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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와 함께 알아보는 미국 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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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6-09 13:10:16

 안녕하재즈, 허슬재즈입재즈. 오늘은 NBA의 알쓸신잡과 더불어 그와 함께 알아볼 수 있는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소개해볼까합니다. NBA는 1946년, 전신인 BAA부터 출발한 리그이기 때문에 그 역사가 매우 길고 거쳐간 사람들 역시 매우 많은데요, 이 중에서도 당시 시대상이나 사회문화를 볼 수 있는 몇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둬도 쓸모없는 잡학을 공유합니다.

 

(평어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NBA에서 홈팀이 흰색 유니폼을 입는 이유

 

  NBA는 전통적으로 홈팀은 흰색, 원정팀은 짙은색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뛴다. 하지만 이 전통은 NBA만의 것은 아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선 20세기 초반의 MLB로 건너가야 한다. 당시 대다수의 메이저리그 팀들은 원정 경기에서 남색, 검은색 혹은 회식 유니폼을 입고 뛰었고 홈 경기에서는 흰색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그 이유는 바로 '빨래'  

 

 요즘처럼 매 경기 새로운 유니폼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 경기 후 옷을 빨아 입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세탁기가 매우 귀해 원정길에 오른 팀은 세탁기를 제공받지 못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빨지 않은 유니폼을 입어야 했고, 이때부터 각종 먼지와 얼룩을 감추기 위해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MLB에서 생긴 이 전통을 이후 생겨난 NBA에서 답습했고, 이 관례는 2017년까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켜졌다.  하지만 2017년, NBA는 나이키와 새로운 유니폼 계약을 만들며 이 관례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2. NBA 최초의 유색인종 선수가 동양인??

 

 지금은 NBA 전체 선수 중 70% 이상이 흑인이지만, 원래 농구는 백인들의 스포츠였다. NBA는 1950년까지 흑인선수 뛸 수 없었고 백인만 선수로 뛸 수 있는 리그였다. 미국 농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NCAA 상위팀들은 흑인 선수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만큼, 인종적으로 개방된지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1947년, BAA(NBA의 전신) 드래프에서 최초로 非백인 선수가 지명됐다. 하지만 그는 흑인이 아닌 일본계 미국인, 와타루 미사카라는 이민 2세대 동양인이었다.

 

 유타주에서 태어나, 유타 대학교 최고의 선수가 된 미사카는 1947년 BAA 드래프트에서 뉴욕 닉스에게 61픽으로 지명되었다. 1947년에는 재키 로빈슨이 MLB의 'Baseball Color Line(리그 내 흑인 선수 입성 금지법)'을 깨고, 최초의 흑인 메이져리거가 된 해이기도 하다. 그는 1847-1948 시즌 단 세경기만을 뛰고 팀에서 방출됐으나, 이것이 인종차별이 때문이 아니라 팀사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팀에서 뛰는 동안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3. 서커스단에게 진 NBA 최강팀 

 

 미국에는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라는 농구팀이 있다. 글로브트로터스는 일종의 쇼 형태로 공연과 같은 전시농구를 하는 팀으로 1926년 창설되어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흑인들의 농구는 서커스에 불과하고, 흑인들은 화를 조절하지 못해 농구를 할 수 없다는 당시의 인종차별 때문에 흑인 선수들은 NBA와 NCAA입성이 제한되었다. 당시 흑인들이 뛸 수 있는 농구팀은 글로브트로터스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미국 전역 최고의 흑인 농구선수들로 팀을 꾸릴 수 있었다. 

 

 이들은 1948년 한 경기를 통해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된다. 상대는 전년도 NBA 챔피언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現 LA 레이커스). 최고의 팀이지만 백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던 당시 레이커스는 '서커스단'에게 61 대 59로 패배하였고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1950년, NBA는 흑인 선수들의 재능을 인정하고 드래프트에서 흑인 선수를 지명하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다인종 리그가 되기 시작한다. 글로브트로터스의 선수 중 몇명은 NBA 팀과 외주(?)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4. 한번도 사용된 적 없는 등번호 '69'

 

 축구처럼 포지션에 따라 등번호가 정해져 있지 않은 NBA에서는, 등번호가 선수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마이클 조던의 23번, 코비 브라이언트의 8번, 24번 등 선수의 이름만 대도 떠오르는 번호가 있을 정도. NBA에서는 0번 부터 00번(100) 사이의 숫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많은 선수들은 등번호를 은퇴까지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중에서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백넘버가 있는데 그 번호는 바로

 

'69번'

 

