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The Unfortunate Tale of T-Mac
이 글은 티맥 은퇴 후인 2013년 8월에 작성된 빌 시몬스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티맥 관련 글 중에 가장 인상깊게 읽어서 번역을 해봤습니다.
주의하실 점은... 글이 엄청나게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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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종료 후 여름이 지나면서, 내가 목격했던 2013 파이널의 모든 것들은 파란만장하고 다방면에 걸친 기억들로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 1차전에서 샷클락 23.999997초에 쏘아올린 슛으로 1차전을 잡아낸 토니파커, 5차전 종료 후 도로정체를 일으켜가며 샌안토니오 다운타운을 꽉 채운 채 경적 소리를 울려대던 스퍼스 팬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벼랑 끝 마이애미를 6차전에서 구해내기 바로 전에 벗겨진 르브론의 헤어밴드, 내가 여태까지 개인적으로 본 중 가장 위대한 슛을 성공시키며 샌안토니오의 챔피언 반지를 뺏어간 레이 알렌, 7차전 종료 직전 무릎에 손을 갖다댄 채 허리를 굽히며 이전에 아마 백만번도 넘게 성공시켰던 마지막 동점슛을 실패한 것에 괴로워하던 팀던컨.
그 파이널 기억의 늪 어딘가에, 한때 당대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동급으로 평가받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존재하고 있었다. 필요이상으로 뛰어난 샌안토니오의 벤치 워머로써.. 팀에서 그의 롤은 그의 능력에 비해 너무 하찮아서 아무도 그의 롤을 어떻게 극대화시켜야 하는지조차 알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아카데미 상 5회 수상자인 진 해크만이 영화 링컨(12년 개봉)에서 엔딩 크레딧에도 안올라가는 경찰 역할로 출연한 것과 같았다.
파이널 시리즈에서 티맥은 아무런 임팩트가 없었다 : 딱 한순간, 4차전 시작 75분전을 제외하고. 당시 나는 팀던컨의 웜업을 기다리며 코트에 서있었다.
던컨은 딱 자신의 계획한 수만큼의 슛을 연습한다. 아무런 농담도, 평범한 대화도, 웃음도 없다. 마치 원로 아티스트가 본인 기술을 연마하듯이, 그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4차전 시작 75분전, 던컨은 아직 라커룸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고, 나의 눈은 티맥을 향했다 – 던컨과 같은 미래 명예의 전당 헌액 예정자지만 스퍼스에 합류하기 전까진 플옵 1라운를 통과해본 경험이 없던 그 남자.
나는 메이크업을 하고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그곳에 서있었다. 티맥은 연습복 차림으로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띄운 채 건성으로 3점슛을 쏘아대고 있었다. 나는 스퍼스가 가비지 게임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지 않는 이상 티맥이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거 라는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연습 시 계속 날려대던 3점슛과 그의 미소, 그 순간은 아무 의미도 없었고 동시에 모든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티맥의 은퇴 발표는 놀라울 것이 없었다. 좋은팀이지만 위대한 팀은 아니었던 ‘07-’08 로켓츠의 더맨으로써 22연승을 달리며 모두를 놀라게 한 이후로 그는 팬들에게 더 이상 즐거움을 줄수 없었다. 만약 당신이 그 22연승을 티맥의 마지막 저항이라고 기억한다 해도 무방하다. 지난 5년간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티맥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 뉴욕, 디트, 애틀란타, 그리고 중국, 결국엔 샌안토니오까지. 그의 커리어 중 마지막 1/3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할리우드에서는 스타배우들이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계속 영화에 출연하는걸 볼수가 있다. 새로운 캐릭터를 창출해 내거나 TV쇼에 출연하거나 아주 후진 영화에 출연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 일들이 스포츠에서, 특히 팀당 8명~9명의 선수만이 사실상 영향력을 발휘하는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벌어질 때는 영화보다 훨씬 기분이 좋지 않다.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룹에 더 이상 끼지 못하는 왕년의 스타들은 존재감 없이 벤치에서 치어리딩을 하거나 가비지 타임에나 출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그곳에 있다. 우리는 작전타임 중이나 연습시에 그들을 목격할수 있다. 대부분 그들은 30대일 것이고, 그들의 얼굴은 전성기 시절과 큰 변화가 없다.
이러한 일들이 주완 하워드나 리차드 제퍼슨 급의 선수들에게 일어난다면 사실 우리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티맥급의 선수라면? 그때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때는 우리가 보고 있는 그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그들도 봤으면 한다. 그리고 “이제 사실상 다 끝났어. 제발 마지막까지 품격을 보여주며 떠나줘”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차라리 은퇴를 한다면 팬으로써 어떠한 안도감마저 든다. 이제 그들의 전성기 아름다웠던 모습들만을 유투브나 NBA TV의 Hardwood Classics등에서 추억할수 있으니까.
