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NBA Maniazine
/ / / /
Xpert

애틀란타 호크스 프랜차이즈 포지션별 랭킹 Top28 - PF편 (ver. 2016)

 
11
  1646
Updated at 2017-01-24 13:11:31
안녕하십니까, 이번에는 시리즈 4번째 연재물인 PF편으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지난 연재물인 PG편, SG편, SF편은 아래 링크해두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PG편 : /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65336

SG편 : /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65390

SF편 : /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65438


범례 및 프랜차이즈의 간단 역사 등은 이미 지난 편을 통해서 소개해 드렸으나, 이번 편을 맨 처음으로 보시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습니다.





      

범례

 

- 이 글의 랭킹은 기본적으로 아래 순위부터 역순으로 소개됩니다. 먼저 기본 랭킹 외의 선수들을 5명씩 소개하는 “Honorable Mention”이 등장하며, 이후 28위부터 역순으로 15위까지 마이너 랭킹”(14), 이어서 14위부터 역순으로 1위까지 메이저 랭킹”(14)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 위 글 내의 전반적인 스탯 정보(기본적인 신체 사이즈 포함) 등은 바스켓볼 레퍼런스(www.basketball-reference.com) 사이트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준용하여 제시하였습니다.

 

- 스탯 정보는 주요 1차 스탯과 일부 2차 스탯을 기재하였습니다. 1차 스탯은 득점(PT), 리바운드(RB), 어시스트(AS), 블록슛(BK), 스틸(ST), 출장시간(MIN)의 총계 및 평균치, 그리고 야투성공률(FG%), 3점슛성공률(3PT%), 자유투성공률(FT%), 3점슛 성공개수(3PTM)까지 수록하였습니다. 턴오버, 개인파울, 오펜/디펜리바 등의 정보는 생략하였으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차 스탯은 가장 대표적인 PER와 윈쉐어(WS)만 수록하였습니다.

 

- 주요 스탯 외에 해당 선수의 신체 사이즈(키와 체중), 포지션, 연차(Yrs), 출장 경기 수(Games), 활동한 시즌 기간(Season) 정보도 수록하였습니다. 포지션별 랭킹인데 포지션에 대한 정보가 중복해 들어간 이유는 두 포지션을 넘나드는 경우를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즉 경우에 따라 세컨드 포지션까지 표기하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시즌의 표기는 파이널이 열린 해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 99-00시즌은 “00”으로 표기함)

 

- 선수들의 주요 수상경력도 기재하였습니다. , 올스타 MVP 등과 같이 직접적인 선수 평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수상 실적은 제외했습니다. 이밖에 올스타 선정 횟수, 우승 횟수도 병기하였습니다.

 

- 각 스탯의 해당 프랜차이즈 내 랭킹도 첨부하였습니다. 이번 애틀란타 호크스 프랜차이즈의 경우, 3점슛 개수 및 3점슛율은 Top12까지, 블락슛과 스틸은 Top15까지, 나머지 스탯들은 Top20까지 랭킹을 매겼습니다. (스탯 랭킹의 범위가 각각 차이가 나는 까닭은, 3점슛은 79-80시즌부터, 블락슛과 스틸은 73-74시즌부터 계산된 스탯임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 스탯 랭킹 내에 드는 평균 및 비율 스탯의 유효 기준은, 레퍼런스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프랜차이즈 커리어 최소 요구 수치를 준용하였습니다. 따라서 평균 득점 등 여러 스탯은 100경기 이상 출전을, FG%500개 이상 필드골 성공을, FT%200개 이상 자유투 성공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다만 3PT%의 경우에는 현 레퍼런스 사이트의 기준이 50개 이상 3점슛 성공인데, 3점슛을 많이 쏘는 현재의 트렌드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기준입니다. 그래서 얼마 뛰지도 않은 전문 3점 슈터들이 상위 랭킹에 대거 포진하는 등의 기현상이 있어서 필자의 임의에 따라 94-95시즌 이전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기존대로 50, 94-95시즌부터 11-12시즌까지는 100, 12-13시즌 이후로는 150개를 랭크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이는 리그의 3점슛 시도가 크게 늘어난 시점을 각각 지표로 삼았습니다. 94-95시즌에는 리그에서 3점슛 거리를 전체 22피트로 조정함에 따라 한 팀의 평균 3점슛 시도 횟수가 급증하였고, 처음으로 경기당 10개를 돌파했습니다. 이 거리 단축 조치는 3시즌 동안만 유지되었으나, 이후 3점슛의 비중이 커지고 선수들이 3점을 더 많이 던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2-13시즌에는 한 팀의 평균 3점슛 시도 횟수가 처음으로 경기당 20개를 돌파하였으며, 또한 이 시즌에 스테판 커리가 레이 알렌이 가지고 있던 시즌 최고 3점슛 기록(269)를 간만에 경신하기도 했습니다.)

 

- 선수에 대한 소개는 해당 프랜차이즈 내에서의 활약상을 위주로 기술하였으며, 따라서 다른 팀에서의 활약상 등은 가급적 생략하거나 짧게 요약하였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랭킹이 올라갈수록 선수 소개의 분량이 많고 자세합니다. 해당 프랜차이즈에서 드래프트 된 경우에는 드래프트된 연도와 그 순위까지 언급하였으며, 고인이 된 선수는 몰년과 향년을 기재하였습니다. 이밖에 명예의 전당 입성 및 해당 프랜차이즈 영구결번 여부 등도 밝혔습니다.




