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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주도한 가장 유명한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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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5 18:41:20

지난 번에 올린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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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1922년에 소련은 파탄 상태였습니다. 1차 대전과 1917년 두 차례의 혁명 그리고 2년간의 끔찍한 내전을 겪으면서 경제가 완전히 망가진 상태여서, 소련의 1921년 공업 총생산은 1차 대전 직전인 1913년의 30%에 불과했고 농업 총생산은 60%에 불과했습니다. 경작 면적은 혁명 전보다 20%가 감소되었고, 내전 중이던 1920년에는 가뭄으로 인한 흉작까지 겹쳐서 식량 사정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니콜라이 부카린의 제안을 받아들여 1차 대전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신경제정책(NEP, 네프)를 실행했습니다. 네프는 공산주의 경제체제에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허용하여 소련의 경제를 1차 대전 이전 수준으로 되살리기 위한 정책입니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당에서 축출되어 유배된 1928년 초에 스탈린은 네프를 비판하고 농업 집단화 정책과 산업화 정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농업 집단화는 집단농장(Kolkhoz, 콜호즈)과 국영농장(Sovkhoz)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스탈린은 콜호즈의 입농을 기피하는 농민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사용해 수백만 세대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런 식의 수많은 인명의 피해 위에서 추진된 농업 집단화는 1929년에 5%에 불과했으나 1940년에 이르자 무려 97%를 달성했습니다. 스탈린에 의해 1928년 초에 실시된 산업화 5개년 계획은 경공업의 투자와 발전을 완전히 무시한 채 중공업에 대한 최대 투자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 성과로 소련의 각 지역에 트랙터 공장, 자동차 공장, 수력 발전소, 제철 공장, 화학 공장 및 군수 공장 등이 설립 가동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스탈린의 중공업 정책에 반대하던 부카린이 당 중앙에서 쫓겨났지만, 결과만을 놓고 봤을 때 산업화 정책은 군사적 근대화를 수반하여 소련을 강대국으로 발돋움시킨 유례없는 성공작이었습니다. 이처럼 스탈린이 주도한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는 수많은 인명 피해와 희생의 잿더미 위에서 위로부터의 강압적인 방법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29년 스탈린에 의해 소련에서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터키에 망명하여 스탈린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담은 책과 글을 썼습니다. 1930년에는 「나의 생애」라는 이름의 자서전을 출간했고, 1931년에는 스탈린의 기회주의적인 본 모습과 권력에 대한 무임승차를 폭로한 「러시아 혁명사」를 출판했습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해외로 추방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소련에 남아 있는 가족을 인질 삼아 해외에서 트로츠키의 행동을 제약하려 했습니다. 트로츠키는 가족과 함께 망명했지만 둘째 아들은 정치를 싫어해서 부모를 따라 해외에 나가지 않았고, 트로츠키와 전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은 모두 소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어떠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스탈린을 비난하는 글과 연설을 이어나갔습니다. 트로츠키 주변에는 열성 지지자들이 몰려들었고, 일부 지지자들은 그를 예수 이후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유대인이라고 칭송했습니다.


1932년 2월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소련 시민권을 박탈하고 공식 문서와 사진, 그림, 영화 등 모든 기록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이후 트로츠키는 4년간 머물던 터키를 떠나 프랑스로 갔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폭압적인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스-레닌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볼셰비키 전통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음을 지적하며 자신의 영구혁명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범죄」라는 책을 출간하여 스탈린이 러시아혁명의 종착역을 전체주의로 몰고 갔다고 비난하며, 스탈린이 권좌에 있는 소련은 절멸의 과정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자행되고 있기에 머지않아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 이후 1936년부터 벌어진 대숙청(예조프시치나)때 트로츠키도 궐석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소련에 남아 있던 트로츠키의 가족과 친척에게 재앙이 닥쳤습니다. 소련에 남았던 둘째 아들 세르게이는 체포된 후 실종되었고, 트로츠키를 따라 망명했던 장남 레프는 프랑스의 한 병원에서 독살되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전처와 두 딸을 뒀는데, 전처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장녀 지나(Zina)는 자살했고, 차녀 니나(Nina)는 남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트로츠키의 여동생과 조카들도 비밀경찰(NKVD)에 의해 처형되었고, 친척들은 체포당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이러한 테러가 가해지는 중에도 트로츠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가족이나 민간인을 볼모로 잡는 행동은 적백내전 당시 트로츠키가 자주 사용하던 전술이었습니다.


