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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글을 보고 쓰는 삼국지의 형주에 대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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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2-20 17:20:16

 

우선 지도를 먼저 보고 시작해 보겠습니다.

형주 공방전 이전 상황으로, 나머지는 2에서 마저 적어 보겠습니다.

 

형주(荆州)는 후한의 여러 주 가운데 하나로, 삼국지 초기에는 원술, 유표, 손견이

영향력을 미치던 곳이었습니다. 남양에 자리를 잡았던 원술이 조조에게 패퇴한

이후 양주 자사의 거소가 있던 수춘 지역에 아예 눌러앉아 버리면서 형주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손견 역시 유표를 공격하다가 전사하면서 장사 일대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끼치던 손가의 영향력 역시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형주는 유표가 토착

호족들(괴씨, 채씨 등)의 도움을 바탕으로 굳건한 지배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지도에서 남양이라 써있는 곳이 삼국지 게임에서 흔히 나오는 완성이고, 번성 일대가

유비가 삼고초려 할 당시 항상 등장하는 신야현 일대입니다. 형주의 중심은 이 완성

남군, 양양, 강릉에 이르는 북형주 지역으로, 유비가 후에 점거하는 형남 4군이라

불리는 무릉, 장사, 영릉, 계양은 형주 크기의 거의 절반에 달하긴 하지만 북형주에

비해서는 발전 속도나 도시화가 덜 된 편이었습니다.(그래도 인구는 생각외로 많았다고...)

 

유표 사후 남하한 조조는 큰 저항 없이 형주를 거두어들였고, 조조의 손아귀에서 겨우

도망친 유비는 하구에 주둔하던 유기에게 의지한 채 함께 조조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우군을 간절하게 원하게 되었고, 때마침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손권과 손을 잡아

손유동맹을 결성, 조조와 맞서 적벽대전이 중심이 되는 형주 공방전에 돌입합니다.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손유 연합군은 조조의 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고,

조조는 대패를 겪으며 후일을 기약한 채 남군에 자신이 가장 믿고 신임할 만한

조인을 남겨 형주를 지키며 피해를 회복할 시간을 벌게 됩니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손권이 아니었고, 손권은 여세를 몰아 주유와 정보로 하여금

남군을 공격하게 하는데, 조인을 필두로 진교, 우금, 서황 등이 지키고 있는 남군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생각 외로 단단했고, 유비 역시 조조군을 추격하다 남군에 이르러

공격에 합류하면서 남군 공방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당시 유비는 영예주목 좌장군 의성정후의 직책으로(이는 연의에도 나옴)

그냥 토로장군, 회계태수였던 손권의 관직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렇기에 관직상

명목상 군을 대표하는 사령관의 위치에 있던 것은 유비였고, 때문에 유비는 공방전

동안 군을 대표하는 위치로서 상당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인은 그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는데, 주유가 감녕을 시켜

남군 방위의 또다른 핵심이 되는 이릉 지역을 공략해 버리자 황급히 이릉을

구하려고 했지만 능통이 눈물나는 본진탱킹을 해내는 사이 주유가 5천명의

병력에 포위된 이릉의 감녕을 구출하고 조인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남군에 덩그러니 남은 조인도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웠는지 1년여를 버티다

퇴각하고, 주유는 남군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연의에서는 진교의 병부를 손에 넣은 제갈량의 기지로 형주와 양양 일대를

비롯한 남군까지 유비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는데, 남군을 실제로

점령한건 주유였습니다. 물론 주유 휘하에 관우가 함께 했으니 유비군의

공적 역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유가 이렇게 남군 공략에 열을 올리는 사이, 유비는 배후에 있는

형남 4군의 세력들이 남군을 돕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명분으로 형남 4군

공략에 나섰고, 주유와 오의 예상과는 달리 순식간에 형남 4군을 집어삼키며

형주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상당한 영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관우로 하여금 주유를 돕게 하며 명분도 잃지 않으며 형남 4군이라는 실리를

취한 셈인데, 유비는 형남 4군을 점거하자 유기를 형주목으로 내세워서 더욱

형주를 취한 명분을 강화합니다. 원래 형주목이던 유표의 장자였던 유기이기에

형주 영유를 위한 명분은 충분했고, 그렇게 유비는 형주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당시 손권은 남군에 파견한 주유의 군대도 있었지만 본인 역시 군대를 끌고

