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와 장비는 정말 만인지적이었나?
코로나로 업무도 널널하고 심심해서 적어본 개인 의견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삼덕이 아닌 일반인에게 오해가 있는 것 같은 인물들을 위주로 시리즈물로 해보고 싶긴합니다. 시간이 된다면 제갈량, 우금, 전예, 만총 정도를 다룰까 고민중입니다만 기약은 없어요...
편의 상 평어체와 음슴체로 적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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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들 중 가장 평가와 기록의 괴리가 큰 인물은 관우와 장비일 것이다.
만인지적이라 불렸고 당대 최고의 장수로 무조건적으로 둘이 먼저 꼽히는데,(당대와 직후 시대인 진, 남북조의 평가) 기록은 위나라나 오나라의 명장들보다 나은 점이 없다.
위나라의 유명한 인물들과 촉의 유비, 제갈량까지는 인물은 평가가 높은만큼 기록 또한 많으며, 오나라 인물들은 진수가 오나라 사서를 그대로 적은 덕에 기록이 비교적 자세한 편이다.
1. 관우, 장비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기록된 공적
당대 관우와 장비에 대한 평가는 여럿있으나 기록 상 빠른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3번 이후 각자에 대한 위,오 인사들의 평가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이라 생략한다.)
(1-1) 유비가 서주를 여포에게 잃고 조조에게 항복하여 예주목이 되었을 때 곽가는 둘을 만인지적으로 평가했다. (196년 9월 이후, 출처 : 정사 곽가전 부자 주석, 주석이므로 100% 신뢰하긴 어려울 수 있다.)
(1-2) 유비가 예주목이 되기 이전 정사에 기록된 관우와 장비의 행적은 몇줄뿐이며, 공적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조는 원소휘하에서, 유비는 공손찬 휘하에서 선봉같은 역할을 하였으니 여러번 맞붙었을 것이다. 다만 그 시기엔 곽가는 조조군에 임관하지 않았었다.
(2-1) 정욱은 적벽대전 이전에 그 둘을 만인지적으로 평가하였다.(208년 11월 이전, 출처 : 정사 정욱전)
(2-2) 주유도 적벽대전 및 남군공방전 이후 관우와 장비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라며 이 둘을 자기가 지휘하게 한다면 조조를 깨뜨릴수 있다고 손권에게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209년 12월 이후, 출처 : 정사 주유전)
(2-3) 정욱이나 주유가 평가한 적벽대전 및 남군공방전 시점을 기준으로 잡아도 정사에 기록된 공적은 관우는 안량을 벤 것과 장비는 장판파의 기록 뿐이다. 적벽대전에도 이 둘의 공적은 나와있지 않고 이후 조조군과 유비-손권연합군의 남군공방전과 이후 형남4군 점령에서도 관우와 장비의 공은 나와있지 않다.
(3-1) 조조가 한중을 정벌하고 유비가 촉을 점령한 시점에 유엽은 관우와 장비는 삼군을 뒤덮을만한 용맹이 있다고 평가했다.(정사 유엽전, 215년 11월 이후)
(3-2) 유엽이 평가한 시점을 기준으로 잡아도 정사에 기록된 공적은 장비는 형주에서 입촉할 때 엄안을 사로잡고 성도까지 고속도로 냈던 행적이 있지만 관우는 그런거 없고 그나마 유비세력의 인재들이 다 촉으로 떠난 형주를 위, 오 상대로 대치하며 지켜냈을 뿐 특별한 공적은 없다.
(4) 이후 두 사람의 공적은 관우의 번성공방전(위나라 올스타를 상대로 선전했지만 상용에서 원군은 안보내오는 와중에 오나라 올스타에게 빈집털이 당하고 본진에 남은 부하들이 배신하면서 결론은..) 장비는 216년 한중공방전 당시 장합을 격파한 행적뿐이다.
(5)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도 최종적으로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이라 칭해진 당세의 범 같은 신하였다' 라고 평한다.
2. 요약
(1) 기록된 관우의 전체 공적 : 관도대전의 안량 참살, 번성 공방전
(2) 기록된 장비의 전체 공적 : 장판파 패기 방출, 입촉 당시 성도까지 고속도로 개통하며 엄안을 사로잡음, 한중공방전 장합 격파
(3) 평가 : 만인지적 (??? 아니 그래서 대체 왜 만인지적인데..)
