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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민자의 꿈, 아들을 통해 이루다-제레미 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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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2-02-20 10:35:01
매니아에도 제레미 린 관련 번역글 한 번 올려봅니다. 
제 블로그가 출처입니다. 
평어체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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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린 열풍이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NBA치곤 조그만 체격의 이 동양인 가드는 NBA에서 보기 드문 하버드 출신, 그리고 동양인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제레미 린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조명을 받고 있는 가운데 린의 대학 시절 때 나왔던 칼럼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몇 년전 NCAA농구 국내 최고의 재야 전문가인 마마님을 통해서 하버드에 엄청난 동양인 신입생 선수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얘는 완전히 레벨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선수가 바로 제레미 린이었다. 이 때부터 린이라는 선수와 그의 하버드 시절 경기들을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다.  

손가락 한 번 꾸~욱 부탁드린다. 


예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ESPN의 칼럼니스트 대나 오닐은 여류 칼럼니스트답게 감성적인 분위기의 글을 잘 쓴다. 2009년 NCAA토머너트 결승에 진출했던 미시건 주립의 센터 고란 수탄 일화를 감동적인 스토리로 일궈낸 칼럼을 블로그에서 소개한 적도 있다. 이 오닐이 지난 2009년 12월, 당시 하버드 재학 중이던 동양인 가드 제레미 린의 칼럼을 내놓은 적이 있다.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NCAA농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칼럼 본문을 번역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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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자신의 농구 경기 첫 득점을 올린 훅 슛은? 카림(압둘 자바)에게서 나왔다. 
점프슛 폼은? 여기에는 래리 버드가 한 몫했다. 
코트 한 쪽에서 다른 쪽까지 속공 연결 후 마무리 덩크는? 이건 닥터 제이(줄리어스 어빙)의 것.
깔끔한 드리블 돌파에 외곽으로 빼는 패스는? 매직 존슨이다. 

제레미 린이 일요일 오후 코네티컷 전에서 30득점을 올리는 동안, 나라 반대편(캘리포니아)에 있는 린의 부친은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이 봐왔던 NBA 전설들의 플레이가 아들에게 그대로 '빙의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에밍 린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 전설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를 가르치기 위해 지난 수년 동안 NBA 테잎들을 돌려보았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본 적도 없는 이 경기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수년 동안을 동네 YMCA를 다니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농구의 기본기와 근육 기억을 가르쳤다. 이 용어가 어떤 의미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 만큼이나 자신의 아들들도 농구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보잘 것 없는 꿈을 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꿈은 코네티컷의 한 경기장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지에밍 린이 캘리포니아 주 팔로알토 시의 자택에서 말했다. "제레미가 뭔가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할 때마다 이를 반복하고 반복해서 익혔다. 나는 계속 지켜보고 그들은 제레미에게 계속 보여줬다."
곧 대학농구 계가 제레미 린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4학년 린이 하버드 팀에게 이룬 업적을 확인해 보라. 하버드는 올 시즌 7승 2패로 지난 25년래 가장 좋은 시즌 출발을 보이고 있다. 


코네티컷과의 경기에서 대활약한 린. 어, 사진의 상대편 코네티컷 선수 어디서 많이 본?
그렇다. KBL용병으로 KGC에서 잠시 뛰었던 개빈 에드워즈다. 



대 코네티컷 전 하일라이트 동영상

린은 자신의 팀을 이끌며 전미 랭킹 12위인 코네티컷 대학교에게 73-79로 패했지만 개인 최다 득점인 30득점에 아홉 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그리고나서 수요일에 열린 ACC소속 보스턴 칼리지와의 경기에서는 25득점을 기록하면서 팀은 74-67 승리를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다. 두 시즌 연속 하버드가 보스턴 칼리지를 격파한 것이다. 

그러니까 뉴잉글랜드 지역의 NCAA토너먼트 진출 단골팀인 두 팀과의 2연전에서 린은 55득점에 64% 야투성공률, 그리고 80%의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했다. 

