울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울기 시작했습니다.

울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어요.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만큼 감성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두 사람이 울만큼의 눈물을 흘리셨어요.

" 계속 열심히 하렴. " 어머니가 그날 밤 저에게 해주셨던 말을 기억해요.
" 우리가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너를 보러 가고 싶기 때문이야. 그곳에 가서 너를 보고 싶어, 아들. 그러니 열심히 하렴. "

그게 저를 더욱 울게 만들었어요.

"그럴게요, 엄마." 제가 말했어요. " 약속해요. "

 16살의 나이였어요. 제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서 뛰기로 계약했던 나이에요. 제 아버지가 프로야구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제 계약 보너스 금액은 10만 달러였어요, 미국에 가서 경기를 뛰기 위해 쓸 돈이 필요하고 부양할 가족이 있다면 그다지 많은 금액이 아니에요.

그리고 고향을 떠나고 어머니의 품을 떠나 미국으로 오는 그 모든 일은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어요. 믿거나 말거나, 저는 가족과 친구들과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게 될지 몰랐어요. 1월부터 9월까지 가있는 줄도 몰랐죠.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본인이 미국으로 떠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슬퍼해주고 울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그리고 그 당시에 저는 전혀 믿지 못했어요.
" 야구를 하러 가는데 왜 울어요? 행복하지 않을까요?? " 그 때 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제 그 경험을 할 차례가 됐을 때...

네, 맞아요.

저는 공항에 있다가 뒤를 돌아봤을 때, 가족과 모든 친구들이 멀리 남겨진 채 마지막으로 뒤돌았던 때를 기억해요. 온몸에 소름이 돋았죠. 바로 눈물을 흘린 건 아니지만, 입국심사를 마치자...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비행기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너무 슬펐어요. 벌써 다들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 감정은 서너 달 정도 지속됐죠. 
말 그대로 매순간 저는 어디선가 혼자 있고 부모님을 생각할 때나 부모님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곤 했어요. 


그 당시 저에게 또 다른 큰 도전은 음식이었어요.

저는 영어를 전혀 못해서, 음식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어려웠어요. 가끔은 팀원이 저를 위해서 대신 주문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는 그냥 제 앞에 있는 사람이 했던 말을 외워서 같은 말을 하려고 노력했었어요. 아니면 이렇게 말했었죠: 

" 뭐든 상관 없어요. 그냥 똑같은 걸 주세요. " 정말 형편없죠? 

게다가, 기본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어요 : 1) 홈경기를 위해 사용중인 페어필드 구장 앞에 있던 '폴로 트로피컬' 아니면 2) 호텔 옆에 있는 '차이나 뷔페'였어요. 둘 중 하나였어요. 매일이요.

폴로 트로피컬에서는 전화로 주문하면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응대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팀원 중 한 명에게 영어로 제가 원하는 말을 하는 법을 배운 다음 전화하기 전에 여러 번 연습을 했을 거에요.

치킨 한 마리에 밥 주세요.
치킨 한 마리에 밥 주세요.
치킨 한 마리에 밥 주세요.

그러고 나서... 저는 분명 일을 엉망으로 망쳤을 거에요.

뷔페에서는 오징어와 랍스타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밥과 파스타를 먹을 수 있었어요.
근데 월요일에는 차이나뷔페, 화요일에는 폴로 트로피컬. 수요일에는 차이나 뷔페. 목요일에는 폴로 트로피컬... 때때로 둘 다 먹고싶지 않을 때에는 그냥 경기장에서 음식을 가져가서 가방에 넣고 호텔에 가져가서 혼자 먹곤 했어요.

 

한동안 꽤 외로웠어요. 적응하기 쉽지 않았죠.



야구장 밖의 저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에요 ㅡ 마치 두 명의 다른 사람 같아요.

때때로 저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처음 본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말하기가 힘들어요. 저는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그것은 저에게 도전이었고, 지금도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특히 제가 미국에 처음 왔을 당시에, 저는 극도로 소심하고 내성적이었기에 조금씩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저는 의사소통을 하는 데 정말 어려움을 겪었어요.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언어 장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는지 모르겠어요.야구장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고, 친구들을 사귀고, 운동화를 사는 등의 일들을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들어요.

심지어 제가 메이저리그에 콜업되는 순간에도, 영어를 모르는 것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큰 부분을 차지했어요.

2018년 4월 24일 오전 11시 경이었어요. 쿠바에서 온 팀원이랑 함께 쓰고 있는 호텔방에 있는데 갑자기 문을 큰 소리로 두드리기 시작했어요. 

