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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F1 역사] 뿌리(?)를 찾아서 -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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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4-28 20:20:55

 F1 팀들의 뿌리를 찾는 두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메르세데스에 이어 오늘은 F1 역사의 산 증인이자 F1에 참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특별 대우를 받는 팀 페라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페라리는 팀이 바뀐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에 이번글은 페라리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주를 이룰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Scuderia Ferrari Mission Winnow

 

 이전 팀들

 

 스쿠데리아 페라리 ( 1950 ~ )

 

 대표적인 드라이버

 

 알베르토 아스카리, 후안 마누엘 판지오, 마이크 호손, 필 힐, 존 서티스, 잭키 익스, 클레이 레가초니, 니키 라우다, 조디 쉑터, 쥘 뷜너브,  나이젤 만셀, 알랭 프로스트, 게르하르트 베르거, 에디 어바인, 미하엘 슈마허, 루벤스 바리첼로, 필리페 마싸, 페르난도 알론소, 키미 라이코넨, 세바스티안 베텔 등등등...

 

 역사

 

  •  F1 이전 ( ~ 1950)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1929년 엔초 페라리에 의해 설립된 팀이고 그 시작은 같은 이탈리아 자동차 메이커인 알파로메오 산하의 레이싱 팀이었습니다. 그때문에 페라리의 역할은 알파로메오의 이름을 걸고 레이스 대회에 참가하거나 알파로메오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1938년, 알파로메오는 직접 레이스에 참가하기 위해 알파 코르세(Alfa Corse)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들어 페라리를 흡수하려고 했습니다.

 페라리에 대한 간섭을 극도로 싫어했던 엔초 페라리는 알파로메오와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4년간 페라리라는 이름으로 레이스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알파로메오를 나오게 됩니다.

 이듬해인 1939년 레이스카를 제작했지만 앞서 얘기한 조건때문에 'Tipo 815' (8은 실린더 갯수, 15는 1.5리터 배기량에서 따왔다고 합니다.)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차는 페라리가 독자적으로 만든 첫 레이스카였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페라리는 기계 공구를 만드는 일에 투입되어 수년 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1947년 페라리는 비로소 자신들의 이름을 건 첫 레이스카인 12기통 1.5리터 엔진의 'Tipo 125'를 선보였습니다. 이 차는 F1을 위해 '페라리 125 F1'이라는 이름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Tipo 815

 

 

  •  1950년대

 

 1950 F1 챔피언십이 탄생했고 페라리는 그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앙숙으로 바뀐 알파로메오의 전력은 너무나 강했고 인디500을 제외한 모든 레이스에서 알파로메오가 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1951 시즌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호세 프로일란 곤잘레스가 영국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거두며 페라리에게 첫 우승을 안겨줌과 동시에 알파로메오의 연승 행진을 끊었습니다.

 1951 시즌을 끝으로 알파로메오가 재정적인 이유로 F1에서 철수하면서 페라리는 최강자의 자리로 우뚝 올라섰는데, 1952시즌 알베르토 아스카리, 쥐세페 파리나, 피에로 타루피 3명을 앞세운 페라리는 1950 시즌 알파로메오가 그랬던것 처럼 인디500을 제외한 모든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953 시즌이 끝나고 아스카리가 연봉 문제로 마찰을 겪으면서 란치아로 팀을 옮긴데다 15년만에 등장한 메르세데스가 판지오를 앞세우면서 페라리는 1인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1955년 란치아가 아스카리의 죽음과 재정적인 압박으로 인해 F1에서 철수하며 페라리는 란치아의 섀시를 구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라이버 라인업도 판지오, 피터 콜린스, 에우제니오 카스텔로티로 대폭 물갈이하며 페라리는 1956 시즌 8경기에서 5승을 거두며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다음 시즌에도 페라리는 란치아의 섀시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로 인해 점점 경쟁력이 떨어진데다 판지오까지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세라티로 이적하면서 1957시즌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58년에는 루이지 무쏘와 피터 콜린스가 나란히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콜린스와 절친했던 마이크 호손까지 시즌이 끝나자마자 은퇴를 선언하며 (호손도 몇달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페라리는 큰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Ferrari Tipo 500 (1952, 53)

 

  •  1960년대

 

 1960년 페라리는 힐과 앨리슨에 볼프강 폰 트립스, 윌리 마레세(Willy Mairesse), 리치 긴터를 더한 드라이버 라인업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앨리슨이 큰 부상을 당하며 전력에서 이탈했고 힐이 팀의 유일한 우승을 안겨주었습니다.

