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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와 장비는 정말 만인지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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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4-06 18:01:47

코로나로 업무도 널널하고 심심해서 적어본 개인 의견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삼덕이 아닌 일반인에게 오해가 있는 것 같은 인물들을 위주로 시리즈물로 해보고 싶긴합니다. 시간이 된다면 제갈량, 우금, 전예, 만총 정도를 다룰까 고민중입니다만 기약은 없어요...

편의 상 평어체와 음슴체로 적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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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들 중 가장 평가와 기록의 괴리가 큰 인물은 관우와 장비일 것이다.

만인지적이라 불렸고 당대 최고의 장수로 무조건적으로 둘이 먼저 꼽히는데,(당대와 직후 시대인 진, 남북조의 평가) 기록은 위나라나 오나라의 명장들보다 나은 점이 없다.

위나라의 유명한 인물들과 촉의 유비, 제갈량까지는 인물은 평가가 높은만큼 기록 또한 많으며, 오나라 인물들은 진수가 오나라 사서를 그대로 적은 덕에 기록이 비교적 자세한 편이다.


1. 관우, 장비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기록된 공적


당대 관우와 장비에 대한 평가는 여럿있으나 기록 상 빠른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3번 이후 각자에 대한 위,오 인사들의 평가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이라 생략한다.)


(1-1) 유비가 서주를 여포에게 잃고 조조에게 항복하여 예주목이 되었을 때 곽가는 둘을 만인지적으로 평가했다. (196년 9월 이후, 출처 : 정사 곽가전 부자 주석, 주석이므로 100% 신뢰하긴 어려울 수 있다.)

(1-2) 유비가 예주목이 되기 이전 정사에 기록된 관우와 장비의 행적은 몇줄뿐이며, 공적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조는 원소휘하에서, 유비는 공손찬 휘하에서 선봉같은 역할을 하였으니 여러번 맞붙었을 것이다. 다만 그 시기엔 곽가는 조조군에 임관하지 않았었다. 


(2-1) 정욱은 적벽대전 이전에 그 둘을 만인지적으로 평가하였다.(208년 11월 이전, 출처 : 정사 정욱전)

(2-2) 주유도 적벽대전 및 남군공방전 이후 관우와 장비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라며 이 둘을 자기가 지휘하게 한다면 조조를 깨뜨릴수 있다고 손권에게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209년 12월 이후, 출처 : 정사 주유전)

(2-3) 정욱이나 주유가 평가한 적벽대전 및 남군공방전 시점을 기준으로 잡아도 정사에 기록된 공적은 관우는 안량을 벤 것과 장비는 장판파의 기록 뿐이다. 적벽대전에도 이 둘의 공적은 나와있지 않고 이후 조조군과 유비-손권연합군의 남군공방전과 이후 형남4군 점령에서도 관우와 장비의 공은 나와있지 않다.


(3-1) 조조가 한중을 정벌하고 유비가 촉을 점령한 시점에 유엽은 관우와 장비는 삼군을 뒤덮을만한 용맹이 있다고 평가했다.(정사 유엽전, 215년 11월 이후)

(3-2) 유엽이 평가한 시점을 기준으로 잡아도 정사에 기록된 공적은 장비는 형주에서 입촉할 때 엄안을 사로잡고 성도까지 고속도로 냈던 행적이 있지만 관우는 그런거 없고 그나마 유비세력의 인재들이 다 촉으로 떠난 형주를 위, 오 상대로 대치하며 지켜냈을 뿐 특별한 공적은 없다.


(4) 이후 두 사람의 공적은 관우의 번성공방전(위나라 올스타를 상대로 선전했지만 상용에서 원군은 안보내오는 와중에 오나라 올스타에게 빈집털이 당하고 본진에 남은 부하들이 배신하면서 결론은..) 장비는 216년 한중공방전 당시 장합을 격파한 행적뿐이다.


(5)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도 최종적으로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이라 칭해진 당세의 범 같은 신하였다' 라고 평한다.



2. 요약

(1) 기록된 관우의 전체 공적 : 관도대전의 안량 참살, 번성 공방전

(2) 기록된 장비의 전체 공적 : 장판파 패기 방출, 입촉 당시 성도까지 고속도로 개통하며 엄안을 사로잡음, 한중공방전 장합 격파

(3) 평가 : 만인지적 (??? 아니 그래서 대체 왜 만인지적인데..)



3. (평가와 기록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의문점 

(1) 196년 또는 아무리 늦어도 208년 이미 둘은 만인지적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196년 기준으론 둘 다 그 이전에 기록된 공적이 아예 없고, 208년 기준으로 잡아도 각각 안량 참살과 장판파 패기 방출밖에 없다.