합비에서 공방중이었는데, 답없는 공방을 하면서 합비에선 전혀 이득이 나지

않고 있는 찰나에 주유가 큰 부상을 입은 채로 자기 목숨 깎아 가며 결국

남군을 함락시키면서(209) 형주의 핵심 중 하나인 강릉을 손에 넣습니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 태수로 삼고, 정보를 강하 태수로 삼아 각각 주둔시켰고

손권 자신은 유비가 상표하는 형식으로 행 거기장군(行 車騎将軍) 서주목(徐州牧)의 지위에

오르는데(劉備表權行車騎將軍,領徐州牧. : 오주전) 이는 좌장군 의성성후인 유비의

관직에 밀리지 않도록 좌장군보다 위인 거기장군에, 똑같은 주목을 맞춰주기 위해

서주목(이건 손권의 서주에 대한 북벌 야욕을 반영했다고 보는 것이........)을 줘서

세력은 훨씬 큰데 관직에서 밀리는 손권을 유비가 직접 상주해 올려주면서 손권의

권위를 높여서 손권이 우위임을 인정하고, 유비 역시 유기 사후 형주목을 그대로

승계하면서 실리를 추구했는데, 손권은 이 당시에는 유기나 유비가 형주목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반대나 싫은 기미, 불쾌한 반응 같은 것이 없이 '묵인' 합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세력이 유비보다 더 크고, 현 상황에선 종속 관계에

가까운 동맹인데다 황숙이라는 지위를 활용해 본인에게 관직과 명분을 순순히

주는 동시에 우위를 인정해 주니 넘어간 것이 아닐까 추정되는데, 유비는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형주 일대의 속관들에게 추대를 받는 등 본인이 진짜

형주목인 명분을 차곡차곡 축적하는 동시에 형주 지배를 위해 기반을 쌓아올리며

형주에 대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하는 영리한 행동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핵심인 남군에 위치한 주유의 군대는 유비 입장에서는 우군인 동시에 눈엣가시

같았고, 주유는 연의에서 제갈량의 꾀에 매번 당하는 허접과는 달리 오나라 최고의

능력을 자랑하는 만능캐였기에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유는

연의에서 유비에 엄청나게 적대적인 것과 달리 실제 정사에서는 유비를 이용해 먹되

견제를 통해 오나라에 최대한 유익한 방향으로 써먹자는 실용주의자였고, 유비는

이러한 주유의 심리와 남군 공략에 관우를 참여시켜 얻어낸 지분을 활용하면서

장강 남쪽을 주유에게서 얻어냈고, 남안 땅의 유구를 공안(公安)이라 명명하고

군영을 세워 그곳에 주둔합니다. (연의에선 공안에 주둔한 것을 보고 주유가 남군에

욕심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 찾아가 경고하지만, 실제 정사에선 남군 탈취 이후의 일)

 

손권은 이렇게 유비가 세력을 순식간에 키워나가는 동시에 공안에 군대를 이끌고

주둔하자, 너무 키웠다고 생각했는지 위협을 느껴 보험을 들기로 합니다. 그 보험은

자신의 여동생을 유비와 결혼시키는 것. 그렇게 혼인 관계를 통해 동맹을 좀 더

굳건히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연의나 정사나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그러나 공안 하나로는 만족하기 어려웠던 유비는 직접 경구까지 찾아가 손권에게

주유가 준 땅이 적어서, 백성을 안정시키기에 부족하다고 호소하는데, 유비 입장에서

이미 공안 남쪽으로 땅을 확보하고 실질적인 지배권을 손아귀에 쥔 상태에서 정말로

말한 대로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고, 실질적인 뜻은 주유가 간섭하는 것을 줄이고

이 땅의 지배권은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라는 뜻에 가깝다고 보이는데, 이에 주유는

유비는 믿고 부리기엔 위험한 인물이며, 후에 배신을 때릴 테니 붙잡아두고 향락을

제공해 나태해지도록 유도하자고 제안했고 여범도 이에 찬동했습니다.

 

그러나 노숙은 유비를 최대한 활용해 먹어야 한다며, 이미 실질적인 지배권은 유비에게

있고, 본인들의 실질 지배력이 형주 남쪽에는 미치지 못하니 차라리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고, 유비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여 조조를 견제하게 하는게 이롭다는

진언을 손권에게 했고, 손권은 노숙의 말에 따르며 유비에게 땅을 빌려줍니다.

