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NBA       
Xp
  
KBL       
Xp
  
Mania Community. Your Favorite.
Q&A
밥 쿠지는 어떤 선수였나요?
 
  342
2020-03-25 22:24:01

우승 6번 퍼스트 10번 어시왕 8번 올스타도 13번 시엠도 있는데 포가 탑3에 잘언급되지가 않네요 영상을 찾아봐도 2~3분정도 밖에 없어서 어떤 스타일인지도 확인하기도 힘드네요... 커리어만보면 빅오와 비교될만하지 않나요?

이 게시물은 아스카님에 의해 2020-03-25 22:28:32'NBA-Talk' 게시판으로 부터 이동되었습니다.

4
Comments
Updated at 2020-03-25 22:39:31

조지 마이칸이 있었을 때였던 만큼 고대중에서도 고대선수여서 언급조차 힘든 선수이죠

Updated at 2020-03-25 22:59:20

아무래도 먼 과거 nba 초창기에 흑인들이 못 뛰던 시대이거나 제한이 있던 시절에 쌓은 커리어라 평가가 안 좋은게 아닌가 싶네요 

 

거의 대부분의 위대한 선수들은 흑인들이고 nba가 흑인들이 지배하는 판이다보니 흑인들과 동등한 조건속에서 경쟁한 선수들은 인정 받아도 먼 과거 백인들 판이었던 시대의 선수들은 별로 인정을 못 받는듯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nba 인종 관련 문서를 보니까 1953년에 최초로 흑인선수가 올스타에 선정된 내용이 있고 1960년대에 팀당 흑인 선수에 대한 쿼터가 있다고 믿었다는 내용이 나오는걸로 보아 50년대는 흑인 선수들이 별로 없었던걸로 보이거든요.

2020-03-25 23:06:56

너무 예전 선수이기도 하고.
본인이 에이스로 있을땐 우승을 노릴만한 위치는 아니었단점도 약간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보스턴 왕조는 빌 러셀의 왕조였으니까요.

Updated at 2020-03-26 23:35:13

쿠지는 시대를 앞서간 현대 포인트가드들의 조상과도 같은 선수죠. 쿠지 이전에 포인트가드 선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요.

 

쿠지는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현란한 드리블과 기상천외한 노룩 패스를 선보이곤 했는데, 이게 당시 지도자들 눈에는 엄청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홀리 크로스 대학 시절에 감독이 쿠지를 그리 중용하지 않았는데 (실력은 좋으나 자꾸 해괴망칙한 짓거리를 해댄다고 봐서...) 관중들은 그가 나오면 무척 좋아했죠. 한번은 접전을 벌이는데 쿠지가 벤치만 지키고 있으니까 관중들이 "쿠지!" "쿠지!"의 이름을 연호했고, 감독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내보내니 경기를 하드캐리하며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원래 트라이-시티 블랙호크스(지금의 애틀란타 호크스의 전신)의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는데, 당시 그는 연봉을 1만 달러는 줄 것을 요구했으나 블랙호크스의 벤 커너 구단주는 6천불밖에 줄 수 없다며 엄포를 놓았죠. 결국 연봉 협상은 틀어지고 말았고, 괴씸죄에 걸린 쿠지는 시카고 스택스란 팀으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습니다. (커너 구단주는 4천불을 아끼다가 당대 최고의 가드를 놓침...) 근데 하필이면 그 스택스 팀이 오프시즌에 도산을 해버리는 바람에 쿠지의 지명권이 붕 떠버렸죠.

 

다른 구단들은 스택스 팀 소속 선수들을 놓고 제비뽑기를 해서 나누도록 했죠. 당시 보스턴의 월터 브라운 구단주는 득점왕 출신의 맥스 자슬로프스키나 쿠지 이전의 원조 어시스트왕 앤디 필립을 뽑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제비뽑기에서 3번째에 걸려서 엄청 실망햇으며 자슬로프스키와 필립을 놓치고 울며 겨자먹기로 쿠지의 지명권을 가지게 되었죠. (이때 2등에 걸렸고 쿠지를 2번째로 뽑았으며 브라운이 크게 실망했던 건 과장이라는 설도 있긴 합니다.)

