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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을 말아서 먹는 독립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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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7 09:53:38
우리 집에 개라는 동물이 사는 건 특별한 광경이 아니었다.
부모와 4자매로 형성된 우리 가족의 저녁 시간은 유머 대결하는 모습들로 매일이 진풍경이었다. 
남들이 보면 별 시답잖은 농담들이었겠지만,타국 생활과 혈연관계라는 유대감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하루 동안 쌓인 심신의 피로를 웃음과 폭소로 날려버리면서 '너 웃겨죽겠다' 
'이런 미친 화목을 봤나'라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면 피곤해서 잠도 잘 오고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매일이 저렇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밥 한끼 패스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부모님,
남들보다 다양한 기분을 보유하고 있는 둘째 언니와 관종 동생,공주병 첫째 언니와 나
매일 몇 시간씩 수다수다,국제 정세,잔소리,유머,영어했다 한국어했다 난리도 아님.
어느 날 그중에 그나마 제정신이었던 내가
'다른 집 처럼 힙하게 가족 간에 말 좀 없고,집에서 세련된 시간을 보낼 순 없을까' 라는 생각이 막 들기 시작하던 때에 아버지는 사람으로도 모자라 개를 데려왔는데 그 개의 성격도 참, 하아;
지금 키우고 있는 개는 그 애보다 훨씬 작고,가볍다.
하지만 이렇게 손이 많이 갈 줄은 몰랐다.
어렸을 때는 내가 개를 키운 게 아니라 그냥 개 키우는 집에 내가 살았을 뿐인거지.
내가 하는 건 예뻐하고 프리즈비 던져주는 거뿐이었다.



김밥 같은 음식도 마찬가지,
엄마나 누가 싸주는 거나 먹어봤지 감히(?) 내가 김밥을 만들어 먹을 엄두를 내기 시작한 건 불과 1-2년 사이의 일이다.
과정이 어려운 건 없는데 재료 준비에 손이 많이 가고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음식으로
다 말고 썰어서 한입 먹어보기 전 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파프리카 넣어도 되겠지? '
'터질까봐 조심조심 하다보니 타이트하게 되질 않아'
'남들 거까지 만드는 거였으면 어쩔 뻔했어?'
'괜찮아, 집에 참기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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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17-01-18 02:46:23

.

WR
2016-11-17 10:33:45

나를 위해 차려져 있는 밥상을 우습게 봐선 안되겠다 싶어요.
김 좀 두껍게 만들어주라

3
2016-11-17 10:31:48

 저희 집은 부모님이 맞벌이셔서 집안 살림을 할머니께서 도맡아 하셨었어요. 가족 생일이면 갈비찜, 잡채, 해파리냉채를 자주 해주시고는 하셨죠. 이제 연세도 있으시고 어머니도 몸이 불편하셔서 가족 생일이면 늘상 중국음식을 시켜먹다 얼마 전 아버지 생신 때 동생과 의기투합해서 우리가 생신상 차려드리자 해서 갈비찜, 잡채, 해파리냉채를 딱 세가지를 준비했습니다.

 동생은 잡채와 해파리냉채를 준비하는데, 토요일 한나절을 다 썼고, 저는 갈비찜 준비하는데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고기 손질 끝내고 양념 재워두고 잘수가 있었어요. 이런걸 할머니 혼자 늘상 하셔 왔다니 정말 대단하단 생각 밖에 들지 않더군요.

 이번 주는 할머니 생신인데, 최근 드시고 싶다던 꽃게찜을 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부디 맛있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WR
2016-11-17 10:50:27

갈비찜,잡채,해파리 냉채라니 할머니 메뉴 구성이 맘에 들어요.
어딜가서 먹어도 저 3가지 음식은 할머니 손맛이 기준이시겠어요.
그날 꽃게가 달고 맛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6-11-17 11:04:10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딸이시군요. 으하하

푸짐한 사진이 후토마키 느낌이네요. 좋으시겠어요.
WR
2016-11-17 11:28:52

감사합니다.
집에 8장 남아있는데 자신이 생기네요

1
Updated at 2016-11-17 11:13:29
전 아직도 혼자서 김밥 만드는건 엄두도 못내는데, 속이 꽉 찬 김밥을 보니 멋지네요 

저희집은 항상 따로 밥을 먹지만 어머니가 김밥 싸시는 날만은 가족이 식탁에 모여앉아요.
어릴 땐 김밥에 간장조림오징어같은거 들어가면 티나게 물 많이 먹는 모습 보여드리면서 투정부렸는데,
자취생활 시작하고 나니 어머니가 김밥에 설익은 아보카도를 넣어도
"엄마, 이런건 어디서 배웠어? 잘 어울리는데?" 하며 우걱우걱 먹게 됐어요.
원랜 입에 김밥이라도 넣어주시려고 하면 손사래를 쳤는데, 
이젠 덜컥 받아먹고 아이컨택도 해드리고 싶은 나이가 됐나봅니다.
김밥은 사랑입니다.




WR
2016-11-17 11:35:40

김밥은 사랑입니다.
누가 자신에게 김밥을 선물한다면 핵 그린 라이트입니다.

2016-11-17 11:26:54

밥 해먹다가 하루가 다 갑니다...

WR
2016-11-17 11:37:54

그렇죠.
특히 한식상으로만 3끼니 차려내는 분들 참 대단해요.

Updated at 2016-11-17 14:12:16

전 어렸을 때 김밥을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어머니가 만드시는 김밥은 항상 맛이 담백하고 야채가 많아서 제가 아는 시중의 김밥에 비해서 그당시 제 초딩 입맛에는 별로라고 느꼈나봅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갑자기 그 맛이 떠올랐습니다.
그 맛에 담긴 옛날 저희 집의 모습과 함께요.
어릴 때만 해도 항상 화기애애하고 제가 소풍 가는 날이면 어머니께서 직접 김밥도 만드시고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집 안은 조용해지고 김밥은 시중의 참기름 듬뿍 발린 김밥으로 바뀌어 버리긴 했지만요.
추억을 자아내게 하는 멋진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WR
2016-11-17 14:49:12

엄마 제발 떡볶이에 힘 주지마
누구 저염식인 줄 알고 드신 분

2016-11-17 17:28:49

재료를 끝까지 넣으면 백프로 풀어질텐데.
이쁘긴 한데 손으로 집어드셔야 했을듯.

WR
2016-11-17 17:37:05
주섬주섬
2016-11-17 21:47:18

저희는 남자 사형제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집이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합니다.

WR
2016-11-17 22:37:41

푸하하하하

2016-11-18 07:31:40

캐시님의 글은 떠올리게 하는 것이 있네요.
읽고서 조금 행복해졌어요.
감사합니다.^^

WR
2016-11-18 07:50:00

댓글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네요.

힘내세요, 북두신돈님.
2016-11-18 11:34:34

진심으로 매니아에서 가장 글을 예쁘게 쓰시는 것 같아요.
글이 이미지화가 될 정도...
저는 글을 뭉개지고 추잡하게 쓰는 편이라 부럽네요.^^
다시 한 번 잘 읽었습니다.
요 글은 좀 훔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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