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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 공방전 3- 관우의 최후와 평(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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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12:17:54

 

 

 지도를 일단 보겠습니다.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고, 양양성 앞에 흐르는 면수를 수군으로

완벽하게 장악한 상태. 서황은 이 상태에서 번성의 포위를 풀고자 진군했는데, 의외로

다급한 번성의 상황을 고려하면 즉각 달려들어 관우군과 교전했어야 하지만 서황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즉각적인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휘하의 장수들과 병사들은 하루바삐 적을 쳐서 위급한 번성을 구원해야 한다며

서황을 독촉했으나 서황은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는데, 불만이 갈수록 커지자

휘하에 있던 의랑 조엄이 말하기를

 

우리쪽 병사는 단독이며 너무 적고, 조인은 따로 떨어져 있어 힘을 합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첩자를 보내 조인에게 통지하여 밖에 구원병이 왔음을 알게하여 면려하는 것만 못합니다.
북쪽의 지원군은 열흘을 넘기지 않고 도착할 것이며, 성 또한 굳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장들이 동의하면서, 서황은 쉽게 공격하지 않고 번성의 조인과 연락을
취하면서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는데, 이 무렵 관우에게 놀라운 소식이 날아듭니다.
 
군사를 출발시킨 손권은 조조에게 사신을 보내, 군대를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하니 비밀을 지켜서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라는
내용을 전했는데, 조조가 의견을 물어보니 오히려 조조 진영에서는 동소가 나서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동소의 말에 따른 조조는 서황으로 하여금 이 내용을 적은 편지를 화살에 달아 쏘아

관우에게 이 소식이 들어가게 하는데,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고뇌하며 주저했으나 결국

회군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데, 아마도 반신반의하며 고민했지만 그동안 쌓아올린 전과와,

번성과 양양이 떨어지는 것을 코앞에 둔 이상 너무도 아쉬워서 그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서황은 지도에서 보듯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언성으로 향했던 관평은 보기좋게 낚이면서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해 관우에게 합류하는데

서황은 그렇게 아무 피해 없이 언성을 손에 넣었고,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하여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합니다. 그러자 조조는 서황에게

정예병을 지원했고, 정예병을 지원받아 병력을 보강한 서황은 진격을 개시합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소문을 퍼뜨려 적군의 시선을 돌리면서 훼이크를

치다가은밀히 사총을 공격하는데, 사총에는 10겹의 녹각(나무 울타리로 만든 방어진)으로

방어되고 있었는데 서황은 너무나 쉽게 방어선을 돌파해 나갔고, 사총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에 관우는 급히 보기 5천을 이끌고 서황의 군대를 막고자 나섰습니다. 관우와 서황은

예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로, 관우가 조조의 휘하에 있을 때 두터운 교분을 나눈 사이였기에

관우는 서황에게 말을 거나, 서황은 이를 냉정하게 대응하며 나랏일을 하는 것이라 대응,

군대를 휘몰아 관우의 군대를 개박살내면서, 10겹의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녹각을 다 뚫어내고 관우의 군대를 몰아내며 추격했고, 관우군 중 일부는 면수에

투신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서황은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보여주며 포위망을 뚫어냅니다.

 

관우는 포위망을 구성하고 이를 대비하는 동시에 방어선을 짜서 대비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간단하게 뚫린 것은 방어선을 유지하는 병력의 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미 양양을 포위하고 있는 병력에, 포위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제외하면

본인이 직접 즉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5천으로는 아무리 군신이라 한들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습니다. 관우가 유봉과

맹달의 지원을 그토록 바랬던 이유가 이것이었는데, 만일 상용의 지원군이 와서

지원병이 한쪽을 막는다면 방어선을 유지하고 동원 가용한 병력이 늘었을 터이나

지원이 없는 이상 상용 방면의 공백은 조조군도 이미 알고 있었던 만큼 대비하기

어려웠고, 거기에 조조군을 지휘하는 장수는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 서황이었던 것.

 

서황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포위망이 뚫리자 번성 안에 갇혀 있던 조인과 만총 역시 이에

호응하여 관우의 군대를 공격했고, 성밖과 안으로 모두 적을 맞이하게 된 관우는 결국

번성 포위망을 풀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조군은 최대의 위기였던 번성 포위를

풀어내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는데, 관우는 번성의 포위는 풀었지만 면수를 여전히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양양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을 끊어 양양성은 조조군과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어 그대로 있으면 결국 항복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여몽은 정예 병사들을 모두 큰 배 안에 숨겨놓고 흰 옷을 입고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복장을 하고

침입하여 관우가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 남겨둔 강변의 둔후들을 모조리 붙잡아 묶으니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士仁)과 미방(芳)이 모두 항복했다.