린은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장점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선수이다. 지난 시즌 린은 전미 대학농구를 통틀어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슛블록, 야투 성공률, 자유투 성공률, 그리고 3점슛 성공률 등의 항목에서 소속 컨퍼런스 개인 순위 10걸에 드는 유일한 선수였다. 

올 시즌은 어떤가. 아이비리그에서 제레미 린은 간발의 차이로 득점 랭킹 2위(18.6득점), 리바운드 10위(5.3개), 야투 성공률 5위(51.6%), 어시스트 3위(4.6개), 스틸 2위(2.4개), 슛블록 6위(1.2개)를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는 명예의 전당 감독인 짐 캘훈 코네티컷 감독까지도 관심을 갖게 할 만한 기록이다. 

캘훈 감독이 린에 대해 말했다. "코네티컷의 홈 구장에는 수많은 팀들이 와서 원정을 치렀지만 린은 그 어떠한 팀들과도 맞붙을 수 있는 선수이다. 린은 무지무지하게 침착하고 어떻게 경기를 풀어나갈 지를 읽는 능력이 있다." 
 
동양인이어서 운동 신경이 없다고? 사진은 코네티컷의 에이스 제롬 다이슨의 
속공을 블로킹해버리는 린. 

그리고 이런 린의 경기를 풀어가는 능력은 부친의 결심 때문에 가능했다. 린은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스포츠를 위해 길러진 미식축구 선수 마브 마리노비치와 같은 그런 완벽한 훈련 시스템의 산물이 아니다. 다만 5피트 6인치의 조그만 신장을 가진 부친이 아주 오래전 농구라는 스포츠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 스포츠를 통해서라면 자신의 아들들이 미국의 주류 사회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레미의 부친은 체육은 등한시되고 학업은 중시되는 대만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구라는 스포츠를 살짝 들여다보게 되었고 어쩐 일인지 농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리고 미국에 왔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 박사과정을 마치기 위해서와 NBA를 보기 위해서. 결국 1977년 지에밍 린은 퍼듀 대학교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바로 원하던 게 이뤄졌다. NBA의 70년대 영광이 한창이던 때였다. 카림 압둘 자바와 모세스 말론, 닥터J가 한창 날리고 있었고 조던과 버드, 그리고 매직이 싹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완벽한 농구 폐인이다."라고 제레미는 밝혔다. 지에밍 린의 첫번째 일은 제레미를 데리고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어떤 것이든 운동을 시켜 보려고 했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시킬 지 전혀 무지했다는 것. 지에밍은 평생 단 한 번도 농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눈을 돌린 것이 예전부터 봐왔던 NBA 경기들이었다. 지에밍은 비디오 테잎들을 보면서 자신의 박사과정에서 연구를 하던 그 열정으로 NBA 경기들을 공부했다. "그저 그 경기들을 반복해서 보고 또 봤다. 내 훅슛은 카림에게서 나왔다"라고 말하며 지에밍은 웃었다. 지에밍이 동네 농구 시합에서 어느 정도 뛸 수 있게 될 때까지 몇 년이 걸렸다. 지에밍은 아직 자녀를 가지기 몇 년전부터 자녀들이 어릴 적부터 농구를 알고 자랄 수 있도록 가르치겠다고 결심했다. 

장남인 조슈아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지에밍은 동네 YMCA 농구 교실에서 농구를 배우도록 했고 여기에서 자신이 비디오 테잎으로만 봤던 값진 농구 기술들을 체득하도록 했다. 제레미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막내인 조셉이 가세하자 일주일에 세 번은 반드시 농구를 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들들은 8시 30분쯤 숙제를 모두 끝내고 YMCA에 가서 한 시간 반 동안 훈련과 연습 경기를 가졌다. 