우리는 티맥급의 선수를 08-09시즌에 폼이 떨어진 모습으로 나타나서 구단을 애태우다가 트레이드 데드라인 전에 마이크로 프랙쳐 수술을 받으며 구단 뒤통수를 치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티맥급의 선수를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진 선수와 감독과의 싸움에서 참여했던 선수, 애틀란타에서 마빈 윌리엄스의 백업 롤을 맡던 선수, 혹은 고작 몇백만불을 받으며 중국을 유랑하던 선수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건 그가 기록한 22연승과 평득 32.1점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건 그의 7연속 올스타 선정과 워싱턴 전에서의 62득점, ‘01년 플옵 1차전 Game3 에서 밀워키를 상대로 트래쉬 토크를 날려대며 42점 10어시 8리바를 기록하던 (그의 슈퍼스타 오디션 테이프) 모습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건 ’03 피스톤스를 플옵에서 독고다이로 벼랑 끝까지 내몰았던 모습, 2005년에 노비츠키와 도합 103점을 기록하던 모습, 혹은 휴스턴에서 열린 2006년 올스타전에서 27분동안 36점을 폭발시키던 모습이다. 우리는 “티맥의 Top10 인유어 페이스 덩크 모음”, “숀 브래들리에게 덩크를 꽂는 티맥”, 혹은 그의 인터넷 마스터 피스 “티맥타임” 류의 제목의 비디오에서 그를 기억하고 싶다는 말이다.
우리는 코비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던 2001년부터 2008년까지의 티맥의 생산력을 기억하고 싶다. 자 한번 보자.
- Player A (정규시즌) : 26.3 ppg, 6.4 rpg, 5.5 apg, 44-34-75%, 21.8 FGA, 7.4 FTA, 24.2 PER, 32.7 usage
- Player B (정규시즌) : 29.0 ppg, 5.9 rpg, 5.3 apg, 45-34-84%, 21.9 FGA, 9.0 FTA, 25.0 PER, 32.6 usage
당신은 아마 Player B가 코비라고 유추할 것이다 (정답). 하지만 2001년~2008년 티맥의 플옵 평균기록 (35게임)과 같은 기간 코비의 플옵 평균 기록 (102게임) 스탯을 비교해보면 유추가 좀 더 어렵게 된다.
- Player A : 28.4 ppg, 5.7 rpg, 5.3 apg, 43.4 mpg, 45-33-81%, 22.6 FGA, 8.3 FTA, 22.5 PER, 31.1 usage
- Player B : 29.5 ppg, 6.9 rpg, 6.5 apg, 42.6 mpg, 43-30-75%, 24.5 FGA, 9.1 FTA, 25.4 PER, 35.3 usage
당신은 아마 Player B가 코비라고 유추할 것이겠지만 틀렸다. Player B는 티맥이다. 저 플옵 35게임은 티맥의 유산이 되었다. 뭐 그래봤자 슈퍼스타 급의 스탯이겠지 울트라 슈퍼스타 급은 아니야 왜냐면 (흠흠) 울트라 슈퍼스타는 적어도 플옵 2라운드까지는 진출해봐야 할거 아니야!
우리는 선수들을 판단할떄 플옵 성적을 다른 어떤 것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건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근데 티맥의 경우, 그것은 전혀 공평하지 않다.
코비에게는 샤크와 필 잭슨이 있었고 나중엔 가솔과 오돔이 있었다, 다수의 오리, 피셔, 글렌 라이스 급 선수들도 함께 했다.
티맥의 베스트 팀메이트로는.. 야오밍, 그랜트 힐 (티맥과 함께 4년동안 46경기 출장), 마이크 밀러, 전성기가 지난 무톰보, 전성기가 완전히 지난 패트릭 유잉과 그냥 퇴물이 다된 숀 켐프가 있었다.
코비가 LA에서 샤크를 밀어내고, 기적처럼 파우 가솔이 합류하기 전에, 콰미 브라운이나 스무쉬 파커와 뛸 때 우리가 코비에게 잠시 가졌던 연민을 기억하는가? 자 이제 앞 서말한 티맥의 최전성기 기간 (‘01~’08)동안 그와 함께 플옵에서 뛰었던 모든 팀원들 리스트를 살펴보자.
대럴 암스트롱 (3년), 보 아웃로, Andrew DeClercq (2년), 마이크 밀러 (2년), 팻 개리티 (2년), 호레이스 그랜트 (당시 36세), 몬티 윌리암스, 잭 본, 고든 기리책, 드루 구든, 야오밍 (2년), 데이비드 웨슬리, 밥 수라, 라이언 보웬, Scott Padgett, 세인 배티에 (2년), 래퍼 알스톤 (2년), 척 헤이즈, 루이스 스콜라, 디켐베 무톰보 (당시 40~52세 사이로 추정), 그리고 바비 잭슨.
