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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전적으로 인조와 서인들의 책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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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01:30:09

오늘(일요일) 저녁에 부모님 댁에서 어머니 그리고 저의 바로 아래 동생과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머니와 제 동생은 모두 나름대로 우리나라 역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온 분들입니다. 지난주에 어머님이 어떤 노인 분들의 모임에서 병자호란과 인조에 대한 특강을 하셨다면서 그 내용은 이렇고 이런 것이었는데, 저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어머니와 제 동생은 모두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를 조선조 5백년 역사에서 최악의 왕 중 하나로 여깁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제가 중고등학생 때 배운 역사에서는 광해군은 폭군이고 인조(仁祖)는 한자의 뜻처럼 어진 임금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 평가가 완전히 바뀌고 있음을 저는 여러 번 실감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절대 인조가 어진 임금이거나 뛰어난 임금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래에 유행처럼 번지던 광해군 띄우기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지만, 인조와 서인들이 광해군을 내쫓은 명분에 대해서도 저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조가 21세기 한국에서 맹비난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호란이 발생한 것이 전적으로 인조와 집권 서인들의 책임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오늘 저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열변을 토했고, 거기에 대해 어머니와 동생은 썩 내키지는 않지만 다시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필 받은 김에 제가 말한 내용을 여기 매니아에 올리겠습니다.


병자호란의 발생과 그 직후에 벌어진 극도의 무기력함에 대한 책임이 인조와 집권 서인에게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수많은 역사책과 연구논문에서 당시 집권층의 잘못된 판단, 허술함과 무능무책임 등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어, 파헤칠수록 당시 조선이 입은 피해의 거의 모든 것이 인조와 집권층의 책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입니다. 만일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고 그때까지 집권했다면 그가 구사한 절묘한 외교정책으로 병자호란 같은 참사를 원천적으로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많은 학자들과 저술가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와 동생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르하치(努爾哈赤, 노이합적)가 이끄는 건주여진은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주변의 여진족들을 차례로 복속시켰고 1613년에 여진족 대부분을 통일했습니다. 광해군 8년인 1616년 누르하치는 국호를 대금(大金, 이하 후금)으로 정하며 건국하였고, 그 이후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때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명군에 원병을 보내 후금과 싸울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심하에서 조선군은 후금 군대와 격전을 벌여 수많은 장병을 사살했습니다. 하지만 명군이 섬멸되고 조선군이 겹겹이 포위된 상태가 되자 원병을 이끌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에게 항복했습니다. 강홍립의 항복은 실제로 후금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광해군의 심중을 헤아린 것이었습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적극적인 양면외교를 펼쳐 명의 의구심을 풀어주면서도 후금을 자극하지 않았고, 후금과의 교역도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인조가 집권하기 바로 전 해인 1622년 후금의 광녕 정복으로 인해 조선과 명의 육상통로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1623년 인조가 즉위한 후에도 후금은 팽창을 계속했습니다. 육상통로가 완전히 차단되자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 쪽으로 기우는 것을 더더욱 경계했고, 후금은 명과의 전쟁을 위해서 조선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627년 후금이 조선을 느닷없이 침략한 것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궁궐을 짓느라 파탄 낸 재정도 복귀가 안 되었고, 방치했던 군비도 정리가 안 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화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전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정묘호란부터 병자호란 사이에 약 10년 동안 조선과 후금은 혼란스러운 관계에 있었습니다. 두 나라 간의 가장 큰 갈등은 명나라와 동등한 예우를 요청하는 후금과 이를 거부하는 조선 사이의 불신이었습니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정변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강력히 비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입으로만 척화정책을 썼을 뿐 실제로는 후금과의 적대관계를 피하려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1633년 조선과 후금의 국교단절 위기도 누르하치의 대를 이은 후금의 홍타이지(皇太極, 황태극)가 조선에게 남조(명)와 똑같은 대우를 요구하며 절사의 통첩을 보낸 것입니다. 조선의 대신들은 청의 요구에 화가 치밀었지만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관계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누르하치의 사망 후 왕위를 이어 받은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는 여진족의 전통에 따라 지도자들의 합의에 의해 선출되었고, 나이 많은 형들은 자리에 앉을 때도 왕보다 상석에 앉는 등 홍타이지가 즉위 할 당시 후금의 왕실은 전래의 부족 수준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홍타이지는 왕이었지만 8기군 중에서 2기만 지휘할 수 있었기에 그의 권력은 반토막에도 못 미치는 네토막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빠른 속도로 세력을 늘였고, 아버지 누르하치는 꿈도 꾸지 못했던 명(明)을 대신할 새로운 제국을 꿈꿨습니다. 그는 혼인을 통해 몽고와 연합함으로써 원(元)제국의 황제였던 쿠빌라이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중권 제패를 선언했습니다.


