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빠가 되고 싶나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 완전한 비혼주의자였습니다.
'결혼하는 순간 본인의 인생은 끝이야.'
꾸미는 걸 좋아하고 주말마다 여행을 다니며 인생을 즐기던 선배들이,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며 본인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 같이 느껴졌었거든요.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놀고 싶은 거 다 놀기에도 빠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P라는 직장 선배가 있는데요, 누구보다 화려했던 선배입니다. 운동을 잘하고 똑똑했으며 성격도 좋을뿐만 아니라,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겨서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본인도 그런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인싸겠네요.
그런 선배가 2년 전 결혼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약간 충격이었죠.
그 선배에게는 오래된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좀 더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나눴었거든요.
그 후 1년이 지나 P를 봤습니다.
살이 많이 쪄서 예전의 샤프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고,
'야, 민창아. 봐봐.너무 귀엽지.'라며, 태어난지 8개월 된 딸의 동영상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짓는 아재가 되었더라구요.
술이 약간 거나하게 취했을 때였을까요, 제가 P한테 이런 얘기를 했던 거 같습니다.
'선배, 근데 난 예전 화려했던 선배모습이 그리워.
지금은 선배가 아닌 거 같아.'
그러자 그 선배가 저한테 이런 식으로 말했던 거 같아요.
'민창아, 물론 그 때의 내 모습이 외면적으로는 화려했을 수 있지만, 사실 난 지금 그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
허리 사이즈는 4인치나 늘었고 턱선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지만,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날 반갑게 맞아주는 우리 와이프, 그리고 8개월 된 우리 딸. 요즘은 제법 옹알이도 길어지고 자주 깔깔대며 웃어. 며칠 전에 처음으로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 아빠라고 말했거든. 33년을 살며 가장 행복했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었어.'
저는 결혼과 육아를 포기와 희생이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한끼에 20,000원짜리 밥을 먹고 5,000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수가 없겠구나.
책 읽을 시간도, 대학원 다닐 시간도, 혼자 여행을 다닐 시간도 없겠구나. 내가 꿈꾸던 미래를 포기해야하겠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면 옆에 누구보다 든든한 내 편이 있고, 나와 반려자를 반반씩 똑닮은 사랑하는 아기가 올바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도 참 행복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오셔서, 동생과 셋이서 맥주한잔을 했거든요. 처음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났던 얘기도 자세히 듣고, 성현이와 제가 성장하며 있었던 에피소드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부모님도 분명 포기와 희생을 하셨겠죠.
하지만 이렇게 세대차이를 넘어, 같이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행복을 공유할 수 있는 자녀가 있다는 것도 인생의 축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몇 달 전에 '어떤 아빠가 되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었는데요. 아들의 초등학교 축구 경기에 가서 목청이 터져라 응원해줄 수 있는, 비록 아들이 축구를 잘 못해 골키퍼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라운드에서 뛸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아빠.
딸의 학예회에 가서 꽃다발을 주며, '고생했어 우리 딸. 오늘 최고였어.'라고 따뜻하게 말해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던 것 같아요.
금전적으로 부유한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부유한 아빠와 남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가 많이 노력해야겠죠.
아직은 먼나라 이웃나라 얘기인거 같지만요.
최근에 P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살이 더 쪘더라고요.
'선배, 요즘도 행복해?'라고 물었더니,
'야, 요즘 진짜 살쪘다고 맨날 와이프한테 혼난다. 아주 미치겠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네요.
매 순간이 행복할 순 없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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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제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어떤 아빠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는 아빠가 되려고 합니다. 추궁하는 식의 질문이 아니라 정말로 아이가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해주려고요.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게끔 해주려고 합니다. 또, 아빠 말이 항상 옳을 수 없다는 것도 주지시켜 주고 싶습니다. 예전에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저희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무조건 용서를 빌라는 식은 옥의 티였으니깐요.
막상 아이가 생기면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착하고 정의롭게만 커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