쾅! 쾅! 쾅!

그 순간부터, 그것은 우리 둘의 싸움이었죠.

" Asere, contesta la puerta. "

" No, hazlo tu. "

" 문을 열어! " " 아니, 네가 해! " 같은 식이었죠.

" Te dije que no voy a contestar la puerta. No hablo ingles y no entendre lo que dicen."

" Yo Tamopoko!!!!! " 

" 나는 영어 못해. 네가 가! ... 아니, 너! 나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 

우리는 그렇게 계속 서로에게 미뤘습니다. 그 사이 노크에 응답하는 사람이 없자 다시 한번... 

쾅! 쾅! 쾅! 

우리 중 한 명이 행동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저는 까치발로 걸어가 문 구멍을 들여다봤죠.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저희 감독님이었습니다.

안돼!

우리 중 한 명이 곤경에 처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죠.
그래서 저는 제 팀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팀원이 노크에 응답하도록 하기 위해 뭔가를 계획했어요.

저는 스페인어로 " 야,야, 빨리 와봐. 감독님이야. 감독님이 너를 찾고 있어. 지금 밖에 계셔. "

그러자 팀원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노크에 응하기 위해 문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우리 감독님은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서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이윽고, "아쿠냐 어디 갔어?" 라고 말했죠.

그 말을 듣자마자, 저는 " 여기요! 저 여기 있어요! " 소리치며 뛰어나왔어요.

감독님은 매우 간단하게 말했어요. 정말 말도 안 돼요. " 지금 짐을 챙기세요. 당신은 메이저리그로 갈 겁니다. "

저는 그가 말한 말을 이해했지만, 여전히 "읭?" 상태였어요.

" 비행기는 5시에 출발합니다. 빨리 짐을 싸세요. "

그 말을 한 뒤 그는 방을 나갔고, 문이 닫히자마자 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그래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나랑 장난해 ?!?!?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어요.
" 아빠, 저 메이저리그에 가요. 내일부터 저는 메이저리거가 되는 거에요. 저는 제 꿈을 이룰거에요!!!! "
 
아버지가 문자를 받았을 때, 부모님 모두 저에게 전화를 했고, 그러고나서 우리는 라 사바나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나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저는 그 반대의 증거를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것, 즉 기도했던 것이 바로 지금 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에요. 

하지만 제 기도에는 단순히 유명해지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어요. 제가 항상 신께 드린 말씀이 있었어요.

제가 그에게 저를 유명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제가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고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이 쌓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저에게 그것을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어요.

그리고 그러한 부분은... 사실 그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신은 저에게 아주 빠르게, 아주 이르게 명성을 날리게 해주셨어요. 마치...

" 당신은 명성을 원하는군요???? ... 자,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명성을 가지세요! " 

BAAM! 명성! BAAM! 더욱 더 많은 명성! BAAM!
 
" 가져가, 가져가,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잖아요? 여기!! "

저는 17살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꿈꿔왔던 모든 것들이 실현되기 시작했어요.

" 명예를 원한다고? 그럼 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줘봐! " 

그리고 저는 불평하는 것이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저는 제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 너무나 감사함을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너무 많았어요. 특히 너무 어린 나이에. 솔직히 말해서, 저는 준비되지 않았었어요. 완전히 준비가 되지 않았었어요. 

저에게는 다음과 같았어요: 지금은 뭐지?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일어나는 거지? 

그러는 동안, 저는 실수를 많이 했고,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일들도 있었어요.(이제는 실수가 줄어들기를 바라지만, 오늘날에도 실수를 하고있어요.)

저는 제게 필요한 성숙함이나 경험이 항상 있었던 건 아니에요. 프로 생활 초창기에, 몇몇 감독님들과 상대 선수들은 제 플레이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문제가 있었어요.

감독님들은 제가 너무 자아로 가득 차 있거나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충분히 진지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때때로 저는 경기력이 좋지 않을 때 베이스를 향해 열심히 뛰지 않거나 수비에서 저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공을 설렁설렁 뛰며 놓쳤어요. 
그 일로 저는 벤치를 지켰죠. 

그것은 저에게 배움의 과정이 되었고,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완벽해지기 위해서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많이 성장했고, 성숙해졌어요.

그러나 심지어 메이저리그 경기를 뛸 때에도 저는 경기에서 두 번이나 열심히 뛰지 않은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 경기는 제가 벤치를 지켰죠. 저는 그래야만 했습니다. 다른 한 경기에서, 우리는 1점 차로 패배했어요.모두가 저에게 화가 났었죠. 끔찍한 기분이었어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저는 모두에게 사과하고 감독님에게 제 잘못이라고 말했어요. 다행스럽게도, 저는 그 이후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 사건은 2019년이고 우리는 지금 2024년에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저에게 약간의 성장이 있었다고 믿고 싶어요.