그렇게 경구에서 연회를 하면서 우애를 다진 양측, 유비가 떠날 때 손권은 서로 화기애애하게

조조를 물리치고 황제를 맞이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마지막 연회 때 유비는 주유의 능력으로

볼 때 그는 밑에 없을 것이라는 디스를 손권에게 한 채 떠납니다. (강표전)

 

이는 자신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주유를 손권에게 참소해 둘 사이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동시에, 유비가 손권에게서 벗어나려는 뜻을 이미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

 

위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와 같이 손유 동맹이 화목하고,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줬단

소식이 위 왕궁에 들어가자 조조는 들고 있던 붓을 땅에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는데, 막상

유비는 돌아와서 손거기(손권)는 위는 높지만 아래는 낮소, 그의 아래가 되기는 어렵소,

나는 다시 보지 않을 것이오" 라는 말을 남깁니다(선주전). 즉 손권의 밑에 남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인데, 후에 휘하에 들어온 방통이 주유가 자신을 붙잡아 놓으라 손권에게

간언한 사실을 알아낸 뒤로는 더더욱 주유를 경계하는 동시에 노숙의 뜻대로 되었음을

알고는 한시름을 놓게 되며 형주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굳건히 하기 시작합니다.

 

유비를 도모하기 어렵게 된 주유는 유비를 놔둔 채, 서촉을 공략하여 오나라의 영역을

서천에서 강동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의 남쪽을 장악해 북쪽을 거의 손아귀에 넣은

조조와 천하이분을 바탕으로 겨뤄볼 웅대한 꿈을 품고 손유와 함께 원정 준비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미 부상입은 몸으로 목숨 깎아 가며 혹사중이던 주유는 결국

몸에 걸린 과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후임으로

노숙을 지명하고 유비를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급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주유의 죽음으로 후임으로 임명된 노숙은 친유비파인 동시에 장사꾼 출신의 실리파

였고, 이미 형주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유비의 세력을 견제하고 대립하기 보단

유비를 방패로 세워 조조를 막게끔 하자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조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경지이며, 막상 우리가 얻은 형주(남군) 땅에서 은총과 신의가

 널리 퍼져 있지 않으니 조조의 적을 늘리는 한편, 우리 측의 친구를 늘리는 방편으로 유비에게

 빌려 위무하게 하여야.....' -노숙(한진춘추)

 

 그러니 즉, 오나라 단독의 역량으로 형주를 차지한들 조조를 막기 어려우니 차라리

 형주에서 인심을 얻은 유비에게 땅 빌려주고 조조를 상대로 탱킹시키며 우리는

 실리를 취하고 힘을 기르자는 뜻인데, 합비를 향한 오나라의 집념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당시로선 합리적인 뜻이기도 했습니다. 손권은 노숙의 말에 찬성하여, 유비에게

 남은 땅 역시 빌려주면서 유비는 사실상 형주 남쪽을 지배하는 실권자가 됩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주유 사후 노숙은 강릉에 주둔해 있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는 것이 합의된 이후 군을 이끌고 내려와 육구에 주둔하는데, 이 내용을 토대로

 보아 주유 사후 주유가 준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노숙이 유비에게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대충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형주 남쪽 형남 4군: 무릉, 장사, 영릉, 계양: 유비가 점령했고, 유비의 세력권.

 강릉 일대: 주유가 점령. 관우를 필두로 한 유비의 지원도 있어 지분으로 장강 남쪽 득템

 

 그런데 여기서, 오나라의 기록서인 오서에도 형주에 대한 오나라의 지배권이 일부

 나오는데, 촉나라의 역사서와 기타 기록등을 미루어보아 형남 4군 역시 유비가 모두

 가져갔다기 보단 오에 근접한 지역은 오 역시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인

 형주와 양주 접경지역인 장사군의 경우 210년에 손권이 장사군을 분할하여 한창군을 세웠다.