(2) 만인지적이란 칭호는 항우를 포함하여 중국 역사상 열명남짓밖에 받지 못한 칭호인데 둘에 대해 기록된 당대의 첫 평가가 만인지적이다. 그전까지는 관우, 장비 개인에 대한 평가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만인지적 소리 듣기 이전부터 다른 식의 용맹한 장수라는 표현이 나오는게 맞을 텐데 말이다.


(3) 정사삼국지의 저자 진수조차 둘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길 만인지적이자 범 같은 신하라고 평가했는데 기록이 적다.


(4) 당대 평가로 최고의 장수로는 여포도 다른 누구도 아닌 둘이 꼽히는데 기록이 적다. 일찍 리타이어한 여포도 기록이 많은데 말이다. 이는 정사 촉서의 고질적인 문제이긴 하다. (진수가 조운, 황충도 관영, 하후영과 같은 장수라고 평가했으면서 기록된 공적이 더 적다.)


(5) 사후 수백년 간 용맹한 장수를 항우, 곽거병, 여포에 빗대는게 아닌 관장지용이라해서 관우, 장비에 빗대어 왔는데 기록이 적다.



4. 개인적인 결론

(1) 삼국지 이전 중국사에서도 현재 남아있는 공적에 비해 당대 또는 후대의 평가가 높은 케이스가 적은건 아니다. 강태공, 장량 등의 전설적인 인물들도 평가에 비해 남아있는 기록은 적은 편. 물론 이들과 비교할 급은 아니다.


(2) 유비 세력하면 적벽대전 이전까진 항상 세력이 곤궁하여 필패의 이미지가 강한데, 도겸은 조조를 방어하기 위해 전해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전해와 같이 지원 온 유비에게 서주를 양도했다. 조조도 유비가 망명오자 예주목으로 삼고 원술이 원소에게 가는 것을 막게하기위해 서주로 파견했다. 원소는 유비와의 관계에서 공손찬, 원술이라는 악연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유비가 망명해오자 업에서 200리(약80km)를 마중나가면서 환대했다. 유표도 조조를 방비하기 위해 상빈의 예의로 대우하고 신야에 주둔시켰지만 유비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였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필패의 세력치곤 행적이 묘하다. 서주 대부분의 호족들이 유비를 따랐고(조표같은 예외도 있다.) 원소 휘하에선 원소군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유좌장군의 군대로 칭한 수백의 무리를 모았다. 신야에 주둔할 때 형주의 호걸들이 유비에게 모여들어 유표가 견제하였으며, 유비가 신야를 버리고 강릉으로 도망갈 때에도 유종을 따르던 형주인 다수가 유비에게 귀부했다고 한다. 피난길에 백성들이 따른거야 워낙 유명하고 말이다.

유비 세력이 단순 필패의 세력이라고 보기엔 당대 군웅들이나 호족, 백성들에게 받은 평가는 대단했다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나 싶다. 그 중심에 관우와 장비가 있었음은 두 말 할것도 없다.


(3) 관우와 장비는 유비를 따라 황건적의 난 이후 황건적, 동탁, 원소, 조조, 원술, 여포, 유장, 손권 등의 세력과 싸우면서 계속 활약했다. 이후 유비가 공손찬 휘하일 때에 조조는 원소 휘하였기 때문에 유비와 조조는 자주 맞부딪혔을 것이라는게 중론. 그래서인지 둘의 평가는 조조 세력(훗날 위나라)에서 유독 평가가 많이 나왔다.


(4) 조조세력과는 그 이후에도 수도 없이 싸웠음을 감안했을 때 핵심인물인 관우, 장비의 활약이 없었다면 평가가 높을 수 없다. 최초 곽가가 만인지적이라고 평한 196년 시점엔 곽가는 조조 세력에 갓 임관한 상태였고 유비 세력은 그동안 황건적, 동탁, 원소, 조조, 원술의 세력과 싸워온 실적이 있다.


(5) 당대에도 이미 최고 무장 반열에 올랐고, 사후 수백년간 맹장을 대표하는 칭호가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기록되지 않은 활약이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6) 종합해보자면 관우와 장비가 과대평가되었다고 보기보단 정사와 남아있는 기록이 부실함을 의심하는게 합리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어쨌든 알 수 없는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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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0-04-02 10:13:27

저도 종합 의견에 동의합니다. 재밌는 삼국지 글 감사합니다.

