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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 over, Young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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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4 08:37:07

농구 대잔치때부터 프로 농구 초기까지 한국 농구 포워드 계를 이끌었던 '사마귀 슈터' 김영만이 얼마전 코트를 떠났다. 35살이라는 아직은 젊은 나이에, 이렇다할 라스트 씬을 남기지 못한 채 코트를 떠난것이 못내 아쉽다.

'사마귀 슈터', '코트의 당랑거사'로 통하며, 국내 최고의 스몰포워드로 활약했던 김영만은 초등학교 5학년에 농구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차범근 감독이 최고의 우상이였던 탓에, 그도 축구를 하고 싶어했으나, 다니던 초등학교에 축구부가 없어 그의 운동 소질을 눈여겨본 선생님의 권유로 농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마산동중과 마산고를 거치며 발전 가능성이 높은 센터로 활약했던 김영만은 고등학교 선수로는 드물게 '스카우트 파동'을 일으킬 만큼 큰 주목을 받으며 중앙대에 입학하게 된다. 타 센터들에 비해 키에 메리트가 없었던 김영만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포워드로 전향, 자신의 농구 인생에 있어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포워드로의 전직이 센터로 뛰었던 만큼 슛거리가 짧아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가 포워드로 완벽히 전향했을 때 센터로서의 경험은 그에게 큰 득이 되었다.


마산 중앙고 시절 그를 가르쳤던 임철진 감독은 고등 학교 시절 김영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무슨 운동을 해도 성공할 선수처럼 보였습니다. 운동 능력이 뛰어 났을 뿐만 아니라, 노력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몇 배로 했으니까요. 모르는 것은 알때까지 배우는 악착성은 전교 1등에게도 뒤지지 않는 다고 생각했어요.』




중앙대 시절 김영만은 이상민의 연세대나 전희철의 고려대만큼 소녀 팬들에게 사랑받지 못했지만, 많은 남성 농구 매니아들의 탄성을 자아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정확한 페이드 어웨이, 센터의 경험을 살린 포스트업, 상대의 퍼스트 스텝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완벽한 대인 방어, 공수 모든 부분에서 뛰어났던 김영만은 외곽슛과 페넌트레이션에만 치중했던 한국 포워드의 기형적인 공격 시스템을 뛰어넘는 플레이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도저히 막을수 없다는 느낌보단 다양한 옵션으로 어떻해든 넣는다란 느낌, 더티 디펜스나 헐리우드 액션으로 한번의 공격권을 가져오겠다는 느낌보다는 타이트한 움직임과 악착같은 수비 정신으로 막는 다는 느낌이 강했던 만큼, 그의 농구에는 남자다운이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비록 호화 멤버를 구축한 연세대와 고려대에 밀려 그들만큼 지금까지 팬들의 뇌리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투혼으로 경기를 했던 경희대와 더불어 많은 명경기를 대학 농구사에 남기며 광기의 시대를 매몰차게 걸어갔다 .





KBL 4년간 '가장 많은 득점'과 '가장 많은 아투 성공'



대학을 졸업한 김영만은 많은 팀들의 스카우트를 제의를 뿌리치고 기아 자동차에 입단하게 된다. 거액의 돈과 여러가지 회유를 뿌리치고 그가 기아에 입단한 이유는 단 한가지. 『 선배 허재, 강동희와 같이 뛰고 싶다. 』라는 일념 한 가지 였다. 이후의 김영만은 말그대로 화룡정점. 허재, 강동희가 대한 민국의 백코트를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공격 부담이 더욱 없어진 그는 더욱 수비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다득점을 할 수 있는 선수임에도 불구 마이클 조던을 보좌했던 미 프로농구 시카고의 불스의 스코티 피펜처럼 팀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선수입장에서는 큰 득이 없는 자질구레한 일에 자신의 농구 인생을 받쳤다.




그렇게 지난 농구대잔치, 그리고 프로 원년. '농구 9단' 허재가 떠난, 긴 왕조의 끝이 드리우는 KBL 원년의 기아 엔터프라이즈에서 강동희가 '2인자의 설움'을 깨끗이 날려버리는 MVP 트로피에 입을 맞출때도 환호의 시선은 김영만에게 한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명지대 출신으로 이상민과 추승균에 처절하게 가려있다가 플레이 오프를 계기로 화려하게 '비상' 했던 조성원과 확연하게 대조되는 상황이였다.