지에밍은 여기서 한 가지. 수많은 유소년 지도자들이 잊고 있는 한 가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성공의 바탕은 기본기라는 진리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농구를 배우도록 했기 때문에 농구가 몸에 체득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기본기만 제대로 갖춘다면 나머지는 쉽게 따라올 것이다"라고 지에밍은 말했다. 그의 열정은 곧 아들들의 열정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아이들이 자라면서 농구 연습을 하던 90분은 점점 농구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이른 시간 전쟁으로 바뀌었다. 


장남인 조슈아는 헨리 M 건 고등학교에서 스타 선수가 되었다. 둘째인 제레미는 라이벌 학교인 팔로 알토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이 때 조슈아는 이미 졸업반이었다. 

제레미는 걸출했다. 그는 부친의 열정과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 그리고 6피트 3인치까지 자린 신장을 갖고 있었다. 제레미는 2번을 소화하기에 충분한 득점력 뿐 아니라 1번 플레이 메이커로서의 자질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건 순전히 부친과 매직 존슨 덕분이었다. 제레미는 안정된 외곽 슈터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닥터J, 압둘 자바에게서 배운, 골 밑 플레이 능력까지 습득했다. 제레미의 재능은 너무 출중한 나머지 그의 고등학교 농구팀 코치는 팀 연회장에서 일어나 신입생 제레미를 일컬어 "내가 여태껏 본 그 나이대의 선수들 중에 최고 다재다능한 선수이다"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학교 대표팀에 들어간 제레미는 올해의 2학년 상과 2번의 리그 MVP를 거머쥐었다. 농구에 그토록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레미는 스스로를 그저 농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이같은 순진한 생각을 하던 제레미에게 시련이 닥쳤다.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조롱과 야유를 받게 된 것이다. 제레미는 거친 고교 농구계에서 신기하고 독특할 수밖에 없는 '아시아계 미국인' 농구 선수였다. 사실 이런 세계에서는 그저 평범한 게 가장 나은 위치일 것이다. "자라면서 특히나 더 고생을 많이 했다. 그냥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존중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내가 농구를 못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제레미는 회상했다. 

부친은 아들에게 슬기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사람들은 네게 이런저런 말들을 할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런 말들에 동요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그저 말들일 뿐이다. 네 학교가 이기도록 경기하면 사람들이 널 알아줄 것이다."

다시 한 번 지에밍의 말이 옳았다. 제레미의 3학년 시즌 동안 제레미는 경기당 평균 15득점, 7 어시스트, 6 리바운드, 5 스틸을 기록했고 팔로 알토 고등학교의 32승 1패 전적을 이끌면서 CIF 디비전2 주내 결승전 경기에서 전미 랭킹에 올라있는 매터 데이 고교를 51-47로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런 과정에서 제레미는 자신을 놀렸던 몇몇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팔로 알토 고교가 매터 데이 고교와 맞대결했을 때 제레미의 학교와 함께 라이벌인 헨리 M 건 고교 학생들까지도 함께 동내 피자 가게에 모여서 제레미와 그의 팀을 단체로 응원했다. 

북부 캘리포니아 이외 지역의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과정은 더욱 어려웠다. 제레미가 4학년이 되었을 즈음에는 캘리포니아 주내의 거의 모든 언론이 제레미를 고교 올해의 선수로 꼽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레미는 대학 디비전1 내의 그 어느 학교로부터도 장학금 제의를 받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의 인종이 어느 정도 그 원인이었다고 제레미는 생각하고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NCAA 디비전1 선수 명단의 단 0.4%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5,051명 등록 선수 가운데 단 20명. 

하버드는 입학 기회를 제공했지만 물론 무지막지하게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아이비리그는 운동선수 장학금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도 디비전1에서 뛸 수 있는 기회였다. 린은 주저하지 않고 하버드로 향했다. 