6
2020-04-02 10:24:07

글 잘읽었습니다. 삼국지를 좋아하고 관심이 많아 정사까지 찾아보는데 사실 촉의 장수들에 대한 기록은 마니 부족하죠..역사라는게 승자가 기록하며 유비같은 경우 전국을 떠돌아다니다보니 그 기록이 더 부실한거 같습니다. 예전의 기록들은 보관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기록의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관우, 장비 같은 경우 당대의 평가가 무장 중 탑티어라면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공적이 더 많았으리라 봅니다. 삼국지 인물들이 바보도 아니고 저정도 공적으로 관우와 장비를 추켜세웠을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비가 승리와 패배를 반복함에도 끝까지 살아남고 한명의 영웅으로 인정받는데에는 관우와 장비의 역할이 컸겠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5
Updated at 2020-04-02 10:27:42

아마 실제로 조조군에서 가장 강력한 장수 넷을 뽑자면 장료,장합,조인,서황이었고,

그 중 장합을 털어버린 장비. 조인,서황,우금 등 올스타 총 충돌과 비등하게 오히려 뒷치기 아니면 우세했던 관우이기에 만인지적 칭호는 적합하지 않나 싶네요.  

1
2020-04-02 13:21:31

서황같은 경우엔 가장 무용을 천하에 떨친 게 바로 번성에서 관우를 물리친 덕분이기도 했죠.

 

관우가 우금, 방덕, 조인 등 조조군 네임드들을 털어버리면서 천하에 위용을 떨쳤고, 그 관우의 위용을 서황이 털어버리면서 서황이 말년에 빛을 봤죠.

5
2020-04-02 10:27:47

정리를 잘 해주신 점 못지 않게 내용도 너무 재밌어요~

 

치밀한 논리전개와 문단별 넘버링에 명확한 소제목까지...

"코로나로 업무도 널널" 하시다 하지만

평소의 꼼꼼하신(깐깐하신?) 업무 스타일을 알 수 있는.....쿨럭

(요약...이 있는 걸로 보아 보고업무가 많으신 듯~)

 

 

2
2020-04-02 10:41:34

워낙 촉쪽 기록이 많이 없다고 듣기도 했습니다. 유실된건지 제대로 안쓴건지.. 어제 삼국지를 보면서 관우의 번성 공방전에 대해서 생각했던터라 신기하네요. 어쨌든 그 조조가 거의 굴욕적이다 싶을만큼 호들갑을 떨면서 관우를 두려워했으니 당대에도 이름값은 대단했을거라 생각합니다.

2
2020-04-02 10:57:25

연의에서 장비가 저평가되는게 항상 아쉽더군요. 그래서 코에이 삼국지에서도 지력은 낮고 통솔은 80대.... 정사기록으로만 보면 관우보다도 티어가 높은듯한 느낌인데 말이죠.

2
2020-04-02 11:39:04

삼국지 극초반부터 관우장비에 대한 극찬이 이어지는거보면 뭔가 그시대사람들 모두가 알만한 무용담이 있었을건데 극걸 기록안한 진수도 이상하긴해요. 진수가 아니더라도 왕찬? 그사람도 동시대일건데 왜 안적어놨을까나요. 저게 허명이 아닌건 관우장비를 까도 성격이나 실적없음을 까지 실력자체를 까진 않으니 확실한 것 같구요

WR
2020-04-02 11:54:32

왕찬의 영웅기는 현재 유실되기도 했고 그나마 마지막 보루인 배송지 주석에서조차 관우전과 장비전에 영웅기를 인용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천재로 소문났고 한번 보면 뭐든 다 기억했다는 왕찬이 적은 사서는 어땠을지가 항상 궁금한데요..

2
2020-04-02 11:48:50

불운한 유관장 삼형제의 초년부?를 생각해보면, 지역에서는 날리는 괴물들이지만 세력이 세력이다보니 대규모 전공을 날릴 만한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게다가 당시 그들에 대한 기록이라는게 종이든 목간이든 별로 전해지지도 않았을거구요.
그런 사람들이 대장군급이 되어서 형주지역 총사령관으로 대전장에서 조조를 몰아붙이거나, 촉을 돌파하고 장합을 꺾어버리고 한 거 보면 낭중지추가 아니었나 싶네요.
느바로 비교하면 유럽에서 털고 다니면서 알릴 만큼 알려진 돈치치가 데뷔하자마자 MVP급 이상 찍어버리는 그런 모양새 아니었을까요.

1
2020-04-02 11:54:05

 근데 항상 궁금한게

 

만인지적 이라던가   용맹과 강력함 이라던가 하는 기준은

 

장수로서 전체 총솔및 전략을 통한 전장의 전과로 평가인가요 

아님  1:1 맞짱이건  아님 무쌍이건 정말 치고박고 하는  개인의 무력치를 얘기하는건가요?