 1961년 엔진 규정이 1500cc로 바뀌면서 페라리는 F2 섀시를 기초로 만든 페라리 156 모델을 선보였고 강력한 레이스카 성능을 바탕으로 시즌을 압도했습니다. 그러나 폰 트립스가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더블 챔피언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아픈 해로 기억되고 말았습니다.

 1962년 페라리 156을 디자인했던 카를로스 치티(Carlos Chiti)와 감독인 로몰로 타보니가 ATS라는 팀을 만들며 빠져나갔고 남아있는 드라이버는 힐과 시즌 도중 들어온 지안카를로 바게티 2명이었지만 여기에 신예 드라이버였던 로렌조 반디니와 리카르도 로드리게즈를 영입하며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치티가 빠져나간 공백은 컸고 156 모델을 1년더 사용한 페라리는 1승도 거두지 못하는 부진에 빠지고 말았고 이탈리아에서 금속 공업자들의 파업과 여러가지 문제까지 겹치면서 엔초 페라리는 마지막 두번의 레이스에서 아예 손을 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로드리게즈가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드라이버 라인업에 다시 한번 큰 구멍이 뚫리고 말았습니다.

 1964년 158 모델을 선보인 페라리는 팀에서 2년차를 맞이한 존 서티스가 2승, 반디니가 1승을 거두면서 더욱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지만 서티스가 1966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감독이었던 에우제니오 드라고니(Eugenio Dragoni)와 다툰 끝에 팀을 떠나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서티스의 빈자리는 마이크 팍스(Mike Parkes)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67년은 페라리에게 가슴아팠던 한해인데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반디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데 이어, 팍스가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심한 부상을 당하면서 커리어를 마감하고 말았고 1963년부터 페라리에서 뛰었던 루드비코 스카피오티(Ludvico Scarfiotti)마저 팍스의 사고를 보고 충격을 받아 은퇴를 선언하며 팀의 드라이버중 3명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1968년도 다사다난 했는데 새롭게 들어온 잭키 익스(Jackey Ickx)가 1승을 따내며 고분분투했지만 1년만에 브라밤으로 떠나버렸고 엔초 페라리는 로드카 사업을 피아트에 매각했습니다.

 

 

Ferrari 156

 

 

  •  1970년대

 

 1970년 페라리는 새롭게 디자인한 312 모델을 선보였고 브라밤으로 떠났던 익스가 돌아와 3승을 거두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몇년간 페라리는 침체를 겪었는데 리카르도 로드리게즈의 형이자 페라리 드라이버였던 페드로 로드리게즈가 1971년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1973년에는 F1에 참가한 이후 처음으로 네덜란드와 독일 그랑프리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1974년 페라리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동안 참가해오던 스포츠카 레이싱을 과감히 접고 F1에 주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F1팀 수장으로 그 유명한 루카 디 몬테제믈로가 부임했고 니키 라우다가 드라이버로 영입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성과를 거두어 클레이 레가초니(Clay Regazzoni)가 에머슨 피티팔디에 이어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를 차지하며 만족할만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1975년 페라리는 라우다가 드라이버 챔피언, 팀이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따내며 더블 챔피언에 성공하며 F1에 우뚝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듬해인 1976년 독일 그랑프리에서 라우다가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었고 6주만에 복귀하며 투혼을 불태웠지만 제임스 헌트에게 단 1포인트 차이로 챔피언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그랑프리였던 일본 그랑프리에서 폭우로 인해 라우다가 레이스를 포기하고 말았는데 (화상으로 인한 후유증때문에 빗속에서 레이스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엔초가 격분하며 둘 사이가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1977 시즌 라우다는 여전히 건재했지만 팀에는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던 카를로스 로이테만(Carlos Reutemann)이 들어왔고 이해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우다는 브라밤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1978년 라우다의 빈자리는 쥘 뷜너브가 매꾸었고 로이테만과 뷜너브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5승을 차지했지만 로터스의 강력함에 밀리며 챔피언을 모두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1979 시즌 페라리는 다시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가져왔고 로이테만 대신 들어온 조디 쉑터가 드라이버 챔피언십까지 차지하며 다시 한번 더블 챔피언에 성공했습니다.