 - 오서 여몽전

 

관우는 형주의 병력을 빼면서도, 관측소가 있기에 여몽이 움직인다면 즉시 형주로 귀환해

이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여몽은 관우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무섭고 주도면밀한

인물이었고, 관우는 그렇게 관측소가 모두 장악되면서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내통자의 도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이는데,

손권은 실제로 형주 사방에 첩자를 풀고 사람을 파견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을 포섭하여

전초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고, 형주 침공시 내통자들이 내응했기에 장악이 빨라졌습니다.

여몽은 손권에게 쫓겨나 좌천되어 있던 우번까지 불러들여 우번으로 하여금 사인에게

가서 항복을 권유하게 하는데, 우번은 그렇게 사인에게 가서 항복을 권유합니다.

 

연의에선 부사인으로 나오는 사인은 한번에 항복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정사에서는

공안을 지키며 우번을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항복 요구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우번은

편지를 써서, '우리가 왔는데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으니 내통이 있었다는 거쯤은

알 수 있지 않아? 어차피 여몽 장군이 남군으로 육로를 끊으면 살길이 막히는데 여기서

버텨봐야 니 가족만 망하고 싸워도 살길이 없으니 항복하라' 는 협박이 담긴 편지를 보내고

사인은 결국 편지의 내용을 보고는 항복을 결심하고 항복합니다.

 

사인의 항복을 받아낸 여몽은 이를 '거짓항복' 일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사인을 그대로

데리고 남군성으로 가는 동시에 공안에는 자신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치밀함을 보였고,

남군성에 이르자, 미방에게 항복을 권유하는데 미방은 여기서.........................

쇠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대접까지 하면서 단번에 항복합니다.

 

미방의 항복은 관우 입장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음이 분명한데,

미방은 개국공신인 동시에 서주 시절부터 온갖 고생과 위기를 헤쳐가며 유비를

따라온 충복 중 하나였고, 그의 형 미축이 촉의 중신이었으며 누이는 유비의 부인.

이런 미방이 아무런 전투나 저항 없이 형주를 통째로 넘겨줬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방이 투항한 데에는 관우와의 불편한 관계도 컸겠지만 관우가 자신을 진짜로

처벌해 죽일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 관우는 유비의 한중왕

등극 직후 사방장군의 필두인 전장군에 임명되고 가절을 수여받아 관리의 포상과

처벌에 대한 권리를 일임받았기에 자신을 충분히 죽이고도 남을거라 생각한 듯

한데, 관우와 십수년을 함께 했던 만큼 관우의 성격과 인물상은 잘 알고 있었고,

여몽이 이미 코앞까지 온 이상 내통하고 있었던 상황에 그냥 항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방의 항복은 남군성 내부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어서, 남군성 내부에선

동요가 일어났으며 저항의 움직임도 있었으나 여몽이 이에 철저하게 대응하면서

내부의 저항은 금세 진압되었고, 여몽은 그렇게 너무나 쉽게 형주를 손에 넣습니다.

여몽은 강릉 군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를 억압하기는 커녕, 병사들을 통제해

 민가를 돌아다니며 요구하거나 빼앗는 일을 할 수 없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리는

동시에 그들을 위무하고 살피면서 빠르게 민심을 얻어나갔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여몽은 그 말을 지켜 여몽과 같은 군 사람이 공적인 물건인 관의 갑옷을 지키기 위해

민가에서 삿갓 한 개를 빼앗아서 갑옷을 덮는 사건을 발생했을 때도 군령을 범했는데

고향사람이라고 용서할 수는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후

군영 안에서는 두려움에 떨면서 길에 떨어져있는 것조차 줍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몽은 그와 동시에 육손에게 군대를 주어 즉시 의도와 이릉에 파견해, 유비군의 잔당을

소탕하고 그 지역을 장악하는 동시에 익주에서 관우의 위급함을 알고 구원병을 파견하면

도착하게 될 입구를 틀어막도록 지시하는데, 그렇게 관우는 익주에서 구원병이 올 통로도

여몽에 의해 완벽하게 차단되면서 완벽하게 고립되고 맙니다.

