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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비하인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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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26 00:25:37

2편에 이어 적어보겠습니다.


1. 일본 역사 최초의 대륙침공?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하고자 했던 것은 명 뿐만이 아니였습니다. 훗날 청 왕조의 시초 누르하치는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조선에 몇 차례 원병을 제의했으나 선조는 이를 매몰차게 거부하는데,

여진의 의도가 불분명했던데다 명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답도 없는 상황에서도 여진에

손을 벌리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니시가 평양에 주둔하며 간을 보고 있을 무렵, 가토는 함경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쾌속으로 진격,

회령에서 함경도 지방으로 모병을 떠났던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립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모병을 위해 함경도로 와 회령에 진주했지만, 왕자라는 명목 하에 백성과 군사들에게

깽판을 치며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같은 조선인 아전과 백성들에게 사로잡혀 가토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이 임해군과 순화군은 역사에 남을 최악의 왕자들로, 임해군이 유명하지만 순화군은 진짜 인간말종이

이런것인가 싶을 정도의 쓰레기로 살인, 동물학대, 궁녀겁간, 폭행 등의 온갖 잔인무도한 행동을 하던

조선의 사이코패스였으나  아버지인 선조가 그들을 감싸고 돌았기에 편히 살다 가는 행운을 누리죠.


왕자 둘을 사로잡는 큰 성과를 올린 가토는 그대로 북진하여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을 공격하는데, 이것이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륙침공으로, 후에 있을 중일전쟁 수백년 전의 맛보기였죠. 이 때 여진족에게 이골이

났던 함경도 지역의 조선인 일부도 일본군에 합세하여 여진을 치러 갔다고 하며, 가토의 공격에 여진은

맹렬하게 저항, 지속적으로 반격을 가했고 피해가 누적되자 가토는 조선에만 집중하고자 병사를 철수,

일본 역사 최초의 대륙 침공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히데요시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명나라로

가는 길을 탐사한 것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만강 너머 여진쪽으로 명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은

당시 일본군의 사정으론 보급과 병력의 문제로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조선의 반격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은 보급난에 시달리게 된데다, 명군의 참전으로 군사적 이점 역시 잃어버려

초기의 기세를 많이 상실하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고자 곡창지대 전라도를 빼앗아 물자를 확보하려던

계획이 1차 진주성 전투와 이치전투로 좌절되면서, 답이 없으니 물러서자는 분위기가 점점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은 후방 불안과 전선 재편성을 위해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이 패퇴하면서 잠시 여유가 생긴 일본은 조선의 한성 탈환을 저지하고자 드림팀을 구성,

한성 탈환을 위해 선발대로 행주산에 진출해 있던 전라도 관찰사 권율을 3만의 병력으로 공격하는데,

총대장인 우키타를 비롯하여 히데요시의 대행으로 파견온 이시다, 고니시, 구로다, 고바야카와 등의

일본군 선봉장 다수가 포함된 정예병력이 공격해온 반면, 권율이 가진 병력은 의병을 포함해 3천에

불과했고, 권율은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드림팀 병력을 우주방어를 통해 관광보내면서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 불리는 행주대첩을 승리로 일구어 냅니다.


화차와 신기전을 동원하여 화력덕후의 쇼를 보여준 수비군에게 일본군은 우라돌격을 시전,

초기 투입병력인 1군과 2군, 그 중 특히 고니시의 1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이에 누각을 지어 총포를 쏘며 일본이 대응에 나서자 권율은 최종병기를 꺼내드는데, 그것은

우리의 성웅 갓순신께서 제공하신 여유분의 화포로, 친분이 있는 권율에게 제공해준 것이었고

갓순신 버프를 받은 권율은 화력이 무엇인지 참교육을 시전, 일본군을 격퇴합니다. 마지막 총공격

을 시전한 일본군의 맹공에 잠시나마 목책이 뚫리고 불이 나기도 했으나 침착한 대응을 통해 피해를

차단했고, 결국 목책이 뚫려 백병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일본군의 자랑인 백병전에도 쉬이 밀리지

않고, 행주치마의 전설이 된 투석을 통해 일본을 깨부수면서 그들의 드림팀은 무참하게 박살납니다.


