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이야기 - 1 영화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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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02 17:29:32
커리어 이야기
커리어 이야기 - 1 (영화판)
12년 전이네요. 혈기 넘치고 꿈 많던 20대초중반 시절 제 꿈은 영화감독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영화제작 동아리서 활동도 하면서 6mm DV 캠코더로 단편영화를 찍으며 언젠가는 거장이 되는 꿈을 꾸었죠. 당시 6mm DV 캠코더 중에 24프레임으로 촬영이 가능한 모델이 나왔었는데 저 같은 아마추어에겐 아주 가공할만한 도구의 출현이었습니다. 여기에 애플의 파이널 컷 프로와 어도비의 애프터이펙트까지 등장하면서, 저렴한 캠코더 + PC 조합만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암튼 사족이 길어지는데, 더 이상 언더에서 우물안 개구리로 사는게 싫어진 저는 휴학을 하고 영화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2006년 당시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괴물'의 스텝으로 참여하였죠. 처음에 가서 면접을 보는데 대강의 시나리오와 콘티를 보면서 "아... 영구와 공룡쭈쭈 같은 삼류 B급 괴수 영화겠구나..." 하면서 그냥 돌아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허나 뭔가 벽에 붙은 괴물 스케치들을 보면서 뭔가 허풍은 아닌듯 하여 문 앞에 서서 담배 피우시던 연출부 형님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괴물은 어떻게 누가 만드나요?" 그 형님 왈, "어.. 그... 반지의 제왕 씨지팀이 호주에서 와서 한다던데... 근데 넌 누구...?" 그말에 저는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당시 팀장이 면담을 하면서 페이 얘기를 꺼내더군요. 줄 돈이 200밖에 없다. 원래 더 줄 예산이 있었는데, 너 앞에 있던 사람이 반 먹고 그만두는 바람에 줄게 이거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돈 개념 없던 저로써는 돈 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돈은 그냥 포기했었습니다. 물론 지금와서 생각하면 어이가 없습니다. 3개월 준비기간에 10개월 한강서 온갖 하수구 진흙탕서 비 맞고 밤새고 추위에 떨면서 개노가다로 옷 다 버리면서 몸 버려가며 극한직업 하면서 받은 돈이 고작 200이라니... 월13만원... 노동자 최저인금도 못 받으며 야근 수당, 밤샘 수당은 커녕 생명 수당도 못 받은... 아.... 남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뭐 촛불끄며 따듯한 이불에서 연애할 때 군바리도 아닌 내가 왜 이런 극한직업에서 사서 고생을 해야했는지... 아...
촬영얘기는 그냥 줄여서 몇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들만 간추려 얘기하죠. 당시 호주서 온 씨지 팀은 백인들 4명 정도 되는데, 이들은 모두 촬영장에 왔습니다. 와서 봉감독에게 이러이러하게 찍으면 씨지를 이러이러하게 넣겠다 등과, 당시 빛의 상황 같은 현장 데이터를 수집해서 나중에 씨지할 때 사용하려고 왔었죠. 암튼 이들도 매주마다 있는 고기집 회식에 참여하였는데, 10개월이 지나니 이들도 소주 매니아가 되더군요. 나중에 봉감독이 후반작업 하러 호주에 갔더니 쌓아놓은 소주병만 300병이라나? 건물 입구에서부터 일렬로 소주병을 쫙 도열해서 복도마다 이어놨던 사진이 기억납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마지막 장면의 눈은 모두 소금입니다. 소금을 제가 모두 삽으로 퍼서 눈 온 것처럼 지평선 끝까지 뿌렸죠...
영화 촬영기간이 모두 끝나고 저는 완전 지쳐 있었습니다. 군대가 오히려 더 편했다고까지 느껴지더군요. 당시 여자친구도 없어서 이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지침에 대한 위로와 안식은 없었죠... 그저 마초같은 영화 동지들이나 만나면 술이나 먹으며 영화 얘기나 하던게 당시 그 시절 저의 삶이었습니다. 씁쓸했죠...
복학을 하였습니다. 당시 06학번 새내기들이 들어 왔고, 저는 동아리서 이제는 현장을 갔다온 베테랑 영웅이 되어있었죠. 당시 괴물 시사회에도 2장의 표를 얻어 새내기 여후배를 데리고 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 후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정말로 표가 남아서 "너 같이 갈래?"를 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녀는 예쁘고 귀여웠습니다. 안 예뻤으면.... 같이 가자 말 안 했겠죠...
시사회장서 다 편집 된 영화를 보는데, 내용은 하나도 안 들어오고 프레임 밖에 누가 어디 서 있었고, 저 때 난 어디에서서 무얼 하고 있었고 등등이 생각나서 영화는 하나도 읽히지가 않더군요. 그냥 그 영화는 저에게 촬영장 기억의 모자이크일 뿐이었습니다. 시사회 끝나고 오랜만에 만나는 스텝 동지들과 인사를 해봐도 모두 "야 이 영화 열라 재미없어. 망했어..." 다 이러더군요. 근데 같이 갔던 후배는 재밌다고 난리였습니다. 니가 영화에 대해 뭘 알겠어 디스를 치면서도 전 믿기질 않았습니다. 그 후배는 시사회장에 연예인들도 있고 등등 신나고 좋아서 혼자 황홀할 지경이더군요... 아마 그날 끝나고 같이 술먹으면서 "야 우리 사귀자"라고 했으면 100% 성공했었을 것 같네요.... 근데 당시는 이런거 잘 몰라서... 어휴...
화장실에 갔더니 봉준호 감독님이 계셨고, 인사를 하니 저를 알아봐 주시더군요. 허허허 순간 기분 업...
아무튼 이 시절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저는 한국영화를 볼 때 재미 보다는, 이 영화로 한국 영화인들이 얼만큼 벌고 얼만큼 행복하게 일 했을까?의 생각이 먼저 듭니다. 당시의 저는 1년 고생하고 200을 벌었고, 물론 영화가 대박이 나서 보너스로 800을 더 받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초대박이 난 영화도 도무지 스텝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안 나왔었는데... 왠만한 영화들은 어떨까... 사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있었던 영화현장의 젊은 스텝들은 사실 모두 열정페이로 참여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일부 기술직들과 일부 감독급들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영화해서는 생계도 어렵죠. 그리고 그 일부라고 말한 사람들도 1년 수입으로 계산해 보면 보통 회사의 신입초봉 수준이고요. 스텝 참여는 이 이후로 다시는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 촬영스텝 문화는 도제 시스템이 만연했습니다. 당시 제가 모셨던(이 표현도 좀 그런데... 당시 모시던 감독들을 현장에서는 오야지라고 합니다.) 감독도 끈질기게 저를 자기 밑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도 제대로 된 연봉과 복지와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닌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조폭 세계의 "나를 따라주면 나중에 내가 너 키워줄께"의 논리로 설득을 했습니다.
2007년으로 기억 되네요. 제가 모셨던 감독님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저 보고 졸업하면 자기 밑으로 다시 오라는 제스쳐와 자기 내 뒤를 봐주고 키워주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길래 제가 좀 차갑게 받아치며 인연을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저 졸업하면 이정도 기업에 이정도 연봉으로 입사할 수 있습니다. 감독님은 얼마 주실 수 있으신가요? 주말에 밤샘은 기본인데, 최소한 이 기업보다 1.5배는 더 주셔야 한번 생각이라도 해보겠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시더군요. 그 분도 바로 깨달으셨던 거죠. '얘도 열정페이 기한이 다 했구나...'
기회가 된다면 '2. 광고판'편도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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