 

애틀란타 호크스 프랜차이즈의 간단 역사

  


 

 

호크스 프랜차이즈는 1946년에 NBL 리그에서 버팔로 바이슨즈(Buffalo Bisons)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다가, 한 달 여 만에 연고지를 일리노이 주의 멀린(Moline)으로 옮기면서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Tri-Cities Blackhawks)로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트라이-시티스란 미시시피 강 유역에 서로 인접한 멀린, 록 아일랜드(Rock Island), 데이븐포트(Davenport)의 세 도시에 속한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고, “블랙호크스는 과거 용맹했던 인디언 추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죠. 장신 센터 돈 오튼을 주축으로 한 블랙호크스는 1949년에 NBLBAA 리그에 병합되어 새로이 NBA 리그가 출범함에 따라, 그 소속이 NBA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구단주 벤 커너는 1951년에 연고지를 대도시인 밀워키로 옮겼고, 팀 이름도 좀 더 간단하게 호크스로 바꿨죠. 하지만 밀워키 호크스는 성적이 계속 하위권에 머물면서 흥행이 신통치 않았고, 결국 1955년에 연고지를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엘리트 빅맨인 밥 페팃을 중심으로 차츰 전력을 강화한 호크스는 56 드래프트에서 빌 러셀을 뽑았지만, 흥행 때문에 세인트루이스의 지역 스타인 에드 마콜리를 영입하기 위해 러셀을 보스턴 셀틱스에 팔고 말았죠. 56-57시즌에 파이널에 진출한 호크스는 공교롭게도 러셀 트레이드의 상대였던 보스턴과 맞붙어 역대 파이널 사상 가장 치열했던 7차전 대접전을 벌인 끝에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57-58시즌에 다시 파이널에 진출한 호크스는 보스턴과 리매치를 벌였는데 이번에는 러셀의 부상을 틈타 4-2로 승리를 거두면서 리벤지에 성공, 프랜차이즈 첫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죠. 이후 호크스는 밥 페팃, 클리프 헤이건 등을 앞세워 50년대 말~60년대 초에 서부를 대표하는 강자로 군림했으며, 라이벌 보스턴과는 두 번 더 파이널에서 맞붙었지만 아쉽게도 모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64-65시즌을 끝으로 밥 페팃이 은퇴하자, 호크스는 선수 겸 감독인 리치 게린의 지도하에 레니 윌킨스, 젤모 비티 등의 흑인 스타들을 앞세워 꾸준히 중상위권 전력을 유지했죠. 게린의 시대에 호크스는 매년 빠짐없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67-68시즌에는 56승의 호성적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한편 홈구장 신축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벤 커너 구단주는 1968년에 끝내 팀을 애틀란타의 부동산 재벌인 톰 커즌스 등에게 매각함에 따라, 호크스는 연고지를 애틀란타로 옮기게 되었죠.

 

이후 호크스는 루 허드슨, 피트 마라비치 등 재간 있는 스코어러들이 팀을 이끌었지만, 몇몇 주축 선수들을 경쟁 리그인 ABA에 빼앗기기도 하고 마라비치와 흑인 동료들 간에 갈등도 심했으며 ABA의 스타 쥴리어스 어빙을 영입하려다 실패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성적이 추락, 잠시 침체기를 걷게 됩니다. 그러다가 1977년에 MLB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구단주인 테드 터너가 팀을 사들이고 휴비 브라운을 감독으로 임명한 후에 댄 라운드필드의 영입 등으로 전력을 추스르며 다시 중상위권으로 도약하게 되었죠. 82-83시즌에는 조지아 주 출신의 지역스타인 도미닉 윌킨스를 운 좋게 데려온 호크스는 이후 엘리트 스코어러로 성장한 윌킨스의 활약과 명장 마이크 프라텔로의 지도력 등을 앞세워 80년대 말에 4년 연속 50승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라이벌 보스턴 셀틱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등의 벽을 넘지 못하며 잇달아 고배를 마셔야 했죠. 프라텔로 사임 후 애매하게 중위권에 머물던 호크스는 93-94시즌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레니 윌킨스를 감독으로 선임했습니다. 윌킨스는 부임 첫 해에 도미닉 윌킨스를 트레이드하는 등 과감한 행보를 보이면서 57승의 호성적을 거두었으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도미닉을 트레이드한 데에 충격을 받은 다수의 홈팬들이 호크스에 등을 돌리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죠.

 

이후 윌킨스 감독은 마이애미 히트로부터 스티브 스미스를 영입하고, FA로 수비 대마왕 디켐베 무톰보를 영입하며 90년대 중후반에 공수 발란스가 훌륭한 호화 라인업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플레이오프에서는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 등에게 가로막히며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죠. 99-00시즌부터 리빌딩에 들어간 호크스는 프런트의 잇따른 오판에 따른 선수 영입 실패로 인해 오랜 암흑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무려 8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호크스는 그래도 그간 얻은 드래프트 픽 등을 통해 차츰 전력을 강화한 끝에 07-08시즌부터는 다시 플레이오프 권으로 복귀했죠. 이후 호크스는 조 존슨, 알 호포드 등을 앞세워 계속 중상위권 전력을 유지만 하다가, 13-14시즌에 마이크 부덴홀저 감독을 영입하며 새롭게 도약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벤치 마킹, 팀플레이 위주의 짜임새 있는 전력을 구축한 호크스는 14-15시즌에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인 60승을 거두며 챔피언 컨텐더 급의 전력으로 올라섰죠. 하지만 무려 45년 만에 진출한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속절없이 스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다시 중상위권으로 내려온 호크스는 이번 시즌에도 동부의 다른 팀들과 치열하게 플레이오프 싸움을 벌이는 중이죠.

 

호크스는 70년 역사 동안 우승은 단 1회에 불과하지만, 47회나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꾸준히 중상위권 전력을 유지해 온 부지런한 프랜차이즈입니다. 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8시즌 동안 외에는 뚜렷이 긴 암흑기도 없죠.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번번이 1라운드 탈락, 2라운드 탈락 등의 성적에 그치며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에 비해 그리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 편입니다.

 

그럼 이상으로 서설을 마치고, 본격적인 랭킹 소개에 앞서 28위 밖 선수들 중에서 나름대로 소개해줄 만한 선수들을 5명을 추려서 "Honorable Mention"이란 타이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28위 밖 선수들에게도 잠정적인 랭킹은 있지만 여기에서 소개하는 순서는 그 순위와는 무관하며, 그냥 시대순으로 정렬했습니다.)




Honorable Mention


Woody Sauldsberry



역대 최저 픽(60픽) 신인왕 출신으로 뛰어난 수비수였던 우디 솔즈베리는 60년대 초반에 세 시즌 동안 벤치에서 활약했습니다.