일본은 총대장인 우키타가 큰 부상을 당해 병사들이 겨우 부축해 퇴각하는 등 참패를 당했고,

행주산성의 대패로 인해 버틸 힘을 상실한데다 소식을 들은 명군이 다시 진격해오자 일본은

 4월 18일 한성에서 총퇴각하며 조선은 다시 수도를 수복하게 됩니다.


일본은 부산포로 총퇴각을 결행한 뒤, 다시 전력을 재편성했고, 히데요시는 다시 경상우도와 전라도를

공격할 것을 명령하면서 화전양면책을 실시, 명나라와 협상을 시도하는데, 그러면서도 히데요시는

임란에 참전중인 다이묘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협박하는 등 그들을 닥달했고, 이에 다이묘들은 무언가

분노를 피할 성과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1차에서 대패를 당했던 천해의 요새 진주성.



3. 임란 사상 최대의 혈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명은 조선의 도읍인 한성도 수복했고, 일본의 만주 진출도 저지한 만큼 더 이상의 확전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심유경을 통해 강화 협상을 진행했고, 일본군이 진주성을 노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심유경은 일본에 공격 중지를 강력하게 요청하지만, 고니시는 일본군을 대표해서 진주성은

어쩔 방법이 없으며, 차라리 진주성을 비워준다면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답을 보내며 진주성을 공격

할 뜻을 명백히 드러냅니다.


그러자 명은 일본이 진주성을 공격할 의도가 분명하니 진주성을 포기할 것을 권했으며, 명군은 실제로

진주성을 구원할 군대를 소집하긴 했지만 당시 진주성 근처에 있던 명군을 합쳐도 일본군의 전력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기에 명군 장수들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고, 이여송도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의 상황도 진주성을 구원할 여력이 없어, 명군에 여러번 구원 요청을 했으나 대부분 무시당했습니다.


당시 진주성의 구원 요청을 받았던 홍의장군 곽재우는 답도 없는 병력차를 확인하고는 차라리 자결을

하면 했지 가면 개죽음이라는 말과 함께 구원을 포기, 그나마 구원병을 이끌고 왔던 조선군 역시 진주성

근처 집결한 일본군의 병력을 목격하고는 gg를 치고 물러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성 방어군은 항전할 뜻이 굳건했는데, 답도 없는 병력차에 조선도 명도 구원을

포기한 최악의 상태에서도, 진주성의 군민들은 일본군의 공세를 정면으로 맞이하며 임란 사상 최대의

혈전은 결국 시작됩니다. 일본군의 병력은 10만에 달했으나, 수비군의 병력은 추정치로 만 명 이하의

압도적인 열세였고,  당시 1차 진주성 대첩의 승전 이후였기에 진주성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여긴

수만명의 백성이 진주성 안으로 피신하면서, 5만 이상의 백성들이 진주성 안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1593년 6월 22일 일본의 대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수비군은 압도적인 열세에도 천해의

요새인 진주성을 방패삼아 격렬하게 저항했고, 일본군을 계속 격파하며 수성을 성공적으로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6월 28일 북쪽 성벽을 담당하던 진주목사 서예원이 일본군의 기습에 겁을 먹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며 성벽에 큰 타격을 입으며 약점이 생겼고, 수성전에서 사실상의 총책임자인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 수성의 투톱이자 가장 큰 전공을 올리던 황진이 전과 확인 중 일본군의 총탄에

저격당하면서 사망, 점점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진주성의 책임자는 진주목사인 서예원이었으나, 실질적인 수비대장은 의병장 김천일이었고,

황진은 충청병사로, 진주성이 답도 없는 상황에서 곽재우가 진주성 구원을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하여 진주성 방위의 핵심을 맡았습니다. 황진은 임진왜란 최대 졸전중

하나인 용인전투의 대패 이후 자신의 병력을 온전히 수습해 웅치, 이치 전투에서 권율 휘하로 종군,

승전을 이끌어냈으며 수원 전투에선 일본군에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돌격해 실사판 진삼국무쌍을

찍으며 성공적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고, 죽산, 상주전투에서 4배 많은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실로

유능한 장수였기에, 그의 사망은 진주성에 있어서는 참담한 일이었을 겁니다.