이와 함께 손권은 예장군의  일부를 나누어 파양군을 세웠고, 원래 남군태수인 정보를

강하태수로 옮기고 노숙을  한창태수로 삼았으며 노숙은 군대를 이끌고 육구에

주둔했다는 기록으로 볼때 손권 역시 장사 일대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고, 유비에게

형주를 넘길 때 자신이 가진 장사의 영역은 따로 떼서 한창군으로 가져가고 유비의 영역을

장사군으로 가져가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여기서 양측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유비: 조조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서 서로 필요해 손을 잡은 것이고, 우리가

힘이 약해 먼저 우리가 숙이고 들어갔으며 너희에게 명분과 관직도 줬다.

원래부터 유기의 영역이던 하구 일대와 형남 4군(무릉, 장사, 영릉, 계양)

은 온전히 내 힘으로 먹었고, 남군은 비록 너희가 먹긴 했지만 우리도 공로가

크기에 지분이 있으니 그만큼은 받아야겠다. 너희가 준건 강릉뿐이잖아?

지금이야 내가 세력이 약해 웅거할 땅을 얻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는 약조를

했지만, 형주에 대한 소유권은 이미 충분히 얻은 만큼 적당히 나눠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가 아닌가?

 

손권: 조조한테 멸망당하기 직전까지 온 녀석을 구제해줬고, 우리가 품안에

넣어서 키워준 동시에 우리가 합비와 남군에서 탱킹하는 동안 형남 4군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거다. 비록 너희가 컸다 한들 우리가 세력은

더 크고, 너희를 품어 지켜준 입장이니 너희가 나중에 땅을 얻어 독립해

나간다면 그 보답은 해야 한다. 핵심인 강릉도 우리가 빌려준 것이지 않나.

 

양 측의 입장을 궁예해보면 대강 이랬을 겁니다.

즉, 손권은 형주 전체의 소유권을, 유비는 자신의 몫은 유지하면서 나눠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서로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손권은 합비에서 막히자, 주유가 원래 기획했던 안을 실행으로 옮기고자 서천

일대를 공략할 생각으로 손유에게 촉을 공격할 준비를 하라 이른 뒤 유비에게

협력을 요청하는데, 촉으로 가는 길목의 영유권을 유비가 쥐고 있으니 편한

군대의 이동과 보급을 위해 협력을 요구한 것인데, 손권의 요구에 유비는

애초에 본인이 서촉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에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손권은 손유를 시켜 단독으로 군을 일으켜 서촉 정벌에 나서게 하는데

유비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유장은 똑같은 한종실이기에 공격하면 안 된다면서

안 들어주면 산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소리를 하며 막으니 손권은 열이 엄청나게

뻗쳤지만 당장 혼인 동맹인 동시에 아직은 유비와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는지

일단은 손유의 군대를 물린 채 유비의 움직임을 지켜봅니다.

 

그런데 이후, 판도를 크게 뒤흔들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211년, 조조가 종요에게 한중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것이었는데, 관중 일대에

조조의 군대가 집결하기 시작하지 위협을 느낀 마초는 먼저 선빵을 치기로 결의하고

서량의 군대를 집결시키는 동시에 미리 언질이 있던 관중의 군벌들과 함께 일어나

조조에 맞서기 시작했는데, 마초 외에 불안함을 느낀 인물이 또 있었습니다.

 

그건 당시 익주를 지배하고 있던 유장이었는데, 장송이 같은 한나라 종실이며

영웅인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견제하게 하자는 제안에 유장이 찬성하면서

유비에게 들어오라는 제안을 보냈고, 유비는 그러자 자신의 세력 일부를

거느리고 촉에 들어와(211), 212년까지 장로를 공격하는 둥 마는둥 시간을

끌면서 서천 백성들에게 인심을 베풀어 민심을 쌓는데 주력합니다.

 그러자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어느 세월에 먹고, 형주를 확실히 돌려줄까

하는 의문을 품었는지, 유비에게 시집보냈던 동생에게 돌아올 것을 권했고

(연의와는 달리 모친이 위독하단 소식따위 없었음), 손부인은 유비의 하나뿐인

혈육인 아두를 데리고 돌아가려 했는데(사실상 납치) 조운과 장비가

직접 군을 끌고 나서서야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조조는 마초의 군대에게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결국 마초의 군대를 관광보냈고,

본인은 장안에 주둔해 있었는데 본인을 비롯한 주력군이 관중 일대로 가 있는

사이 형주 방면에서는 악진이 청니에서 관우와 대치중에 있었고, 서로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며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유비는 손권이 도움을 요청해 형주로 돌아가겠다며