Connie Hawkins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걸은 비운의 스타 코니 호킨스는 커리어 말년인 75-76시즌에 주전 4번으로 뛴 뒤에 이내 무릎 부상 악화로 은퇴해야 했습니다.


Adam Keefe



부지런한 빅맨인 애덤 키프는 92 드래프트에서 전체 10번으로 뽑혀 두 시즌 간 백업으로 활약한 뒤, 타이론 코빈과 맞트레이드 되어 유타 재즈로 이적했습니다.


Laphonso Ellis
 


무릎 부상으로 커리어가 일찍 꺾여버린 라폰조 엘리스는 98-99시즌에 합류해 두 시즌 간 뛰었으나, 부상 여파로 인해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Ivan Johnson



KBL에서도 뛴 바 있는 아이반 존슨은 11-12시즌에 NBA에 입성해 두 시즌 동안 끈적끈적한 수비력을 선보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랭킹 소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이너 랭킹 (28위~15위)


28위


#_41 Sam Pellom



6-9, 225lbs  PF/C  /  4시즌(80-83), 192경기


4.5점, 3.5리바운드, 0.5어시스트, 0.8블록슛(통산 15위)


샘 펠럼은 버팔로 대학 재학 시절에 전미 리바운드 왕(평균 16.2개)을 차지한 적도 있었지만, 워낙 무명 대학 소속이었기에 78 드래프트에서 NBA의 지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묘기 농구단인 워싱턴 제너럴스(Washington Generals)에서 1년을 뛴 뒤, 79-80시즌을 앞두고 다시 NBA에 도전했죠. 애틀란타 호크스의 트레이닝 캠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그는 우여곡절 끝에 개막 로스터까지 살아남으며 데뷔에 성공했습니다. 루키 시즌에는 벤치만 덥혔던 그는 2년차 때인 80-81시즌에 주전 빅맨들의 잦은 부상 결장을 틈타 20분 가까이 출장시간을 얻으며(평균 19.1분) 평균 5.9득점, 4.6리바운드, 1.2블록슛을 올려주기도 하였죠. 전형적인 수비형 빅맨이었던 그는 특히 블록슛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82-83시즌 초반에 2경기만 뛰고서 방출되고 말았으며, 이윽고 밀워키 벅스와 10일 계약을 맺고 4경기를 뛰었으나 잔여 시즌 계약에는 실패했죠. 이후 그는 하부리그와 해외를 전전하며 프로 커리어를 보냈습니다.




27위


#_8 Alexander Volkov



6-10, 218lbs  PF/SF  /  2시즌(90, 92), 149경기


6.8득점, 2.6리바운드, 2.2어시스트, 0.7스틸, 33.3% 3점슛율


88년 서울 올림픽 때 결승에서 미 대표팀을 꺾은 소련 국가대표 팀의 일원이었던 알렉산더 볼코프는 이미 86 드래프트에서 6라운드 전체 134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동서 냉전으로 인해 동구권 선수들의 미국 진출이 불가능했기에, 이렇게 동구권의 유망주들을 드래프트에서 낮은 픽으로 슬쩍 지명해 두는 꼼수가 흔했죠. 그런데 동서 냉전이 급격한 화해 무드로 변하면서 1989년부터 이들의 NBA 진출이 가능해지자, 볼코프도 호크스와 3년 계약을 맺고 89-90시즌부터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루키 시즌에는 벤치만 덥혔고 2년차 때에는 손목 골절로 시즌을 통째로 날리는 등 그의 NBA 도전기는 그리 순탄치 못했죠. 91-92시즌에도 전반기에는 벤치를 전전한 그는 도미닉 윌킨스가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자 일약 땜빵 스타팅으로 발탁되었습니다. 6-10의 장신이었지만 뛰어난 외곽슛 능력을 지닌 그는 3월 달에만 평균 14.6득점, 5.4리바운드, 5.4어시스트의 깜짝 활약을 펼쳐줬죠. 하지만 당시는 외국 출신 선수들에 대한 텃세가 워낙 심했기에 그는 결국 시즌을 마치고 다시 유럽으로 리턴해 스페인, 그리스 리그 등에서 뛰었습니다. 현재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정치인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26위


#_44 Scott Hastings



6-10, 235lbs  PF  /  6시즌(83-88), 299경기


3.1득점, 2.4리바운드, 0.5어시스트, 81.1% 자유투율


82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전체 29번)로 뉴욕 닉스에 뽑힌 스캇 헤이스팅스는 루키 시즌 도중에 로리 스패로우와 맞트레이드되어 애틀란타 호크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주전 포인트가드인 스패로우를 사실상 현금 트레이드로 넘기면서 헤이스팅스를 덤으로 받았죠. 이후 그는 호크스에서 여러 시즌 동안 벤치 워머로 꾸준히 뛰어줬습니다. 빅맨임에도 18피트 너머에서 준수한 점프슛을 지녔던 그는 그밖에 다른 기량들은 평범해 많은 시간을 출전하진 못했지만, 코트 위에 설 때마다 늘 투지 넘치는 허슬을 보여줬죠. 그는 이른바 “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의 80년대 버전”이었습니다. 호크스에서 5시즌 반 동안 벤치를 지킨 그는 88-89시즌을 앞두고 신생팀 마이애미 히트의 확장 드래프트 때 지명을 당해 정든 호크스를 떠나야 했죠. 이후 그는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즈”에 합류해 행운의 반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는 덴버 너게츠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 뒤에 방송 해설가로 변신, 덴버 지역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스포츠를 중계해오고 있습니다.