 69는 미국에서 매우 야한 숫자로 통한다. 이 숫자는 69라는 숫자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두 파트너가 동시에 서로에게 구강 성행위를 하도록 몸을 배열하는 것을 일컫는 속어로 쓰이고 있다. NBA 선수들은 암묵적으로 이 번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NBA의 탕아 데니스 로드맨이 이걸 두고 볼리 없지. 그는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하면서 69번 사용을 신청했지만 NBA 총재로부터 거절당한다. 그래서 그는 69번에 1을 더해 70번으로 댈러스 매버릭스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5. 최고의 유망주, 드래프트 직후 세상을 떠나다

 

 매릴랜드 대학의 랜 바이아스는 NBA 명문 구단 보스턴 셀틱스에게 1986년 전체 2순위로 지명된다. 대학교 4학년 엄청난 운동능력과 득점능력을 바탕으로 팀을 이끈 바이아스는 무려 마이클 조던에 비교될 정도의 유망주였다. 향후 수년간 보장된 천문학적인 연봉, 리복과 맺은 160만 달라의 스폰서쉽까지 그에게 보장된 미래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드래프트 발표 이틀 후 그는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코카인 과용으로 인해 사망했다.

 

 코카인은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미국은 자유로운 문화를 표방하는 디스코 클럽을 필두로 전파되었고, 당시 주류였던 락밴드 사이에서도 큰 유행을 일으켰다. 90년대에 들어 코카인 사용자 수는 급증했지만, 실제 대중적인 전파는 80년대 초반 극에 달했으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NBA는 90년대 초부터 강력한 마약 규제 정책을 실행했고, 코카인뿐만 아니라 대마초까지도 금지 약물로 규정하기 시작한다.

6. 이제 NBA에서 대마초는 합법?


 NBA 선수들은 항상 불시 약물 검사를 진행한다. 물론 이 검사는 주로 신체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약물을 추적하기 위함이지만, 동시에 마약류에 대한 검사도 함께 진행된다. 천문학적인 몸값의 선수들이 마약 오 과용으로 인해 사망하는 전례가 있었던 NBA는 약물 사용에 대해 매우 엄격한 규칙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 미국에서 본격적인 대마초 합법화가 진행되었다. 미국 전체에서도 주에 따라 합법 여부가 다르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의료목적인 경우 대마초를 허용하고 있으며 워싱턴 DC를 포함한 15개 행정권역에서는 완전 합법화되어 있다. 이 흐름에 맞춰 NBA 또한 대마초를 약물 검사 항목에서 배제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정부 정책에 맞추면 된다는 배용으로 자체 규제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7. NBA에 뛸 뻔한 북한 선수, 연봉은 밀가루??

 

 키 235cm의 초장신 센터 리명훈은 NBA에서 뛸 뻔한 적이 있다. 엄청난 키로 국제대회에서 활약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리명훈은 1996년에 이미 여러 NBA 팀들과 접촉이 있었다. 엄청난 키, 북한 출신이라는 상품성까지, 당시 NBA에서 찾고 있던 이슈 메이커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1917년 제정한 적성국 교역법에 따라 계약을 거절했다. 그리고 1998년부터 조성된 한반도 해빙무드의 물살을 타고 NBA 진출을 타계했다. 

 

 2000년, 미북관계가 급진전되면서 70년대 초반 미국과 중국이 탁구를 통한 '핑퐁외교'로 화해무드를 조성했듯 상징적인 의미에서 리명훈의 NBA진출을 허용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리명훈의 연봉이 북한으로 갈 수 없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이에 대응해 북한 또한 리명훈을 놔주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NBA 진출이 좌절됐다. 당시 북한의 국방위원장이었던 김정일은 리명훈의 연봉으로 밀(밀가루)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커밍아웃

 

 불과 1년전인 2018년까지 NBA(미국농구리그), NFL(미식축구리그), MLB(미식축구리그),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 MLS(미국축구리그), EPL, 남자 프로골프, 남자 프로테니스 전체에서 단 한명의 게이 선수가 나온 적이 없었다. 진짜 게이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커밍아웃하지 않은 것일까? 2013년 4월 29일, 13년차 NBA 센터 제이슨 콜린스가 이 풍토를 깨버렸다. 그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했다. 메이저 스포츠 리그에서 뛰고 있는, 그것도 현역 선수가 커밍아웃을 한 건 처음이었다.

 

 같이 샤워를 하고, 몸을 부대끼며 운동을 해야 하는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게이에 대한 꺼리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미국 스포츠리그는 그 어떤 곳보다 마초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본인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꺼려질 수 있다. 하지만 제이슨 콜린스의 커밍아웃은 프로스포츠 리그의 게이 선수들에게 큰 용기를 줬다. 그의 발표 바로 한달 뒤 MLS의 로비 로저스가 , 1년도 안돼서 NFL의 마이클 샘까지 커밍아웃 했다. 2014년 제이슨 콜린스는 은퇴했지만,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었고 지금은 동성애 인권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좀 더 쓸데 없는 잡학 2탄으로 찾아오겠습재즈.