 

전자라고 보기엔 만인지적 등의 평가는 안어울리는거같고    

후자라고 보기엔   정사는 당연히 물론이고  삼국지 를 봐도  의외로 별게 없더라구요

네임드끼리 별로 붙은 적이 없고  간혹 있어도 50합을 겨루다가 갈 길 갔다~~  

 

라고 하니 흠...  

  

WR
1
Updated at 2020-04-02 12:07:13

관우가 안량을 참살한 것이 특이한거지 정사에서 일기토는 손에 꼽을 정도의 기록이고, 개인의 무용이 굉장히 뛰어났다는 전위와 허저의 경우에 장수로서 뛰어났다고 평가받진않듯, 만인지적이란 평가는 종합적인 군사능력이라 보는게 맞겠죠. 

중국사에서 만인지적 평가를 받은 장수들을 보면 여러번에 걸쳐 상대 병력을 말그대로 갈아버린 장수들에게 내려온 칭호인데 관우와 장비의 경우 정사에 기록된 전공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부터 이미 보편적으로 만인지적 평가를 받았으니 기록이 부실함을 의심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 제 개인 의견입니다.

1
Updated at 2020-04-02 14:25:05

장수의 능력을 2개가 아니라, 하나 더 추가해서 3개로 구분하는 게 보다 정확할 겁니다:  

<1:1>, <대군의 지휘>, 그리고 그 중간격인 <소규모 야전군 에이스>. 


<만인지적>의 평가는 <소규모 야전군 에이스>로서 '백병전에서의 맹활약'을 가리킬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봅니다. 이건 개인의 무력이 활용된다는 점에서 일기토 능력과도 연관되고, 또 소대 내지는 대대급 병력을 지휘 내지는 캐리하면서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장수로서의 능력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장군'의 면모는 아니긴 하죠. 

 

196년에 이미 관우장비가 <만인지적>의 평가를 받았다면, 그들의 백병전 능력이 부각되었을 가능성이 더욱 높겠네요. 그때까지 유비가 만 명 이상의 대군을 보유했을리 없고, 따라서 대군 관리자로서의 장수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런 소규모 전투들을 하나하나 기록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백병전, 예를 들어서 100명과 100명의 전투에서 한 개인의 역할이 어느 정도냐고 평가하는 것은 전투를 경험하지 않은 입장에서 쉽지 않긴 한데요. 하지만 군사사에서 얘기되는 것이, 전투라는 것은 결국 기세싸움이고 100명 중의 1명이라도, 선봉에서 서서 상대방을 뒷걸음치게 만드는 순간 그 전투는 이기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100명이라고 하더라도 맞붙을 때는 


---->      <----

 

의 형태가 되어서, 결국 꼭지점끼리 만나게 되는 게 보통이고, 이때 첫 기세에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그대로 상대방 진영을 뚫어버리는 것이 그런 야전군 에이스의 역할이었다고 해요. 저도 잘 상상되지는 않지만, 르브론이 속공에서 공 몰고 돌진할 때 수비 2, 3명이 떨어져나가는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대군과 대군이 격돌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경우 전투는 기세싸움이 되어버리죠. 특히 관우장비가 주로 활약했을 중원지역은 평야다 보니까, 평지에서의 야전 상황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100명 중의 한 명이 꼭지점이 되듯, 10,000명 중의 100명이 대군의 꼭지점이 되어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보통 대규모 회전에서는 기병이 그런 역할을 하고요. 이럴 때 대군의 에이스는 1,000명 정도의 핵심부대일 것이고, 이런 대대급 부대의 맨 앞에 서서 용맹을 발휘하며 리드하는 것이 만인지적의 능력이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10,000명을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에 돌입했을 때 꼭지점에서 서서 혼자서 만 명을 상대하는 꼴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조금 번외로, 전투에서 기세싸움의 중요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례로는 합비전투에서의 장료의 활약, 그리고 사수 전투에서 부견 부대의 패배를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2020-04-02 12:59:37

전투에 임하는 전술가로서도 최고이지만 개인 용명으로도 인간이상을 찍었다 평가받는 건 항우가 유일하지 싶구요. 그 아류(?)가 관우인데 외려 여기는 중국인의 사랑을 받아 신이 되어버렸으니.
여담으로 이순신 지원 왔던 진린이 자기랑 충무공이랑 자랑하고 싶었는지 저기 완도인가 신안인가 관우 사당 짓고 그랬습니다. 그에 비견되고 싶어서

