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똑부러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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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3 16:45:28
개인적 편견이 가득한 글입니다.
2. 예전엔 저만 이렇게 흐리멍텅하고 멍청하고 실수연발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햇수로 13년동안 재무/회계일만 했지만, 숫자를 다루는 사람의 날카로운 감각이나 계산능력은 쉽게 늘지 않더군요. 하지만, 언젠가 그림파일 하나를 봤죠.
이 작은 캡쳐화면만큼 제게 위안을 준 건 없을 겁니다. 물론 윗선에서 이거저거 고치라고 신나게 쪼아대서 고친 것일수도 있지만, 저 여러 버전의 파일들 중 작성자의 실수가 들어간 것도 많을겁니다. 그림에 나온 1127 이후에도 수정본이 더 있을 것에 주머니 속 100원을 겁니다.
3. 이런 이유에서 똑부러지는 일처리의 인재에 대한 로망이 자꾸 커져간 것이겠죠. 한번의 작성만으로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칼같은 레포트를 결재올리고 "흠, XXX씨 완벽하군!"이란 피드백을 받고 "먼저 퇴근합니다"라는 사자후를 날리며 유유히 퇴근하는 시크한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보지만, 현실은...
"다들 야근이지? 저녁 뭐 시킬까?"
4. 근데, 가만히 보면, 똑부러지게 일한다...라는 평가를 받는 (여성 직장인에 대한 편견이 있을수 있겠지만)사람들은 많은 수가 여성인 것 같습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지금보다 덜하던 시절에는 여성이 직장생활하면서도 제한적인 롤을 맡고 있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다보니 여성직장인은 전문가(expert)보다는 어느 한 분야의 특화된 업무(specialist)에 맞는 사람이었던 경우가 많죠. 그리고 살림을 잘하는 주부들에게도 똑부러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일처리를 잘 하는 남자 직원 혹은 아버지들에게는 똑부러진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5. 일이 '똑 부러진다'는 건 맡고 있던 업무가 다른 사람과 100% 구분/독립되어 있다는 뜻인데... 점점 위로 갈수록 업무는 경영자/다른부서/고객/부하직원... 기타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어울려있기 쉽습니다. 그리고 일이라는 것이 똑부러지가 딱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관여, 상황의 변화, 고객의 말바꾸기, 서로간의 의사소통의 차이... 기타 여러가지 상황으로 똑부러질래야 똑부러질 수가 없는 상황이 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능력이 있다는 건, 똑부러지는 것보다는 어떻게해서든 진흙탕 속에 뛰어들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프로젝트를 살려놓고 소소하게 X되는 일은 X되게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6. 저도 지난 직장생활을 되새겨보면, 재무파트에서 하게 되는 결산은 물론이고, KIKO사태나, 세무조사, ERP관련 작업처럼 100% 똑부러지지 않는 일이나 거의 실패로 점철되어있는 업무들에서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한 것 같습니다. 뒤돌아보면 행운이었죠. 실수나 실패가 주는 교훈들이 제가 일하는 분야뿐만은 아닐 겁니다. 첨단기술이라는 것이 그냥 무슨 설계도같은 것이 아니라, 설계도로 표현될 수 없는 현장의 모든 움직임들이 기술이고, 그것들 중 대부분은 실수와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발견된 것이죠.
7. 얼마전 TV 다큐멘터리에서 구글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다른 작은 벤처기업들을 인수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 "그 회사들은 충분히 그 기술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기술'만' 살 수도 있는데, 그 회사들 자체를 인수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 작은 회사들이 가지고 있는 '실패'의 경험을 사는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10년 전쯤이라면 무슨 개소리야? 라는 소리가 나왔겠지만, 지금은 어렴풋하게나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요즘 취준생들, 특히 재무/회계 파트를 지원하는 지원자들의 이력서는 예전보다 훨씬 충실합니다. 자격증도 많고 학점도 훌륭하고, 대단하다고 느껴지지만 이 친구들에게 '실패할 기회'조차 주어지기 힘들다는 건 좀 씁슬합니다. 40이 넘어간 아재로서 취준생(특히, 주위에 똑부러지게 똑똑해보이는 먼저 취업한 친구들때문에 뒤쳐진다고 생각되는)분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건, 절대 기죽지 말고, 눈에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이런 실패할 기회를 찾아서 자신을 갈고 닦길 바랍니다. '똑부러지는 똑똑함'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P.S. 글을 쓰고나니, 뭔가 교장님 훈화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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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파일 저렇게 하는 거 저만 그런줄 알았는데...! 뜻하지 않게 저도 마음의 위안을 얻어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