 

여몽은 그렇게 형주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관우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관우는 219년 10월, 번성을 포기하고 양양 일대에 있었는데, 위와 같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는 양양의 포위마저 푼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우에게 된통 당하며 개고생한

 조인은 관우의 뒤를 추격하려 했으나,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

면서 추격을 반대했고 조조는 조엄의 말에 따르며 손권에게 관우의 처리를 떠넘깁니다.

 

 11월에 이르자 형주가 이미 위급하다는 사실은 이미 익주에도 전해졌고, 연의에서 관우가

죽을 때까지 이 소식을 몰랐던 것과는 달리 유비는 구원병을 파견하는 등 형주의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움직이려 애썼으나 이미 형주로 들어가는 길목은 육손이 틀어막고 있었고

한중을 점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중 지역을 안정화시키는 중이었기 때문에

전면전으로 병력을 동원할 상황이 못 되었기에 이을 뚫어낼 방법은 없었습니다.

 

관우는 그렇게 퇴각하던 도중 여몽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사신으로 하여금 형주 내부 상황을

알아보게 하는데, 여몽은 이를 역이용하여 자신은 전혀 민가에 약탈이나 피해를 끼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형주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편지를 관우의 병사들에게 전하도록 하여 대접을

잘 받고 있음을 알리도록 하여 관우군의 사기를 대폭 떨어뜨렸고, 여몽의 의도대로 관우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가족에게 칼을 들 수 없다며 탈영병이 속출하는 등

군대가 와해되면서 전투력을 상실했고, 맥성에서 최대한 저항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죠.

 

 

연의에선 이 상황에 상용에 도움을 청하는데, 정사에서도 도움을 청한 것은 똑같지만,

이 상황에선 상용에서 구원을 가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지원을 하지 않은

원죄가 크지만, 이미 맥성에 갇힌 관우를 이 상황에서 구하긴 무리였습니다.

 

그러자 관우는 결국 거짓항복까지 하면서 최후까지 탈출각을 보는데, 마지막으로

관우가 진격한 경로는 맥성-장향-협석-임저로 향하는 험한 산길 루트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여몽이 예상한 루트 그대로였으며, 우번은 이미 점괘를 통해 관우가

이쪽으로 도망치다 사로잡힐 것을 예측한 상황이었습니다. 관우는 그렇게 필사적

으로 도망치다 반장과 마충에 의해 사로잡혔는데, 이 방향은 영안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상용 쪽인 것으로 보아 유봉과 맹달의 지원을 받아 돌파할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나, 유봉과 맹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사실상 관우의 죽음을 방기했고,

(후에 유비가 격노하는 또다른 원인이 되죠) 관우는 그렇게 결국 사로잡혀서......

 

죽음을 맞게 되면서, 천하를 진동시키던 명장은 사라지고 맙니다.(219)

 

관우의 죽음 이후에도 형주 일대에선 소요가 있었으나 이는 대부분 진압되었고,

손오는 형주를 손에 넣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강릉 점령 직후 대규모의 역병이

발발하면서, 여몽과 장흠이라는 도독감을 순식간에 둘이나 잃은데 이어 손교도

사망, 반장이 관우를 잡은 이후 감녕의 군대를 승계한 것으로 보아 감녕도 이

시기에 죽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오의 핵심 장수 넷이 한꺼번에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때문에 혹자는 역병 때문에 장수들이 한꺼번에 모두 죽었다는 것은 이상하기에

관우의 군대와 치열하게 싸운 끝에 장수들이 중상을 입고 찾아온 역병에 의해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어찌되었던 역병으로 군사와 백성을 잃고

나라를 대표하는 상장을 넷이나 잃은 손오도 더 이상의 군사행동을 하지 못한 채

멈추면서, 형주 공방전은 이렇게 끝나게 됩니다.

 

평가: 관우는 형주의 1/3만 가지고도 엄청난 전공을 쌓아올리며 천하를 진동시켰지만

결국 위와 오의 연합에 패배하며 형주를 상실합니다. 관우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수군

지휘에 능하고, 천시를 활용할 줄 아는 동시에 군사를 부리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드러냈지만, 반대로 자신보다 하수라 판단한 사람은 무시하는 오만함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 휘하 장수들과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등의 문제점 역시 드러내고 맙니다.