이제 제가 홈런을 쳤을 때 세레머니를 하는 것에 관해서는... 그건 좀 다른 것 같아요.

실제로 저는 그런 행동을 바꾼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 그게 바로 저 자신이기 때문이에요.

야구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저의 즐거움, 제가 가지고 있는 재미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저니까요.
저는 경기를 할 때 대본이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죠. 그리고 저는 이해해요.

가끔 상대 감독은 제가 홈런을 쳤을 때 양팔을 위로 올리거나 서서 하늘로 날아가는 공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에게는 제가 무례하게 보이겠죠.

제가 마이너리그에서 뛸 때 그런 일이 몇 번 일어났고, 어머니가 저를 불러 꾸짖었던 기억이 나요.
" 그만 두렴. " 그녀가 말했어요.

" 겸손해지렴. 그런 종류의 쇼를 하지 말거라. " 제 말은, 어머니가 이 행동은 저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마치... 진정해라, 아들. 그리고 저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습니다.
" 좋아요, 제 잘못이에요. 이제 하지 않을게요. "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 몸 안에는 그러한 순간들에 저를 반응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어요.

만약 제가 홈런을 치면... 그러한 감정들을 병 안에 담기가 어려워요, 무슨 말인지 알죠? 

메이저 콜업 이후 두 번째 경기에서도 큰 홈런을 쳤을 때, 저는 그 타구를 지켜보며 제가 해야 할 일을 참을 수 없었어요.
https://twitter.com/grantmcauley/status/1519013560311074816
벤치로 돌아오자 코치님들과 몇몇 선수들은 이렇게 말했죠.

" 꼬맹아, 너 방금 메이저리그에 도착했어! 뭐하는 거야? 5분 동안 여기 와서 홈런 하나 치면 그렇게 행동하는거야? " 

그래서 저는 말했죠. " 제 잘못이에요. 이해했어요. " 그러나....

하하하.

뭐라고 해야할까요? 그건 제 안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에요. 악의는 없어요, 맹세해요.

저는 그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고, 많은 경기에서 승리하고 싶을 뿐이에요.


올해는 정말 중요한 시즌이에요. 저희 팀을 위해서,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함께 해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고, 저는 또 다른 월드시리즈 우승을 돕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제가 그 일의 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아킬레스건이 찢어진 그 해, 2021년... 그 해는 저에게 정말 많은 면에서 악몽과 같았어요.
그리고 그 악몽을 과거에 놓아둘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 때로 돌아가서, 저는 몇 달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저는 무력감을 느꼈고, 우울증에 빠졌었어요.

그 때, 저는 친구들에게 항상 " 내가 다시 경기를 뛸 수 있을까? 내가 그때와 같은 선수로 돌아올 거라고 믿니? " 라고 물었죠.
그리고 친구들은 모두 저에게 모든 것이 잘 될거라고 말해줬어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전 너무 우울했어요.

저는 경기에 뛰고싶었어요. 경기장을 떠나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3~4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었고, 결국 저는 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저는 정말 고통스러웠고,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처음에는 수술을 받고싶지 않았어요. 그런 상황에 처한 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 저는 일종의 반항을 했었죠.

그러나 그 후에는: 나는 이것을 해야만 해... 왜냐하면 내가 여기서 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결코 완전히 회복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다시는 경기를 뛰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수술을 받고 난 뒤 삶의 모든 것이 어려워졌어요. 일찍부터 제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제 발을 들어줘야 했어요ㅡ 부모님이나 집에 돌아온 좋은 친구들 중 한 명인 레너드.

누군가가 저를 업어주거나, 들어 올려주거나, 옷 입는 것을 도와주거나, 저를 목욕시켜줘야했어요.

큰 타격을 받았어요. 저는 친구들이 재미있게 놀거나 밖에 나가는 것을 보면서 방에 낙오되곤 했어요. 저는 눈물을 흘렸어요.

그들은 제가 우는 것을 보지 못했을 거에요. 하지만 부상은 저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때때로 저는 화를 내면서 울기도 했어요.
그들이 저에게 가져다 준 목발을 땅바닥에 집어던지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부끄럽지만, 그 때 큰 소리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말을 많이 했었어요. 저 자신에게.
그건 마치... 실례할게요

 

솔직히 부상 이후에는 팀 경기를 많이 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저를 더 슬프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플레이오프 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제 팀원들이 아주 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월드시리즈에서 이겼을 때... 행복했지만... 100% 즐겼다고 말하긴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제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저도 경기장에서 역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올해는 그게 저의 목적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팀을 구성했다고 생각해요. 젊은 선수들과 베테랑이 고르게 섞여있죠.