 

Ferrari 312T (1975)

 

 

  •  1980년대

 

 1980 시즌 페라리는 전 해의 성공을 유지하는데 실패하며 단 8포인트만 따내는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리타이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1년 페라리는 쉑터대신 디디에 피로니를 뷜너브의 파트너로 영입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터보 차저 엔진을 도입하게 되었는데 첫 해에는 적응에 문제를 드러냈지만 시즌이 계속될수록 점점 나아졌고 뷜너브가 2승을 거두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82년은 전년도의 경험을 살려 가장 좋은 레이스카를 가진 팀이 되었지만 뷜너브가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피로니가 독일 그랑프리에서 커리어를 마감하는 큰 부상을 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고 말았습니다. 뷜너브의 자리는 페트릭 탐베이, 피로니의 자리는 마리오 안드레티로 대신했고 결국 컨스트럭터 챔피언은 차지하지만 전혀 기뻐할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이 해 페라리의 팩토리가 현재 위치인 피오라노 테스트 서킷 옆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1983년 안드레티 대신 르네 아누(Rene Arnoux)를 영입하며 팀은 2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지만 드라이버 챔피언 획득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984년 이번에는 탐베이가 르노로 떠나면서 그 자리를 전 시즌 티렐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미쉘 알보레토로 매꾸었지만 레이스카 성능도 밀렸던데다 라우다와 알랭 프로스트라는 걸출한 드라이버 라인업을 자랑했던 맥라렌에게 점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1985 시즌 알보레토는 프로스트와 드라이버 챔피언을 두고 경쟁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번에는 아누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 도중 스테판 요한손으로 교체되고 말았습니다.

 1986 시즌 알보레토와 요한손은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부진에 빠졌고 1987년 요한손은 게르하르트 베르거로 교체되었습니다. 베르거는 곧바로 알보레토보다 좋은 성적을 꾸준히 내면서 팀내 입지를 굳혀가기 시작했습니다.

 1988 시즌 페라리는 컨스트럭터 2위를 차지했지만 이 해 맥라렌이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제외하고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역대급 성적을 기록하며 철저히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해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앞두고 엔초 페라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엔초의 시대도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1989년 F1은 터보 차저 엔진에서 자연 흡기 엔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페라리의 로비와 다른 시리즈에 참가하겠다는 위협도 섞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 페라리는 F1을 크게 바꿀만한 시스템을 선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반자동 기어박스 (패들 시프트로 많이 알려진) 였습니다. 시즌 초반에는 신뢰성 문제로 애를 먹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베르거와 개막 전 영입한 나이젤 만셀이 몇 차례 우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Ferrari 640 (1989)

 

 

  •  90년대

 

 1990년 페라리는 맥라렌을 떠난 프로스트를 영입하며 프로스트 & 만셀이라는 어마어마한 드라이버 라인업을 구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스트 위주의 팀 운영에 불만을 느낀 만셀 (만셀에게 얘기없이 차 셋팅을 바꾸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은 시즌이 끝나자마자 팀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991년 만셀을 대신해 장 알레시를 영입했지만 더이상 페라리의 자랑이었던 V12 엔진은 경쟁력이 떨어져있는 상태였고 레이스카에 불만을 느낀 프로스트가 트럭같다는 표현을 쓰며 레이스카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자 팀에서는 가차없이 프로스트를 해고해 버렸습니다.