25위


#_30 George Trapp



6-8, 205lbs  PF/SF  /  2시즌(72-73), 137경기


9.2득점, 4.7리바운드, 1.3어시스트, 76.6% 자유투율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 출신의 조지 트랩은 71 드래프트에서 전체 5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에 지명되었습니다. 그는 루키 시즌에 평균 6.6득점을 올리는 데 그쳤으나, 대 버팔로 브레이브스 전에서는 34득점을 넣는 등 간간이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었죠. 2년차인 72-73시즌에 그는 3, 4번을 두루 백업하며 팀의 핵심 식스맨으로 활약, 평균 11.3득점, 5.9리바운드를 올려주었습니다. 그는 “Instant Heat”라는 별명에 걸맞게 한번 타오르면 못 말리는 폭발력 있는 중장거리 슈터였으며, 돌파력도 준수했죠. 다만 슈팅 기복이 좀 심해서 벤치에서 조커로 쓰기에 알맞은 스타일이었습니다. 한편 그는 오프시즌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73 드래프트 1라운드 픽(전체 9번 픽으로, 드와잇 존스 지명)과 맞트레이드 되어 호크스를 떠났으며, 이후 디트로이트에서 4시즌을 더 보낸 뒤 하부리그와 유럽 등을 전전했죠. 그는 2002년에 친구와 술을 마시고 다툼을 벌이다가 친구가 휘두른 칼에 찔려 53세의 나이로 횡사했습니다.




24위


#_19 / #_21 Mike Todorovich



6-5, 220lbs  PF  /  2시즌(50-51), 117경기


11.5득점, 6.9리바운드, 3.1어시스트, 71.9% 자유투율


마이크 토도로비치는 47-48시즌에 NBL의 셰보이건 레드스킨스(Sheboygan Redskins)에 입단해 그해 신인왕 및 올-NBL 퍼스트 팀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한편 1949년에 NBL이 BAA에 병합, NBA가 출범하자 그는 고향팀인 세인트루이스 봄버스(St. Louis Bombers)에서 뛰다가 14경기만에 맥 오튼+현금과 맞트레이드 되어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로 이적했죠. 새로운 팀에서 일약 주축 멤버로 중용된 그는 남은 51경기에서 평균 13.6득점, 3.7어시스트를 올려주었습니다. 당시 블랙호크스에는 이렇다 할 플레이메이커가 없었는데, 그는 팀 내 가장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리딩에도 한 몫 했죠. 대학 시절에는 줄곧 센터를 봤던 정통 빅맨인 그는 그리 큰 신장은 아니었지만 다부진 체격을 지녔고 다재다능했습니다. 한편 이듬해인 50-51시즌 초반에 데이브 맥밀런 감독이 경질되자, 베테랑 가드 존 로건이 임시로 3경기 동안 감독직을 맡았다가 이후 토도로비치가 정식으로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죠. 하지만 그가 지휘봉을 잡은 블랙호크스는 42경기에서 14승 28패를 거두는 데 그치며 서부 최하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는 시즌을 마치고 불과 27살의 나이로 은퇴한 뒤 보험 중개인으로 일했는데, 당시는 프로농구가 인기 스포츠가 아니어서 선수들의 수입과 처우가 보잘 것 없었기에 이처럼 이른 나이에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는 2000년에 암으로 인해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3위


#_8 Antoine Walker



6-8, 224lbs  PF/SF  /  1시즌(05), 53경기

 

20.4득점, 9.4리바운드, 3.7어시스트, 1.2스틸, 40.2분 출전


달라스 매버릭스에서 뛰던 올스타 출신 포워드 앤트완 워커는 03-04시즌을 마치고 트레이드를 통해 애틀란타 호크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수년간 리빌딩 실패로 골머리를 앓아오던 호크스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제이슨 테리까지 내주었으며, 이어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로부터 알 해링턴을 영입해 워커-해링턴으로 이어지는 주전 포워드 라인업을 꾸렸죠. 그는 뛰어난 득점력을 지녔고 다재다능했으나, 지나치게 슛을 난사하는 등 단점도 많은 양날의 검 스타일이었습니다. 04-05시즌에 그는 시즌 중반까지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하며 수치상으로는 이름값을 해줬지만, 그와 반대로 팀 성적은 10승 43패에 그치며 바닥을 치고 있었죠. 그와 해링턴 콤비는 개인플레이로 일관하며 자기들의 스탯만 두둑이 챙길 뿐, 팀 승리에는 별반 공헌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의 영입이 실패임을 자인한 호크스 구단은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그를 보스턴 셀틱스로 트레이드 하는 대신에 게리 페이튼+샐러리 필러(톰 구글리오타, 마이클 스튜어트)+1라운드 픽을 얻어왔죠. (페이튼은 곧바로 방출되어 다시 보스턴에 합류하였기에, 1라운드 픽 하나만 챙기는 무브였습니다.) 이후 마이애미 히트에서 행운의 반지를 차지하기도 한 그는 은퇴 후 막대한 재산을 날리고 파산하는 등 곤욕을 치렀으며, 현재는 조그마한 스포츠 매체에서 해설 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2위


#_33 Leonard “Truck” Robinson



6-7, 225lbs  PF  /  1시즌(77), 36경기


22.4득점, 12.8리바운드, 2.7어시스트, 1.1스틸, 40.3분 출전


인상적인 별명을 지닌  트럭 로빈슨은 워싱턴 불리츠 소속으로 뛰던 76-77시즌 도중에 톰 헨더슨과 맞트레이드되어 애틀란타 호크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골밑이 약했던 호크스는 불리츠의 이 유망주 빅맨을 얻기 위해 당시 어시스트 수위권(평균 8.4개)을 달리던 베테랑 가드 헨더슨을 내주었죠. 로빈슨은 남은 36경기에서 평균 22.4득점, 12.8리바운드의 놀라운 스탯을 기록하며 자신의 포텐셜을 한껏 터뜨렸습니다. 그는 6-7의 단신이었지만 걸출한 리바운드 능력을 지녔으며, “트럭”이란 별명에 걸맞게 강인한 힘과 저돌성을 겸비한 뛰어난 득점원이었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별명답지 않게 깔끔한 중거리 슛과 영리한 플레이 스타일을 뽐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를 잡기 위해 호크스는 총력을 다했으나, 안타깝게도 뉴올리언스 재즈가 그를 영입하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죠. 호크스는 이에 따른 FA 보상선수로 평범한 포워드인 론 버해건과 약간의 현금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이후 그는 올-NBA 퍼스트팀에도 한 차례 뽑히는 등 승승장구의 커리어를 걸었으며, 은퇴 후에는 새크라멘토 킹스의 어시스턴트 코치 등을 역임했습니다.




