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Free-Talk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이야기: 2편-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8
  817
Updated at 2019-05-03 19:33:59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으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은 이제 팽창이 아닌, 그들의 영토를 지키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국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많았다. 두 명의 왕은 사실상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실질적인 권력은 페르디카스와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과 마케도니아 본토의 안티파트로스가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던 곳은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었다.

 

 

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고향이라고 평가받는 곳이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매우 불안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불안정이란 그들의 체제가 불안정했다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외부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에서 패할 경우 그 대가로 아테네 시민들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아테네 시민들이 포기해야 할 것 중 가장 컸던 것이 바로 민주정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했던 아테네는 그 대가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함대를 상실했다. 여기에 장벽과 민주정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1년 만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고자 했던 테베를 지원하면서 민주정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후 벌어졌던 코린토스 전쟁에서 페르시아의 지원 속에 함대와 장벽을 되찾았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동맹은 대가가 컸다. 페르시아는 아테네의 성장을 저지했고, 이에 반발했던 동맹국들이 들고 일어나서 다시 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전쟁 이전에 민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약 4만 명에 달했던 시민은 이후 약 15,000명으로 감소했으며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는 겨우 25,000여 명 정도로 늘어나는 데 그쳤을 정도로 힘이 약해졌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내분으로 힘이 약해졌을 때 기회를 잡았던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인 필리포스 2세였다. 필리포스 2세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차례대로 격파했고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을 상대로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하며 그리스 전체를 손에 넣었다.

 

비록 아테네를 점령했지만, 필리포스 2세는 관용을 베풀어 그들이 민주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 아테네는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세울 권한을 상실했고 마케도니아를 지지하고 그 지도를 받겠다고 서약한 그리스 동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언제든지 반격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하자 데모스테네스를 중심으로 반()마케도니아 세력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신들린 용병술을 바탕으로 단번에 그리스 동맹 국가들의 저항을 격파했다. 특히, 테베는 쑥대밭이 됐다. 다행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압박하지 않았지만, 승리의 대가로 데모스테네스의 추방을 요구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길을 떠나면서 실질적으로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 인사는 안티파트로스였다. 동시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아리스토텔레스가 맞다)와 포키온과 같은 친 마케도니아 인사들이 아테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은 이제까지 유지됐던 아테네 정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상술했듯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가 아니었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기를 꺼렸다. 특히, 아테네와 같은 민주정 국가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조국을 떠난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제2의 알렉산드로스가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귀향하기를 희망했다. 데모스테네스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돌며 마케도니아를 공격해서 그들을 그리스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아테네로 다시 돌아왔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친 마케도니아 인사들은 입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포키온인 경우 마케도니아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살길이라며 전쟁을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불경죄로 아테네에서 추방됐다. 사실상 아테네와 마케도니아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리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안티파트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와 충돌했다.

 

아테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해체한 그리스 용병들의 대장인 레오스테네스를 고용했다. 레오스테네스는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끈질기게 맞서 싸웠던 인물이었다. 레오스테네스는 총사령관으로 선출됐고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와 싸웠다.

 

레오스테네스와 안티파트로스는 테르모필레에서 맞붙었다. 이곳은 페르시아 전쟁 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상대한 곳으로 그리스에게 상징적인 장소였다. 레오스테네스는 테살리아 기병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수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근처의 테살리아 도시인 라미아로 퇴각해 방어에 전념했다. 레오스테네스는 도시로 들어가는 보급품을 차지하여 안티파트로스와 마케도니아 군대를 압박했다. 아테네 군대는 승리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승리는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법이다. 성안에서 농성을 하기에 끝내 한계에 직면했던 안티파트로스는 레오스테네스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레오스테네스는 조건은 승자가 정할 것이라며 휴전을 거부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케도니아 군대가 성벽 밖을 나서 참호를 파고 있던 그리스 병사들을 공격했다. 레오스테네스는 지원군을 이끌고 달려갔는데, 성벽 가까이 다가갔다가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었고 이틀 후 사망했다.

 

뛰어난 지휘관의 죽음은 패배로 이어지는 법이다. 그리스 연합군에서 레오스테네스만큼 과감한 결단력과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는 이는 없었다.