29일, 황진을 대신해 서예원이 순성장이 되었으나 서예원은 겁을 집어먹었고, 이에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서예원을 참하려다가 그만두는 등 성 내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서예원 대신 순성장이

된 장윤은 곧바로 전사하며 지휘체계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큰 비가 내리면서 동문이

무너지자, 일본군이 난입했고 이종인의 결사적인 저지로 일시적 수성에 성공했으나 약해진 북쪽

성벽을 일본군이 귀갑차를 동원하여 무너뜨리자 북쪽의 수비군은 순식간에 전멸했고, 일본군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고 맙니다. 김천일을 비롯한 지휘관은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거나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으며, 일본군은 끝까지 성에 남아있던 모든 군민을 학살합니다.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희생자는 6만 이상, 일본에선 과장되었다 주장하나 그들의 기록에도 취한

수급만 2만이 넘을 정도였고, 대량의 포로를 잡았으며 일본군을 피해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한

사람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논개의 야사도 이 2차 진주성 전투의 함락 이후의

일입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데, 10만의 병력을 열흘이나 막아낸 것을 보아 그들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진주목사이던 서예원의 목은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는데,

그들은 1차 진주성 당시 진주목사이던 김시민이 전사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목사의 일본식 독음인

모쿠소를 잡아 죽였다며 목을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시켜 히데요시의 분노를 피할 전과를 마련했고, 조선의 전라도 의병은 이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거의 대부분 전멸하다시피 하며 사실상 와해됩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전라도 진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대부분 진주성 군민의 처절한 항쟁에서 찾는

경우가 국내의 다수 의견이나 일본과 몀의 기록과 조선의 기록을 보면, 일본은 명과의 강화협상

상황에서 전장을 더이상 늘려 확전이 발생하면 명군이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했고, 명 역시 확전은

원치 않았던 만큼 진주성의 함락 이후 별다른 행동이나 대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본이

읍성 하나에 9만이라는 비효율적인 병력수를 투입했고, 함락 이후 주변에 대한 추가적인 보강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주성은 임란에서 두 차례의 혈전을 치른 최대의 요충지였고, 1차는 수성에 성공했지만 2차에선

함락되는데, 2차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있었기에 전후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수성에서 명목상의 지휘관이던 서예원과 실질상 지휘관이던 김천일, 이 두사람에

대한 기록은 엇갈리는 것이 많아 현대에도 후손들이 다투고 있으며, 학자별로 제각기 의견도 달라

여전히 논쟁이 잦고 현재도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합니다.


4. 구라치다 걸리면 모가지 날아가


조선은 한양 수복 이후 전선이 안정화되자 육군 13만, 의병과 수군 포함 17만 5천이라는 병력을

뽑아내며 군세를 회복합니다. 그러나 명과 일본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전장은 고착되고

국지전 형태만 일어났으며, 조선 곳곳에선 의병과 승병, 향토군이 일어나는 등 전쟁 초기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고, 그러자 협상을 진행하던 일본의 대표적인 반전주의자 고니시와 명의 대표인

심유경은 빨리 협상을 끝내고 싶어했으나 여기엔 엄청난 난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내세운 히데요시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명나라 황녀를 천왕의 후궁으로 보내며, 조선 8도중 4도를 이양하는

등의 요구조건을 본 일본과 명의 대표는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요구조건을 보고는 주작을 하기로

합의, 실제로 상주문을 주작하여 합의 직전까지 이르지만 당시 상주문을 주작한대로 읽기로 합의한

세이쇼오(임진록의 그 사람. 전국시대 무장들은 대부분 글을 읽지 못해 읽기 대행으로 있었다.)가

원문을 그대로 읽는 대사건(:::)을 저질렀고,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협상은 순식간에 파토나고 맙니다.