4년간 최고의 대학 시절을 보낸 린은 또다시 쉽지 않은 위치에 서 있다. 제레미 린은 자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힘빠지는 아시아계 미국인 농구 선수의 선구자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 유니폼과 아시아계라는 배경은 여전히 제레미를 특이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린이 바라는 건 그냥 농구 선수가 되고 싶은 것이다. 아시아계 농구 선수가 아닌 그냥 농구 선수 말이다. 

듀크 대학교 선수 출신이면서 시튼 홀과 미시건 대학교 감독을 잇따라 역임한 하버드의 토미 애매커 감독은 말한다. "제레미는 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 중의 하나로 발돋움했다. 제레미는 누구보다도 안정적인 선수이다. 그의 플레이를 처음 보는 이들은 이를 보면서 감탄하지만 이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그는 보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선입견은 쉽게 없어지지 않고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꼬리표처럼 떠돌아 다닌다. 코네티컷 대학교 원정에서 제레미가 첫 자유투를 던지기 위해 라인에 섰을 때 한 무지몽매한 학생팬이 소리쳤다. "만두국(Won-ton soup. 중국식 만두국의 일종)!"

"나도 지칠 때가 있다. 그래도 그냥 경기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고 포용하려 노력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게 더 가치있는 행동일 것"이라고 제레미는 말했다.  

 지난 109년의 역사 속에서 하버드는 단 한 번도 아이비리그 우승을 차지해 본 적이 없다. 단 세 번 준우승에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여태껏 리그 올해의 선수상은 지난 1984년의 조 캐러비노 한 명만을 배출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NBA 선수로 뛰었던 하버드 출신은 누구일까? 무려 1953년의 에드 스미스이다. 

린은 이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십수년전 농구라는 스포츠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머리 속에서 계속해서 떠돌고 있다. 

지에밍 린은 말했다. "여태껏 제레미가 자라오면서 난 단 한 번도 그가 대학이나 프로에서 농구 선수로 뛸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즐겁고 너무 자랑스럽고 아들 때문에 행복할 뿐이다. 제레미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 꿈은 이미 이뤄졌다고..." (I just enjoyed watching him play. I'm just so proud of him and so happy for him. I told him my dream already has come true.)

(끝)
- Dana ONeil, 2009. 12. 10일자 ESPN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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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으며...
1.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마지막 문장을 읽으니 눈물이 찔끔난다. 다시 한 번 칼럼니스트 오닐 여사에게 (비록 오래되었지만) 좋은 글 써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최고의 글이다. 기자라면 저런 소재를 찾아내서 저렇게 글을 써야 한다. 

2. 개인적으로 린의 최근 플레이를 보면서 감회가 참 새롭다. 과거 하버드 시절 보스턴 칼리지와 맞대결에서 All-ACC 가드였던 타이리스 라이스를 완전히 능멸했던 기억이 난다. 이 경기를 보면서, 동양인 제레미 린을 보면서 저 정도면 NBA에 가서도 어쩌면, 어쩌면 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린이 이제 NBA에서 대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깐 그 때 잠시 동안 했던 상상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3. 린은 하버드 시절 포인트 가드보다는 슈터로서 더 명성을 날렸다. 즉 대학에서는 윙 플레이어에 더 가까왔다. 포인트 가드 위치에서 보낸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포인트 가드 자원이 절실했던 뉴욕 닉스에서 훌륭하게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해주고 있는 걸보면 린의 재능 뿐 아니라 개인적인 노력 또한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4. 하버드 신입생 시절에는 전국적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린의 운명은 그가 2학년이 되던 2007년, 토미 애매커 당시 미시건 감독이 하버드 대학교 농구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애매커 감독은 농구 명문 듀크 대학교 출신으로 세계 최고의 감독인 마이크 슈셉스키 듀크 감독 밑에서 선수 생활과 코치 생활을 해 본 명 감독이다. 애매커 감독은 린에게 수비와 조직력을 함께 가르쳤다. 하버드를 비롯해 아이비리그 학교들은 개인기가 아무래도 부족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조직력에 의존한 농구를 구사한다. 린은 애매커 감독으로부터 조직력을 강화하면서도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여기에 더욱 중요한 능력인, 동료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 빛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다. 바로 애매커 감독이 듀크 선수 시절 그랬듯이 말이다. 