 

촉은 여기서 형주를 상실하며 익주/형주 양방향으로 북벌에 나선다는 천하삼분지계의

기본 그림부터가 박살나 버렸고, 이 형주공방전 직후 맹달의 배신으로 결국 상용마저

위의 손아귀에 넘어가면서 북벌 루트는 옹양주로 가는 길 하나로 한정되고야 맙니다.

이는 치명적인 것이었는데, 옹양주 루트는 워낙 길이 험하고 산맥을 넘어야 하기에

장기전을 할 수가 없어 매번 단기 승부로 봐야 했기에 북벌에는 너무나 장애가 많았고

제갈량은 몇번이고 북벌을 시도하나 위의 장기전에 말리며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오는 항상 원하던 형주를 손에 넣는데 성공했고 영토와 인구를 늘리는 동시에

장강 방어선을 구축하며 방위 라인을 좀더 굳건히 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형주를

점령하고 매번 삽질을 거듭하며 결국 북벌에도 실패하고, 이릉대전을 통해 양측이

치고받으면서 조위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고 마는데, 결국 이 이후 진에 의해 삼국이

통일될 때까지, 강대한 위에 맞서 연합은 했지만 결국 양국 모두 끝까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위 7: 오 2: 촉 1의 세력비 구도를 깨지 못하고 맙니다...............

 

왜 손오가 형주를 쳤는가는 여몽의 말에서 드러나는데, 서주나 합비를 얻을 수 있다면

건업을 지키는 방위선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원 공략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서주는 평탄하고, 기병 운용에 유리해 위의 군대가

언제든지 다시 되찾을 수 있는 땅이고, 합비에서 손오 특유의 세병제와 육전능력의

한계로 인해 매번 실패를 거듭하자 차라리 서쪽으로 형주를 먹어 장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세력을 넓히자는 것이었는데 이 말은 사실 맞는 말이었습니다.

 

후에 오가 온갖 군사 행동을 벌여가며 합비를 손에 넣으려 했으나 만총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되고 털리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고, 오가 만일 서주 방면으로 진군하려 하면

광릉을 거쳐야 하는데, 광릉은 늪지대가 많아 군사를 운용하기 어렵고 방어군의 눈에

쉽게 띄이는 지역인지라(반대로 말하면 오 역시 방어에 유리하다는 이야기.)

유수로 상징되는 건업 방위선은 워낙 튼튼한데다 장강의 물살이 빠르고 험해서 위는

결국 단 한번도 건업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합니다. 오는 이 방어선을 더 강화하고자

형주 점령을 통해 장강 방어선을 늘렸고, 이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오가 훗날

멸망하게 된 계기는 두예에 의해 형주 방어선이 뚫리면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형주 방어선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데, 오와 같은 강남 지방에 위치한 세력들이

건업(난징) 일대를 바탕으로 수비할 때, 장강을 이용해 공격해오는 수비군을 방어하는

전술은 가히 철벽에 가까웠으나 형주를 점령하고 수로를 따라 동으로 진군해오면

이를 막기 어려워 무너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두예의 진공이 바로 그랬고, 훗날

몽골이 남송을 멸망시킬 때도, 6년을 공격한 끝에 양양성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형주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진공한 케이스였습니다.

 

오의 입장에서 형주 공격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고, 실제로 영토와 인구를

얻었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양을 비롯한 북형주 일대는

여전히 위의 손에 있었고, 장강 방어선을 강화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장강 삼협의

입구인 백제성은 여전히 촉의 영역이었으며 양양과 면수를 위가 가지고 있는 이상

언제든 형주가 공격당할 수 있는 불완전한 상태의 형주 점령이었습니다.

 

거기에 여몽과 장흠 사후 형주 책임자에 임명된 것은 육손이었는데, 육손은

강동에서 가장 큰 호족들 중 하나인 육씨 가문 출신으로, 육손이 관우처럼

형주를 책임지게 되나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은 손권의 강동 일대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했는데, 세병제인 손오의 특성과 전란을 통해 인구가 준

형주의 특성, 거기에 시도때도 없이 소요가 일어나는 이민족의 무릉만

등의 이유로 손오는 남형주를 손에 쥐고도 형주를 통한 북벌 시도에

소극적이었고, 관우가 했던 양번 공략에 근접한 소득도 내지 못합니다.

