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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이야기: 3편-에우메네스의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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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7 19:56:39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반기를 들었다.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는 위기에 몰렸지만,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며 그리스의 자유를 짓밟았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겉으로나마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국의 분열은 이제 시작 불과했다. 이제 불길은 그리스 본토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아시아로 번졌다. 공교롭게도 그 불길이 붙게 된 원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신을 운구하는 페르디카스 병사들


결혼 문제로 고민에 빠진 페르디카스, 그리고 시체 쟁탈전

 

마케도니아 왕국은 어린 알렉산드로스 4세와 정신이상자였던 리포스 3세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왕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인물은 페르디카스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쥐고 있었던 페르디카스는 바빌론에서 왕국을 통치했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그를 방부 처리했다. 이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매우 낯선 일이었다. 그 이전에 마케도니아 왕들은 죽으면 대개 화증을 한 뒤에 아이가이의 돌방무덤에 매장되는 게 관습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 역시 이런 방식으로 매장됐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달랐다. 생전에 그는 아몬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신적인 존재였다. 비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외 대상이었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왕은 죽었지만, 그의 시신은 페르디카스에게 엄청난 명예와 동시에 영향력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아이가이 왕조의 수호자라는 명분과 동시에 왕의 충직한 신하라는 이미지였다.

 

따라서 페르디카스에게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이 매우 중요했다. 그만큼 왕을 신처럼 만들어야 했다. 페르디카스는 무려 1년 가까이 왕의 시신을 아이가이로 운반하기 위한 작업을 펼쳤다.

 

한편,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는 여전히 강력한 패이자, 최후의 패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딸인 클레오파트라를 레오나토스에게 시집보내고자 했지만, 그가 죽으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살아있었기에 올림피아스는 여전히 강력한 패를 쥘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페르디카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시집보내고자 했다.

 

올림피아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클레오파트라가 30대에 접어들면서 그녀가 후사를 낳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촉박했다. 무엇보다 클레오파트라는 정통 왕위 상속자를 낳을 수 있는 몸이었으며, 동시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일한 친형제였기에 그녀와 결혼한 남성은 순식간에 왕족이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운이 좋다면 마케도니아 왕국의 합법적인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에는 두 명의 왕이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필리포스 3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일한 적자인 알렉산드로스 4세는 혈통에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는 위대한 왕이었으나, 그의 어머니인 록사네가 문제였다. 그녀가 페르시아인이었던 까닭에 알렉산드로스 4세는 보수적인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는 남자는 운이 좋다면 두 왕의 이런 허점을 이용해서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올림피아스의 정적인 안티파트로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역시 딸인 니카이아를 페르디카스에게 시집보내고자 했다. 비록 니카이아는 클레오파트라와 달리 정당한 왕위 계승권이나, 정통성을 안겨줄 수 없었지만, 마케도니아 내부에서 안티파트로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와 척을 진다는 말은 곧 마케도니아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페르디카스는 레오나토스처럼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르디카스가 처한 상황은 레오나토스와 달랐다. 레오나토스는 포위당한 안티파트로스를 구하고 나면,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르디카스는 그러지 못했다.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의 반란을 평정한 상태였고, 페르디카스가 그의 제안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로부터 공격당하는 동안 딸들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에게 시집보내서 강력한 동맹 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안티파트로스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페르디카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사위들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컸다.

 

페르디카스의 동생인 알케타스는 니카이아와 결혼하기를 주장했다. 비록 니카이아와 결혼한다면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될 수 없지만, 현상 유지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에 페르디카스는 나카이아와 결혼함과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 이 과정에서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그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권력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던 인물은 페르디카스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이자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애꾸눈안티고노스도 있었다.

 