 

당시 레드 아워백 감독도 쿠지를 못마땅해 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루키 시즌에 쿠지는 주전 포가가 아닌 오프-가드(보조 볼핸들러로 슈팅가드 포지션 정립 전에, 2번 포지션에 해당)로 기용되었죠. 하지만 낭중지추라고 점차 그 천재성을 엿보이자 아워백 감독도 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점차 팀의 중심으로 중용하게 되었죠. 아워백은 빠른 템포의 공격 농구를 선호했는데, 쿠지는 그런 스타일에 딱 맞는 핸들링과 스피드, 코트 비전, 속공 전개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죠.

 

이후 그는 근 10년간 리그 탑 포인트가드 자리에 군림했고, 8년 연속 어시스트 왕에 올랐죠. 당시 평균 어시스트가 7~8개 정도에 불과해 얼핏 별 거 아닌 듯 보이는데, 그때는 어시스트 판정 기준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습니다. 심지어 패스 받아서 완전 오픈 찬스인데 두 세 발 걸어서 골 넣으면 어시스트가 불인정되기도 했죠. 지금처럼 페이크 다 넣고 이 난리 저 난리 쳐도 다 어시스트로 쳐주는 때와는 차원이 달랐죠. 즉, 당시 7~8어시스트는 지금 기준으로 치면 9~10어시스트와 맞먹는 수준이었죠. 그리고 애초에 그만큼 어시스트 해줄 수 있는 가드가, 당대에 쿠지가 유일하다시피 했고요. 

 

쿠지의 진가는 탁월한 리딩 능력에 있었지만, 당대 가드로서 최고의 득점력을 지녔던 것도 결코 무시 못하죠. 조지 마이칸이 판을 치던 센터 중심 농구 시절에, 그는 가드로서 평균 20득점 안팎을 올리며 최고의 공격형 가드로 코트를 누볐습니다. 그의 주요 득점 루트는 현란한 볼핸들링과 스피드를 기반으로 한 골밑 돌파와 속공 득점, 그리고 요새로 치면 플로터에 해당하는 러닝 훅 슛이었죠. 그리고 샤프 슈터는 아니지만 간간이 외곽에서도 자신감 있게 슛을 던지곤 했는데, 옛 영상을 보면 지금의 거의 3점슛 거리에서도 종종 슛을 넣는 쿠지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그는 가드이면서 리바운드 능력도 제법 탁월했고, 가끔식 트리플-더블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당시는 그런 거에 대한 개념이 없긴 했죠. 그의 적극적인 리바 가담은 보스턴의 속공을 좀 더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무기였죠.

 

다만 당시 정서 상 작은 가드가 저렇게 코트를 누비고 골밑을 헤집는 꼴을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들이 많았죠. 게다가 비하인드 백 드리블을 치질 않나, 노 룩 패스를 하지 않나, 쿠지가 보여주는 시대를 앞서간 온갖 스킬들은 다른 팀 감독이나 선수들이 보기에는 자기를 놀려먹는 듯한 도발로 보였죠. 그래서 간혹 쿠지를 위해하려는 상대 선수의 거친 반칙이 이어지곤 했는데, 아워백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3, 4번 포지션에서 쿠지 전용 보디가드들을 일부러 키웠습니다. 밥 브래넘, 밥 해리스, 짐 로스커토프가 이런 임무를 주로 맡았는데, 이 떡대 좋은 포워드들은 쿠지가 거친 반칙을 당하거나 공연한 시비를 당할 때 마다 나서서 쿠지를 보호하고, 또 당한 대로 되갚아주었죠.

