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임벌린을 다시 바라보며...
(평어체 양해바랍니다.)
체임벌린 얘기가 나오면 항상 적지 않은 글들이 소세지처럼 매달리곤 한다. '정말 그렇게 뛰어난 선수였냐', '진짜 4대 센터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냐'... 항상 이런 낚시성 글들이 올라오는 경우를 포털에서 종종 본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글들은 항상 본의 아니게 떡밥성 글이 되버리는 경우가 많다.
결론부터 써보자면 난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센터 중 한 사람이라고 칭하고 싶다. 단지 그의 기록만 보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전설적인 힘만 보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NBA선수로서 남긴 업적은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것이며 절대로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체임벌린빠도 아니고 고도의 안티도 아니다. 다만 생각 이상으로 저평가 당하는 체임벌린을 보면 가끔은 답답함마저 느낀다.
가장 많은 오해라면 다음 세가지가 꼽힐 것이다.
"그 당시 농구수준이 별거 아니었다."
"그의 운동능력과 내구성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별거 아니다."
"그는 스탯만 챙긴 개인플레이어다."
그의 시대를 목격한 이가 거의 없어서인지 체임벌린에 대한 소견마다 이런 말들은 항상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것들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오해다.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 아니까 당연히 잘못된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먼저 당시 농구수준을 보자. 당시 농구 수준으로 포괄해서 말하면 너무 넓으니까 그와 맞붙었던 선수들만 간단히 언급해보자.
1. 빌 러셀(1957 ~ 1969)
경력: MVP 5회(1958, 1961 ~ 1963, 1965), 올스타 MVP 1회(1963), 파이널 우승 11회(1957, 1959 ~ 1966, 1968, 1969), 퍼스트팀 3회(1959, 1963, 1965), 세컨드팀 8회(1958, 1960 ~ 1962, 1964, 1966 ~ 1968), 디펜시브 퍼스트팀 1회(1969; 이 해 처음 신설)
발가락에도 반지 끼운다는 러셀옹이 가장 먼저 꼽힌다. 역대 최고의 센터 탑3에 꼽히는 사람이자 역사상 최고의 리더로 꼽히는 사람이다. 혹시 이 양반 체격(208cm, 102kg)보고 '호리호리하고 머리 잘 굴리는 센터'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는가? 만일 있다면 말하고 싶다. 러셀 역시 엄청난 운동능력과 파워를 자랑했던 사람이라고. 단지 체임벌린을 상대하다 보니 약해보였던 것뿐이다. 더구나 러셀은 체임벌린이 평균 50점 넣게 넣던 62시즌에 그를 35점대로 막았던 사람이다. 게다가 역대 최고의 샷 블락커로 불리기도 한다. 73년 이전까지 블락을 세지 않는 바람에 러셀의 블락 기록은 남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경기 기록관들은 러셀이 2~3번의 1번꼴로 한 경기에 두 자릿수 블락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체임벌린은 이런 러셀과 142번이나 경기를 했다.
2. 월트 벨라미(1962 ~ 1975)
경력: 신인왕(1962), 올스타 4회(1962 ~ 1965)
벨라미도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실 이 선수는 조금 낯설지도 모르겠다. 올NBA팀에 한번도 뽑힌적이 없고 두각을 제대로 드러낸 시즌이 없기 때문. 하지만 올 NBA팀이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체임벌린과 러셀과 같이 뛰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세컨드팀까지밖에 없었으니 그 두 자리는 항상 그 둘의 차지였다. 로마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이기도 하고 신인시즌에 평균 30점 19리바운드, 통산 평균 20.1점 13.7리바운드를 기록한 이 센터가 처지는 센터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벨라미는 윌트를 상대로 40점을 넣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센터였으니까.