안티고노스 역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답게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페르디카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할 계획을 알고 있었던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서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페르디카스의 행동은 당연히 안티파트로스의 분노를 샀다. 이는 그에 대한 배신이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사위인 크라테로스와 안티고노스와 함께 페르디카스를 몰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안티파트로스는 페르디카스의 정치적 라이벌인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공고히 했고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넜다. 이 중에는 그의 부관인 폴리페르콘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운구하는 수레를 호송하고 마케도니아의 아이가이아로 향했다. 왕의 미라를 실은 영구차는 가로 4미터, 세로 5미터가 넘었고 원통형 둥근 천장이 달려있었다. 지붕은 금판과 보석을 씌워 장식했으며, 모퉁이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상이 장식됐다. 기둥에는 부조 장식이 달려 있었으며, 생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업적을 보여주는 패널화가 달려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 거대한 장식에 위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영구차를 수송하는 아리다이오스는 페르디카스가 아직 장례 대열을 이끌고 준비하기 전에 길을 떠난 것이다. 파견대는 서둘러 아리다이오스를 추격했으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끌었던 군대와 충돌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혼란한 틈을 타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손에 넣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왕의 주검을 이집트로 가져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잃어버린 것은 페르디카스에게 엄청난 손실이었다. 이제까지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충직한 신하이자 동시에 아기아이 왕조의 보호자라는 명분이 있었고, 이를 통해 가장 강력한 권한을 쥐고 있었다. 페르디카스의 이런 정치적 입지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강력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적자인 알렉산드로스 3세를 보호하고 있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가 왕의 주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시신은 페르디카스에게 매우 쓸모가 있었다. 특히, 페르시아와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점령한 곳이었기에 그의 주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기가 됐다. 그러나 이제 페르디카스가 왕의 시신을 잃어버림으로써 그는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제까지 아이가이 왕조의 보호자이자 알렉산드로스 4세를 보호하고 있었던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잃어버렸다는 점은 다른 장군들은 물론이고, 아시아에서 그를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 신뢰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왕의 시신을 잃어버린 이를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페르디카스는 서둘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되찾아야만 했다. 말 그대로 죽은 자는 산 자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페르디카스의 몰락, 그리고 에우메네스의 도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잃어버린 페르디카스는 두 명의 적과 싸움을 해야만 했다. 한 명은 유럽 본토에서 온 안티파트로스였고, 한 명은 프톨레마이오스였다. 페르디카스에게는 두 명의 적을 한꺼번에 상대할 만한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한쪽을 먼저 공략해야만 했다. 페르디카스의 첫 번째 선택은 프톨레마이아소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되찾을 수 있으며, 두 번째 풍족한 이집트를 정복해서 얻은 막대한 물자로 안티파트로스에게 대항할 수 있었다. 페르디카스는 에우메네스에게 병력을 주며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넌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일파를 저지하도록 했다. 페르디카스는 에우메네스가 이들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기에, 최소한 에우메네스가 시간을 벌어주기만을 바랐따.

 

페르디카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검을 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왕의 누이이자 올림피아스의 딸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페르디카스는 에우메네스를 보내 자신이 안티파트로스의 딸인 니카이아와 결혼을 거부하고 사르디스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안티고노스가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사르디스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후 3,000명을 이끌고 그를 기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페르디카스의 입지가 매우 위험해졌고 그의 미래가 불안정해졌음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녀는 페르디카스의 청혼을 거절했다.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헬레스폰트 해협에 도착한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또한, 사르디스에 있었던 안티고노스 역시 해당 소식을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게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파트로스는 분노했다. 크라테로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의 에우메네스의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에우메네스의 군대는 불안정했다. 이는 에우메네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닌, 그의 출신이 그리스인이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상술했듯이 마케도니아 군대의 장군들 중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에우메네스를 중용하는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에우메네스는 복종해야 하는 인물이었지, 자신들처럼 군대를 이끌고 지휘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를 따랐지만, 페르디카스 군대 내에서도 그에게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페르디카스의 동생인 알케타스는 에우메네스에게 비협조적이었다. 페르디카스는 전력을 보내 에우메네스를 전력으로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알케타스는 이를 듣지 않았다. 또 다른 장군인 네오프톨레모스는 에우메네스를 배신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는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에우메네스를 배신할 계획을 알렸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역시 에우메네스를 설득하고자 했다. 이들은 가능한 한 싸움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에우메네스가 그들의 편에 선다면 완전한 사면을 보장함과 동시에 새로운 권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에게 군대를, 그것도 마케도니아의 기병대 지휘관 업무를 시험해본 것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 역시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페르디카스를 배신하지 않았다. 동시에 네오프톨레모스가 적과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필자 개인적으로 에우메네스의 행동은 여러모로 납득이 된다. 첫 번째, 만약 그가 페르디카스를 배신하고 이들의 편에 섰다면 불안정한 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이는 에우메네스가 마케도니아인이 아닌 그리스인이라는 점이 크다. 보수적인 마케도니아인들로 가득찬 안티파트로스 진영에서 에우메네스 같은 그리스인이 힘을 얻기란 어렵다.

 

두 번째,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검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가 있었다. 비록 주인의 시신을 빼앗김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불안정해졌음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됐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적자이자 유일한 후계자라고 평가할 수 있는 알렉산드로스 4세의 존재는 거대했다.