Go JAZZ~! Hustle JA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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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9-22 21:19:12

재밌게 잘봤습니다

2019-09-23 12:43:32

 땀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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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9-23 16:22:01

그런데 흑인들이 뛸 수 있는 팀이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20년대에 창단된, 오로지 흑인 선수들로만 구성된 뉴욕 르네상스(줄여서 뉴욕 렌즈(Rens))란 팀이 존재했죠.

 

렌즈는 흑인들을 차별하는 당시 분위기 때문에 ABL, NBL 등 여타 프로 리그에는 가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친선 경기, 토너먼트 등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2, 30년대 최강팀으로 군림했죠. 신체 조건이 월등한 흑인들로만 구성된 팀이었으니 뭐...

 

당시 이들을 대적할만한 팀은 ABL의 "오리지널 셀틱스" 정도였습니다. 렌즈는 1년 내내 바쁜 스케줄로 여러 리그의 팀들과 대결을 했는데, 32-33시즌에 128전 120승 8패를 기록할 때 이들에게 6패를 안긴 팀이 바로 셀틱스였죠. (렌즈는 그해 셀틱스를 8번 꺾었구요.) 1939년에는 월드 프로 농구 토너먼트에서는 NBL의 강호 오쉬코쉬 올스타스를 꺾고 월드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구요. (해마다 많은 경기를 치렀던 건, 경기 입장료를 통해 구단을 겨우 운영하던 생계형 팀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렌즈는 1923년에 창단되어 1949년에 해체될 때 까지 2588승 539패라는 기념비적인 성적을 남겼죠. 프로 농구가 제대로 자리잡기 전에 어느 리그에도 제대로 소속되지 못한 채 전국을 떠돌며 1년에 100경기 넘게 치르면서 80%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비록 프로 리그 공식 역사에는 제대로 남아있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20세기 초반의 최강 팀이었던, 그야말로 실사판 공포의 외인구단이었습니다. 1950년 들어 NBA가 흑인들의 리그 입성을 허용하면서 리그에 등장한 여러 흑인 선수들이 대개 다 이 렌즈 출신들이었죠.

존재만으로도 전설이었던 이 렌즈 팀은 팀 자체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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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9-23 16:34:09

렌 바이어스의 경우 참 안타까운 게, 원래가 마약을 일삼던 그런 불성실한 선수가 아니라 반듯한 청년이었는데 그가 드래프트 2픽에 뽑힌 날 밤에 축하 파티를 하면서 친구들이 그에게 신고식 한다고 건넨 코카인 때문에 탈이 난 거였죠. 어버버한 상태에서 아마도 당시 코카인이란 걸 처음으로 흡입한 바이어스는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 덕에 과량의 코카인을 한 번에 흡입하고 말았고, 이게 심장에 무리를 주면서 급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바이어스의 죽음은 그야말로 셀틱스에겐 크나큰 비극이었죠. 래리 버드 ERA 이후, 팀을 이끌 수 있는 젊은 스윙맨 유망주였는데... 셀틱스는 마치 운명의 잔혹한 장난처럼 바이어스의 사후 또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스윙맨 스타 레지 루이스 마저 심장마비로 잃고 말았습니다. 한 팀이 불과 7년 사이에 팀의 미래를 10년을 책임질 젊은 올스타급 드래프티 유망주를 둘 씩이나 불운하게 잃은, 그야말로 정말 기구한 사건이었죠.

 

바이어스의 죽음은 리그에서 당시 만연하던 마약 문제에 대해 데이빗 스턴 등 리그 경영진이 단호하게 대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로 리그에서는 마약으로 지속적인 문제를 일으키면 퇴출 등 강경한 징계를 내렸죠. 독버섯처럼 80년대 NBA를 물들이던 마약 문제를 그나마 리그가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이어스의 충격적인 죽음 이후, 정말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경각심이 리그 전반에 급속도로 퍼지면서였습니다.

 

루이스의 경우 선천적으로 심장에 이상이 있었는데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갑자기 쓰러지며 문제가 본격화되었죠. 보스턴 구단에서는 그의 심장병을 고치기 위해 미국 최고의 심장 전문의 십수명을 투입해가며 무진 애를 썼으나, 정작 최고 전문가들을 한 자리에 모으다보니 루이스의 증세를 두고 의견이 엇갈려 치료에 별 효과를 못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루이스는 최고 의료진의 케어를 받고있는 상황에서 연습 경기 도중 다시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WR
2019-09-23 17:46:55

렌 바이어스 사망으로 당시 같이 있던 팀원 세명이 실제 감옥에 보내졌다고 해서, 굳이? 라는 생각은 했는데 그런 스토리가 있었군요. 역시 허슬플레이어님의 첨언이 붙으니 자료가 알차지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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