나이 47세이던 163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홍타이지가 즉위식을 올릴 당시 축하사절로 간 조선의 이곽, 나덕현 등은 그에게 황제의 예를 거부했습니다. 그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지만 만일 군신지맹으로 황제의 예를 올리는 경우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반역죄로 일가족이 몰살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홍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을 벌하는 대신 그들을 귀국시키면서 자신은 쿠빌라이의 후손이기 때문에 고려가 원나라를 섬기던 것처럼 조선은 청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조를 책망하는 서한을 보내 조속한 시일 내에 회답과 함께 인질을 보내도록 명령했습니다.


청의 홍타이지는 명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던 이전의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조선은 청을 유일하게 섬겨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조선은 이제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고 청의 신하국이 되느냐 이를 거부하느냐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하였으며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조정은 홍타이지의 서신을 묵살한 채 회답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요구를 조선이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해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의 조정이 취한 어리석은 정책이 병자호란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 청나라가 느닷없이 군신 관계를 요구하면서 침략한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물론 조선이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들을 유일한 황제국으로 섬겼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명을 배반하고 새로 청을 섬긴다는 것은 조선의 외교정책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고 조선의 건국이념과 유교사상, 정치와 문화 그리고 사회 운영의 구석구석에 이르도록 긴밀히 짜여진 틀을 깨는 문제였기 때문에 조선의 조정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막말로 필부도 주먹질하며 협박한다고 아무에게나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데, 하물며 자신의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살던 자존심 높은 나라에서 죽기 살기로 싸워보지도 않고 청을 유일한 황제국으로 섬길 수는 없었습니다. 광해군이 당시에 집권했더라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광해군시절 집권하던 대북파는 인조시절 서인들 못지않은 명분론자들이었습니다. 광해군과 대북파라고 할지라도 청으로부터 양자택을을 요구받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보낸 서한에서 “너희들의 조상이 원제국을 섬겼듯이 너희들도 대청제국을 섬기라.”고 했는데,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조선과 고려는 명백히 다른 나라고 원이 아니라 명을 섬기는 것이 조선 건국의 한 명분이었기에 홍타이지의 서신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정도를 지키며 사직을 지키며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인조실록에 적혀 있는 당시 이조참판 정온의 말은 당시 조정이 처했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조선이 현실에 눈을 감은 채 자신들만의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 대신 열린 마음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예의 주시했다면, 여진족이 중원의 주인이 된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테고 훗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기는커녕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을 것이다.”

어머님 댁에서 읽은 책의 한 구절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그 책의 주장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의 시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명실상부한 중화의 주인이며 임진왜란 때 재조지은을 준 명제국이 천하질서를 위협하는 오랑캐를 결국 물리칠 것이라는 게 오히려 당시의 합리적인 사고였을 겁니다. 만일 조선이 명을 배신하고 청을 요구를 들어줬는데, 명이 청을 토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조선은 그 즉시 망국의 길로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당시 사람들에게 안 떠올랐을 리 없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만 해도 명은 여전히 강국이었고 천하의 중심도 여전히 명이었습니다. 청이 결국 중원의 임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사람에게는 오히려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글의 요지는 병자호란의 발발과 삼전도의 치욕은 온전히 인조와 집권 서인들만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인조는 어질지도 않고 유능하지도 않은 임금이었습니다.


인조실록에는 삼전도의 굴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산성일기나 병자일기 등의 자료를 살펴봐야 합니다. 인조는 항복하기 전에 수시로 사람을 보내 항복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지 알아보며 두려워했습니다.