군을 물릴 채비를 하는데, 오나라의 역사서엔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역사서에선 유비의 뻥카라고 여기는데(실제로 조조가 손권을 공격한 건 다음해)

오히려 유장측에서 내통하려 했던 장송이 유비의 뻥카에 낚여 안절부절 못하다

실수로 이것이 발각되면서 처형되고, 유장은 유비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전쟁을

선포하는데, 유비는 유장과 전면전을 벌였으나 213년 군사였던 방통을 잃으며

고전했고, 결국 서촉의 완전한 정복을 위해 본거지인 형주에서 2차로 병력을

빼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갈량을

비롯한 장비, 조운 등 1군이 서촉으로 파견됩니다. 즉, 원래 형주 수비와 지배를

위해 남겨놨던 주력군을 서쪽으로 보냈기에 형주 방면 군사력은 약화된 것.

 

그래도 장비라는 뛰어난 사령관과 주력군을 익주로 파병한 덕택에, 유비는

그 이후 승승장구하며 익주에서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관우는 수만의 병력과 장수, 책사의 유출에도 청니에서 악진과

끊임없이 대치하며 고독한 싸움을 이어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비군에서 당시 일군을 이끌 상장으로 대표되는 것은 관우와 장비였습니다.

기록이 부실해 유비가 세력을 얻기 전에 관우와 장비가 왜 그렇게 크게 명성을

떨쳤는가는 불분명한데,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여포 생존시기)

부터 이미 둘은 범과 호랑이 같은 장수이며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장비가 촉으로 파견된 이상 형주 방면을 맡아 수비할

사령관으로 적합한 건 관우밖에 없었고, 관우는 이렇게 홀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 청니 대치는 뜻밖의 일로 끝나는데, 유수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위와 오가 충돌하자 악진이 전선으로 파견나가면서 대치가 끝난 것인데, 이

당시 손권은 주광이 지키고 있던 환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높였고, 조조와

손권은 공방 끝에 승자 없이 끝나는데, 그 무렵 유비는 마초의 세력마저

휘하에 넣으면서 결국 익주를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합니다.(214)

 

유비가 서천을 손에 넣었다는 소식은 조조와 손권 모두에게 전해졌고, 양측은

서로 다른 행동을 하는데 조조는 서천의 입구인 동천(한중)을 점령해 유비를

견제하고자 하여 장로를 공략할 채비를 했고, 손권은 약속대로 유비가 영주할

땅을 얻었으니 형주를 돌려줘야 한다는 뜻을 전하고자 제갈근을 파견합니다.

 제갈근이 유비에게 나아가 손권의 뜻을 전하자, 유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

주를 다 내어주겠습니다."   여기서의 양주는 손권이 있는 오나라 지방의 양주가 아닌

서량을 의미하는 양주로, 연의에서는 이를 조금 더 자세하게 풀어서 형주에 주둔하고

있는 관우가 갈 곳이 없으므로 양주(서량)을 얻으면 관우를 이쪽으로 옮겨 주둔케

하고 형주를 손권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을 밝힌 것인데.................

 

손권 입장에선 분노할 만한 일인게, 서천을 오에서 점령하려고 할때는 쌍수벌려

인척이기에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며 막아서고 지원도 거부하더니, 막상 유비는

서천으로 들어가 본인들이 조조와 유수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날름 서천을 먹은

동시에 원래 촉의 주인이던 유장을 형주로 내쫓으며 신의는 개나 줘버렸기에

어이를 잃어버린 상황이었지만, 형주를 돌려받을 명분은 얻었기에 제갈근을 보냈는데

 

유비가 저렇게 나오자 분노한 손권은 이는 시간을 끌고자 하는 수작이다! 라고

분노하여 현 주인인 유비의 요청없이 본인 독단으로 유비가 독자적으로 얻었던

형남 4군 가운데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는데 당시 형주를

책임지고 있던 관우는 지체없이 임명된 태수들을 위협해 경계 밖으로 내쫓았고,

이에 손권은 격렬하게 분노하여 여몽에게 지시해 군을 이끌고 형주를 공격하여

장사, 계양, 영릉을 손에 넣을 것을 지시한 동시에, 곧바로 여대와 손무 등을 비롯한

장수와 지원군을 파견해 형주를 거두어들일 뜻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그러자 손권의 병력의 위세에 장사와 계양은 그냥 항복하며 순식간에 넘어갑니다.