티맥의 팀원 수준이 심각한건 알고 있었겠지만, 이정도로 처참할 줄은 몰랐을거다. 근대 (Modern) 슈퍼스타 중에 티맥보다 팀원 복이 없던 선수는 없었다. 그는 1993년~ 2007년대 리그의 유망한 슈퍼스타들이 상대적으로 성공하기 불리했던 기이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리그의 과팽창으로 선수층이 얇아졌고, 많은 어린 스타들 (티맥, 르브론, 가넷, 피어스, 아이버슨, 그랜트힐 등)은 실력이 떨어지는 조력자들을 끌고 나가기를 요구당했다. 고등학생이던 티맥과 코비가 바로 프로로 직행하던 시기였고, 각기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선수들 계약은 통제불능 상태였다 : 90년대 로터리픽 선수들은 단숨에 백만장자가 되거나 (돈에 안주할 가능성 발생), 3년 루키계약 후에 방출되거나 (갑자기 생긴 부와 힘을 감당할수 없는 상황 발생)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였는지 엄청나게 많은 무능한 GM들과 오너들이 근시안 적인 잘못된 결정을 남발해대던 시기였다.
그냥 그 시기를 NBA의 WTF (What the Fuck) Era라고 지칭해버리자. 그리고 티맥은 그 시기를 상징하던 선수였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고졸직행으로 토론토에 입성해서 루키 시즌을 가비지 멤버로 보냈고, 2년차에 리그 파업과 함께 50경기만을 뛰며 시즌을 낭비했지만 3년차에 기대치 이상으로 터지면서 사촌형 빈스 카터의 러닝메이트가 되었다.
나는 티맥과 카터를 개인적으로 만났던 ‘99-’00 시즌을 기억한다. 그리고는 뒤늦게 ‘97년 드래프트에서 릭 피티노가 티맥보다 3순위 앞서서 론 머서를 택한걸 떠올리며 분개했고, 그때부터 나에게 ‘97년 드래프트는 셀틱스 드래프트 최대 흑역사 중 하나가 되었다.
티맥 대신에 론 머써?? 만약 가넷, 코비, 티맥이 고졸 신인들의 포텐셜을 과소평가하면 안된다고 미리 가르쳐 줬을면 어땠을까? ‘97년당시에는 우리가 절대 알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티맥 대신에 론 머써???????
*주 : 본문의 저자는 셀틱스의 광팬입니다. 론 머써는 ’97드래프트 당시 6순위로 셀틱스에 지명됐습니다.
3년차 시즌이 끝난 그해 여름, 티맥의 이름은 갑자기 당시 FA였던 던컨과 그랜트힐과 동일 선상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제 막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수 있는 나이가 된 떠오르는 올스타의 가치는 어느정도일까?
토론토의 장미빛 구상과는 달리 티맥은 올랜도에서 자신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해 여름에 2013년의 계약 룰이 존재했다면 티맥은 토론토에서 2년 더 머무를수 밖에 없었을거고… 아마 2001년이나 2002년에 파이널에 진출 했을거다.
우리는 그를 피펜이 할수 있던 모든 것을 더해서 득점력까지 겸비한 미친 운동능력의 최종 진화형 피펜으로 기억했을거고, 지금 웨스트브룩과 듀란트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티맥과 카터에 대해 논의하며, 샼&코비 VS 티맥&카터에 대해 열심히 다투고 있었을거다..
하지만 티맥은 사촌 형의 그늘을 벗어나 온전한 본인의 팀을 원했다, 또한 그는 고향에서 가까운곳에서 뛰길 원했다. 그는 제2의 피펜이 되고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고 그것이 당시 21살짜리 선수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가 토론토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티맥-카터 사이의 불화설이 확산되었는데, 아마 지금의 SNS/트위터 시대였다면 10배 이상 부풀려지고 토론하기 즐거웠던 주제였을거다. (둘은 화해함)
많은 시간이 흐른후에 티맥은 당시 토론토에 남아있었어야 했다고 회고했지만 만약 그랜트힐이 건강했다면, 혹은 올랜도가 힐을 받아오기 위한 사인 앤 트레이드에 벤월라스를 포함시키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올랜도는 백퍼 최소한 한번의 파이널을 경험했을 것이다.