5. '제레미 린 효과'로 인해 NCAA농구에서 하버드, 나아가서는 아이비리그의 위치는 완전히 달라졌다. 린의 졸업 후 지난 09-10시즌 하버드는 프린스턴과 함께 아이리비그 공동 우승을 차지했고 NCAA 토너먼트에 진출한 프린스턴은 전미 최강팀 중 하나였던 켄터키를 1회전에서 만나 접전 끝에 막판 켄터키 브랜던 나이트의 결승 레이업 슛으로 2점차 석패를 당했다. 켄터키는 끝내 4강까지 진출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한편 올 10-11시즌 하버드는 코네티컷과 플로리다 주립 등 강호들이 참가한 배틀포 애틀랜티스 토너먼트에서 준결승에서 플로리다 주립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고 현재 전미 랭킹 25순위 내에 진입해 있다. 

6. 린은 대학 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습이다. 그의 겸손함은 다른 프로선수들 뿐 아니라 자라나는 유망주들에게는 타의 모범이 되고 있다. 부디 제레미 린의 선전이 계속되길 기원해 본다. 

10
Comments
2012-02-19 22:47:24

저보다 어리지만 존경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친구네요

2012-02-19 22:56:22

읽으면서 왜 이렇게 울컥하는지


진정한 스타네요 제레미 린
2012-02-19 23:01:31

네이버 블로그의 라본테님이시군요.

9덕분에 간간히 NCAA관련 소식들 확인하고 있습니다.
(헌데 듀크대 MBA 과정을 마치신 분이 짧은 영어라뇨.)

마지막 문단이 참 감동적이네요. "내 꿈은 이미 이루어졌다."
인종과 나라에 관계없이 역시 아버지의 헌신과 사랑은 위대한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좋은 잘 읽었습니다.


2012-02-19 23:05:42

마지막에서 울컥했네요. 부성이 애틋하네요. 제레미 린이 얼마나 힘든 길을 걸으며 농구를 해왔을지 알 수 있네요.. 정말 화이팅이에요..

2012-02-19 23:05:50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2-02-20 02:05:13
할말이 없내요역시 제레미 린
 
2012-02-20 12:46:23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린이 4학년쯤 되서 대학농구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게 됐었고
골스에 들어간걸 보고 "오오옷!! 동양인이 nba인가??" 좋아했었는데 왠지 쩌리되는 것 같아서
아쉬워 했다가 어느순간 기억에서 잊혀졌다가, 만화 주인공처럼 뉴욕 주전으로 나와서
활약하는것을 보면 그 힘든 무대에서 얼마나 노력했을지가 눈에 선하네요;;;
 
잠시동안에 어학연수 기간동안 만난 농구하는 백인 흑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게
어느 고등학교 선수냐;;; 였던게 기억나네요;; 26에 대학도 마치고 갔는데 말이죠;; 
어디가나 처음엔 쩌리 잘하면 정말 의외라는 시선을 정말 많이 받아봤습니다~
하물며 프로무대에서 어땟을 지는 상상도 안되네요;;
2012-02-20 13:37:43

슬램덩크만화의 산왕 정우성선수의 부친이 오버랩되는군요. 본인의 의지뿐 아니라 부친까지 바스켓볼에대한 열정이 남달랐을줄은 상상못했습니다. 

2012-02-20 20:37:42
ncaa 방송도 자주 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 좋은 방송에 힘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2-02-21 10:16:22

스포츠 기자라면 당연히 써야할 기사인데 어찌나 주옥같은지요.


역시 자식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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