고니시는 사기죄로 죽을 위기에 처하나 이시다의 만류로 겨우 목숨을 건져 다시 전장으로 복귀하고,

심유경은 일본으로 도주하고자 남쪽으로 피신하던 중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압송, 목이

잘리게 되면서, 지지부진하게 오래 끈 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위와 같은 기존의 연구결과 외에 최근 논문에서는 주작된 문서가 오고간 것은 사실이나, 히데요시가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중 10개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의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의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이런 조건을 제시했고, 명나라는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에 임명하는 판자를 주었고, 실제로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금인과 관면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의 행적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고 있고,

책봉사와의 대담 이후 히데요시는 협상결렬을 선언하는데 조선의 왕자가 인질로 오지 않았고, 심유경의

사례가 없었으며, 조선이 명에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으며 두 나라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이유로

책봉은 받을 용의가 있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철군하면 일본이 손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협상을 파기했다는 내용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결국 협상은 파기되어, 일본은 다시 재침을 결정하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으로, 정유재란 초기

조선은 또다시 처참하게 당하게 되고, 선조는 갈수록 정신줄을 놓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4)에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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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7-02-25 23:37:54
항상 흥미로운 글 잘 읽고 많이 배워갑니다.
예전에 역사저널 그날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북으로 갈수록 힘을 쓰지 못한 이유중 하나를 동장군 즉, 추위때문이라는 이야기도 하더라구요. 실제로 군대생활을 해보니 유격은 몸이 피곤해서 힘들었지만, 혹한기 훈련은 그냥 숨쉬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더라구요.
임해군과 순화군 일화도 덕분에 알게 되었고, 간단하게 치열한 전투였다고 알고있었던 2차 진주성 전투는 얼마나 끔찍 했을지 상상조차 되질 않네요. 지금도 6만명의 인구라고 하면 엄청나게 많은 숫자인데, 조선시대에 6만명의 인구를 하나의 성안에서 무참히 살육했다고 하니... 얼마나 지옥같았고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요...
2
2017-02-26 10:13:29

1차 진주성 좌절이후 총병력을 집결 시켜서 추정치 5천대 vs 9만 5천 가까이 싸워서 일본 병력 2만 가까이를 전사시켜 냈으니 전투후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죠. 임진왜란 패인중 하나가 진주성을 함락시켜 전라도 진출후 식량확보를 못한것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동장군 추위는 솔직히 아니라고 보는게 일본에 무쓰나 데와지방쪽 영주들 차출군들도 있었을껀데 이쪽 눈은 우리나라 눈내리는거 비웃을정도로 많이오고 추운지방이기 때문에. 물론 규슈나 관서쪽 관동 나머지 차출군들은 추위에 힘들었을것 같기도 하지만요.
4
2017-02-26 00:53:55

이 시리즈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늘 댓글을 달고 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의 전술과 철학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합니다.


행주산성전투가 시사하는 것은 군사학적으로 매우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후 일본이 러일전쟁부터 2차대전까지 계속 이러한 양상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전략/전술적으로 치명적인 오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전투 정신은 말이 좋아 사무라이이고 무사도이지, 실상은 원시 야만 부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남아프리카의 줄루족과 동급이라는 평가도 밀덕들 사이에서 존재하죠. 특히나 나라와 천황을 위해 한 목숨 바치는 것,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것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너무 쉽게 생각하고 이걸 병사들에게 광신적으로 권장합니다. 싸우다 죽으면 발할라에 간다는 신앙을 가진 바이킹과 비슷합니다. 일본인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가 신이 되어 후손들에게 숭배를 받는다고 믿죠. 이것을 이해해야 일본이 왜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극우파의 성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패튼 장군이 이런 말은 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지마라. 나라를 위해 죽어서 이긴 전쟁은 역사에 없다. 승리는 적군이 지들 나라를 위해 죽게할 때 이루어 진다." 한마디로 무사도 정신은 머리를 쓰는 스마트함을 상실한채 어떻게 상대를 죽일까의 고민보다는 어떻게 내가 명예롭게 죽을까부터 고민하는 심각한 사고의 오류를 전투 전부터 일으킵니다. 시작부터 죽을 생각부터 하는데 어떻게 이깁니까? 2차대전 때의 태평양 섬에서 미군과의 전투 양상을 보면 모두가 하나 같이 어떻게 이 상황을 타계할까의 전략적 사고나 밀고 당기고 속이고 하는 계략도 없이, 오직 천황을 위해서 어떻게 장렬히 죽어야 내가 위대해질까 고민 하며 사케 한잔 마신후 칼 빼들고 돌격하다가 진형을 갖추고 화력으로 대응하는 미군에게 몰살 하는 일을 계속 반복합니다. 계속 작전에 실패를 하여도 반성을 하기는 커녕 일본 군부는 더욱 이를 심화시켜 카미가제 특공대, 자폭 인간 어뢰 등과 같이 계속 죽을 생각만 합니다. 이들의 목적은 전쟁의 승리인지, 야스쿠니 신사 입성인지 햇갈립니다. 행주성 전투를 이끈 권율 장군은 초기 일본군과의 전쟁을 통하여 개활지에서 백병전을 치루는 것보다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진을 친 다음에 화력으로 상대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시작한 것이 이치 전투부터 이고요. 이는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일본군은 계속 돌격만 신봉합니다.