 결국 프로스트까지 떠나버린 페라리는 1993년까지 단 1승도 올리지 못하는 부진을 겪게 되었습니다.

 1993년 베르거가 다시 페라리로 돌아왔고 팀의 수장으로 장 토트가 부임하면서 페라리는 성적을 점차 끌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페라리는 드라이버 라인업을 대대적으로 교체하게 되는데 조던 팀에서 달렸던 에디 어바인과 무려 3000만 달러의 연봉을 주고 베네통에서 미하엘 슈마허를 영입해 오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슈마허를 영입하면서 베네통의 엔지니어들도 대거 영입했는데 거기에는 테크니컬 디렉터였던 로스 브런과 수석 디자이너였던 로리 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로써 페라리는 앞으로 몇년간 F1을 지배하게 되는 토트-브런-슈마허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 페라리는 신뢰성 문제로 고생하지만 슈마허가 3승을 따내며 팀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이듬해인 1997년 슈마허는 아깝게 드라이버 챔피언을 놓친데다 마지막 그랑프리였던 유러피언 그랑프리에서 자크 뷜너브와 일으켰던 충돌이 문제가 되어 드라이버 챔피언십 포인트를 모두 몰수당했습니다.

 1998 시즌 페라리는 레이스카 성능에서 경쟁자인 맥라렌보다 떨어지는 상황이었지만 브런의 전략과 슈마허의 실력을 이를 극복하며 6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일본 그랑프리에서 슈마허가 레이스카 문제로 부진하며 미카 하키넨과 맥라렌에게 드라이버,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모두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1999시즌 페라리는 첫 4개의 그랑프리 중 3개에서 우승하며 기분좋은 출발을 했지만 슈마허가 영국 그랑프리에서 큰 부상을 당하며 6경기를 빠지며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바인이 슈마허가 빠진 동안 좋은 성적을 거두며 퍼스트 드라이버 역할을 해냈고 하키넨과 최종전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친 끝에 3포인트 차이로 드라이버 챔피언을 내주었지만 83년 이후 16년만에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우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Ferrari F310 (1996)

 

 

  •  2000년대

 

 2000년 페라리는 어바인을 대신해 루벤스 바리첼로를 슈마허의 파트너로 영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4년까지 페라리와 슈마허는 드라이버 챔피언과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독식하며 페라리의 전성시대를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성기도 2005년을 끝으로 저물기 시작하는데 2005 시즌의 레이스카였던 F2005의 성능은 다른 팀들과 비교하면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었고 잦은 고장을 일으키며 슈마허와 페라리는 드라이버와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각각 3위를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해를 끝으로 바리첼로가 혼다로 떠나고 말았고 레이스카 문제의 책임을 지고 로리 번이 팀을 떠나면서 페라리의 굳건했던 시스템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첼로를 대신해 마싸가 들어온 2006년, 슈마허는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고 마지막 레이스였던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타이어 펑쳐에도 불구하고 4위를 기록했고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는 르노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슈마허와 페라리의 시대는 끝을 맺었습니다.

 슈마허가 은퇴를 선언하자마자 팀에서는 곧바로 드라이버 영입에 착수해 2007년 키미 라이코넨을 영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라이코넨은 페라리에서의 데뷔전이었던 호주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만셀 이후 페라리 데뷔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첫 드라이버가 되었고 그 기세를 이어가 1포인트 차이로 드라이버 챔피언까지 따내는데 성공했고 팀도 오랫만에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경쟁자였던 맥라렌이 시즌후 터진 스파이게이트에 연류되어 컨스트럭터 포인트가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2007 시즌이 끝난후 페라리의 회장이었던 몬테제믈로는 대대적인 팀내 인사 개편을 발표했는데 팀 수석이었던 토트가 CEO로 승진했고 그 자리에 스테파노 도메니칼리가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로스 브런이 혼다의 팀 수석으로 떠난 자리를 알도 코스타가 매꾸며 팀내 중요직을 대부분 이탈리아인들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2008 시즌 페라리는 다시 한번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지만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는 마싸가 1포인트 차이로 해밀턴에게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2009년은 마싸와 페라리 모두 힘든 한해였는데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마싸가 바리첼로의 레이스카에서 튀어나온 스프링에 머리를 맞으면서 큰 부상을 당해 한동안 레이스에 빠지고 말았고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도 레이스카 성능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하며 브런 GP에게 우승을 내주었습니다.

