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선배 시나리오를 아십니까
제가 공군 14년 군번입니다. 공군 비행단은 각각 인트라넷을 통해 홈페이지를 개설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제 입대 전부터 인트라넷을 통해 홈페이지 한 구석에 병사 홈페이지(병홈)라는 곳을 만들어 이용할 수 있게끔 했죠. 여러 비행단의 병홈이 동시에 활성화되진 않았고, 한 비행단의 병홈이 활성화 되었다가, 어떤 이유에서 이용이 금지 당하면 다른 비행단의 병홈이 활성화되는 식이었습니다. 보통 병홈에서는 여친 만들고 싶단 얘기, 여친 얘기, 휴가 가고 싶단 얘기, 휴가 얘기, 이 네 가지가 메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간혹 매니아에서 뵐 법한 특정 분야의 준전문가께서 적으신 정보글도 있었고, 무엇보다 제 지루한 근무시간을 달래준 각종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썰게'가 있었죠. 그 가운데 국문과 나오신 것 같은 분들께서 쓰신 글들은 12년(?)에 쓰인 글임에도 제가 제대할 때까지(16년) 텍스트 파일로 저장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피곤하고 지겨운 군생활에서 썰게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죠. 보안감사 기간만 되면 부들거리는 손으로 얼굴도 못 봤던 선임들이 모아둔 썰들을 삭제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썰은 아니고, 잡설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꽤나 헷갈리네요. 잡설이라 하기엔 너무 문학적이고, 소설이라 하기엔 실화를 옮겨놓은 것 같은 내용이었거든요. 어떤 병사가 써놓은 글이었는데, 제목이 '복학선배 시나리오' 였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 친구들은 1,2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했고, 대개 , 군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가가 그늘진 복학생들을 잠깐이나마 보고 온 친구들이 많았죠. 저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제가 이상한 놈인지는 몰라도 먼 미래를 대비할 능력이 있는 동물답게 입대를 하는 순간부터 '제대해서 어떻게 신입생을 꼬시지?', '제대하고 군인 티를 어떻게 벗(어서 최대한 멀쩡하게 보여져서 결국 여자를 꼬시)지?' 와 같은 생각을 진주 훈련소에서부터 했습니다. 옆의 침상에서 동기가 습관적으로 사타구니에 손을 넣는 모습이 그날따라 절절하게 보이더군요. 군대는 사람의 사고 능력을 퇴화시키는지, 제 생각은 제대할 때까지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건 뭐 대부분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 아니 믿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복학선배 시나리오'라는 글이었다고 믿고 싶네요.
내용은 참 단순합니다. 제목과 작성자가 한창 간부들한테 갈굼당했을 병사가 근무시간에 눈치를 보면서까지 썼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그 내용은 뻔합니다. 너무나도 슬픈, 우리들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죠. 입대 전에 얼핏 보고 지나쳤던 수많은 복학생 아웃사이더들. 그런데 그 서술과 묘사가 너무나 담백하고 사실적이어서 제 가슴을 후벼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특히나 여기에 관심이 많아 더 몰입을 해서 읽었죠. 당시로선 너무나 리얼해서 수많은 공군장병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인트라넷 메일로 그 텍스트 파일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던 것 같더군요.
저는 무사히 제대했습니다. 생각보다 주름도 안 생겼고, 휴가 나올 때마다 친구들한테 휴학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군기가 빠졌던 덕분에 적응하는 데 그리 어려움이 없었죠. 자연스레 복학선배 시나리오는 제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히 인트라넷에서 보던 이 글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마주했을 때의 그 감정이란... 짬통 앞에서 김치 안 잘랐다고 얼굴에 담배 뿜으며 욕하던 선임, 말 무지 안 듣고 평등을 외치다 맞후임한테 찔려서 보직이동을 간 후임 등이 떠올랐지만 그 얘기들은 지겨우니 생략하도록 하고, 아무튼 그 감정들이 옅어진 상태에서 읽었음에도 꽤나 재미있네요. 흥미가 생기셨다면 읽어보세요. 다만 어느 정도 자신이 온갖 자유가 제한된 군인이라고 세뇌를 하셔야 합니다. 나와서 보니 건방져지게 되어서 그런가, 그냥 어휴 한심한 놈 이렇게만 느껴졌거든요. 안에선 눈물도 날 뻔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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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제로에 범죄자라는 생각밖에 안드네요 읽다가 암걸리는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