산성일기에 따르면 항복의식을 거행할 당시 홍타이지가 단 위의 의자에 앉자 인조는 진흙 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행하려 했습니다. 신하들이 읍소하며 돗자리를 깔기를 청하자 인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히 황제 앞에서 어찌 스스로를 높일 수 있겠는가?”



오늘의 글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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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16-07-18 01:43:29

설령 피할수 없었더라도 대처와 이후 행동들이 너무나 실망스러웠기에 비난은 피할 수 없어보입니다. 광해군이라고 호란을 막을 것같진않지만 인조보다는 대처를 잘했을 것 같습니다.
외침이라는게 집권층의 오롯한 잘못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임진란이나 일제침략 등등도 그렇게봐야할텐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네요.

WR
2016-07-18 01:57:58

저는 병자호란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외침이라고 일반화시켜서 다시 물어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2016-07-18 10:12:40

저는 침략당한경우 만만하게 보이게 만든 집권층들이 가장 크다고 보기에 청의 상황은 부차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크게보면 세조의 왕위찬탈부터 이괄의 난까지 많은 내부 사건들이 삼전도의 치욕을 만든 것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결국에 책임의 범위를 어디까지 두는가 문제로 보여서 다른 비슷한 경우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봤습니다. 일반화시켜서 다른것도 그렇다면 그 관점에서는 그렇구나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2016-07-18 01:51:01

사실 광해군 일기의 수정되기전의 원본이 등장하고나서 사실관계에 관한 연ㄱ가 부족할 수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정보의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아 제한적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명이 이길것이라 생각한 것이겠죠.
사실 과거 역사만 보더라도 원이나 이민족이 중국의 왕조를 무너뜨린 경우가 사실 적기도 해서 당시에는 설마했던 것이었을 겁니다.
뭐 서인들과 인조를 옹호할 생각도 없고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더 이야기해도 바뀌지는 않을 테지만, 현대의 외교서 저리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건 충분히 고민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WR
2016-07-18 01:59:05

말씀처럼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풀어 쓴 것입니다. 저는 이제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편한 밤 되시길..

2016-07-18 02:35:42

저의 능력이 부족해서 베일리님의 글을 다 이해를 못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편안한 밤되세요.~~~
2016-07-18 02:20:09

개인적으로 호란은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판단을 쉽게 할 수 없어도, 내부적으로 이괄의 난 같은 대형참사를 막지못한것이(자초했다고도 볼수있는) 큰 타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WR
2016-07-18 10:14:10

이괄의 난을 막았다면 정묘호란은 없었을 거라는 말씀이신지요? 제 글의 맥락과도 잘 이어지지 않아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Updated at 2016-07-18 11:46:53

이괄의 난을 통해 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이괄의 난이 실패한 후 일부 잔당이 청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들은 조선의 상황과 이괄의 난에서 사용된 진격루트를 청에게 고스란히 알려주었고 호란 당시 청군은 이 길을 따라 단숨에 수도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이괄의 난과 호란은 어느 정도의 연속성이 있으며, 이괄의 난을 자초한 서인과 인조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인조는 무능한 인사정책과 유유부단함으로 전쟁 전후동안 악수를 거듭했습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더라도,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나 전쟁 대처과정에서 인조는 너무 안일했다고 보입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비교해보면 더욱 아쉬운 부분입니다.

2016-07-18 13:08:35

베일리님 말씀대로 당시 정세 속에서 외교적인 문제는 인조와 집권세력의 역량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 판단을 보류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족이었지만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그 정예군이 수비하는 동안 조정에서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면 그렇게 처참히 무너지진 않았을거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2016-07-18 03:22:55

음 인조입장이 아니라 조선의 입장에선 병자호란은 어쩔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 의한 산물이고 그 피해자 정도 라고 봐야하는건가요?