 

 

Ferrari 2002

 

  •  2010년대

 

 2010년 페라리는 계약이 1년더 남아있던 라이코넨 대신 르노에서 페르난도 알론소를 영입했습니다. 알론소는 기대에 걸맞게 마지막까지 챔피언십 선두를 유지했지만 최종전이었던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7위를 기록하며 레드불의 신예 드라이버였던 세바스티안 베텔에게 챔피언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때 이탈리아의 분노는 대단해서 몬테제믈로 회장이 이탈리아 국회 청문회까지 불려갔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그 이후 2013년까지 알론소와 페라리는 베텔과 레드불에 가로막히며 4년 연속 더블 챔피언을 차지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2014년 마싸 대신 라이코넨을 다시 영입했지만 성적은 더욱 떨어지면서 1993년 이후 처음으로 페라리는 시즌 1승에 실패하며 체면을 구기고 말았습니다. 이에 책임을 지고 회장이었던 몬테제믈로와 팀 수석이었던 도메니칼리가 나란히 물러나고 세르지오 마르치오네가 회장으로, 마우리치오 아리바베네가 팀 수석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드라이버 라인업에도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맥라렌으로 떠난 알론소를 대신해 레드불에서 베텔을 영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팀을 대대적으로 바꾼 2015 시즌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페라리는 34경기만에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2승을 더 보태며 베텔이 3위, 라이코넨이 4위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그 이후 2018시즌까지 베텔과 라이코넨의 드라이버 라인업으로 챔피언에 도전했지만 메르세데스에게 번번히 막히며 챔피언십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2019시즌 페라리는 팀 수석을 마티아 비노토로 교체했고 베테랑 드라이버들을 기용하던 기존의 방침을 버리고 리카르도 로드리게즈 이후 무려 50년만에 자우버에서 샤를 르끌레르를 영입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르끌레르는 기대에 걸맞게 챔피언십 4위로 페라리에서의 첫 시즌을 마무리 했습니다.

 

 이것으로 페라리의 팀 역사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F1에 새바람을 몰고왔던 레드불에 대해서 써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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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0-03-30 17:04:05

잘 읽었습니다.
이번 시즌은 베일님 경기리뷰 못 보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라도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WR
2020-03-30 17:26:08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저도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가면서 F1 글을 쓰면서 알게되는 사실도 많기 때문에 쓸때마다 재미있네요.

 앞으로 남은 7팀도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2
Updated at 2020-03-30 18:15:18

역시나 양질의 글 감사합니다!!
다만 르끌래르는 19년도 드라이버 챔피언십 4위로 알고 있습니다.(3위는 베르스타펜)

WR
1
2020-03-30 20:43:44

아악 요새 왜이럴까요
얼른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2020-03-31 09:26:56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WR
1
2020-04-01 13:24:52

 저야말로 항상 읽어주는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1
2020-03-30 18:24:02

몇몇 경기를 제외하고 F1에 꾸준히 개근중이라 그에 대한 공로로 추가상금도 가져가는게 페라리죠 

다만 이게 계속 논란이 되어서 (이제 그만 할때도 되지 않았냐? 라는 거죠)

다음 콩고드 협정때에는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전 레이싱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말할때