 

지금으로 치면 대놓고 하드 파울과 보복성 플레이를 일삼는 비매너 선수들이지만, 당시 50년대는 시대가 그랬습니다. 조지 마이칸은 허구헌날 코트 위에서 구타를 당하곤 했고, 그래도 심판이 보호해주지 않으니까 자기도 엊어맞으면 상대에게 똑같이 갚아주곤 했죠. 당한 만큼 갚아주고 그래야만 얕보이지 않았던, 마치 코트 위가 정글 같던 시대였습니다.

 

쿠지는 백코트 파트너인 빌 샤먼과 함께 리그 탑 가드로서 매년 놀라운 활약을 펼쳤지만, 보스턴은 빌 러셀 전에 쿠지 ERA에서는 파이널을 한 번도 못 가본 그냥 그런 상위권 팀에 그쳤죠. 비록 올스타 센터 에드 마콜리가 있긴 했으나 상대적으로 골밑 수비가 약했던 탓에 (마콜리는 득점력은 뛰어나나 6-8에 180파운드의 빈약한 체격이었음...) 컨텐더까지는 못 올라갔습니다. 가드 중심의 농구로는 아직 우승하기는 힘들었던, 그런 시대였던 겁니다. (쿠지의 역대 평가에도 이런 부분이 좀 반영이 되어야겠죠. 냉정하게 말해서 빌 러셀이 오기 전에 쿠지는 팀을 파이널로 견인한 업적은 없었던 거니까요.)

 

쿠지는 기량도 기량이지만 인품도 정말 훌륭했던 선수로, 보스턴의 정신적 기둥이기도 했죠. 특히 그는 흑인 선수들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팀의 흑인 동료들을 앞장서써 감싸던 인격자였는데, 이태리 이민자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빈민가에서 자라며 자연스레 흑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농구를 했기에 인종에 대한 비뚤어진 편견이 없었던 겁니다. 빌 러셀이 리그에 데뷔하면서 인종 차별로 맘 고생을 많이 겪었는데, 다행히 당시 보기 드물게 인종차별 마인드가 없었던 감독 아워백과 팀의 리더 쿠지가 러셀을 잘 다독여주었죠. (우스개소리로 아워백은 흑인이건 백인이건 차별 없이 똑같이 갈궜다고 하죠.)

 

쿠지는 리그 초대 선수협 회장으로 선수들의 권리 증진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은퇴 후에는 신시내티 로얄즈 등에서 감독으로 재직했는데, 지도자로선 그리 큰 성공을 못 보고 오히려 그의 명성을 깎아먹었죠. 특히 그가 은퇴한 후 역대 최고 1번 자리를 너무나도 빨리 뺏어가 버린 천재 가드 오스카 로벗슨에 대한 질투심이 심해서, 감독으로 있던 신시내티 시절에 팀의 에이스인 그와 자주 부딪혔고 결국 오스카가 신시내티를 떠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죠. 둘이 기본적으로 성격이 너무 안 맞는 탓(온화하고 점잖은 쿠지, 그리고 직설적이고 불 같은 오스카)도 있지만, 나름 쿠지만한 인격자가 질투심 때문에 공사 분간을 못할 정도로 당시 오스카의 포스는 엄청났습니다. (쿠지가 역대 포가 랭킹에서 오스카에 비견되기 어려운 하나의 이유기도 하죠.)

 

또 쿠지는 신시내티 감독 재직 중에, 팀의 흥행을 위해 거의 이벤트 성으로 아무 준비도 없이 선수로 뛰었다가 선수 커리어에 먹칠을 하기도 했죠. 그는 69-70시즌에 선수로 7경기를 뛰었는데 이는 진짜 거의 구단주가 억지를 부려 은퇴한 지 7년이 된 마흔 넘은 감독을 흥행을 위해 어거지로 코트에 내보낸 거였죠. 제아무리 쿠지라도 그 나이 먹고 몸상태도 관리 못한 채 코트에서 제대로 뛸 수는 없었고, 깜짝 이벤트도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죠. 괜히 그때 뛴 것 때문에 쿠지는 그만 보스턴 원클럽 맨이라는 영예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