트로츠키뿐 아니라 초창기 공산주의 리더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특이한 냉정함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스탈린의 장남 야콥은 장교 임관 한 달 만에 1941년 독-소전에 참전해서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2년 후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야콥과 독일군 포로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야콥은 좌절하여 수용소에서 돌발행동을 일으켰고 독일군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중국의 리더 마오쩌둥(모택동)의 외아들 마오안잉은 결혼 한지 1년 만에 인민해방군에 자원입대하여 한국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마오안잉은 참전 1달 만에 평안북도 대유동에서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그의 시신을 중국으로 안치하려고 했지만 마오쩌둥은 외아들이 다른 인민군과 함께 묻히는 것이 도리라며 거절해 그의 유해는 평안북도에 묻혔습니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흐루쇼프의 장남도 공군 장교였습니다. 나치 독일이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하고 3주 후 소련 공군은 전멸했습니다. 전투기의 성능이 너무 차이나서입니다. 흐루쇼프의 장남 레오니트는 독일 전투기에 맞서겠다며 고물 같은 소련 전투기를 끌고 전투에 나섰다가 격추되어 유해조차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과학 후진국이던 소련은 민간 비행기를 폭격기로 개조하기 위하여 수학자들을 동원했는데, 불과 십 여 년 후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앞선 나라로 변모했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상식으로 설명되기 힘든 기적 같은 일들이 소련에서 일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스탈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트로츠키는 노르웨이로 거처를 옮겨 1936년에 트로츠키 최후의 명저로 꼽히는 「배반당한 혁명」을 출간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혁명이 주변국가와 선진국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소련 내에 머문다면 고립된 소련 체제는 타락하고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의 인민을 포함한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영구혁명론을 통해 마르크스와 러시아 혁명의 진정한 유산을 이어받는 혁명적 전통을 건설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37년이 되자 노르웨이는 소련의 압력 때문에 더 이상 트로츠키에게 안전한 거처를 제공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소련에서 열린 재판에서 트로츠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상황에서 성가신 정치활동으로 유럽 각국의 정부에게 골칫거리가 된 트로츠키를 받아주겠다고 한 곳은 멕시코였습니다. 그때부터 트로츠키는 멕시코시티 교외에 요새 같은 빌라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당을 위협으로 생각하던 미국 정부는 스탈린의 눈치를 보느라 트로츠키를 무시했지만, 스탈린에게 혐오감을 느낀 미국의 지식인들은 트로츠키를 도왔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교육철학자 존 듀이(John Dewy) 등 여러 학자들은 트로츠키 집 안에서 열린 청문회에 참석하여 소련 내에서 트로츠키에게 내린 모든 혐의를 근거 없다고 단정하며 트로츠키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들은 트로츠키와 함께 보도기사를 통해 스탈린이 소련에서 자행하고 있는 야만적인 학살을 폭로했고, 국제연맹에 진정서를 보냈습니다. 이미 소련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천만 명 넘게 살해한 스탈린은 여러 방법으로 트로츠키를 제거하려 했으나 번번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스탈린은 대놓고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40년 5월 24일 새벽, 정체불명의 무장 특공대가 트로츠키의 빌라에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특공대는 경비원을 제압하여 밧줄로 묶은 다음 경찰서로 연결되는 경보장치를 절단했습니다. 그들은 트로츠키 부부가 잠자는 침실에 200발 이상의 무차별 사격을 가한 후 달아나면서 집에다 폭약을 던졌습니다. 트로츠키 부부는 낌새를 눈치 채고 침대 밑에 바짝 엎드려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트로츠키에게 세계 각기에서 성금이 쏟아져 트로츠키는 빌라의 보안을 훨씬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경호원이 몇 배로 증가되었고 전기가 흐르는 철문에 6미터 높이의 거대한 벽이 세워졌습니다. 그 벽에서 다시 바깥쪽으로 사방에 가시철망과 또 다른 벽이 쳐졌습니다. 트로츠키는 외출을 자제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도 않기로 하면서 스탈린을 궁지로 몰아넣을 또 다른 책을 집필하려고 했습니다.


그 즈음 트로츠키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벨기에 출신 청년작가인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에게 더욱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트로츠키는 프랑스 망명 시절부터 미국 출신의 실비아 애걸로프(Sylvia Agelof)를 비서로 두고 있었습니다. 애걸로프는 매우 유능하여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로 계속 트로츠키를 따라다니며 비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프랭크 잭슨은 프랑스에서 애걸로프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애걸로프는 노르웨이에서 자신의 약혼자 잭슨을 트로츠키에게 소개했는데, 강한 카탈루냐 억양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적인 그 청년에게 트로츠키는 호감을 느꼈습니다. 프랭크 잭슨은 멕시코에 도착 후 트로츠키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논문을 쓰려고 하는데, 지도해줄 스승이 필요하다고 했고, 트로츠키는 기꺼이 지도에 응하겠다고 답했습니다.