원년부터 세 시즌동안 60%의 2점슛, 43%의 3점슛률, 85%의 자유투율. 다득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절제된 플레이로 많은 지도자들의 극찬을 받았던 김영만. 그런 김영만을 지도자로서 만났던 최인선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센터에서 포워드로 전향한 선수들은 대개 과거에 집착해 돌파에 인색합니다. 그런데 김영만은 외곽이든, 수비든, 돌파든 못한것이 없었습니다. 공격과 수비를 잘하는 선수가 많지 않은 KBL에서 독보적인 권력가질만한 몇 안되는 선수였습니다. 게다가 성실함도 겸비해 감독 입장에선 아주 고마운 선수였지요. 』

프로 원년의 우승, 그 이후로 김영만의 기록들은 과거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다. 기량은 나날이 만개해 나갔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그의 잘나가던 농구 인생의 발목을 붙잡았다. 특히 국제 대회에서 놀라운 예지력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일선에 차단하는 그의 수비력을 잃었다는 것은 한국 농구의 큰 아픔이였다. 앞으로 다가올 한국 농구에서도 나올까 말까한 수비수가 바로 '당랑거사' 김영만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더욱 느끼게 될 것이다. 큰 손과 긴 팔을 이용해서 수비 범위를 넓히는 것은 태생적으로 타고났다고 치더라도, 당시 한국 농구에서는 보기 드물게 스텝에 중점을 두면서 공격수의 슛모션을 일선에 차단하는 장면은 두고 두고 화자가 될 것이라 확신하다.


『 아쉬움은 많이 남습니다. 하지만 농구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 것에 후회란 없는 법이지요. 』라는 말을 남기며 떠날 때가 되었다는 김영만의 뒷 모습에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농구인으로써의 당당함을 느낄수 있었다. 상대 수비수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페이드 어웨이부터 현실에게 매몰찬 홀대를 받으며 외롭게 재기를 꿈꾸고 있던 시간까지 김영만과 함께 했던 환호와 아픔의 시간들이 한 순간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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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07-03-14 15:49:13

어릴때는 기아차멤버들을 너무 싫어했었는데(이훙희의 팬이었던지라..^^;;) 같은 학교
선배라 그런지 어느순간부터 마구마구 응원하고 있게 되있더군요^^(가재는 게편?흐흐)
김영만 선수에 대한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KBL초창기에는 외국인 선수보다도 더 뛰어난
KBL최고의 스몰포워드였지요. 부상으로인해서 선수생활이 다소 짧게 끝나서 아쉽습니다

2007-03-15 20:14:06

정성스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

추승균과 함께 스몰포워드의 정석을 보여 주며, 한국 프로농구와 한국농구에 더 보여줄 것이 많았던 선수인데 아쉽게도 부상이 발목을 잡았네요. 부상으로 만개하지 못한 선수생활과 그의 은퇴식은 팬은 아니지만, 김영만의 중대시절부터 지켜 본 농구팬으로서 많이 아쉽더라고요.

기아의 전성기를 함께 누렸었던 김영만인데, 그의 백넘버를 기억하며 기릴 팀이 없다는 것이 김영만, 자신으로서도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많이 아쉬웠을거라 생각이 듭니다.

비록 선수생활은 부상으로 인해 맘껏 펼치진 못했지만, 모교인 중대에서 못다핀 농구에 대한 열정을 모두 펼쳐주길 바랍니다.

2007-03-15 23:10:31

페니님 글은 무조건 추천~~~

2007-03-16 02:36:50

개인적으로 한국농구는 잘 모른다만 멋진글이네요.
특히 흑백사진들과 노래가 잘 어울려요. Our lady peace인가요? 진짜 오랜만이네;

2007-03-16 09:17:11

저에게만큼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3번이었습니다..ㅠㅠㅠㅠ

아 영만이형....ㅠㅠㅠㅠ

페니님 잘 읽었습니다.

2007-03-16 13:24:51

추승균과 김영만 선수는 공히 안정적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공격에서도 수비에서도... 대학시절부터도 줄곧...
그들의 이름을 듣기 시작한 순간부터 20대 초반의 젊은 플레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머 상대적으로 저도 보는눈이 젊었었겠죠) 주욱...
지금의 국내 어느 선수들은 봐도 그런 안정감을 주는 선수가 없었던것 같네요...
물론, 폭발력을 보여주던 스코어러들이 있기는 하지만, 필요할때 언제라도 득점을 해주고 그것이 3점이건 레이업이건 미들점퍼건... 또 필요하면 언제라도 수비리바를 잡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선수들은 저 둘밖에 없었던듯 싶습니다...
정말 아쉬운데요... 김영만 선수는... 참 아쉽네요...
애매하다... 반지가 없어서 아쉬운것도 아니고...
그냥 KBL 전체가 아쉽다는 생각뿐입니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한강변이나 아파트 단지 농구코트에 가면 중고생들로 가득해서, 끼워달라고 하기도 모했는데,
저희 아파트 단지 농구코트는 이제 롤러장스러워졌습니다... 골대만 덩그러니 서있지...
주 사용은 인라인 스케이팅이라는... 걔네들 보호장치라고 코트라인 따라서 철창 보호벽을 세워놓는 바람에, 어쩌다 인원수 되서 게임하더라도 무척 힘들다는...
아아아... 마지막 승부 이후 한국 농구는 최저점을 보이고 있는듯...

2007-03-23 01:01:00

정말 좋은 글입니다.

마지막 페니의 얼굴의 참 묘하게 다가오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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