그러나 일본 역사에 그렇지 않는 장수들도 몇명 존재하는데, 그중 한명이 고니시입니다. 고니시는 집안이 상인 출신이고 아버지가 상인이죠. 그리고 본인은 기독교인으로써 사고방식이 일반적인 일본 다이묘들과 다릅니다. 만일 고니시가 가토나 와키자카 같은 부류였다면 임진왜란은 진작에 더 빨리 끝났을 것입니다. 2차대전 이오지마 전투를 이끌었던 쿠리마야시 장군도 다른 부류입니다. 미국 물을 일찍부터 먹은 이 사람은 이오지마 전투 당시 돌격을 금지 시키고 섬 내륙 깊이 참호와 진지를 구축하여 미군을 깊이 끌어들인 후 진흙탕 전투를 통해 미국에게 탱평양 전쟁 통틀어 최고의 피해를 입히게 되죠. 러일 전쟁을 이끈 도고 제독 역시도 돌격을 지양하고 이순신 장군을 본받아 학익진 전법을 적용해 승리하였고 말이죠. 군국주의를 신봉하는 일본에게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명장이 없다는 것은 이러한 그릇 된 무사도가 한 몫을 한다고 저는 봅니다.
1
Updated at 2017-02-26 01:42:08

이순신 장군


丈夫出世 用則效死以忠(장부출세 용즉효사이충)

대장부로 세상에 나와 나라에서 써주면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 것이요.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3
2017-02-26 10:21:02

100년간 이어온 센고쿠 시대에 인명경시가 너무 심하죠. 그리고 무사들이라는 사무라이들도 전투에서

죽는게 영광이고 할복은 뭐 이리 성스럽게 묘사되고 많이들 하는지..
그러나 일본군이 돌격만 신봉한다는 건 동의할 수 없네요. 
히데요시의 주 전술은 정공을 통한 낙성이 아니라 수공, 그리고 식공으로 대표되는 말려죽이기등이 있죠.
그 아래서 자라난 다이묘들인 고니시 가토 와키자카 모두 이런 식의 공성은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
2017-02-26 11:04:43

히데요시가 그렇다는 것은 맞는 말씀이십니다. 제가 말한부분은 전반적으로 일본군이 세계전쟁사에서 보여준 모습입니다. 특히 전쟁이 장기화 되고 패색이 짙어질수록 전략보다는 자결에 가까운 돌격을 강요하죠.

3
2017-02-26 11:08:50

전쟁이 장기화되고 패색이 짙어질수록 무리수를 두는건 세계사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유독 일본이 자결에 가까운 돌격이라는 수를 보여준다는 것은 동의하는 바입니다.

2017-02-26 11:14:28

게임에서 보통 말하는 종족특성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케이스바이케이스로 일일이 다 따지면 한도 끝도 없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쟁철학에 짙게 깔린 사고관의 전반은 그렇죠. 한 예를들면 독일이라는 나라는 2차대전 때 패색이 짙어질수록 비밀병기 개발과 같은 과학개발에 열을 올렸죠.

2017-02-26 01:11:36

선조랑 그 아들들은 유전적 정신병이 있지않았나 추측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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