엔초 페라리가 스쿠데리아 페라리에 대한 자금조달을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자동차 회사 페라리를 만든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케로군으로 알려진 윤재수 해설위원께서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정확히 말하면 아예 틀린말은 아닌데 (어찌되었든 차 팔아서 레이싱팀 자금으로 돌렸으니까요)

오로지 레이싱을 위해 자동차 회사를 만들고 차를 팔았다는건 과장이 되어도 너무 많이 된

영화 스토리에 쓰면 적합할만한 이야기라고 하시더군요  

무언가 페라리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니키 라우다에 대한 스토리는 영화 <러시: 더 라이벌>에도 잘 그려져 있으니

안보신 분들은 한번 보시는걸 추천 드립니다.

실제로도 라우다는 당시 화상으로 입은 상처로 인해 시야가 많이 불편하셨었다 합니다.

페라리 312T가 꽤나 명차였죠, 저 새시 가지고 업데이트만 진행하면서 꽤나 오래 탔다고 들었습니다.

엔초는 라우다가 일본 그랑프리를 기권한것에 대한 불만이 컷었나 보군요?

무리가 아니긴 하죠;; 덕분에 챔피언 타이틀이 헌트에게 넘어갔으니까요

단 제가 알기론 라우다 측에서도 불만이 컷다고 알고있는데

라우다를 많이 총애했던 엔초는 라우다의 사고 이후 

FIA측에 항의 하는 모양새로 다음 그랑프리를 불참했다고 하더군요

여기에 라우다는 오히려 출전해서 헌트를 막았어야 하지 않느냐?

그리고 자신의 대타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로이테만을 자리에 앉혔던것이 상당히 불만이였다고 하더군요

뭐 그 이후의 스토리는 베일님이 언급해주신대로

비행기 사업이 잘 안풀리던 라우다는 F1에 복귀해서 0.5 포인트 차이였나요?

팀메이트인 프로스트를 제치며 페라리, 맥라렌에서 월챔을 해본 유일한 선수라는 타이틀을 획득했죠

(그리고 이게 프로스트가 미친듯이 포인트를 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들었습니다.

세나가 오로지 1등!만을 바라보며 전력을 다한다면 

프로스트는 2,3등도 꾸준히 하는 식으로 말이죠)

 

지난주 일요일에 윤재수 해설위원님이 2001년 호주 그랑프리를 중계 해주셔서

F1 TV 결제해서 봤습니다.

슈마허의 레이싱을 제대로 본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슈마허와 하키넨..정말 빠르더군요, 거기다 V10엔진의 사운드란... 

당시 중계는 무조건 1등만 비추어주는터라 거의 슈마허 스페셜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당 그랑프리는 키미와 알론소의 데뷔전이기도 했는데

키미는 첫 대회에 포인트 피니쉬를 획득했다더군요 (이 경기가 낮잠 자느라 지각했다는 그 경기!)

슈미는 자동차 피드백도 굉장히 잘해주어서 키미의 월챔 및 2000년대 중후반부 페라리의 선전은

슈미의 공의 크다는 말도 있더군요, 2008년 이후 페라리 차는 뭐 위에 언급해주신대로..

 

페라리의 1000번째 레이스가 있는 해인데 참 기념하기 어렵네요

SF1000을 언제쯤 볼 수 있나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새시를 내년에도 봐야하는군요

WR
1
2020-03-30 21:13:32

 페라리의 비토권과 LST(Long Standing Team) 보너스는 엄청난 혜택이죠. 둘다 페라리가 순순히 포기할리는 없기 때문에 만약 내놓아야 한다면 이걸 댓가로 다른걸 받아내려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페라리가 레이싱을 위해 차를 만든다는 얘기는 과장이 많이 섞여있긴 하지만 이쪽이 좀더 드라마틱한 얘기라 많이 회자되는것 같습니다.