 

이런 페르디카스를 에우메네스가 배신했다면, 사람들은 그가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손가락질했을 것이며 에우메네스는 중용 받지 못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적자를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안티파트로스가 젊었다면 에우메네스가 그의 약속을 바탕으로 살아남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안티파트로스는 일흔을 훨씬 넘긴 상태였기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노장이었다. ,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물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에우메네스가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의 제안을 거절한 일은 그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도박을 벌인 일임에도 본인 스스로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높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에우메네스의 칼은 결국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토스에게 향했다. 그는 제일 먼저 네오프톨레모스의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네오프톨레모스는 기병 300명만을 이끌고 간신히 도망쳤다. 그리고 남은 병사들은 에우메네스에게 충성했다.

 

크라테토스는 네오프톨레모스와 합류하여 에우메네스를 없애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 북부로 향했다. 전장에 도착한 크라테로스는 에우메네스 휘하의 마케도니아의 병사들이 자신을 따를 것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었기에 병사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우메네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와 싸울지 병사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크라테로스가 직접 군대를 이끄는 곳에는 아시아 기병대만을 배치했고, 그들에게 적이 보이는 대로 즉각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마케도니아인 부대는 크라테로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여 상황을 알아차리지 않게 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크라테로스는 전투가 시작된 이후에야 자기가 원하는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향해 돌격해오는 병사들 중 마케도니아인들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그 누구도 자기편으로 넘어올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라테로스와 그의 병사들은 에우메네스 군대와 맞서 싸웠다. 하지만 크라테로스는 전사했다. 지휘관이 죽자 그의 부대는 퇴각했다.

 

 

네오프톨레모스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에우메네스 

 

한편, 에우메네스는 네오프톨레모스가 이끄는 기병대와 맞붙었다. 두 사람은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 둘 다 말을 타고 있었지만, 서로 상대의 투구를 벗기기 위해 고삐를 놓았다. 두 사람은 말에서 떨어졌다. 그 사이 에우메네스는 네오프톨레모스의 뒷다리를 찔러 그가 일어서지 못하게 했다. 주저앉은 네오프톨레모스는 에우메네스의 팔과 허벅지를 공격했지만,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 결국, 네오프톨레모스는 에우메네스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전투가 끝난 이후 에우메네스는 크라테로스의 시신을 거두어 화장을 치렀다. 에우메네스의 군대 중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에우메네스는 크라테로스의 유골을 보관했다가 그의 미망인에게 전했다.

 

하지만 크라테로스의 죽음은 에우메네스 본인에게도 여러모로 난감한 일이었다. 에우메네스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리스인이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장군을 죽였다는 사실은 안티파트로스와 그를 따르던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동시에 에우메네스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이제 에우메네스의 적들은, 그리고 그의 정적들은 이 그리스인과 무조건 싸우기보다 그와 회유할 방법이 더 나았음을 깨달았다.

 

 

문제는, 페르디카스는 에우메네스가 크라테로스와 전투에서 승리한 사실을 몰랐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를 격파하기 위해 나일 강으로 향했다.

 

서아시아 영토에서 이집트를 꺾기 위해서는 나일 강을 건너야만 한다. 페르디카스의 군대는 강을 건너 프톨레마이오스를 공략하고자 했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아래 잘 조련 받았던 이들로 비가 내리고 천둥이 내리는 밤에 도강(渡江)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둑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가 이들을 공격했다. 페르디카스의 병사들 중 절반만이 삼각주에 도착했다.

 

또 다른 문제는, 코끼리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도를 격파한 이후 코끼리 병사들을 양성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무거웠기에 나일 강을 건너는 데 한계가 있었다. 코끼리가 강을 건너자 강바닥 진흙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수심이 깊어졌다. 발이 닿지 않자 병사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나일 강에 서식하는 악어들이 몰려와서 이들을 먹어치웠다. 페르디카스가 이끄는 병사들의 절반만이 삼각주에 도착했을 뿐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익사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예를 갖춰 화장을 거행했다. 이는 부하들의 시신을 나일 강 악어들의 먹이로 내버려둔 페르디카스와 달리 자신은 적들의 목숨도 소중하게 여긴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동시에 적도 자신의 편에 선다면 관대하게 대접하겠다는 의도도 담겨져 있었다.

 

페르디카스는 병력에서도 밀렸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 역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밀렸다.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아니라 자기의 부하인 페이톤과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 등에게 목숨을 잃었다.

 

한때 알렉산드로스 대왕 최고위 친위대장이자 인장반지를 상속받았던 페르디카스의 삶은 허무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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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019-05-18 18:28:08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제국이 쪼개졌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상세한 내용은 처음 알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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