 

익양대치 때 손권의 주장인 형주 3군의 반환과 상수경계선 확정으로 결론이

매듭지어져  더 이상 형주의 소유권을 주장할 명분이 없었음에도, 손권은 형주

전지역을 탐냈고 그렇게 관우의 무례함과 상관의 물자 탈취를 명분으로 통수를

치고 관우를 죽이면서 형주를 손에 넣는데, 손권에게 오소리 새끼라 모욕하고

혼담을 거절했으며 상관의 물자를 제멋대로 탈취한 관우에게도 결함이 있었으나

이를 관우의 주인인 유비에게 먼저 항의하여 조치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은 애초에 관우를 위협적으로 보고 군사행동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손권이 유비를 동맹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대목이죠.

 

거기에 손권이 평생에 걸쳐 가장 원했던 것은 합비를 비롯한 회남 일대였는데,

형주는 회남에 비하면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습니다. 오가 합비에 그렇게 수없이

꼬라박은 걸 보면 그 엄청난 집념을 느낄 수 있는데, 결국 합비는 끝까지 못넘고

당장 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가 생기니 손에 넣었다는, 이후의 전국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 당시 조조가 합비에서 장료를

빼버렸기에, 그대로 합비를 노렸다면 염원했던 합비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도 컸습니다.

아니면 위와 촉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자신들이 캐스팅보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편한 길을 선택했고, 큰 피해 없이 형주를 먹는데 성공합니다.

리스크 측면에서 봤을 때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이었으니, 국가를 경영하는 군주의

입장에서 잘못되거나 손해를 본 판단은 아니었고, 충분히 할 수도 있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 역사를 보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아쉽고 답답한 것이죠.

 

유비 역시 실책이 있는 것이, 관우에게 형주를 맡겼으나 그를 통제하지 못하며

관우가 오만한 태도로 외교관계를 망치는 것을 방관했고, 유봉과 맹달을 상용에

배치했으나 이들이 지휘권을 두고 싸우는 것을 막지 못해 화근을 낳았으며, 한중을

안정시키고자 예방 전쟁격으로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으나 이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면서 결국 형주를 상실하게 되는 패착을 낳았다는 것인데........................

 

위의 문제는 여러 불운과 당시 상황이 겹쳐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들도 크지만

결정적으로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나서며 친정했으나

초반의 날카로운 기세와 큰 전과에도 불구하고 육손에게 이릉대전에서 대패하며

촉의 인재와 병력, 물자를 싸그리 다 날려먹으면서 촉의 국운은 쇠퇴합니다.

북벌이 좌절된 것의 1차 원인이 형주와 상용의 상실이었다면, 거기에 결정타를

박아버린 것이 이릉대전의 대패로, 촉은 이후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이 형주 공방전의 승자는 결국 위나라였는데, 양번이 포위되고 허도까지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오를 이용해 포위를 풀어낸 동시에 서황이 관우를 박살냈고

거기에 양양은 그대로 온존히 보전한 동시에 손오를 자신의 그림자 밑에 두면서

(물론 바로 벗어나긴 하지만) 명분도 실리도 모두 챙겼으며, 이후 촉과 오가

이릉대전을 벌이며 서로 국력을 깎아먹은 탓에 매우 큰 이득을 보게 되죠............

 

형주 공방전은 이렇게 아쉬운 결과를 남긴 채 이후의 판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저는 이런 점에서 개인적인 생각으로 노숙이 너무 아쉽습니다.

노숙이 요절한건 아니지만, 조금만 더 살아서 이때까지 도독으로 있었다면

관우도 컨트롤할 수 있었을 것이고(관우는 자신이 인정한 인물에겐 관대하기에)

익양대치로 큰 충돌 없이 이득을 일구어 내기도 했으며 결정적으로 이 형주

공방 이후 조조가 사망하기 때문에(220),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의 형편없는 육전을 고려해볼때 가능했을 지 역시 의문입니다..........)