 

두 군을 그냥 눈뜨고 빼앗긴 유비 역시 극도로 분노해 5만의 병력을 끌고 직접

형주로 와서 공안에 주둔하는 동시에 관우를 익양에 배치시켰고, 그러자 손권은

유비가 순순히 형주를 내어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영릉을 공격중이던

여몽에게 영릉 공략을 멈추고 돌아와 노숙의 본진에 합류하라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여몽은 꾀를 써서 학보가 지키고 있던 영릉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는

학보의 친구 등현지의 편지를 득템한 뒤, 이를 위조하여 유비군은 격파되었고,

손권군은 계속 군대가 증원되고 있으니 희망이 없으니 항복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으로 편지를 주작했고, 학보는 이에 항복, 영릉도 여몽의 손아귀에 떨어집니다.

장사, 영릉, 계양의 삼군을 손에 넣은 여몽은 그렇게 유유히 노숙에게 합류했고.....

 

여몽이 형주 남부를 그렇게 손에 넣는 동안, 노숙의 오나라 본진은 익양에 주둔한

관우의 군대와 대치중이었는데, 노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관우를 마주보는 형태로

강의 북쪽에 성을 축조하는데(노숙제라고 부름) 관우는 이 노숙제를 보고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때 3백 명의 병사를 가지고 있던

감녕이 자신에게 5백 명만 증원시켜주면 관우가 자신의 침 뱉는 소리만 듣고도 건너오지

못하겠다고 호언장담했고, 노숙은 감녕에게 병사 1천을 증원, 감녕으로 하여금 나무로

망루를 세워 관우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는데 감녕의 호언장담마냥 관우는 쉽사리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노숙처럼 진채를 벌인 채(관우뢰) 대치를 계속합니다.

 

대치만 계속하단 답이 안나올 것이라 판단한 양측은 타협에 들어가는데, 서로 군사를

백보 밖으로 물린 채 단도 하나만 들고 만날 것을 제안하자,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관우를 상대로 하기에 오나라의 장수들은 관우의 흉계를 알 수 없다며 노숙을

만류하지만 노숙은 진의를 알기 위해 위협은 감수해야 할 일이라며 직접 만나러

갈 뜻을 강하게 밝히고 관우를 만나기 위해 출발합니다.

 

관우와 노숙이 만나자 관우는 우리 군이 조조를 물리치는데 많은 공로를 세웠는데

왜 땅을 빼앗아 가는가를 항의하자 노숙은 장판파에서 죽을 뻔한 유비의 세력을

거두어 온갖 지원 끝에 일으켜 세운 것은 손오의 힘 때문이었음을 주지시켰고,

관우가 이에 마땅한 답을 하기 전에 관우 휘하의 장수가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 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라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연의에선 주창으로 나옴)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관우는 눈짓으로 이를 제지하는데,

연의에서는 관우가 노숙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오나라의 위협을 유유히 피해간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정사에선 험악한 분위기 속에 결국 파토가 나고 맙니다.

 

그러자 양측은 정말 전쟁을 각오한 채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치를 이어나갔는데

이 대치를 끝낸 것은 양측이 아닌 조조였습니다. 조조는 215년 장로에게 항복을

받아내며 동천(한중)을 손아귀에 넣는데, '서천의 목구멍' 이라 불리며 이와

입술의 관계(脣亡齒寒)인 한중이 조조에게 넘어가자 서천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매일같이 조조가 그대로 서천을 침공해 오는 것이 아닌가 떨면서 두려워했는데

이는 유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형주에 있는 사이 조조가 그대로

밀고 내려오면 답이 없겠다고 판단한 유비는 손권에게 먼저 손을 내밉니다.