21위


#_32 Mike Scott



6-8, 237lbs  PF/SF  /  4시즌(13-16), 263경기


7.4득점, 3.0리바운드, 0.9어시스트, 34.5% 3점슛율


버지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12 드래프트에 참가한 마이크 스캇은 2라운드 전체 43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에는 D-리그를 오가다가 2년차인 13-14시즌부터 로테이션에 자리 잡은 그는 벤치에서 평균 9.6득점, 3.6리바운드를 올려줬으며, 대 뉴욕 닉스 전에서는 깜짝 30득점을 넣기도 했죠. 그는 대학시절에는 3점슛 능력이 별 볼일 없었지만 프로 와서는 레인지를 차차 늘린 덕에 스트레치 빅맨으로 뛸 수 있으며, 탁월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받아먹기에도 능합니다. 다만 수비가 허약하고 기복이 심해서 주로 벤치에서 공격형 조커로 쓰기에 알맞은 타입이죠. 13-14시즌을 마치고 호크스와 3년 10mil에 재계약한 그는 벤치 득점에 일조하면서 꾸준히 3점슛의 정확도를 늘려 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2015년에 마리화나 등 대량의 마약을 소지했다가 적발되고 말았고, 현재 이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에 있죠. 만약 유죄로 판결나면 그는 마약 소지죄로 중형을 선고받아 선수 생활을 마감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20위


#_13 / #_10 George Ratkovicz



6-6, 220lbs  PF/SF  /  4시즌(49, 53-55), 203경기


7.6득점, 7.3리바운드*, 2.6어시스트*, 31.0분 출전*


※ 평균 리바운드, 어시스트, 출전시간 값은 NBA 리그에서 기록한 139경기의 평균 기록


40년대 초반부터 NBL에서 활약해 온 베테랑 빅맨 조지 라트코비츠는 48-49시즌에 아직 NBL 소속이었던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에서 1시즌 간 활약했습니다. 이후 그는 NBA의 시라큐즈 내셔널즈에서 3시즌 간 활약하다가 볼티모어 불리츠로 이적했고, 52-53시즌 초반에 밀워키 호크스의 루키 센터 에디 밀러와 트레이드되었죠. 호크스에서 멜 헛친스와 함께 단단한 주전 포워드 라인업을 구축한 그는 그해 61경기에서 평균 10.3득점, 7.7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골밑에서 부대끼는 전형적인 올드 스쿨 빅맨이었고, 리바운드 솜씨가 좋았죠. 이듬해인 53-54시즌에도 그는 호크스의 골밑을 수호하며 평균 8.3득점, 7.6리바운드를 올려주었습니다. 하지만 54-55시즌, 어느덧 32살의 노장이 된 그는 슈퍼 루키 밥 페팃의 등장 등으로 팀 내에서 입지를 잃었고, 결국 호크스를 떠나 하부리그인 이스턴 리그(Eastern League)의 윌크스-배리 배런즈(Wilkes-Barre Barons)에서 1년 더 뛴 뒤 은퇴했죠. 그는 2007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위


#_3 Al Harrington



6-9, 230lbs  PF/SF  /  2시즌(05-06), 142경기


18.1득점(통산 10위), 6.9리바운드, 3.1어시스트, 1.2스틸, 37.5분 출전(통산 5위)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식스맨으로 활약한 알 해링턴은 03-04시즌을 마치고 스티븐 잭슨과 맞트레이드되어 애틀란타 호크스로 이적했습니다. 그는 04-05시즌에 호크스의 주전 3번 자리를 꿰차며 커리어 처음으로 풀타임 스타팅이 되었죠. 그는 자신의 공격 재능을 한껏 뽐내며 평균 17.5득점, 7리바운드의 인상적인 스탯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와 앤트완 워커 듀오는 비효율적인 난사와 개인플레이로 팀을 말아먹었고, 결국 프랜차이즈 역대 최악의 성적(13승 69패)을 내고 말았죠. 3-4번을 두루 오가는 트위너인 그는 페이스-업 아이솔레이션을 즐겼으며, 나름 중장거리 슈팅력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비와 보드 장악력이 다소 부족했고, 호크스 시절에는 너무 이기적인 플레이로 일관하며 팀 승리에 별 보탬이 못됐죠. 이듬해인 05-06시즌에는 워커가 떠난 주전 4번 자리를 차지한 그는 여전히 겉으로 좋은 수치들을 기록했으나, (평균 18.6득점, 6.9리바운드) 팀 성적은 26승에 그치며 여전히 바닥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호크스는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를 사인 & 트레이드로 친정팀 인디애나에 보내면서 1라운드 픽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죠. 이후 여러 팀을 전전하며 오래도록 커리어를 이어간 그는 지난 시즌 호주에서 잠깐 뛰었으며, 현재는 현역에서 거의 은퇴한 상태입니다.




18위


#_33 / #_35 Antoine Carr



6-9, 225lbs  PF  /  6시즌(85-90), 346경기


7.5득점, 3.3리바운드, 1.1어시스트, 0.9블록슛(통산 12위), 총 320블록슛(통산 11위), 51.6% 야투율(통산 7위)


위치타 주립대 출신의 앤트완 카는 83 드래프트에서 전체 8번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지명되었으나, 디트로이트로 합류를 거부하며 이태리 리그에서 1년을 뛰었습니다. 결국 디트로이트는 83-84시즌을 마치고 애틀란타 호크스의 올스타 포워드 댄 라운드필드를 받는 조건으로 카의 권리와 클리프 레빙스턴+2장의 2라운드 픽을 내놓았죠. 그는 2년차 때인 85-86시즌에는 정강이 부상으로 17경기 출장에 그치기도 했으나, 이후 건강히 돌아와 호크스의 벤치 에너자이저로 꾸준히 활약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호쾌한 덩크슛과 블록슛을 자주 선보였으며, 터프한 수비수이자 살림꾼이었죠. 또한 그는 빅맨이면서도 슈팅력도 깔끔해 18피트 언저리에서 정확한 중거리 슛을 종종 꽂아주곤 했습니다. 한편 87-88시즌을 앞두고 제한적 FA가 된 그에게 보스턴 셀틱스가 7년 계약을 오퍼했으나, 호크스가 이를 매치하며 잔류하게 되었죠. 이후 그는 89-90시즌 도중에 트레이드를 통해 새크라멘토 킹스로 이적하며 호크스를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샌안토니오, 유타 등지에서 솔리드하게 활약했으며, 말년에는 유럽에서 뛰다가 01-02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죠. 한편 그는 국내 팬들에게는 고글을 쓴 모습으로 익숙한데, 94-95시즌 도중 눈 부상을 당한 후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17위