7
2020-04-02 12:02:04

저도 딱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력이 작아 기록적인 전과를 낼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현대까지 전해지는 사료는 딱히 없으나, 그래도 당대의 군웅들과 계속 낑겨 어울리며 거기서 날린 무명이 상당했기 때문에 당대의 인물평이 그러했을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인물을 평하는 것이 워낙 유행했었기 때문에 남 평가하기 좋아하는 한 사람이 실수로 쟤네 진짜 쎄 내 말 한번 믿어봐. 라고 그냥 추측성 평을 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도 생각해봤지만. 한명이 어거지로 밀어붙인 명성도 아니고 조조군 핵심참모 셋이 나란히 저런 평을 내린 거니. 대규모 회전 승리는 없었더라도, 초년기에 당대사람들을 식겁하게 만들 모습들을 분명 보여줬을거라 생각합니다.

2
2020-04-02 12:10:59

촉은 기록 유실이 유독 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후기 장수들은 기록이 정말 거의 없죠.

 

관우와 장비에 대한 이야기는 글쓴분 의견에 동의하는게, 예전부터 생각하던게 '저 사이에 정사에 한게 없는데 평가는 점점 올라가고 있다'라는거죠. 후대도 아니고 당대의 명사 / 장수들의 평가가 모두 동일하다면 사실 뭔가 있는데 기록이 없는걸 의심하는게 더 당연한게 맞습니다.

3
Updated at 2020-04-02 12:19:28

핀트에 어긋난 여담이지만 관우의 입지는 장량 강태공 이상이라고 봐야죠. 실제로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니까요.

2020-04-02 12:21:35

관제라고 불리는걸 보면 더 그렇긴 하죠

2020-04-02 12:24:02

그런면을 보충하기 위해서 연의가 1기토 장면등을 배치하면서 MSG를 친거죠
당대 평가는 높은데 기록이 적거나, 위상은 높은데 1선 활약이 적은 인물들에게 적당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붙이더군요

1
2020-04-02 12:45:44

사실 유비가 여러 군웅들을 돌아다니며 객장을 할 수 있었던것도

 

관우장비의 무력때문이였다고 봐야하죠.

 

관우장비의 무력을 이용하기위해 유비를 받아주는 경우가 많았죠

2020-04-02 14:08:25

글 진짜깔끔하게 잘 쓰시네요! 종종 재밌는 삼국지 글 기대하겠습니다!!

2020-04-02 15:36:27

관우만 봐도 안량참살이 엄청난 전공인게 조조가 안량에게 밀려 불리한 상황에서 특공으로 장료와 함께 소수병력으로 참살하고 살아돌아왔으니 (거기에 객장이) 대단했다고 봅니다.
장비야 장판파가 조조 선봉기마대를 20여명으로 조그만 다리에서 막은건데 실제로 거기 하천보다는 개울에 가깝다더군요. 2천~5천의 기마대가 장비한테 막힌거니 명성이 당시에 대단했었다고 생각합니다

3
Updated at 2020-04-02 18:43:16
문제는 안량 참살 이전부터 관우에 대한 평은 저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 이후엔 거의 언터쳐블이죠.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했을 때 조조는 바로 편장군으로 봉했으며(조조는 항장이 공훈을 세우기 전에는 높은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조조 휘하에 있을 때 관우의 뻣뻣함이 정사에도 고스란히 나오는데, 항장주제에 저렇게 뻣뻣해도 조조 휘하 장수들이 건드리질 못했습니다. 연의에 나오는 하후돈 이야기는 물론 지어낸 이야기고... 안량 참살 자체가 어마어마한 공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죠. 아무튼 초기부터 이런 식이라 애초에 유비 휘하에서 하북쪽에서 큰 명성을 얻을 사건들이 분명히 있었을텐데, 그게 사서에 남은게 없습니다. 장비 역시 마찬가지로 만인지적 평가를 받은건 장판파보다 한참 전입니다. 그냥 기록이 부실한걸로 보는게 낫습니다.
 
촉이나 유비 휘하 장수의 기록이 얼마나 부실한가 하면, 유비 휘하에는 진도라고 유비 친위 특수부대인 백이병을 이끄는 장수가 있습니다. 무명이 조운에 버금가고, 최종 계급이 정서장군(조운이 정남장군이던 시절)에 이른 명장인데 기록이 너무 없어서 연의에서는 잘렸습니다. 문제는 유비가 예주에서 병사 모으던 시절부터 따라다녔어요. 유비군의 성골이라고 할만한 장수인데, 정사 기록이 너무 없어서 연의에서는 안타깝게도 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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