 

협상해서, 서로 형주를 나눠먹고 타협하자는 제안이었는데 이미 손권이

점령한 장사와 계양을 내어주고, 본인이 유기에게 받은 땅이던 하구 일대,

강하군 일부를 손권에게 넘겨줄테니 본인이 강릉, 무릉, 영릉을 갖겠다는

제안으로, 형주 남부를 동서로 분할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확전을 원치 않았던 양측은 그렇게 결국 타협하면서 형주 분할에 합의하는데,

이 대치를 '익양대치' 라고 부르며, 유비와 손권이 충돌하기 직전까지 간 사건

인 동시에 형주 문제를 놓고 양측의 인내심이 거의 한계까지 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일촉즉발으로, 이미 깨질대로 깨진 항아리를 조조의

위협이라는 접착제로 간신히 붙여놓은 형국이었는데, 양측의 신뢰는 이미

거의 무너진 상황에서, 타협을 통해 가까스로 전쟁은 피했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215년)

 

 손권은 여전히 불만이 많았습니다. 익양대치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이미 3군을 점령한 상황에서 하구를 비롯한 강하 남부 일대는

 손권의 영역에 가까웠기에 언제든지 점거할 수 있는 땅이었고, 형주 전체

 를 손에 넣겠다는 손오의 뜻은 여전히 확고했습니다.

 

 거기에다 손권이 형주 방면 외에 다른 전선에서 소득을 얻었다면 모를까...........

 10만의 병력으로 합비에서 장료에게 료라이라이를 쳐맞으면서

 관광당했고(215), 소식을 듣고 급하게 한중에서 합비 전선으로 온

 조조의 군대와 유수에서 공방을 벌인 끝에 승자 없이 병력과 물자만

 소비하며 결국 아무 이득을 취하지 못하며 오나라 육전 능력의 한계와

 손권 본인의 지휘 무능을 드러내는 꼴이 나고 말았으며............

 

 결정적으로 217년, 유비와 손권 양 진영에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오의 도독 노숙이 사망하면서, 대 유비 강경파인

 여몽이 후임으로 도독에 임명되었고, 여몽은 손오의 육전 능력의

 한계와 수비에서의 불리성을 들어 서주와 합비 방면으로의 군사

 행동은 어려움을 피력하고 형주에 집중할 것을 손권에게 제안했고

 유비의 커져가는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미 유비에 대한

신뢰가 없는 손권은 이를 받아들여 형주를 노릴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 무렵 유비군은 216년, 유비가 서촉을 완전히 세력권으로 확보하기

 전에 이를 견제하고자 남하했던 장합의 군대를 장비가 탕거에서

 대파하면서 익주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으며, 218년 법정의 건의로

 북진하여 조조의 군대와 대치, 한중 공방전에서 하후연을 베고

 조조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한중을 빼앗고 상용도 점령하며(219)

 최전성기를 달렸고, 유비는 한중왕에 오르며 천하에 기세를 뻗칩니다.

 (저를 포함한 촉빠들의 환희, 그러나 이후는 눈물없이 못보는........)

 

 관우는 당시 형주에서 병마를 조련하고 수비를 강화했는데, 여몽과

 손권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던 관우는 남군과 공안 일대에 수비병력을

 배치하여 여몽의 움직임에 대비했고, 여몽은 관우의 철통같은 방어선을

 보고 형주 공략은 절대 쉽지 않을 것임을 파악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지자 상황을 타파하고자 손권은

본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결혼시킬 것을 제안하는데, 관우는 이 제안을

가져온 사신에게 모욕을 주면서 단박에 거절, 손권은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되었으며 여몽을 비롯한 강경파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됩니다.

 

 여기서 혼담을 거절한 관우를 비판하는 의견도 많은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거절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익양대치로

 손권의 형주에 대한 야욕은 드러난 상황에서 의도가 의심스러웠고,

 유비군 내에서 유비에 이어 2인자인 동시에 형주를 거의 독립적인

 세력처럼 경영중이던 관우가 손권의 사돈이 되면 의심을 사기도

 쉬운데다 손권과의 관계에도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며, 거기에다

 이미 손부인을 빼돌리려는 시도를 했던 손오의 사례로 볼 때,

 또 같은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기에.

 

 관우의 실책이라면 정중하게 거절했어야 하는데 모욕을 내뱉었다는 점?

 어차피 거절한 이상 어느 쪽이던 손권의 분노를 피할 길은 없겠지만......

 유비가 한중왕이 되며 본인과 같은 위치에 올랐단 것에 대노한 조조와

 형주에 대한 욕심과 관우 문제로 분노한 손권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고

 적벽 이후 치고받던 양국은 처음으로 손을 맞잡게 되는데.....

12
Comments
1
2019-02-18 18:41:11

아아...여기까지만 볼란다...
아아....