 엔초와 라우다의 관계는 자세히 들어가면 분량이 엄청나게 길어질것 같아 결말만 간략하게 썼지만, 말씀하신대로 라우다가 엔초에게 불만을 가졌던게 먼저였죠. 아이러니하게도 엔초가 라우다에게 불만을 가졌던 이유도 라우다가 엔초에게 그랬던것과 마찬가지였고요. 둘다 레이싱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부딪힌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312T는 제 기억으로 저 모델을 기반으로 3~4년 정도 마이너 업데이트만 거치면서 쓴걸로 알고있습니다. 명차답게 건들게 없었죠.

 저는 일요일 코멘터리를 다시보기로 봤는데 오랫만에 자연 흡기 엔진 소리를 들으니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더군요. 언제나 들어도 좋은 소리죠. 

 슈마허가 레이스카 개발에 많이 관여했던 건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엔지니어들을 격려하면서 목표로 이끄는데도 슈마허가 기여한 부분이 컸죠.

 내년에도 네이밍이 SF1000이라면 뭔가 좀 어색할것 같긴 합니다. 만약 올해 일부라도 시즌이 진행된다면 1000번째 레이스가 어디에 걸릴지 상당히 궁금하네요. (원래는 프랑스 그랑프리가 1000번째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1
2020-03-30 18:29:02

윔블던도 취소될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빨라도 7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에서 개막하거나 그냥 여름 건너뛰고 8월 벨기에에서 개막할 확률이 가장 클거 같네요.

WR
2020-03-30 21:21:31

 후반기 백투백이 많이 편성되어 있는데 연기된 그랑프리들을 얼마나 잘 넣을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일단 벨기에부터라도 개막하면 다행인 상황이긴 합니다. 

1
Updated at 2020-03-30 18:37:38

당대 이름을 날렸던 드라이버라면 한번씩 거쳐가는 팀이 또 페라리라 

언급할 선수들이 너무 많네요 세나도 은퇴는 페라리에서 하고 싶었다고 하니;;

챔피언만 추려도 9명이나 되니..

그 중에서도 나름 기념비적인 챔피언이 많네요

최초로 2년연속 월챔을 수상하고 유일한 이탈리아 챔프인 알베르토 아스카리

(안드레티는 이미 미국인 국적으로 귀화한 뒤라 해당이 안되는..)

엔초 친구의 아들이였는데 태우고 나니 레전드가 된 케이스죠, 판지오의 라이벌이라 불릴만한 선수였고

최초의 영국인 월챔인 마이크 호쏜과 최초의 미국인 챔프인 필 힐

여기에 모터GP 챔피언이면서 F1 월챔도 이룩한 존 서티스

황제라 불린 슈마허는 말할것도 없고요 

확실히 역사가 깊다 보니까 각종기록을 죄다 가지고 있는 팀이라 보는 맛이 납니다.

키미가 속해있었고 르끌레 덕에 응원하는 입장에 있긴 한데....차만 좀 빨랐으면 하는군요... 

WR
1
2020-03-30 21:23:57

 역사상으로 보면 페라리가 다른 팀들을 동등한 조건에서 레이스카 성능으로 압도했던 적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던것 같습니다.

 50년대초도 여러 팀들이 떨어져나가면서 고육지책으로 F2 규정으로 치루기까지 했었고, 슈마허 시절에도 레이스카 성능에서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지는 않았죠.

 재작년이 최근들어 그나마 메르세데스와 레이스카 성능에서 비벼볼만한 한해였고 시즌 중반까지 그랬는데 그다음은....

1
2020-03-30 21:28:22

슈미시절은 F2002, F2004를 제외하면 딱히 압도적이라고 할 만한 차는 없었다더군요;;

오히려 맥라렌이 가장 빠르거나 엔진은 BMW 파워유닛을 쓴 윌리엄스가 가장 좋았다고도 하고요

슈마허가 참 대단하긴 대단했다고 생각되네요 (바리첼로의 엄청난 희생도 있었지만요..)

WR
1
2020-03-30 21:32:25

 2000년대 초를 기억해보면 운영의 페라리, 성능의 맥라렌, 그리고 직빨의 윌리엄스()같이 각각 특징이 뚜렷했던거 같네요.