코비/가넷/티맥/앤써 시대를 요약해주는 키워드 : 에고 + 멍정한 경영진 + 불행…
4년 후, 올랜도는 티맥과 루키 드와이트 하워드로 팀을 구성할 기회가 있었지만, 대신에 올랜도는 티맥을 휴스턴에 버리면서 스티브 프랜시스, 커티노 모블리, 케빈 케이토를 받아왔다. (오해하지마, 이 당시에도 이미 우린 이 트레이드가 끔찍하단걸 알고 있었어)
티맥은 자신의 나머지 전성기를 야오밍 - 원더풀한 팀메이트이자 어마어마한 연습 벌레이며 아마도 그 시기 가장 과대 평가된 굿 플레이어 - 과 함께했지만, 내 생각에는 하워드가 티맥에게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
불쌍한 맥그레이디는 (비상할수 있는) 한번의 기회가 없었다, 단 한번도. 그리고 그의 허리가 그의 몸을 배신하는 순간, 그대로 그의 커리어는 끝났다.
가넷은 ’04년 시엠 수상과 보스턴에 일어난 모든 것들을 경험했고, 아이버슨에게는 ’01년 파이널 전설이 있다. 웨버에게는 판타스틱했던 새크라멘토 팀이 있다.
레이 알렌은 ’01년 밀워키 벅스와 보스턴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의 The Shot이 있다.
코비와 던컨은 도합 9개의 반지와 12번의 파이널 진출경험이 있고, 노비츠키는 ‘07년 시엠과 ‘11년의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내쉬는 7 Seconds or Less로 리그에 신바람을 일으키며 두개의 시엠을 수상했고, 제이슨 키드는 2연속 파이널 진출 경험, 폴 피어스는 ‘02년도 플레이오프의 활약과 ‘08년 파엠 타이틀이 있다.
심지어 빈스카터 조차도 잊혀지지 않을 아이버슨과의 플레이오프 혈전이 있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그는 한번도 플옵 2라운드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비 브라이언트는 불과 2주전 지미 키멜 토크쇼에 출연하여 5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본인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상대로 티맥을 지목했다.
르브론도 아니고 웨이드도, 피어스, 듀란트도 아닌 티맥을 말이다. 코비의 티맥 언급은 르브론을 돌려까기 위함일까? 코비의 발언은 진심일까? 티맥의 은회 직후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코비에게 문자를 보내서 물어봤다. “진짜야? 진짜 티맥이 너가 상대한 상대 중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야?”
코비의 답변 : “No question.”
세차장에 가면 가격 별로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차 패키지가 있다. 나는 이러한 analogy를 NBA 선수들에게 도입해 본 적이 있지만 결국 가장 좋은 딜은 대부분 언제나 “everything” 패키지였다. 이름 자체로 설명이 되는 이 패키지는 말 그대로 모든 세차관련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신은 오직 한명의 선수에게만 “everything” 패키지를 주셨다. 그게 우리가 지난 7년동안 르브론을 그 한명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상대평가를 한 이유이다. “everything” 패키지를 받은 선수가 실패하는 것을 우리는 용납하지 않는다.
음 그렇다면 “everything” 패키지보다 한단계 가격이 낮은 패키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너로 인해 “젠장, 이 패키지를 구입할 바엔 3달러만 더 주고 ‘everything’ 패키지를 구입하는게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만한.
그 정도의 탤런트가 티맥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패키지다. 토론토에서의 티맥은 피펜의 길을 따라갈 것 처럼 보였다. 극강의 운동능력과 준수한 볼핸들링을 갖춘 채 4개의 포지션을 수행하며 누구든 막을수 있고, 공격의 일부를 담당하면서 주위 팀원들을 살리는 멋진 선수. 보통 이런 선수는 팀에 승리를 가져온다. 그리고 만약 이런 선수가 당신 팀의 2옵션이라면 당신은 그와 함께 우승할수 있다.
하지만 그는 올랜도로 가버렸고… 하느님 맙소사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 21살 티맥 스탯 : 26.8 PPG, 7.5 RPG, 4.6 APG, 40.1 MPG, 46-36-73%, 3.0 stocks,4 24.9 PER, 12.2 WS
- 22살 티맥 스탯 : 25.6 PPG, 7.9 RPG, 5.3 APG, 38.3 MPG, 45-36-75%, 2.6 stocks, 25.1 PER, 11.5 WS
- 23살 티맥 스탯 : 32.1 PPG, 6.5 RPG, 5.5 APG, 39.4 MPG, 46-39-79%, 2.5 stocks, 30.3 PER, 16.1 WS
저 ’02-’03 시즌의 스탯은 근대(Modern) 퍼리미터 선수가 뿜어낸 역대 최고의 스탯 중 하나다. 만약ABA/NBA가 합병한 1976년 이후 전설들의 최고의 시즌을 한 개씩만 뽑아 본다면 아래와 같다.