1940년 8월 20일 저녁 5시쯤 프랭크 잭슨은 트로츠키의 빌라를 방문했습니다. 트로츠키의 제자이자 비서의 약혼자인 만큼 경비원의 제지도 받지 않았습니다. 30도가 훨씬 넘는 무더위에도 잭슨은 잘 접은 비옷을 들고 있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잭슨을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습니다. 잭슨이 트로츠키의 책상을 봤을 때 거기에는 권총이 두 자루 놓여 있었고, 비상경보 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잭슨과 이야기를 나눈 후 트로츠키는 의자에 앉아서 그가 건네준 원고를 읽고 있었습니다. 트로츠키가 원고를 읽고 있는 동안 잭슨은 비옷 속에서 30센티미터 길이의 등산용 얼음도끼를 꺼냈습니다. 잭슨은 얼음도끼로 원고를 읽고 있던 트로츠키의 머리를 내리 찍었고, 그 얼음도끼는 트로츠키의 머리에 7센티 깊이로 박혔습니다. 트로츠키는 비명을 질렀고 잭슨은 급히 달려온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했습니다. 트로츠키는 피를 흘리며 소리소리 고함을 질렀는데, 잭슨을 죽이지 말고 자백을 받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잭슨이 트로츠키를 공격한 바로 그 얼음도끼입니다.



아래 영상은 1972년 영화 트로츠키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의 장면입니다. 알랭 들롱이 트로츠키를 암살한 프랭크 잭슨 역을 맡았고, 리처드 버튼이 트로츠키의 역을 맡았습니다. 트로츠키의 비서이자 잭슨의 약혼자 역은 로미 슈나이더입니다. 이 영화는 트로츠키보다는 프랭크 잭슨에게 초점을 맞춰 암살사건을 다뤘습니다. 1972년 작품인 만큼 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의 영화입니다. 전체 영화가 자막과 함께 유튜브에 올라와 있으니까 관심 있는 분들은 보셔도 좋습니다. 첨부 영상은 암살장면만 편집한 것입니다.

https://youtu.be/jFg1rX1EmGM


프랭크 잭슨에게 습격당한 다음날 트로츠키는 사망했습니다. 30만 명의 멕시코 인들이 그의 관을 따르며 애도했습니다. 재판에서 프랭크 잭슨은 트로츠키가 전 세계 공산주의를 분열시키려 했기 때문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의 의지로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 프랭크 잭슨은 재판에서 20년 형을 선고받았고, 20년 후인 1960년에 만기 출소했습니다. 1941년 스탈린은 멕시코 감옥에 수감 중인 그에게 소련의 영웅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 그가 감옥에서 출감했을 때 소련은 흐루쇼프 주도 하에 스탈린 격하운동이 한창이었고,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체코가 잭슨에게 여권을 발행해 줘서 그는 한동안 체코 주변을 떠돌다가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에게 영웅 대접을 받으며 쿠바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1978년 사망한 그는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환영 아래 모스크바에 안장되었습니다.


프랭크 잭슨의 정체가 소련 NKVD(비밀경찰)의 지령을 받은 바르셀로나 인 라몬 메르카데르라는 것은 훗날에 밝혀졌습니다. 스페인 내란 동안 공산당에 가입해 NKVD 요원이 된 그의 모친의 설득으로 NKVD 에이팅겐 대령의 공작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잭슨의 비서 실비아 애걸로프에게 접근했고, 그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사귄지 1년이 넘도록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에이팅겐 대령과 라몬의 어머니는 암살 현장에 있다가 라몬의 탈출을 도울 생각이었으나 그가 붙잡히는 바람에 포기하고 달아났던 것입니다. 암살 직후 라몬의 어머니는 스탈린에게 영웅으로 불리며 레닌 훈장을 받았고, 에이팅겐 대령도 NKVD 장군으로 특진했습니다. 에이팅겐 대령은 스탈린 사망 후 흐루쇼프에 의해서 다시 계급이 강등되었지만 트로츠키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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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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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5 19:42:19

휴우 긴글이지만 한 호흡에 쭉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정적의 제거하는 잔인함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무섭네요

2017-03-05 20:27:22

트로츠키가 끝끝내 복권안된건 이해가 가네요
스탈린을 좋아하든 안하든
최고지도자가 트로츠키를 복권시켜주면
자신에 대한 같은 식의 비난도 용인해줘야할텐데
그럴 독재자는 없겠죠

비판도 공개활동도 않고
놀기만했는데 암살당한 김정남은

Updated at 2017-03-05 21:18:51

김정남 같은 경우는 암살 며칠전에 김정남이 언급된 기사중 참 그런게 하나 있었죠

자세히는 정치글 금지다보니 못적는점 양해 부탁드리고 2월 11일에김정남 이름으로 검색되는 기사가 있습니다.
2017-03-05 22:38:05

기다렸었는데, 보람 있을 정도로
흥미 진진하네요. 공산주의는 참 숙청의 역사네요.

2017-03-05 23:07:16

정말 영화같은 이야기네요. 그나저나 장기복역하게될 것을 알았을텐데... 라몬이란 사람의 심리가 궁금합니다.
스탈린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깡요. 그정도까지는 아닐지몰라도 우리나라에서도 국가기관이 많은 암살을 저질렀겠죠.

2017-03-09 11:13:33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렸습니다. 재미있는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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