#_20 Ed Macauley



6-8, 185bs  PF/SF  /  3시즌(57-59), 158경기


14.4득점, 6.1리바운드, 2.3어시스트, 29.7분 출전, 17.1 PER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에드 마콜리는 보스턴 셀틱스에서 6번이나 올스타에 뽑힌 엘리트 공격형 센터였습니다. 한편 56 드래프트에서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빌 러셀을 노리던 보스턴의 레드 아워백 감독은 1픽을 쥔 로체스터 로얄즈가 러셀을 뽑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는 2픽을 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게 접근했죠. 당시 호크스는 세인트루이스로 연고지를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흥행에 부진을 겪고 있었는데, 아워백이 지역 출신 스타로 흥행 보증 수표인 마콜리를 2픽의 대가로 제시하자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보스턴이 53 드래프트에 지명했던 클리프 헤이건의 권리까지 더해져서 역사에 길이 남을 마콜리+헤이건 ⇔ 러셀 딜이 일어났죠. 그는 체구는 빈약했지만 골밑에서 득점하는 기술만큼은 당대 탑 클래스였으며, 센터로서 패싱 센스도 발군이었습니다. 다만 몸빵이 안 되다 보니 골밑 수비와 리바운드에서는 상대적으로 아쉬운 면이 있었죠.


호크스 합류 후 포워드로 보직을 변경한 그는 56-57시즌에 밥 페팃, 척 쉐어와 함께 종종 트리플 포스트로 기용되었고, 평균 16.5득점, 6.1리바운드의 기록으로 올스타에도 선발되며 나름 이름값을 해주었습니다. 얄궂게도 그해 파이널에서는 빅딜의 당사자였던 호크스와 보스턴이 서로 맞붙었는데,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호크스는 아쉬운 패배를 당했죠. 이듬해인 57-58시즌에는 주로 벤치에서 식스맨으로 활약한 그는 호크스가 보스턴을 상대로 파이널에서 리벤지에 성공함에 따라 생애 첫 우승 반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58-59시즌에 신임 감독 앤디 필립이 10경기 만에 경질되자, 그가 후임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았죠. 그는 남은 경기 동안 호크스를 43승 19패로 훌륭히 이끌었으나, 플레이오프 서부 파이널에서 그만 언더독인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59-60시즌에는 아예 선수 생활은 접고 감독직에만 전념한 그는 팀을 파이널까지 올렸으나 안타깝게도 보스턴과 7차전 접전을 벌인 끝에 패배했죠. 시즌이 끝난 후 감독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후 종교에 귀의해 카톨릭 사제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60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11년에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6위


#_50 John Brown



6-7, 220lbs  PF/SF  /  6시즌(74-78, 80), 405경기


8.0득점, 4.6리바운드, 1.5어시스트, 0.6스틸


미주리 대학 출신의 존 브라운은 73 드래프트에서 전체 10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에는 3-4번 포지션을 두루 백업한 그는 평균 9.3득점, 5.7리바운드를 올리며 올-루키 퍼스트 팀에도 선발되었죠. 2년차 때인 74-75시즌에 그는 주로 주전 4번으로 기용되며 평균 11.2득점, 5.9리바운드로 활약했습니다. 당시 호크스의 프론트 코트는 그를 비롯해 존 드류, 드와잇 존스, 마이크 소저너 등 1, 2년차의 젊은 피들로 구성되었죠. 이후 두 시즌 동안은 주로 벤치에서 출격한 그는 77-78시즌에는 출장시간은 20분 남짓으로 짧았지만 주로 스타팅 4번으로 나왔습니다. 3-4번 포지션을 두루 소화할 수 있았던 그는 빅맨으로서 그리 좋은 체격조건은 아니었지만, 강인한 근성과 힘, 세련된 기술을 바탕으로 페인트 존에서 제법 활약해줬고 중거리 슈팅력도 준수했죠. 한편 그는 78-79시즌을 앞두고 미래의 2라운드 픽과 맞트레이드 되어 시카고 불스로 이적했으며, 이듬해인 79-80시즌 도중 유타 재즈에서 방출된 후 10일 계약으로 친정팀 호크스에 복귀해 잔여 시즌을 뛰었습니다. 이후 그는 유럽으로 건너가 이탈리아 리그에서 세 시즌을 더 뛴 뒤 은퇴했습니다.




15위


#_54 Tom McMillen



6-11, 215lbs  PF/SF  /  6시즌(78-83), 416경기


8.5득점, 4.4리바운드, 1.2어시스트, 48.8% 야투율(통산 15위), 80.7% 자유투율


톰 맥밀런은 고교 시절 전미 최고의 농구 유망주였고, 메릴랜드 대학 졸업 후 로즈 장학금을 받고 영국 옥스퍼드 유학까지 간 슈퍼 엘리트였습니다. (리그 역사상 로즈 장학생 출신은 그와 빌 브래들리 뿐입니다.) 하지만 공부보다는 운동으로 진로를 택하여 NBA에 입성한 그는 77-78시즌을 앞두고 뉴욕 닉스 소속으로 있다가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죠. 그는 주로 벤치에서 출격하며 백업 포워드로 여러 시즌 동안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미 20대 때부터 희끗희끗한 은발이었던 그는 운동능력은 평범했지만 18피트 너머에서 던지는 중거리 슛이 일품이었으며, 자유투도 정확했죠. 또한 페인트 존에서 마무리하는 공격 기술도 뛰어났고, 지능적인 수비수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눈에 안 보이게 상대를 팔꿈치나 무릎 등으로 가격하는 비열한 수비로 악명을 떨쳤죠. 그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명석한 두뇌로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했으며,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른 살이 넘어가자 본격적으로 정계 진출 준비에 나선 그는 구단에 가급적이면 자신을 워싱턴 불리츠로 트레이드 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가 정치적 기반으로 삼을 메릴랜드 주가 워싱턴에서 가까웠기 때문이죠. 결국 그는 82-83시즌을 마치고 랜디 위트먼과 트레이드되어 워싱턴으로 이적했습니다. 3년 뒤에 선수 생활을 마치고 바로 정계로 뛰어든 그는 메릴랜드 주 4구역에서 민주당의 하원의원으로 3선에 성공했으며,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는 사업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메이저 랭킹 (14위~1위)