2
2019-02-18 18:57:24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잠깐 들어오지 않는 사이 또 형주 떡밥이 지나갔네요 흐흐. 조비를 까고 싶어서 우금에 대한 글을 쓰려던 참이었는데 주제를 바꿀까봐요.
저도 이전에 비교가 안될 부족한 글이긴하지만 형주와 관련해 유-손 동맹의 위태로움에 대해 적은 바 있습니다.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456158

2019-02-18 19:59:44

생각해보면, 동오의 후임 도독인 노숙과 유비측의 전략입안자인 제갈량이 모두 서주 출신이었죠. 당시 같은 지방 출신 명사들간의 높은 연대를 생각한다면 둘의 깊은 커넥션은 더 이해가 갑니다. 노숙 자체가 전임 주유에 비해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기도 했고 말이죠.

WR
2019-02-18 20:20:14

노숙이 요절한건 아니지만, 조금만 오래 살았어도 판도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넓은 시각에서 정세를 파악하고 정국을 주도하는 동시에 양국을 중재하여 유비와 손권

둘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조금 아쉽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충돌을 막을 수 있을거라고는 보지 않지만서도.........

 

2019-02-18 19:31:17

글 잘쓰시네요. 어떻게 보면 단순한 기록의 나열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마치 또 하나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쓰셨네요. 잘보고 갑니다.
다른 삼국지 관련 글도 쓰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2019-02-18 20:33:49

오하의 아몽..
맘에 안듬. 진삼에서도 제일늦게
손대는 캐릭. 결론은 손제리를 까야합니다. 손책만 오래살았으면...

2019-02-18 20:46:19

손책의 그 불같은 성격을 누가 감당했을까요...

2019-02-18 22:24:47

장소. 장굉. 고옹 3노친네?
아님 주유?

2019-02-19 10:15:14

제갈량은 처음 등용되었을 때 형주를 먹으려고 했었죠?

 

1. 어떤 방식으로 먹으려고 했나요?

유기를 통해서? 공격을 통해서?

 

2. 운이 좋아 적벽대전이라는 상황이 발생을 했지만

 

만약 형주를 점령했으면 북쪽에서 내려온느 대군을 형주에서 막을 수 있었나요?

WR
2019-02-19 11:33:57

 

1. 천하삼분지계를 내세우면서 형주과 익주를 손에 넣자 주장한건 사실이죠.

방식은 확실하진 않지만 유장을 부술 때와 같았을 거라고 봅니다. 같은 종친임을

내세워 들어간 뒤, 민심을 사서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케이스. 그런데 유장과는

다르게, 유표는 형주 지역에 지배력이 확고한데다 형주는 괴씨나 채씨등 토착

호족 세력들의 세력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이들이 유비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형주를 손쉽게 손에 넣기는 어려웠을 거라 봅니다.

유기를 지원한 것도,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유종을 미니까 반대급부였을 거라 보고요.

 

 

2. 형주를 점령했어도 유비군의 능력으로만은 조조를 막기 어려웠을 거라 봅니다.

갓 형주를 점령했다 한들 유표가 죽고 조조가 남하하는데 1년 이내의 짧은 기간에서

유비가 형주 전체를 아우르고 안정화시킨 뒤 군대를 뽑아내는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토착 호족들이 유비를 도왔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 상황에서 만일 유비가 유표의

자리를 계승하려 했다면 내전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

 

거기에 형주는 익주와는 다르게 방어에 유리한 지형은 또 아닌지라.......

손권과 손을 잡는 것도, 당장 앞뒤 가릴 것 없었기에 일사천리로 이루어졌지

유비가 형주를 얻었다면 어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절대라는 것은

없지만, 제 생각에 열에 아홉은 조조에게 박살났을 거라 생각합니다.

 

 

 

 

2019-02-19 11:56:08

.. 형주가 제 생각보다 밑에 있었네요.....

삼국지 맵으로 치면 양양/강릉 바로 밑으로 상상했었는데...

2019-02-20 19:24:56

삼국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항상 흥미롭습니다. 이제 다음얘기들은 촉빠들(저포함)에겐 눈물없인 보기힘든 내용들이겠네요..ㅜㅜ 노숙이 진짜 5년만 더 살았다라면.. 항상 아쉬운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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