 

형주 공방전은 삼국에 모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후 이릉대전까지

이어지면서 촉의 명운을 결정짓는 눈물의 역사가 되어 촉빠들이 손제리를

이를 갈며 증오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오빠들은 형주 문제는 그렇다치고,

익주로 들어가려는 손권을 막아선 것도 유비라며 피장파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가는 후대 역사가들과 이를 보는 독자들의 몫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손권이었어도 아마 깊이 고민해보고 실행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예언자도 아닌 이상 맞추기 어렵고,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이기에 국가에 이득이 되는 입장에서 움직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쉽습니다. 촉빠인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형주의 1/3으로만 조조군과 손권군의 올스타 장수들을 총출동시키게 만들면서 천하를

 진동시켰던 최고의 명장. 후대에 전과가 없다고 거품이라 까이기도 하면서 재평가의

 움직임도 있지만, 조조와 손권이 동원한 장수와 병력의 규모와 질, 그리고 관우가 거둔

 전공과 성과, 관우 사후 촉에는 인물이 없다는 역사서의 평가 등으로 보아 관우는 당시

 정말 위대한 존재였고, 위대했기에 그만큼 센 자부심이 있을 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한 프라이드가 자만과 오만을 낳아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그를 무너뜨렸고,

외부의 불운한 상황이 겹치며 내부와 외부 양측에서 문제를 낳아 결국 천하의 명장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항상 삼국지 게임을 할 때, 이 형주 상실 부분에만 오면 최대한

역사 이벤트 그대로 유지해 오다가도 관우를 살리고 형주를 사수하는 쪽으로 역사를

바꾸려는 것을 보면, 제가 어쩔 수 없는 촉빠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부족한 솜씨에도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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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2-22 12:28:20

단한사람의 움직임으로 천하를 진동시켰다! 위와 오의 올스타들이 관우 한사람을 치기위해 총출동. 후세에 관제라 함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Updated at 2019-02-22 12:34:55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역시 필력이 다르시네요 흐흐.

당장 형주 루트를 이용한 북진도 해보려곤 했는데, 만총-문빙-전예에게 뚜까 맞아버렸으니 여몽이 형주를 칠 땐 그를 활용한 전략이 있던 것은 맞지만, 사실 입안할 때도 '서주는 얻어봐야 조조 기병 킹짱빨라서 못지키니까 형주를 칩시다!' 느낌이니 근시안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죠.

한편으로 저는 사실 글에 잠시 나온 '임저'가 굉장한 키워드라고 혼자 꽂혀있는 편입니다. 입촉에 성공한 마초를 평서장군, 임저독으로 삼고 한중왕 즉위 후에 좌장군 직을 부여하는데, 한중전투 직전까지는 마초를 임저에 두어서 형주에서의 유사시에 보강으로 쓰려던게 아닌가 해서요. 물론 이 시점이 익양대치 즈음이니 당시에는 대비를 했었고, 이후 옮긴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결과에 맞춰서 근거를 해석하는 느낌이라 언급은 잘 안하는 편이지만요.

2019-02-22 12:37:32

근데 궁금한게

거리가 어떻게 되나요..

예를 들어 양양성에서 남군 번성 뭐 이런식으로요.

WR
2
2019-02-22 12:49:50

 

후한시절 형주의 지역도인데, 양양과 강릉은 모두 남군에 위치합니다.

번성과 양양은 면수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어 매우 가깝고, 강릉에서

양양까지도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대략 15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형북에서 허도까지도 그렇게 멀지 않은데, 대략 서울-대구 정도의 거리......?

그래서 조조가 번성, 양양이 포위되었을 때 천도를 고려했던 것이겠죠.

 

 

2019-02-22 12:55:35

친절 설명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런류의 글 많이 부탁드려요.

Updated at 2019-02-22 12:45:52

당대에 관우보다 위로 평가할수 있는 장수가 또 누가있을까요? 정사에서도 무예는 만인지적이라고 평가받고 말씀하신대로 용병술도 좋고 심지어 수전에도 능하고 말이죠.

과대평가라는 말도 많지만 탑이 아닐까요?

1
2019-02-22 12:53:23

워낙 촉서는 기록이 적어서 말이죠. 기록된 군공만으로는 촉 내에선 북벌 직접 나선 승상님 제외하면 장비나 마초, 강유 정도가 비슷하지 싶습니다. 황충은 일군은 이끈 적이 없고, 조운은 1차 북벌 때가 유일하니까요.
위로 올라가면 기록면에서 조인+장료,악진,우금,장합,서황(장악우장서)+사마의 요기는 진짜 군공들이 엄청 짱짱합니다. 동오는 주유가 있고, 육손이 있죠. 육항도 있고요.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507127
요거는 제가 이전에 썼던 글인데 참고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Updated at 2019-02-22 13:02:11

중국 내 평가론 당대에든 후대에든 제갈량이 독보적 탑티어입니다 중국왕조에서 무묘(강태공)에 제사를 지내는데 삼국시기 인물로는 제갈량이 제일 먼저 꼽힙니다 이미지상으론 문묘에 제사지낼거 같은데 중국에선 늘 역사상 가장뛰어난 무장 10인에 제갈량이 들어갔습니다

1
2019-02-22 13:13:42

개인적으로는 제갈량의 무과적 성과는 다소 과대평가되었다고 보는 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술적인 면에 국한해서 보면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만.