 바리첼로가 팀오더로 많이 희생되긴 했죠. 오스트리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그 덕분에 오스트리아 그랑프리가 망할뻔했죠. 페라리도 큰 벌금을 물었고요. 

1
2020-03-30 21:37:31

생각해보니 그 당시 슈마허를 필두로

3스탑 전략을 가져가는 등등 2000년대 초기엔 운영이 참 좋았네요

(물론 슈마허의 실력이 뒷 받침 되니 가능했겠지만요;;)

토드-브런-슈미 3박자여서 가능했던 것일지...

오늘날 운영의 페라리는 어디간거죠? 

요즘으로 치면 밸런스의 메르세데스, 다운포스의 레드불, 직빨의 페라리네요

직빨의 페라리도 작년까지 한정되는 말이고 말이죠   

WR
1
2020-03-30 22:09:52

 페라리가 재급유 전략을 정말 잘짰었죠. 물론 그걸 소화해내는 슈마허가 있어야만 가능앴던 일이지만요. 그 시절 페라리는 정말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덕분에 팬들이 엄청나게 많아졌고 안티도 많이 생겨났었죠.

 해밀턴도 맥라렌 시절 슈마허를 따라한적이 몇번 있지만 결과는 별로 좋지가 않았던것 같습니다.

 슈마허 시절 팀의 주축들이 대부분 이탈리아 쪽 인사들로 바뀌고 나서는 운영이라던가 전략에서 헛점이 많이 보이긴 합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참 궁금하네요..

 

1
Updated at 2020-03-30 18:47:34

 페라리가 항상 이탈리아인 월챔을 만드려고 기를 쓰지만, 결국 이탈리아인 월챔은 아스카리와 파리나가 끝...

WR
2020-03-30 21:29:12

 아스카리, 파리냐 빼고는 이탈리아 출신 챔피언이 없죠. 

 그 사이에 파트레제, 나니니, 피지켈라, 트룰리까지 포디움이나 우승을 따낸 드라이버는 많았지만 챔피언까지는 전부 실패했네요.

 이제 바통이 지오비나찌에게 넘어왔는데 지오비나찌는 강팀에 갈수있을지 부터가 미지수라 당분간은 이탈리안 챔피언을 보긴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1
2020-03-30 21:47:11

이탈리아계의 리치아도가 페라리로 가서 도전해보길...

WR
2020-03-30 22:12:07

 리카르도의 페라리 설이 솔솔 나오고 있는데 만약 실제로 일어나면 재미있을것 같네요. 

1
Updated at 2020-03-30 22:34:19

드라이버 명단에 알랭 프로스트를 보니 어릴 적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렸던 프로스트와 세나의 모나코 레이스 스토리가 기억이 나네요.

프로스트가 세나의 팀 메이트에 막혀서 2위로 올라서고도 1위인 세나에게 추월은 무리인 상태가 되자 랩 타임 갱신으로 세나의 승부욕을 부추겨서 결국 세나는 랩 타임 갱신하고 계속 페이스를 올리다가 코스 이탈로 리타이어하고 프로스트가 1위로 들어왔던 스토리였는데요.

특이했던 건 세나의 집이 모나코에 있었던지, 리타이어하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드러누웠다고 하는 내용이 스토리 끄트머리에 있었네요.

WR
1
2020-03-30 23:18:45

 당시 상황이 세나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잘 나와있는데 프로스트와 큰 간격으로 선두로 달리고 있던 세나는 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계속 페이스를 끌어올리다 방호벽과 충돌하며 리타이어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프로스트는 세나가 큰 격차의 선두였음에도 페이스를 끌어올렸던 것이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려는 것 같아 불쾌했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세나 말고도 모나코에 집을 가졌던 드라이버들은 꽤 많습니다. 아마도 주거 환경이나 위치에서 오는 매력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
2020-03-31 00:07:25

모나코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세금이 없어서 그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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