14위


#_9 / #_22 Mel Hutchins




브리검 영 대학 출신의 멜 헛친스는 51 드래프트에서 전체 2번으로 밀워키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부터 리바운드와 수비에서 두각을 보인 그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880개의 리바운드(평균 13.3개)를 잡아내며 래리 포우스트와 함께 리그 리바운드 공동 1위에 올랐고, 빌 토셰프와 함께 기자단이 뽑은 비공식 공동 신인왕에 등극하죠. (신인왕은 이듬해인 52-53시즌부터 공식으로 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호크스는 17승 49패로 리그 최하위의 성적에 그쳤지만, 그 가운데 루키 헛친스의 활약만큼은 군계일학처럼 빛났습니다. 그는 키가 6-6에 불과했지만 출중한 탄력과 긴 팔을 무기로 더 큰 선수들을 상대로 리바운드를 따냈으며, 슛 블록 능력도 일품이었죠. 또한 그는 공격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강인하고 영리한 수비력으로 매치-업 상대를 꽁꽁 묶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습니다. 52-53시즌에도 호크스의 성적은 형편없었으나(27승 44패), 그는 변함없이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평균 11.7득점, 11.2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생애 첫 올스타에도 선발이 되었죠. 그러나 연이은 성적 부진으로 흥행에 실패하여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 호크스는 결국 오프시즌에 그를 포트웨인 피스톤즈로 현금 트레이드해야 했습니다. 이후 그는 탄탄한 수비력으로 피스톤즈를 2년 연속 파이널에 올리며 3차례 더 올스타에 뽑혔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57-58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죠. 은퇴 후에는 부동산업에 종사하며 아마추어 골퍼로도 활동한 그는 올스타 포워드 키키 밴더웨이의 외삼촌이기도 합니다.




13위


#_12 / #_25 Jim Washington




빌라노바 대학을 졸업한 짐 워싱턴은 65 드래프트에서 전체 6번으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에는 주로 백업으로 활약한 그는 1966년에 시카고 불스의 창단으로 인해 실시된 확장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아 시카고로 이적했죠. 당시 호크스는 유망주인 그를 보호하고 싶었으나, 시카고가 팀의 선수 겸 감독인 리치 게린을 노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 대신에 게린을 마지막 보호자 명단에 넣었습니다. 시카고, 필라델피아에서 주전급 빅맨으로 활약한 그는 71-72시즌 초반에 호크스의 레전드 파워포워드인 빌 브리지스와 맞트레이드 되어 5년여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했죠. 그는 브리지스로부터 팀의 주전 4번 바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평균 12.7득점, 9리바운드를 올려주었습니다. 그는 신장이 6-6밖에 되지 않는 단신 빅맨이었지만, “점핑 지미”라는 별명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탄력으로 리바운드를 걷어냈으며, 덩크슛도 일품이었죠. 늘 자신보다 더 큰 선수들을 상대하며 박스아웃과 궂은일에 전념한 그는 72-73시즌과 73-74시즌에는 2년 연속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했습니다. 한편 74-75시즌에 존 브라운, 존 드류 등 젊은 포워드들이 자리를 잡자 그는 벤치로 밀려났고, 결국 시즌 도중에 버팔로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었죠. 그는 은퇴 후에 다시 애틀란타로 돌아와 사업가, 행정가로 활동했으며, 호크스 팀의 프런트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2위


#_29 Paul Silas




크레이튼 대학 출신의 폴 사일러스는 64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10번으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벤치에서 활약하며 리바운드에서 두각을 보여주었고, 밥 페팃, 빌 브리지스와 같은 선배 엘리트 빅맨들로부터 꾸준히 리바운드 요령을 전수받았죠. 그는 67-68시즌에는 주전 포워드로 발탁되어 비슷한 스타일의 단신 리바운더 브리지스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평균 13.4득점, 11.7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젤모 비티-브리지스-사일러스의 프론트 코트 트리오가 걷어낸 리바운드만 해도 경기당 36개가 넘어갔죠. 그는 신체조건과 운동능력은 별 볼일 없었으나 엄청난 근성과 투지를 바탕으로 골밑 수비와 리바운드를 책임져 줬습니다. 그리고 늘 이타적인 마인드로 팀을 위해 희생했으며, 훌륭한 인품을 지녀 동료들의 신뢰도 컸죠. 호크스가 애틀란타로 연고지를 옮긴 이듬해 68-69시즌, 그는 다시 벤치 식스맨으로 돌아가 궂은일에 전념했으며, 시즌을 마친 뒤 피닉스 선즈의 신예 포워드 개리 그레고어와 맞트레이드되어 호크스를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보스턴, 시애틀 등지에서 뛰며 올스타와 올-디펜시브 팀에 선발되기도 하였고, 총 3개의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죠.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걸은 그는 샬럿 호네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지에서 감독직을 역임했습니다.