 

 

올림피아스, 드디어 움직이다

 

한편, 그 시각 마케도니아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티파트로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올림피아스는 그를 경멸했다. (이는 안티파트로스가 그의 두 아들인 카산드로스와 이올라오스를 시켜 알렉산드로스를 독살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이 죽은 현시점에서 가장 불안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올림피아스는 권력에 대해 한없이 민감했던 여성이다. 일부 매체에서는 올림피아스의 남편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올림피아스를 져버리고 다른 여자와 만났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일부다처제 국가였던 지라 이 묘사는 옳지 않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필리포스 2세가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은 올림피아스의 정치적 입지를 확실히 위협했다. 왜냐하면, 다른 여성들이 낳는 아들이 자신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올림피아스가 필리포스 2세가 나중에 결혼한 부인과 태어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던 딸 에우로파를 죽였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필리포스 3세에게 독을 먹여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으면서 올림피아스를 이런 위험에서 구해줄 수 있는 세력은 약했다. 손자인 알렉산드로스 4세가 있지만, 그는 갓난아기에 불과했다. 이에 올림피아스는 예방 조치가 필요하다 여겨 새로운 남성 보호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자신이 아이가이 왕조와 결혼하여 그들의 후계자를 낳았던 것과 똑같은 방법이 필요했다.

 

이에 올림피아스가 선택한 카드는 바로 딸인 클레오파트라였다. 올림피아스는 딸을 아들의 친위대이자 귀족인 레오나토스에게 시집을 보내고자 했다. 아시아에 있는 레오나토스를 마케도니아로부터 불러들여 이곳의 상황을 정리함과 동시에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는 올림피아스가 가진 유일한 패이자, 동시에 가장 강력한 수였다.

 

그런데 이때 올림피아스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적인 안티파트로스 역시 레오나토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안티파트로스는 포위된 상황이었기에 도움이 절실했다. 그 역시 레오나토스가 도와주는 대가로 딸과 결혼을 제안했다. 동시에 크라테로스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다. 그만큼 안티파트로스가 처한 상황은 급박했다.

 

두 쪽의 제안 모두 좋았다. 이 상황에서 레오나토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게 자신에게 적합한지 간을 보는 것이었다. 우선 레오나토스는 기습을 통해 안티파트로스를 구할 생각이었다. 이후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서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더라도 안티파트로스를 구해냈기 때문에 그에게 모욕을 준 게 아니다.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으로 강력한 권력을 쥘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레오나토스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는 점이다. 레오나토스의 곁에는 페르디카스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에우메네스가 있었다. 레오나토스는 자기 생각을 에우메네스게에 밝혔다. 자신이 아이가이 왕가와 제국을 장악한다는 목적은 숨겼지만, 눈치가 빨랐던 에우메네스는 어쩌면 안티파트로스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동시에 레오나토스의 야심을 간파했다. 이에 에우메네스는 밤 몰래 레오나토스 곁을 탈출해 페르디카스에게 향했다.

 

다음날 에우메네스가 도망친 사실을 깨달은 레오나토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페르디카스와 맞대결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기에 서둘러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

 

마케도니아에 귀향한 레오나토스는 약 2만 명의 대군을 모아 안티파트로스를 돕기 위해 남진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주력은 기병인 헤타이로이였는데, 레오나토스가 이끄는 헤타이로이의 숫자는 기르시 기병대의 절반인 1,500명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알아챈 그리스 군대는 레오나토스가 안티파트로스와 합류하기 전에 그와 기병대 전투를 벌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리스 군대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됐다. 레오나토스가 이끌었던 헤타이로이는 늪지대에 빠지자 안 그래도 열세였던 전투가 더욱 힘에 부쳤다. 그리고 레오나토스는 테살리아 기병대의 창에 찔려 전사했다.

 

그리스 군대는 기세를 몰아 마케도니아의 보병대인 페제타이로이를 격파하고자 했지만, 페제타이로이는 팔랑크스 진형을 앞세워 사리사를 내밀고 그리스 군대의 공격을 저지했다.

