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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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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7 22:18:27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좋아하던 시인 중에는 박인환(1926~1956)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30번째 생일도 맞지 못하고 요절한 박인환 시인이 시를 쓴 기간은 대략 8년이고 약 7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문학사에서는 그를 전후 모더니즘의 기수라고 합니다. 제가 박인환의 시를 알게 된 것은 청아한 목소리의 가수 박인희씨의 낭송 덕분이었습니다. 박인환 시인의 조카인 박인희씨는 삼촌의 시 「목마와 숙녀」를 낭송곡으로 발표했고, 「세월이 가면」을 노래로 발표했습니다. 박인희의 낭송시「목마와 숙녀」는 저의 선배 세대부터 아주 공감을 받아, 그 시대 청년들은 공통적으로 박인환 시인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습니다. 박인환 시인은 찬사만큼이나 비판도 많이 받은 분이었습니다.


탁월한 시인일 뿐 아니라 당대의 독창적인 시론가였던 김수영은 박인환에 대해서 질릴 정도로 신랄한 독설을 퍼부은 분입니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어떤 사람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이다.


김수영의 독설은 그 이후 박인환의 시에 오랫동안 통속의 굴레를 씌워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박인환은 여전히 요절한 천재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지만요.


여하튼 저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수백 번도 더 읊조렸고 그 뜻을 구석구석 파헤쳤습니다.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위에 가져온 것은 시의 핵심 부분입니다. 박인환 시인은 시에서 ‘기억하여야 한다’ ‘들어야 한다’ ‘마셔야 한다’ 등 결단적인 표현을 통해 삶에 대한 비극적 관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슬픔, 처량함 그리고 술에 의존하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달관하는 자세로 스스로 긍정하며 위안하고 있지만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슬픈 체념같이 느껴집니다. 시의 주인공은 현재의 삶을 비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이 삶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현실에서의 삶이 무상할 지라도 일상 속에 머물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숙명을 긍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삶의 무상과 스스로의 숙명을 수용함으로써 일상적인 삶이 주는 좌절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입니다.

시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가을바람 소리는 /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모든 것이 떠나가 버린 데 대한 서러움의 정서를 떨쳐버릴 수 없는 시인은 감상적 어조로 쓰러진 술병 속에서 가을바람 소리로 울고 있는 자신의 애상을 확인합니다.


별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 뜬금없이 올리는 게시물입니다. 아래에 박인희씨의 낭송을 영상으로 첨부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낭송이고 아름다운 시입니다.


https://youtu.be/5_plcSqWEx4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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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7-01-07 22:42:57

「세월이 가면」은 정말 좋아하는 시이자 곡인데 박인희씨가 박인환씨의 조카인줄은 몰랐습니다.

이름만 봐도 바로 알 법한데 말이에요.

뭔가 머리로는 우울함 너머의 무언가를 믿고 나아가려 하면서
마음은 그 안에 계속 머물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몇 달 전에 박인희씨가 컴백콘서트를 하셨던데 앞으로 계속 활동을 하시는 건진 모르겠네요.

좋은 시/음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WR
2017-01-08 00:15:42

저는 처음에 삼촌 조카라는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목마와 숙녀는 제 시대에 가장 인기 많던 시였습니다. 그 내용이 실제 뭘 의미하는지 아는데는 오래 걸렸지만요.


저는 「세월이 가면」이 처음에는 낯설었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박인환씨가 서른 전에 세상을 뜬 걸 알고 있었기에 저 구절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입술까지 경험한 사람의 이름을 잊었을까? 그러데 나이들어보니 제가 기억력이 좋음에도 눈동자는 또렷이 기억나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한 경우가 생기더군요. (물론 제가 입술을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을 거치는 직업이라서 그런지 저는 「세월이 가면」의 첫 구절이 나이들면서 갈수록 공감하고 있습니다.

2017-01-07 23:16:35

제가 학생 때부터 유독 시 해석을 못했는데 지금도 그렇네요.

문예 쪽으론 완전 일자무식인데 난독증까지 있어서 글쓴이님이 소중한 시간 투자하셔서 쓰신 글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시대의 흐름 속에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의 인물을 소개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WR
2017-01-08 00:16:50

20년이 훨씬 넘게 저 시의 뜻을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도 처음 접했을 때에는 도대체 이 사람이 뭘 말하고 싶은 거였는지 감이 안잡혔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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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8 00:03:36

김광균 시인의 시랑 비슷한 느낌을 주네요..
뭔가몰르 답답함이랑 탐미적인 느낌이 몰려옵니다. ㅠㅠ
개인적 감상으론 김수영시인 보다 타고난 부분은 좀 모자라 보이네요 ㅠㅠ

WR
1
2017-01-08 00:20:04

그런데 박인환의 살아생전에 김수영 시인은 나이가 다섯살이 많았음에도 박인환에게 압도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박인환씨의 신화는 많이 희석되었지만요.

2017-01-09 09:28:32

시가 어떤 이미지를 주는거라고 했을 때, 김수영 시인과 박인환 시인의 이미지는 조금 차이가 있죠.


개인적으로 김수영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하고, 항상 마음속에 넣고다니는 시가 "어느날 고궁을 나서며" 입니다만,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는 무언가 잘 모르겠는 애틋함을 몽환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저는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죠. ^^


하지만, 직설적인 어떤 이미지를 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죠. 읽고났을 때, 그게 뭔지 잘 모르겠더라도 뭔가 아름다운 것 같은 그런 느낌? 무언가 애틋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것도 참 대단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저히 시는 잘 못쓰겠더라구요. ^^

WR
2017-01-09 13:16:04

박인환의 시는 어떻게 말하면 사치스럽고 겉멋을 부린 듯한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저 시에서도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페시미즘의 미래' 등의 표현히 겉멋인지 함축적 의미를 포함한 것인지 많이 혼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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