저 그럼 혹시 어떤 면에서 인조를 최악의 왕으로 보시는지 그리고 왜 요새 광해군에 대한 고평가가 별로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대부분 인조를 최악으로 치는 이유는 병자호란을 전혀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이 친-청인 이유로 괄대한 정도로 아는데 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WR
2016-07-18 10:20:36

병자호란의 발발 원인은 조선보다는 청나라에 더 많이 있다는 것이고, 당시의 척화론자들이 국제 정세를 바라보지 못하고 대명의리에 집착해서 나라를 망친 사대주의자로 섣불리 평가하기에 앞서 그들의 내면과 행위를 당대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명분론은 논외로 치더라도 청이 명을 누르고 장차 중원을 장악하리라는 것을 전쟁 당시에 예상할 만한 근거도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글에서 썼듯이 인조를 최악의 왕 중에 하나로 보는 건 제가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입니다. 나름대로 아주 많은 이유 때문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에 대해 반박한 것이 지금 저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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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03:38:18

저도 글쓴 분의 생각에 동조합니다.

 

제가 그동안 항상 궁금해 왔던 것은 왜 병자호란은 우리가 잘못한 점만 부각되고 침략국의 사정에 대해선 별반 이야기가 없을까? 입니다. 대부분의 전쟁에서 침략국의 사정을 우리는 더 중요하게 부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병자호란은 그런 분위기가 없습니다. '조선이 청이란 실리를 취하지 않고 명이란 명분을 취하다가 청의 침입을 받고 무너진 전쟁' 정도로 요약이 됩니다. 홍타이지를 위시한 침략자들에 대한 비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마치 우리가 스스로 매를 번 것을 자조하는 식의 이야기가 널려있습니다.

 

근래에는 저와 같이 이런 궁금증을 갖고 연구하는 분들이 많은가 봅니다. 최근 들어서 이 전쟁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병자호란의 원인을 조선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청의 시각에서 보는 연구들이 많아졌습니다.

 

실질적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당시는 청이 내몽골을 통일하고 제국을 확장한 시기기도 하지만, 산해관을 돌파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진입하지 못하던 시기이기도 하죠.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에도 불구하고 기상 악화로 인한 흉작, 명과의 교역 금지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가고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청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빠지게 되었고, 이 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길은 '청 제국' 에 속하지 않은 자들로 부터 빼앗아야 했습니다. 산해관을 넘지 못하니 그 대상은 명이 될 수 없었고, 급한대로 조선을 쳐서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죠.

 

결국 청은 조선을 치게 되는데, 청 제국의 전력의 다수를 투사하여 단기간 내에 조선과 결전을 보려 했고, 이에 성공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 만큼 대세가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거니와, 청 입장에서도 조선을 치는 것이 국력의 다수를 투입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청은 조선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는데 자질구레한 것 까지 모든 품목이 경제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먼 훗날, 청이 오삼계의 항복으로 산해관을 넘어 화북에 진출 하고 난 이후에야 이 세폐가 줄어들게 되죠.

 

여기 까지 내용을 본다면, 병자호란의 가장 큰 책임은 홍타이지가 져야 하는것이 맞습니다. 인조가 청하고 화끈하게 한판 붙을것이니 다들 전쟁 준비해라. 라는 왕명을 내리지 않았더라도 세폐를 올려 내지 않았다면 홍타이지는 조선을 쳐들어왔을 것입니다. 재미있는건 힘없이 조리돌림 당한 '인조' 의 의사결정(명이냐,청이냐) 에 따라 조선의 앞날이 결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청나라의 경제가 무너질 때 조선과 청은 이미

한판 붙어야 하는 대결로 들어선 것이나 다름 없다는 점이죠. 조선이 아예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철저히 수탈을 당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전쟁 '패배' 의 책임에서 인조는 가장 큰 역할을 차지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청은 그들의 국력 다수를 투자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빠르게 내려왔기에 전쟁이 장기화되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인조가 강화도던 혹은 삼남 지방의 어느 구석이던 이동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근왕군의 동원을 명령하고 전쟁을 장기화 했다면 농번기도 아니고 비교적 곡물 생산량도 남아있을 겨울의 조선은 차츰 청의 보급선을 괴롭혀 가며 여요전쟁 시즌 2를 찍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괄의 난으로 잃어버린 서북방의 정예병력이 없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여도 말이죠.