베테랑 선수들, 그들은 경험이 많은 말과 같은 존재들이에요. 그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우리에게 야구 경기에 대해서 가르침을 줘요.

하지만 그들은 전혀 비열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이 팀에는 '에고'가 없어요.
우리는 모두 평등해요. 여기에 20년을 있었든 단 하루를 있었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대우를 받아요.

그리고 베테랑 선수들은 우리를 편안하고 자신감 있게 만들어줘요ㅡ 모튼, 다노, 아르시아, 레이젤, 그 모든
선수들.

" 이봐, 난 여기 오래 있었고 넌 여기 처음이라는 것을 기억해. " 이런 일은 우리 클럽하우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베테랑 선수들은 우리를 겁주는 대신 우리의 기분을 들어 올려줘요. 물론,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일깨워주죠.
그들은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선수로 성장하길 원해요. 우리 모두.

 

이제 이 글을 마치기 전에 이번 시즌에 대한 저의 꿈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싶어요.
제가 바라는 것은 여기 있어요.
제가 두 눈을 감으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에요.

우리는 월드시리즈를 끝내기 위한 마지막 경기를 위해 팬들과 함께 집에서, 경기장에서 있어요.
그 마지막 경기는 트루이스트, 저의 홈 경기장에서 치뤄져야만 해요.
그리고 이번에는 저도 함께 해야 해요. 그래야만 해요. 저는 경기를 뛰고 있어야 해요.

경기장이 꽉 찼어요. 팬들이 난리가 났어요.

제 머릿 속에서 마지막 타석이 보여요. 공이 방망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공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여요.
그러고 나서 그 공은 제 글러브 안에 착륙해요... 역사 속에 기록됩니다.

그것은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감정일 거에요. 모두가 그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축하합니다.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점프를 해요.

그리고 다음으로, 제가 아는 것은, 모두가 경기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 말은 여러분 모두를 의미해요!

모든 팬들이 잔디밭으로 뛰쳐나오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파티가 될 거에요.

저는 그 꿈을 실현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거에요. 그리고 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저는 제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저는 무엇이든 제가 마음먹은 대로 이뤄낼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만약 제가 한 시즌에 홈런 40개를 친다면, 다음 시즌에는 50개를 쳐야만 해요.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내년에 다시금 도전하겠지만, 저는 포기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항상 배가 고픕니다. 감사함을 느끼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어요.

신께서 저를 건강하게 돌봐주시는 덕분에 작년에는 MVP를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신의 은혜로 또 다른 MVP를 수상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만약 제가 올해 또 다른 MVP를 수상하게 된다면, 내년에도 또 하나를 원할 거에요.
저는 이 팀이 우승을 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해내고 싶어요.

그리고 라 사바나에 있는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자랑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요.

매일 저는 신께 저를 이 지구에, 제가 태어난 곳에 데리고 오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있어요.

저는 그 곳에서 온 것이 자랑스럽고,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바꿀 수 없어요.
만약 제가 다시 태어날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태어나고 싶을 거에요.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고 난 후,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https://youtu.be/5ZKg1keNGiM?si=avu6LLZrIfilxoDx

https://projects.theplayerstribune.com/ronald-acuna-jr-atlanta-braves-mlb-baseball/p/1

4
Comments
2
2024-03-28 14:51:12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흑역사 그 자체인 코포렐라도 업적은 몇가지 있는데 그중 최고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베네수엘라의 이 어린 선수의 포텐셜을 알아봤다는 거죠.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유망주로 찬밥 취급 받던 아쿠냐가 신인왕 mvp를 수상하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고 이제는 통역 없이도 어설프게나마 영어 인터뷰도 하는걸 보니 오랜 애틀팬으로써 감개무량하긴 합니다

WR
2024-03-30 04:03:45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시즌도 건강하게 MVP 레이스를 펼치는 아쿠냐의 모습을 얼른 보고싶네요

2
2024-03-29 13:21:30

이미 대단한 선수임에도 늘 배가 고프다
부족하다 느끼는게 바로 슈퍼스타로 향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네요 멋진 선수네요

WR
2024-03-30 04:06:47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에 결혼에 골인하여 가장의 무게까지 짊어진 아쿠냐가 얼마나 더 잘해줄지 설렙니다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