- ’89 MJ: 32.5 ppg, 8.0 rpg, 8.0 apg, 40.2 mpg, 54-28-85%, 4.8 stocks, 31.1 PER, 19.8 WS5
- ’09 LBJ: 28.4 ppg, 7.6 rpg, 7.2 apg, 37.7 mpg, 49-34-78%, 2.8 stocks, 31.7 PER, 20.3 WS
- ’09 Wade: 30.2 ppg, 5.0 rpg, 7.5 apg, 38.6 mpg, 49-32-77%, 3.5 stocks, 30.4 PER, 14.7 WS
- ’03 T-Mac: 32.1 ppg, 6.5 rpg, 5.5 apg, 39.4 mpg, 46-39-79%, 2.5 stocks, 30.3 PER, 16.1 WS
- ’06 Kobe: 35.4 ppg, 5.3 rpg, 4.5 apg, 41.0 mpg, 45-35-85%, 2.2 stocks, 28.0 PER, 15.3 WS
- ’87 Bird: 28.1 ppg, 9.2 rpg, 7.6 apg, 40.6 mpg, 53-40-91%, 2.7 stocks, 26.4 PER, 15.2 WS
- ’87 Magic: 23.9 ppg, 6.3 rpg, 12.2 apg, 36.3 mpg, 52-21-85%, 2.2 stocks, 27.0 PER, 15.9 WS
위 리스트 선수들이 가진 반지의 총합은? 24개. 그렇다면 저정도로 뛰어난 선수가 어찌해서 팀을 한번도 2라운드로 이끌지 못했을까? 간단히 맥그레이디의 팀원들 탓인가? 조금더 디테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티맥과 3년반을 함께한 로켓츠 GM 데릴 모리에게 물어보았다.
모리는 티맥의 ‘07시즌을 언급하며 당시 티맥이 시엠을 탈거라 믿었다고 한다 -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의견은 아니었던게 당시 나는 그를 MVP 4순위에 올렸다.
- 티맥은 야오가 무릎부상으로 34게임을 결장한 평범한 로케츠를 이끌고 52승을 기록했는데, 당시 팀에서 3번째로 많이 득점하는 선수는 래퍼 알스톤이었다. 루써헤드가 평균 27.6분을 뛰었고, 전성기가 다지난 주완 하워드가 26.5분을 뛰고 있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리는 티맥과 팀원들간의 탤런트 차이를 느낄수 있었는데, 티맥의 best game이 팀원들 best game을 모두 합친거보다 조금 더 낫다고 느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티맥은 타고난 리더가 아니었다. 모리는 티맥의 성격이 그의 탤런트와 매치되지 않는다고 느꼈고 그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티맥의 휴스턴에서의 첫 3시즌동안 팀의 리더십을 부여하는 임무는 감독인 제프 밴건디의 몫이었고, 모리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팀에 색깔과 터프함을 부여하는 임무를 온전히 양복쟁이에게 맡기는건 큰 효과를 볼수가 없다. (시카고에서도 노아나 버틀러가 관여하지 않았다면 티보두 감독의 색깔이 묻어나올수 없었을거라 본다.)
’07-’08 시즌 전, 모리는 밴건디를 해고하고 릭 아델만을 감독으로 앉히면서 티맥이 이전보다 큰 리더십을 발휘해줄것을 기대했다. 아델만은 보다 느긋한 성향으로 선수들에게 위임하는 스타일이었기에 모리와 아델만은 티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떤일이 벌어졌을까? 티맥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난 그런 타입의 사람이 아니야” 라면서.
“그렇다면 로켓츠의 22연승 당시의 선수들이 기대던 리더는 누구였어?” 라고 내가 물었다.
“아마 척 헤이즈였을꺼야” 라고 모리가 답했다..
척 헤이즈??? 이제야 뭔가 좀 알 것같다. 티맥과 동시대의 슈퍼스타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성향과 목소리가 있었다 : 코비, 가넷, 던컨, 아이버슨, 샼, 키드.. 모든 알파독들은 팀을 위해 끊임없이 본인의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성향없이 플옵에서 성공을 거둘수 있을까?
나는 제프 밴건디 - 티맥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 중의 한명이자 비공식 티맥 팬클럽 “티맥은 완전 짱이었어“의 공동 회장 - 에게 전화를 걸었다. 밴건디는 뉴욕에서 팻라일리를 보좌하고 ‘99년 닉스를 파이널에 올리면서 리더십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당신은 당시 패트릭 유잉이 리더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닉스 리더는 허리부상으로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끝없는 경쟁심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던 래리 존슨이었다. 물론 유잉도 어깨에 엄청난 짐을 지고 팀을 이끌었지만. 커트 토마스, 찰리 워드, 크리스 차일드는 팀에서 Nasty함을 담당했고, 그리고 새로 합류한 스프레웰은 로스터에 충분한 건방짐을 더해줬다.
밴건디는 이들을 코칭하는걸 사랑했다. 그들은 밴건디와 팀메이트를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와 밴건디는 이 대화를 하는 와중에 ‘99년 닉스팀이 티맥에게 퍼펙트한 팀이었을거라는걸 깨달았다. 알렌휴스턴 대신 티맥이었다면 그의 전성기는 완전히 달랐을거다. 밴건디는 “팀의 최고선수가 다른 선수들의 부족함을 채워주거나, 최고선수의 부족함을 다른 선수들이 채워줘야해” 라고 했다. ‘99년 닉스와 티맥의 조합은 두가지를 모두 충족시킬수 있었을거다..