 

하지만 인조가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되고 말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근왕군이 무리해서라도 빠르게 근왕을 해야하는 상황을 만들었고, 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조는 전쟁 '패배' 의 책임으로서는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나 전쟁 '발발' 의 책임에 있어 인조는 자유롭진 못하나, 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억울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청의 국력이 명을 앞서게 될 것이 뚜렷하던 시점도 아니었거니와, 광해군과 인조의 정책이 흔히 생각하는데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http://www.pgr21.co.kr/pb/pb.php?id=freedom&no=44352

제가 이와 관련하여 읽고 감명받은 글입니다. 이 글에 생각하시는 것과 부합되는 면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2016-07-18 10:17:49

다 맞는 말이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대부분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중점이 맞춰있지 않나요? 몽골침략부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침략 6.25 전부요. 딱히 병자호란만 그런것같진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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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10:27:42

'주체' 가 다릅니다.

임란은 전국을 통일한 일본이 그 국력을 외부로 투사하는 것이라는 설명으로 침략국 일본이 주체가 되고, 조선은 200년 태평성대에 방비를 게을리 했다. 로 이야기되죠.

6.25 역시 김일성이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믿고 스탈린에게 강력히 요구해서 전력을 갖추고 침입한 주체가 되고 남한은 미군이 다 떠난 뒤 입으로만 떠들다 당했다. 란 식으로 해석되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병자호란은 조선이 주체가 되어 명이란 명분, 청이란 실리를 놓고 명분을 쫓다가 당한 것으로 그동안 해석되는 경향이 강했단 것입니다. 제가 드린 링크에서 원 작성자분도 지적한 바이지만, 이럴 경우 청나라는 조선의 선택에 의해 침공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모양새가 되는데 링크의 본문은 그것이 아니라 청의 사정은 (조선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던) 조선을 침공할 수 밖에 없었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WR
2016-07-18 10:29:45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전쟁에서 극도로 무기력하게 패배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조와 집권자들의 책임입니다. 산성에 들어앉아 요충지를 방어하는 전술을 택했다가 기동대를 동원하여 치고 들어오는 청의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서울까지 길을 열어주었고, 세자와 비빈들이 피난해 있던 강화도가 별 전투도 없이 무참하게 함락된 것 등은 모두 인조와 집권자들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민생의 상태를 종합해 본다면 장기전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애당초 방어태세의 미흡은 비난을 피할 수 없지만 국방력의 증강은 곧바로 민생의 부담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6-07-18 03:59:52

사족을 한가지 덧붙인다면, 전쟁결심을 하고도 우왕좌왕하던 우유부단한 인조에 비해, 청 태종의 국서는 하나같이 명문에다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고 있기에 더욱 그런 이미지(인조가 괜히 멋모르고 까불다가 얻어맞았다)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WR
2016-07-18 10:34:55

홍타이지는 어릴 적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고, 누르하치 사망 후에 유능하다는 이유로 나이가 더 많은 형들을 제치고 칸으로 추대되었던 인물입니다. 인조와 비교하는 건 애초부터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2016-07-18 07:43:15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청나라 군대가 밀려오는데 조정에선 말과 말이 얽혀서 치솟아 오를뿐 막을 자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현실성있는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베일리 님 말처럼 청군이 침략하는건 상수이고 양자택일외에 해결할수있는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WR
1
2016-07-18 10:40:03

전쟁이 벌어진 후에 조정의 무능과 분열은 한심한 정도를 넘어섭니다. 그 와중에서도 척화파의 강경론은 실제로 청보다 조선 내부의 군신을 겨냥한 정치적 공세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런 모든 것 이전에 청나라가 군신 관계를 요구하면서 침략한 것이 병자호란이고, 말씀처럼 조선은 양자택을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2016-07-18 10:53:29

소설만 읽어서 잘 모르지만 최명길과 김상헌이 각각 진영의 대표 캐릭터로 나옵니다.

김상헌은 고고한 선비인척은 다 해 놓고 끝까지 목숨을 부지하더군요.