 

비록 레오나토스를 잃었지만, 안티파트로스는 페제타이로이의 견고한 방어 덕분에 마케도니아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레오나토스의 죽음으로 궁지에 몰린 인물은 이제 올림피아스였다.

 

 

꺼져버린 그리스의 불꽃

 

레오스테네스가 전사함으로써 아테네 군대는 통솔력을 상실했다. 그리스 군대는 레오나토스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어느 정도 기세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케도니아에는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다. 그중 한 명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갈등했던 크라테로스였다. 마케도니아로 귀환하고 있었던 크라테로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안티파트로스 군대에 합류하고자 했다. 안티파트로스는 이 해협을 반드시 장악해야만 했는데, 당시 아테네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가 이곳을 지키기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는데, 당시 아테네는 그럴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군선을 유지하려면 힘과 경험, 기술력 모두를 갖춘 사람이 필요한데, 마케도니아와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에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아시아는 페르시아를 포함해 페니키아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죽기 전 안티파트로스에게 110척의 배와 돈을 보냈다. 그리고 크라테로스를 따라나섰던 클레이토스가 이끄는 함대가 합류했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아모르고스에서 아테네 해군에 승리했다. 바다의 주도권을 잡은 마케도니아 군대는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는 데 성공하면서 그리스 본토로 진입했다.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는 안티파트로스 군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크라테로스는 안티파트로스의 딸인 필라와 재혼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준 페르시아 공주 아마스트리스를 아시아에 놔뒀다.

 

5만 명에 달하는 마케도니아 군대는 그리스 연합군대를 격파했다. 그리고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도시마다 별도의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그중에서도 아테네를 가장 가혹하게 다뤘다. 안티파트로스는 아테네의 힘을 워낙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아테네와 관계를 절연하기를 원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항복 문제로 논의하는 동안 안티파트로스는 테살리아의 도시들을 습격하면서 이들을 위협했다. 그 결과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아테네와 관계를 끊었다.

 

이제 안티파트로스는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아테네 민회에서 상황은 다시 역전됐다. 전쟁에 패하기 전까지 아테네 민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이들은 데모스테네스와 히페리데스 같은 반마케도니아 세력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한 지금 아테네를 장악하고 있었던 이들은 포키온을 비롯한 친 마케도니아 세력이었다. 포키온이 이끄는 친 마케도니아파들은 협상단을 이끌고 안티파트로스에게 만났다.

 

하지만 포키온에게 우호적이었던 안티파트로스조차 이번에는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티파트로스는 조건은 승자가 정하는 것이라는 레오스테네스의 말을 아테네에 되돌려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안티파트로스는 데모스테네스와 히페리데스 등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아테네의 민주정을 과두정치로 바꾸고, 아테네의 피레에프스 항구는 마케도니아 군대의 주둔지로 만들기를 요구했다. 또한, 아테네가 마케도니아가 치렀던 전쟁 비용을 모두 부담할 뿐만 아니라 추가 벌금을 내라고 명령했다.

 

결국, 아테네는 안티파트로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티파트로스의 이 같은 항복 조건은 아테네에 가혹했다. 당시 아테네는 최소 2000드라크마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시민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금권 정치 체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안티파트로스의 이 같은 항복 조건으로 인해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하며 권력을 누렸던 시민들은 참정권을 빼앗기자 분노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판의 화살을 마케도니아에서 친 마케도니아 세력에게 향했다.

 

한편, 히페리데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항복 조건을 듣기 전에 아테네를 탈출했다. 두 사람은 아이이나 섬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현상금 사냥꾼들은 그들을 추격했다. 히페리데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여기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히페리데스는 추격자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의 혀는 머리에서 잘려나갔다. 또한, 마케도니아에 저항한 대가이자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대한 경고로 시신을 묻지 않고 내버려 뒀다.

 

추격자들은 데모스테네스를 끝까지 추격했다. 데모스테네스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신전의 담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팬을 입에 갖다 댔고 거기에 감추었던 독을 먹어 자살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저항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국의 분열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불길은 이제 그리스를 떠나 아시아로 번졌다.

1
Comment
2019-05-18 18:30:59

점점 흥미진진해집니다. +.+

14:44
8
1184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