“최고의 선수가 팀의 분위기를 형성해야해,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 밴건디가 말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감독이 해야해. 하지만 선수가 하는게 감독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지. 티맥은 리더였던적이 없어. 하지만 그는 미친 재능을 가진 농구선수였지. 만약 그를 직접 코치해보거나 그의 상대팀을 코치해보면, 밖에서 그를 볼때와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돼. 티맥은 그의 팀원들을 살리는 플레이를 해 – 그는 아주 아주 뛰어난 패서지. 그는 Great한 슈터는 아니었지만 Great한 득점원이었고 수비, 패스, 리바운드가 가능했고 똑똑한 선수였지. 그는 모든걸 다 할수 있었어. 오죽하면 코비도 그를 칭찬하잖아.”
밴건디 감독은 팬들이 선수를 평가할 때 플옵에서의 활약에 너무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힌다. 케빈 가넷을 예시로 들면 그는 32승을 한 ‘07년에도, 82승(플옵경기 포함)을 한 ‘08년에도 똑같은 케빈 가넷이었다. 밴건디는 성공과 실패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범위보다 훨씬 얇고, 훨씬 랜덤하다고 말한다. 그의 완벽한 예시 : 당연히 ‘13년 파이널 Game6.
‘07년 플옵에서 밴건디의 로케츠는 초반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어린 유타 재즈팀에게 안방에서 Game7을 내줬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사람들은 29점, 13어시스트를 기록한 티맥을 탓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 경기를 잡아냈다면 휴스턴은 8번시드 워리어스와 2라운드 경기를 했을거고, 높은 확률로 컨파에서 샌안토니오와 경기할수 있었을지 모른다. 만약 로케츠가 컨파까지 올라가서 샌안에게 6경기만에 패배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랫다면 당신은 티맥의 커리어에 대해 지금과 다르게 느끼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코치하기 쉬운 선수.” 밴건디가 티맥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x나 똑똑한 놈. 최고의 연습벌레는 아니었어. 그는 코치들과 대립을 피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연습량을 인지하고 그만큼의 시간만을 연습했지. 하지만 그는 정말 비이기적인 플레이를 했어. 정말 비이기적이었지. 백투백 두번째 경기에 약팀과의 경기가 있을 때 나의 작전을 그가 귀 기울여 들을까? 그럴리 없지. 하지만 강팀과의 경기라면? 그는 항상 보여줬지. 그의 플옵 스탯을 정규시즌 스탯과 비교해 봐.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플옵에서 정규시즌보다 활약할수 있을까? 진지하게, 몇 명이 가능할까?”
밴건디는 티맥이 올랜도에서 겪은 경험이 그에게 벌어질수 있는 최악이었다고 믿고 있다. 선수로써 형성되어야 할 시기에 슈퍼스타 롤에 갖혀 슛을 난사하고, 그랜트 힐이 이탈하여 홀로 평균 미만급 팀을 홀로 이끌도록 강요당했으며, 그 중 최악은 본인의 최대 장점인 비이기적인 성향을 뒤로하고 이기적으로 플레이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올랜도 티맥에 대해 더 알기위해 나는 닥 리버스 – 3년 넘게 올랜도에서 티맥을 감독한, 비공식 티맥 팬클럽 “티맥은 완전 짱이었어“의 또다른 공동 회장 – 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여러 말도 안되는 방면으로 스탯보다 훨씬 좋은 선수였어” 리버스가 말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그는 팀을 위해서 득점해야만 했어 – 만약 그가 스코어러의 틀에 갖혀있을 필요가 없었다면 그는 훨씬 좋은 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나는 믿어. 그는 굉장히 비이기적이었고 그것이 그의 최대 장점이었지. 그는 모든걸 다 잘했어.. 패스를 할줄 아는 위대한 플레이 메이커였다고. 만약 그가 또 다른 위대한 선수와 뛸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훨씬 더 좋은 선수가 되었을거야.”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티맥은 위대한 팀동료와 뛸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두번이나. 티맥이 올랜도 떠나버린 이후 랩터스는 47승을 거두고 2라운드에 진출했으며 빈스카터의 커리어 시즌 (27.6 PPG, 46% FG, 25.0 PER)을 경험했다. 함께였다면 훨씬 강력했을 두 사촌 지간은 그해 나란히 세컨드팀에 들어갔다. 빈스는 득점하길 원했고 티맥은 그 외 모든 것을 다하는걸 즐겼다. ’01 랩터스는 밴건디가 사랑한 ’99 닉스와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크 잭슨, 찰스 오클리, 델커리, 안토니오 데이비스 같은 존경받은 베테랑들의 리더십과 함께였다면 카터와 티맥은 다운그레이드 조던과 업그레이드 피펜이 될수 있지 않았을까? 이들과 함께였다면 카터와 티맥 사촌 지간이 1옵션 다툼을 해소하고 당시 우습도록 빈약했던 동부 컨퍼런스를 씹어먹도록 이끌어주지 않았을까? 우리는 영원히 알수 없다.