절개 있는 척 하면서 명분은 다 잡아 놓고서.. 참 느끼는 게 많은 가짜 보수 였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6-07-18 09:23:59

인조 선조 고종은 조선시대 역대 최악의 왕들로 손꼽히죠 고종은 시대의흐름과 아버지에놀아나는 무능력한 인물로,선조는 자기자리만 지키기 급급한인물로,인조는 잘못된정책으로...

WR
2016-07-18 10:41:06

그런 주장이 널리 퍼져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대해서도 의문스러운 점들이 많습니다.

2016-07-18 14:52:38

사실 세 왕 모두 하필이면 주변 정세가 최악인 상황에 있었죠. 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선조는 목릉성세를 구가하며 중흥기를 구가하고 있었고,(뭐 그 이전에 명종대 정치가 워낙 개판이었으니 뭘 해도 잘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인조의 경우도 청나라의 침입은 어쩔 수 없는 외통수였습니다. 고종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이들과 같은 상황에서, 태종, 세종, 문종, 인종, 영조, 정조같은 왕을 데려다놓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왕인들 이들보다 잘 대처했을까 의문이죠.


오히려 선조는 임진왜란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성격적인 결함과 단점들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고, 고종도 뭐 스스로 뭘 했다기보단 아버지랑 처가에서 해먹고 말아먹은 걸 다 뒤집어 쓴 부분도 크죠. (고종은 되려 명종과 동급인듯...) 오히려 이들은 평세에는 그냥저냥 평타 쳤을 임금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인조는 별로 동정이 가질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인조 욕하는 게 꼭 병자호란 유발시키고, 삼전도에서 무릎 꿇어서 그런 건 아니죠. 소현세자랑 강빈, 손자들을 매몰차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걸 주로 욕할 뿐... 이건 사실 인륜 강상과 관련된 문제이고, 국제 정세와 무관치도 않지만 꼭 정세 탓할 건도 아니고... 그냥 인조 그 자신이 폐륜 찌질이라는 것 밖에 안되죠. 영조도 아들을 죽였지만, 당시 정치적 정황이 비극적인 부자 관계를 초래한 부분이 크고, 사도세자 본인의 난장도 결정적이었던 반면, 소현은 그 누가 봐도 자기 왕권 뺏길까 전전긍긍하는 미친 아버지 손에 억울하게 죽은 것이니...


인조는 평화로운 세상에 있었어도 정치 잘하는 임금은 아니지 아니었을까 합니다. 뭐 어짜피 인조반정으로 한 몫 잡은 김자점, 이귀, 김류같은 인간들이 주위에 들끓을 수 밖에 없으니... 그나마 북인들에게 밀려났었던 서인의 유능한 정치인들이 같이 정권을 이끌었기에 그럭저럭 외세의 침공에도 정권을 유지는 할 수 있었지만요. 외세만 아니면 반정 임금으로 중종과 비슷한 포지션인데, 중종은 두 얼굴의 사이코이긴 해도 평상시에는 자신의 악랄함을 거의 잘 드러내지 않았던 포커페이스였던 반면에 인조는 대놓고 찌질한 짓을 많이 했죠.

2016-07-18 09:58:44

저의 배경지식이 이리 아쉬울줄은...


말로만 하지말고 역사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정독하였습니다.

좋은 글과 던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WR
2016-07-18 10:43:19

말씀 감사합니다^^

2016-07-18 10:20:57

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시각에서 봐야겠죠. 분명 조선에서 봤을때 세상의 중심은 여전히 '명' 이었을겁니다.
근데 전 그것보다도 어머님과 동생분과 식사자리에서 역사관련 얘기를 하시는게 더 좋네요.
저도 나중에 아이들과 식사자리에서 역사/문화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
그러기 위해선 일단 제가 책을 더 많이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WR
2016-07-18 10:46:26

고맙습니다. 동생은 의사인데, 본인 스스로 말하기에 우리나라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일 거라 하고, 어머님도 독서량이 많은 걸로 동료와 친지들 사이에서 유명합니다. 그래서 셋이 식사하면 우리나라와 세계를 막론하고 역사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합니다.