3. 윌리스 리드(1965 ~ 1974)
경력: 신인왕(1965), 시즌 MVP(1970), 올스타 MVP(1970), 파이널 MVP(1970, 1973), 퍼스트팀 1회(1970), 세컨드팀 4회(1967 ~ 1969, 1971), 올스타 7회(1965 ~ 1971), 디펜시브 퍼스트팀 1회(1970)
뉴욕의 혼이라고 하면 킹콩 유잉을 흔히 떠올리지만 그 전에는 윌리스 리드가 뉴욕의 심장같은 존재였다. 한시즌에 MVP세트를 싹쓸이한 몇 안되는 선수이며(그 이후 조던과 오닐만이 이 대업을 해냈다.)70년 파이널에서는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고도 절뚝거리면서 코트에 나와 살인적인 투혼으로 뉴욕을 우승으로 이끈 인물이다. 뉴욕의 역사상 두 차례 우승은 모두 리드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 때가 빅 애플의 절정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임벌린은 파이널에서 리드와 세 차례 맞붙었고 전적은 1승 2패다. 괴물을 두번이나 굴복시킨 리드는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4. 네이트 써먼드(1964 ~ 1977)
경력: 올스타 7회(1965 ~ 1968, 1970, 1973, 1974), 디펜시브 퍼스트팀 2회(1969, 1971), 디펜시브 세컨드팀 3회(1972 ~ 1974)
써먼드는 역사에 남을 만한 수비형 센터다. 압둘자바를 가장 괴롭혔다는 센터가 바로 써먼드다. 또한 윌트도 러셀에 비견될 정도로 잘 막았던 인물이다. 더구나 역사상 최초로 쿼드러플더블을 기록하기도 했다.
전성기 윌트와 맞붙은 선수는 이렇게 4명이다.(카림은 윌트의 전성기가 지날 즈음에 등장했다.)저 4명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들이며 벨라미를 제외한 3명은 위대한 50인에 등록되어 있다. 그리고 윌트는 저들과 한시즌에 10여번씩 싸워야 했다. 따라서 그 당시 골밑 수준이 빈약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게다가 당시에는 3점 라인도 없어서 수비 범위도 지금보다 훨씬 좁았다. 심지어 1,2번들까지 페인트존에서 리바싸움에 가세했을 정도다.(웨스트나 빅O의 리바 개수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한마디로 골밑싸움이 엄청 치열했다는 얘기다. 이 사실까지 더해지면 60년대 골밑이 별 볼일 없었다는 얘기는 더욱 설득력이 없다.
그의 운동능력도 짚고 넘어가자. 그의 운동능력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살인 수준에 가깝다. 배면뛰기가 아닌 가위뛰기로 높이뛰기에서 2미터를 넘었고 100야드 달리기에서 10초9를 주파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필리의 레전드 빌리 커닝햄은 "그는 팀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빨랐다."라고 했을 정도. 더구나 그는 과학적인 트레이닝조차 받지 않았다. 그의 평생 주치의였던 스탠 로버가 가끔씩 몸 상태만 체크해줬을 뿐 오로지 혼자 힘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고 혼자서 운동능력 유지 운동을 해왔다. 그리고 그 말근육은 모두 전문 트레이닝없이 키워낸 것들이다. 이런 운동능력 때문에 윌트는 체격빨로 농구한다는 오해를 받아야 했고 그 때문에 스스로 운동능력을 자제하고 순수 농구 스킬로 플레이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사실 진정으로 윌트를 볼 때 그를 경외하게 만드는 것은 내구성이다. 바로 출장 시간과 게임 때문. 그가 부상으로 시즌을 날린 건 단 한 시즌(70시즌)뿐이고 그 나머지 시즌에는 시즌 당 평균 79게임을 뛰었다. 그리고 통산 평균 출장시간은 45.8분으로 압도적으로 1위이며 한 시즌 평균 출장 시간 순위에서 상위 7개는 모조리 윌트 차지다. 더구나 37세의 고령에도 평균 43.2분을 뛴건 윌트밖에 없다. 지금도 35살이 넘으면 30분 출장도 쉽지 않은데 체력 관리 프로그램도 체계화되지 않았던 당시에 그 정도로 오래 뛴건 정말 경악스럽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여러 사이트에서 윌트를
네이트 서먼드가 쿼드러플더블 맞죠? 아마 그 선수보고 채임벌린옹이 자신을 제일 잘 막은 선수라고 해줬던 거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