국가운영 전쟁준비 그리고 군대의 운용(병참 등)은 비교할 바 없이 뛰어난 건 사실입니다만 이런 분야는 다른 말로 바꾸면 전략에 능하다고 할 수 있는데 회전이나 전투 등 국지적인 개별 전투에서 제갈량이 타 무장들에 비해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준 건 정사를 뜯어보면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니까요.

2019-02-22 12:45:43

좋은 연작 글 감사드립니다.  관우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왜 군신의 영역까지 가게 되었는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네요.

2019-02-22 12:57:06

정말로 손오가 천하삼분을 통한 잠시간의 균형 이후 기회를 노려 천하통일의 대업을 노려보겠다는 비전이 있었다면 저때 위나라 뒤통수를 치고 서주 방면 교두보를 마련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때까지만 해도 강남은 매우 낙후되고 이민족이 들끓던 곳이었는데 노른자위 북형주의 대부분을 유종과 채가가 항복하면서 위가 가져갔는데 나머지를 가지고 다툰것은 말그대로 방위선을 철저하게 구축하는 효과는 확실하나 확장성에 있어서는 글쎄입니다

이후 위촉오의 세력비는 고착화됐고 촉과 오는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균형을 깨지 못한걸 보면 더욱 아쉽습니다

2019-02-22 13:08:23

글쵸 저때 위에서 장료 등 다 뺐을때 뒤통수쳐서 합비 수춘 등을 먹었어야 했는데 결국 나중에 또 합비에서 막히고 더 이상 확장을 못하죠.

2019-02-22 12:58:15

오는 후에 양양을 얻었지만 이릉대전 때 위나라에 반납하면서 형주 방어선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했죠. 그리고 이 형주 공방전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으니....

2019-02-22 13:18:37

관우에 대해서는 뭐 글쓴분도 말미에 언급하셨지만

강점도 강하지만 약점도 워낙 뚜렷하고 그 약점으로 인해 무너졌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손권의 선택은 뭐 둘 다 크게 잘못된 건 아니고 형주를 빼앗는 게 좀 더 안전빵(?)이긴 했는데 저로서는 이해가는 선택입니다. 말씀하셨듯 서주는 위 상대로 지키기가 결코 쉽지 않은 지형인지라 오가 만약 서주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위가 전력으로 반격해오면 결코 지켜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으니....다만 문제는 오로서는 위를 북부 형주에서 몰아내고 형주를 완전장악했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했던 점이 좀 크지 않나 싶네요.

2019-02-22 15:05:30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삼국지 관련해서 재미있게 볼만한 사이트같은 것도 있을까요?

2019-02-22 17:32:53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2019-02-22 18:08:40

질문이 있습니다.

 

미방이 방어태세로만 갔어도 형주쪽은 지킬 수 있었나요?

 

WR
2019-02-22 21:25:23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강릉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사인이 항복해서 넘어간 공안, 공안 밑쪽이라 어차피 넘어갈 영릉이야 빼앗겼겠지만

강릉은 삼국지 내에서도 최고의 요새 중 하나였고, 훗날 주연이 보여준 강릉성에서의

무시무시한 탱킹력을 고려하면(물론 지휘관 차이가 넘사긴 하지만.......) 관우가

강릉까지 오는 시간 내에 충분히 버텼다고 봅니다. 양양-강릉 사이 거리는 150km밖에

되지 않기에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강릉은 지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설사 최악의 상황으로 갔어도 익주로 도주할 길은 확보할 수 있었다고 봐요.

 

 

 

2019-02-22 18:20:56

무척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삼국지로 이렇게 심도있는 논의가 가능하다니 반갑고 놀랍습니다. 풀어서 설명해주시니 인물들이 한 선택이 왜 그러했는지 이해가 되네요. 관우의 출정이 1년만 늦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도 해봅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2-22 20:03:45

아 이번 화는 못 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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