2016-07-18 10:25:12

위에서 아웃로우즈님도 말씀하셨지만 인조의 무능함은 전쟁 발발시가 아니라 발발후 또는 긴장 시기에 대처를 너무 못한 것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너무 우왕좌왕했어요

WR
2016-07-18 10:52:17

인조의 우유부단함과 대신들의 무책임성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오직 운명에 맡길 뿐" 이라는 등 시종 무책임한 태도를 취했고, '논의'와 '조치' 사이의 간극도 너무 심했습니다.

2016-07-18 11:22:52

인조의 책임은 외교가 아니라 내치를 못한거죠. 이괄의 난으로 정예 일만병사를 갈아버렸는데다가 중요 야전사령관들 죽여서 말이죠.
이괄의 난때 패주자들이 청으로 넘어간것도 크다고 봅니다. 청군이 이괄과 비슷하게 내려왔다고 하던데 말이죠. 그런데 방비는 또 수도권 중심으로만 하다가 밀려버렸죠
외교는 광해군이라 비슷한 줄타기 외교였다는게 요새 중론인것 같습니다.

Updated at 2016-07-18 11:50:54

저는 역사를 잘 모릅니다만 이 부분은 확실히 Damon Bailey님께 동의합니다.


어떤 왕이 그 입장에 있었다고 해도, 당시에 명을 부정하고 청을 받아들이기는 굉장히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인조가 잘못해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반정으로 왕위를 잡은 사람이, 아무리 집에 가만히 있다가 왕이 된 것은 아니고 나름 공모를 했었다고 해도, 제대로된 왕 노릇(전제군주로서)을 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신하들의 눈치를 많이 볼 수 밖에 없었을거라고 생각해서, 저는 인조는 아무래도 무능할 수 밖에 없지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정으로 왕을 바꾸고나면, 공신을 많이 책봉할 수 밖에 없으니, 나라 살림이 엉망이 되고, 정치도 엉망이 될 수 밖에 없지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결국 반정으로 왕이 된 후, 전쟁이 났으니, 인조는 최악의 왕으로 꼽힐 수 밖에 없는 거겠지요. 그렇다고 인조가 최악의 인간이라서 그렇게 됐다고 보기는 좀 뭣하고, 상황상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왕이니 더 안좋아진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인조가 소현세자에게 한 일들과 그 외에 다른 행적들을 찾아보면 그냥 쫄보에 찌질이였지 싶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인조를 정말로 싫어할 수 밖에 없는 거겠죠.


제가 제일 싫어하는 조선의 왕 셋을 꼽으라면, 저는 연산군, 선조, 인조를 꼽습니다. (고종도 넣고싶은데 셋이라서 뺐습니다.)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어제는 수원 화성에 아들을 데리고 가서 이곳저곳 돌아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 및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부분이 파괴되어 새로 지었지만, 정조가 화성 축조 과정에서 모든 것을 문서화 하도록 지시해놓아서(심지어 새로 개발한 수레는 그림도 그려놓았더군요.) 제대로된 복원이 가능했다는게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할 때, 마치 입헌 군주제 같은 체계를 꿈꾸었던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의 세종, 조선 후기의 정조를 보면, 왕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태종이 정도전의 꿈을 잘라버렸다고 할지라도, 어쩌면 정도전의 이상은 너무 이상적이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2016-07-18 11:49:22

정확히 말하면 인조 및 그 아래의 사람들은 "전쟁의 발발이후 대처능력"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인겁니다. 그것도 역대 세계사를 꼽아봐도 손에 꼽힐 수준이죠. 그냥 아우토반수준으로 "지나갑니다"수준의 상황이란....

그와 별개로 전쟁의 발발원인이 그들이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것도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이라는 나라의 민족성이죠. 중국은 자신을 제외한 주변인에게 단 한 번도 외교라는 걸 한 적이 없습니다.(심지어 지금 현재도 유효합니다!) 그건 내 말 듣던지, 아니면 그냥 밟혀 죽으라는 겁니다. 전쟁용어로 말하는 "권고"인 셈이죠. 그래서 대대로 중국이 분열될때 주변국들이 발전하고 통일국가일때는 숨죽여왔습니다.(최근의 동중국해 및 대만, 티베트를 봐도 이들은 그냥 조직폭력배 수준의 깡패입니다.) 당시의 청은 무리한 요구를 한게 아닙니다. "당연한" 걸 물었고, 그거에 대해 조선은 따라야만 했죠. 답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다만, 그걸 말하지 않았으니 뚜까 맞아야했던겁니다.