3. (평가와 기록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의문점
(1) 196년 또는 아무리 늦어도 208년 이미 둘은 만인지적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196년 기준으론 둘 다 그 이전에 기록된 공적이 아예 없고, 208년 기준으로 잡아도 각각 안량 참살과 장판파 패기 방출밖에 없다.
(2) 만인지적이란 칭호는 항우를 포함하여 중국 역사상 열명남짓밖에 받지 못한 칭호인데 둘에 대해 기록된 당대의 첫 평가가 만인지적이다. 그전까지는 관우, 장비 개인에 대한 평가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만인지적 소리 듣기 이전부터 다른 식의 용맹한 장수라는 표현이 나오는게 맞을 텐데 말이다.
(3) 정사삼국지의 저자 진수조차 둘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길 만인지적이자 범 같은 신하라고 평가했는데 기록이 적다.
(4) 당대 평가로 최고의 장수로는 여포도 다른 누구도 아닌 둘이 꼽히는데 기록이 적다. 일찍 리타이어한 여포도 기록이 많은데 말이다. 이는 정사 촉서의 고질적인 문제이긴 하다. (진수가 조운, 황충도 관영, 하후영과 같은 장수라고 평가했으면서 기록된 공적이 더 적다.)
(5) 사후 수백년 간 용맹한 장수를 항우, 곽거병, 여포에 빗대는게 아닌 관장지용이라해서 관우, 장비에 빗대어 왔는데 기록이 적다.
4. 개인적인 결론
(1) 삼국지 이전 중국사에서도 현재 남아있는 공적에 비해 당대 또는 후대의 평가가 높은 케이스가 적은건 아니다. 강태공, 장량 등의 전설적인 인물들도 평가에 비해 남아있는 기록은 적은 편. 물론 이들과 비교할 급은 아니다.
(2) 유비 세력하면 적벽대전 이전까진 항상 세력이 곤궁하여 필패의 이미지가 강한데, 도겸은 조조를 방어하기 위해 전해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전해와 같이 지원 온 유비에게 서주를 양도했다. 조조도 유비가 망명오자 예주목으로 삼고 원술이 원소에게 가는 것을 막게하기위해 서주로 파견했다. 원소는 유비와의 관계에서 공손찬, 원술이라는 악연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유비가 망명해오자 업에서 200리(약80km)를 마중나가면서 환대했다. 유표도 조조를 방비하기 위해 상빈의 예의로 대우하고 신야에 주둔시켰지만 유비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였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필패의 세력치곤 행적이 묘하다. 서주 대부분의 호족들이 유비를 따랐고(조표같은 예외도 있다.) 원소 휘하에선 원소군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유좌장군의 군대로 칭한 수백의 무리를 모았다. 신야에 주둔할 때 형주의 호걸들이 유비에게 모여들어 유표가 견제하였으며, 유비가 신야를 버리고 강릉으로 도망갈 때에도 유종을 따르던 형주인 다수가 유비에게 귀부했다고 한다. 피난길에 백성들이 따른거야 워낙 유명하고 말이다.
유비 세력이 단순 필패의 세력이라고 보기엔 당대 군웅들이나 호족, 백성들에게 받은 평가는 대단했다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나 싶다. 그 중심에 관우와 장비가 있었음은 두 말 할것도 없다.
(3) 관우와 장비는 유비를 따라 황건적의 난 이후 황건적, 동탁, 원소, 조조, 원술, 여포, 유장, 손권 등의 세력과 싸우면서 계속 활약했다. 이후 유비가 공손찬 휘하일 때에 조조는 원소 휘하였기 때문에 유비와 조조는 자주 맞부딪혔을 것이라는게 중론. 그래서인지 둘의 평가는 조조 세력(훗날 위나라)에서 유독 평가가 많이 나왔다.
(4) 조조세력과는 그 이후에도 수도 없이 싸웠음을 감안했을 때 핵심인물인 관우, 장비의 활약이 없었다면 평가가 높을 수 없다. 최초 곽가가 만인지적이라고 평한 196년 시점엔 곽가는 조조 세력에 갓 임관한 상태였고 유비 세력은 그동안 황건적, 동탁, 원소, 조조, 원술의 세력과 싸워온 실적이 있다.
(5) 당대에도 이미 최고 무장 반열에 올랐고, 사후 수백년간 맹장을 대표하는 칭호가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기록되지 않은 활약이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6) 종합해보자면 관우와 장비가 과대평가되었다고 보기보단 정사와 남아있는 기록이 부실함을 의심하는게 합리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어쨌든 알 수 없는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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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종합 의견에 동의합니다. 재밌는 삼국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