닥 리버스는 “만약 티맥과 그랜트힐이 함께였다면?” 이라는 “What if?”에 대해 생각해봤다고 밝혔다 – 매일매일, 심지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심지어 보스턴에서의 성공을 겪은 이후로도 생각해봤다고 한다. 감독들이 원래 그렇다 – 그들은 지난 패배와 선수들의 부상에 대해 곱씹어보고 “만약에.. 이랬다면?”에 대해 늘 생각한다.
“티맥, 힐, 마이크 밀러가 함께 뛴 시합은 몇경기 되지 않았어” 닥 리버스가 회고한다. “그들이 같이 뛸 때 우리는 막을수 없는 팀이라고 느꼈지. 그리고 (적은 경기수지만) 직접 경험해봤잖아. 셋다 핸들링이 우수하고 패스, 리바운드에 능했지. 건강했더라면 매일매일 상대편에겐 악몽이었을거야. 당시에 나는 이 셋과 우승할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었다고.”
“그리고 그 조합은 사라졌어.”
닥 리버스는 당시 상황이 티맥에게 얼마나 어려줬을지 이제 이해한다고 밝혔다. 특히 그랜트힐이 부상에서 돌아오지 않을거라는게 점점 명백해지면서부터 더욱. “티맥은 전혀 리더 타입이 아니었어, 그리고 불행히도 그는 리더가 되어야만 했지. 너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이제 이팀은 너의 프랜차이즈야’ 라고 말하며 많은 것을 요구했었지. 또한 우리는 그랜트힐 때문에 항상 대기하는 입장이었어. 그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거든.”
닥은 선수시절 애틀란타에서 티맥만큼 거대한 탤런트를 가진 도미닉 윌킨스와 함께 뛴 경험이 있었는데 윌킨스 역시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리더 타입이 아니었다. 그게 애틀란타가 파이널에 한번도 진출 못한 이유는 아니지만 – 버드, 아이재야, 조던이 그 이유다. 하지만 그런 윌킨스도 티맥보다는 코트 안팎으로 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상대팀 최고선수와 일대일로 붙는 것을 무엇보다 즐겼고, 비록 그가 팀원들을 더 좋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 격렬함을 팀원들에게 전염시켰다.
티맥의 천재성은 그러한 전염성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반쯤 감은 눈으로 졸려보였다. 그는 Nasty함이 없었고 위대한 아우라가 없었다. 그는 그저 농구를 정말 정말 정말 잘하는 선수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티맥의 커리어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심지어 그가 명전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정 먼저 꺼내는 이야기도 바로 이와 같다. 만약 당신이 울트라 슈퍼스타와 한팀에서 뛴다면, 매 연습마다 그를 의식하며,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뛰게 된다.
티맥은 동료 누구도 그런 마음이 들게 한적이 없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코비가 때때로 팀원들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지, 가끔 선을 넘은게 아닌지, 주체할수 없는 승부욕이 오히려 팀에 악영향을 끼치진 않은지 의문을 가져왔다 (아마 그랫던 적도 있었을 거다). 티맥은 그 정반대에 있다. 그런면에서 그는 안티 코비이다. 그의 팀원들은 그와 같이 시합을 뛰지만 그와 같이 전쟁터에 뛰어들지 않는다. 아마 그게 코비와 티맥의 차이였을 수도 있다. 혹은 아마 모두가 그런식으로 팀을 리드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뭐 그것도 괜찮다.
내가 ‘99년 닉스와 티맥의 조합에 대해 언급하자, 닥 리버스는 본인이 몸담았던 ‘93년 닉스 – 라일리, 오클리, 유잉, 故앤써니 메이슨이 있던 - 에 티맥이 있었어도 죽여주는 조합이었을 거라고 맞받아쳤다. “그를 보호해주고 지켜줄 멍청이들이 있었을거야. 우린 정말 Nasty 했거든 그는 ’93년 닉스와 잘 맞았을거야.”
바로 그거다. 그나마 ‘08년 로케츠를 제외하고 티맥이 몸담았던 팀들중에 그를 위한 팀이라고 자신있게 부를수 있는 팀은 없다.