선대인 광해군에 비해 인조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인지능력이 없는 수준이었고, 그렇다면 밑에 신하중에라도 똑똑해야 하는데 쿠테타로 만들어진 정권에 이 정도 혜안을 가진 인물이 있기를 바라는게 실상은 무리죠. 중국의 통일국가를 상대하기에 당시의 조선은 나약함 그 자체였습니다. 오히려 그 정도로 끝난게 다행이었다 생각합니다.

Updated at 2016-07-18 13:33:40

호란자체는 조선의 책임이 아니었다 할 지라도 예측가능한 침략에 제대로 맞서싸우지도 못하고 털려버린게 문제였죠.

왜란도 설마 쳐들어오겠거니 하고 당한건데, 호란은 더 어이없이 당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는 인재기용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선조가 돋보이는 효과까지...

애초에 북벌하라고 보낸 장군이 돌아와서 쿠데타로 들어선 나라다 보니,
군사력 강화나 지방군벌에 대해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2016-07-18 17:25:01

조선 선조는 임진왜란 때 도망치는 실력은 정말 뛰어났습니다. 고려 현종도 거란군의 침략에 전라도까지 도망치는 수준이 상당했습니다. 반면에 인조는 내정도 엉망이지만 도망치는 실력도 엉망이었습니다.


전선이 길어질수록 보급로 차단의 위협 때문에 외국 군대가 침략하면 왕은 정말 잘 도망가야 합니다. 인조는 다른 것도 무능했지만, 도망가는 실력도 엉망인 셈이죠. 


2016-07-24 10:00:12

결과론적으로 선조가 잘 도망가서 전쟁을 이겨낼 수 있었죠. 왜놈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2016-07-18 21:51:52

역사에 정통하지는 않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듯 복잡한 입장들이 맞물려 현실세계의 일을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짧게 반정의 명분 때문에 명분론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인조만을 생각했는데, 저 위의 링크의 신불해님의 글처럼 침략자의 입장에서 청 내부의 경제문제로 인해 침략이 불가피했다는 글을 읽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현대의 사람이 지나간 일을 결과론과 현대적인 합리주의를 가지고 과거의 일을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데, Damon Bailey님의 접근도 매우 설득력이 있게 들었습니다.

우리야 나중의 대청제국과 두번의 호란의 결과를 뻔히 알기에 결과론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의 인식이 잘못됬다고 무조건 비난할 수 있는지, 한 국가를 움직이는 통치 이념과 명분을 너무 가벼이 여기지는 않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2016-07-19 19:22:08

그래도 인조는 최악의 군주입니다.

무작정 인조 탓만 하는 것도 잘못인 거는 맞지만

그 당시에 왕이 었으니 까여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2018-08-07 13:08:53

인조는 김영삼같은 인물입니다 그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나은국가가 되었을겁니다. 당시 조선침입은 후금입장에서도 굉장한 모험이었을겁니다. 쉽게 실행하기 어려운 국운을건 모험이죠. 문제는 반정공신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을 제거하면서 서북면 군사력을 공백지대로 만들어버리고 장수들도 다제거하면서 멍청이들만 남고 제대로된자들은 배신에 치를떨며 후금에붙어 복수를 하게되죠. 그 결과가 역사상 최대패전급인 쌍령전투입니다. 광해군 숙청하면서 그나마 실용적이고 쓸모있는 북인들 다 제거하고 이괄난때문에 후금한테 잡아먹어주십사 한게 바로 인조죠. 그후에도 성리학교조주의로 민생을 파탄시켰을뿐아니라 효명세자내외등 실질적자주국으로서의 모든가치를 내버린게 인조입니다. 개인적으로 선조는 인조에비해 차라리 성군에 가깝다고 생각할정도로 인조와 인조반정은 김영삼의 존재처럼 절대 있어서는 안됬을 구카 민족적 비극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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