아이버슨이 은퇴했을 때, 그를 사랑했던 모든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커리어 최대 업적 - 한계가 뚜렷한 ‘01년 식서스팀의 유일한 창으로써 파이널에 진출했을뿐 아니라 레이커스의 플옵 무패기록을 저지했던 –을 돌아보았다. 당시 필리는 아이버슨을 위한 팀을 만들어줬다: 터프한 수비수들과 아이버슨이 30개의 야투를 쏘아대도 개의치 않던 롤플레이어들. 그들은 아이버슨의 성향과 치열함과 그가 코트에서 행한 모든 행동들에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더 강해졌다. 그들은 아이버슨이 10/35 필드골을 기록해도 개의치 않았고, 아이버슨은 계속 쏘고 또 쏘면서 결국 결과를 가져왔다.
심지어 이러한 한계를 갖고있는 식서스의 상황도 티맥이 가져본 어떤 상황보다는 좋았다.
그러니까 티맥을 기억할 때 그가 처한 상황을 기억해보자. 조지 거빈을 제외하고 6’8’’ 신장으로 누구보다 쉽게 득점을 올리면서 피펜과 같이 코트 전체를 커버할수 있는 미친 운동능력의 괴수를 기억해보자.
그가 노비츠키부터 코비까지 막아대던 모습을 기억해보자. 식스맨 급도 안되는 7th, 8th men들을 이끌고 플옵에서 득점포를 쏟아내던 그를 기억해보자.
평득 32.1점과 22연승을 기억하고 종종 유투브에서 그를 감상해보자.
그리고 기억하자, 팀의 우승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한명의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를 위한 팀의 구성이라는 것을.
티맥은 명전급 선수인가? 조 듀마스 케이스를 상기해본다면 티맥은 x나 당연히 의심의 여지없는 Hall of Famer다.
듀마스는 7년의 전성기 시즌 (티맥은 8년)과 6번의 올스타 선정 (티맥은 7번, 모두 올스타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별들 중 하나로써 선정) 경력을 갖고 있다. 듀마스는 1번의 세컨드팀과 2번의 서드팀을 보유하고 있고 티맥은 퍼스트팀 2번, 세컨드팀 3번, 서드팀에 2번 선정되었다. 듀마스는 티맥보다 좋은 수비수였지만 공격력은 티맥과 비교할수 없는 수준이다. 티맥의 통산 PER 22.1은 듀마스의 15.3보다 7가까이 높다.
하지만 듀마스는 척 데일리 감독 지휘하에 주전선수로는 아이재이아 토마스(올타임 25권 선수), 데니스 로드맨(명전), 애드리언 댄틀리(명전), 훌륭한 롤 플레이어인 릭 마흔, 비니 존슨, 빌 레임비어, 존 샐리와 같은 함께 경기를 뛰었다. 난 티맥이 그들과 함께였다면 충분히 듀마스만큼의 성과를 이뤘을거라고 확신한다.
아니 이런 비교를 다 떠나서 짧지만 위대한 전성기와 수많은 “What ifs”를 바탕으로 명전에 선정된 버나드 킹의 케이스를 본다면 어떻게 티맥을 명전에서 제외하는 X같은 생각을 할수 있을까?
만약에 당신이 티맥의 진정한 Legacy를 확인하고 싶다면, 바스켓 레퍼런스에 접속해서 그의 팀원들을 다시 한번 검색해보라. 놀라울 정도다 - 단지 로스터가 약해서가 아니라, 리그의 끔찍했던 시기와 티맥의 커리어 교차가 너무 절묘해서 더욱 놀랍다.
그의 로스터에는 “만약 부상이 없었다면?” 이란 질문에 단골 답변으로 나오는 2명 (야오밍, 그랜트 힐), Overpaid 2명 (주완 하워드, 조존슨), 조던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스타 한명 (패트릭 유잉), 최악의 드래프트 버스트 2명 (다르코, 마빈 윌리엄스), 못다 핀 아쉬운 재능 2명 (빈스 카터, 숀켐프), 짧은 전성기와 함께 사라진 3명 (빈 베이커, 스티브 프랜시스, 케니 앤더슨), 고졸직행의 부작용 에디커리, 디트로이트 홈경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론아테스트, 그리고 언제나 스탯이상의 활약을 하는 스윙맨 세인 배티에가 자리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리그가 이토록 풍요로웠던 적은 없었다 – 선수들에게 맞는 좋은 구성의 팀들, 안정적 재정상태, 양질의 선수들 – 하지만 이러한 리그의 성공은 그전에 벌어진 실수들의 개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리그의 개선과정 중에 티맥의 전성기는 왔다가 갔다.
그가 10년 일찍, 혹은 10년 늦게 데뷔했다면 우리는 그를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13년 파이널 경기 전 건성으로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티맥이 되었다.
‘00년대 가장 빛나는 선수 중 한명이 마침내 1라운드를 통과했다.
But not really.
아 눈물날정도로 짠하네요...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