11위


#_43 Grant Long




마이애미 히트에서 오랫동안 주전 파워포워드로 활약한 그랜트 롱은 94-95시즌 개막 후 2경기 만에 스티브 스미스와 함께 애틀란타 호크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오랫동안 프랜차이즈에서 활약한 올스타 포워드 케빈 윌리스를 내주는 대가로 그 둘을 영입했죠. 윌리스로부터 주전 4번의 바통을 이어받아 부지런히 호크스의 골밑을 지킨 그는 95-96시즌에는 전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13.1득점, 9.6리바운드로 활약했죠. 그는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강한 힘과 투지를 바탕으로 리바운드를 사수했고, 또한 끈질긴 1:1 수비수였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블루-칼라 워커로서 수비, 리바운드 등 팀의 궂은일을 도맡았고, 간간이 중거리 슛이나 받아먹기, 풋-백 등으로 득점에도 가담해 주었죠. 한편 호크스는 96-97시즌을 앞두고 스티브 스미스 재계약, 디켐베 무톰보 영입 등을 위해 샐러리 여유가 필요했고, 결국 그와 스테이시 오그먼을 미래 1라운드 픽과 2라운드 픽을 각각 2장씩 받는 조건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트레이드 해버렸습니다. 그는 두 시즌을 디트로이트에서 보낸 뒤, 98-99시즌을 앞두고 FA가 되자 호크스와 1년 계약을 맺으며 컴백했죠. 그는 주로 벤치에서 식스맨으로 뛰었으며, 주전 4번인 알란 헨더슨이 부상 등으로 빠졌을 때에는 땜빵 주전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02-03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이후 방송 해설가로 변신해 현재 팍스 스포츠에서 활동 중이죠. 한편 그는 80년대 디트로이트에서 활약했던 슈팅가드 존 롱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10위


#_44 Alan Henderson




인디애나 대학 출신의 알란 헨더슨은 95 드래프트에서 전체 16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첫 두 시즌 동안에는 평범한 벤치 멤버에 불과했던 그는 3년차 때인 97-98시즌부터 부쩍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었죠. 급기야 그는 주전 4번인 크리스챤 레이트너가 감기 증세로 4경기를 빠졌을 때 대신 선발 출장하여 평균 20득점, 9.5리바운드의 깜짝 활약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후 레이트너를 벤치로 밀어내고 붙박이 주전 자리를 차지했으며, 스타팅으로 나온 33경기에서 평균 17.8득점, 7리바운드를 올려주었죠. 지난 시즌에 비해 스탯을 거의 배로 향상시킨 그는 (평균 6.6득점 3.9리바운드 ⇒ 14.3득점, 6.4리바운드) 그해 “기량발전상(MIP)”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미래의 주전 4번감으로 낙점한 호크스 구단은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에게 7년 45mil의 장기계약을 안겨주었죠. 그는 터프하고 저돌적인 스타일로 훌륭한 로-포스트 무브를 지녔고 베이스라인에서 던지는 점프슛도 제법 괜찮았습니다. 또한 그는 근성 있는 좋은 수비수였으며, 코트 위에서 늘 에너지가 넘쳤죠. 하지만 사이즈와 운동능력에 다소 한계가 있었고 자유투가 부실한 편이었으며, (통산 자유투 성공률 63.9%) 볼을 잡으면 패스할 줄 모르는 블랙홀이었죠. 한편 호크스는 99-00시즌부터 대대적인 리빌딩에 들어갔는데, 그는 나름 팀의 핵심 코어였으나 더 이상의 기량 향상은 보여주지 못한 채 그저 평범한 플레이어가 되어버렸습니다. 호크스는 그를 팔고 싶어도 실력 대비 몸값이 높아서 팔 수가 없었고, 리빌딩은 점점 수렁에 빠져갔죠. 급기야 그는 01-02시즌에 무릎 부상을 당한 후로는 완전히 벤치로 밀러나고 말았고, 03-04시즌에는 등 부상 등으로 6경기 출장에 그쳤습니다. 결국 그는 04-05시즌을 앞두고 앤트완 워커를 영입할 때 만기계약 샐러리 필러로 쓰이며 달라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되었죠. 이후 그는 클리블랜드, 필라델피아 등을 전전하다가 등 부상 악화로 인해 06-07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9위


#_32 Christian Laettner




듀크 대학 시절에 원조 드림팀에 뽑히기도 했던 NCAA의 슈퍼스타 크리스챤 레이트너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여러 시즌 동안 주전 빅맨으로 활약했으나, 루키 케빈 가넷과 갈등을 벌이는 바람에 95-96시즌 도중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되고 말았습니다. (레이트너+션 룩스 ⇔ 스퍼드 웹+앤드류 랭) 그는 본 포지션이 4번이었지만 호크스에 합류한 첫 시즌에는 팀 사정상 센터로 뛰어야 했죠. 96-97시즌에 디켐베 무톰보가 가세하자 본 포지션인 4번으로 돌아온 그는 평균 18.1득점, 8.8리바운드로 활약하며 생애 첫 올스타에 선발되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주전들의 발란스가 훌륭했던 매력적인 팀이었고, 시즌 56승을 거두었죠. 그는 포스트에서 좋은 공격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빅맨이면서도 슈팅 터치가 좋아 정교한 중거리 슛과 자유투 실력을 뽐냈습니다. 다만 운동능력이 최상급은 아니었고 보드 장악력과 수비력은 평범했죠. 그는 대학 시절 포스가 워낙 막강했기에 프로 와서는 올스타까지 지냈음에도 다소 기대에 못 미친 케이스라는 평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편 97-98시즌에는 전 시즌에 비해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여준 그는 후반기에는 신예 알란 헨더슨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벤치로 물러나고 말았죠. 결국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사인 & 트레이드 형식으로 3년 18mil에 계약하며 호크스를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달라스, 워싱턴 등을 전전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04-05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죠. 이후 그는 대학 시절 동료인 브라이언 데이비스와 각종 사업을 벌였는데, 한번은 멤피스 그리즐리스 구단을 매입하려다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유소년 농구 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8위


#_53 Cliff Levingston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소속이던 클리프 레빙스턴은 83-84시즌을 마치고 댄 라운드필드 트레이드에 매물로 끼어 애틀란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라운드필드를 파는 댓가로 레빙스턴, 앤트완 카의 권리, 2장의 2라운드 픽을 얻어왔죠. 그는 84-85시즌에는 주전 4번으로 자주 기용되며 평균 9.8득점, 7.6리바운드를 올려주었고, 이듬해인 85-86시즌 중반부터는 케빈 윌리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며 벤치에서 식스맨으로 활약했습니다. 터프하고 에너지 넘치는 수비수인 그는 팀에서 항상 궂은일을 도맡아했던 전형적인 블루-칼라 워커였죠. 특히 그는 공격 리바운드를 잘 따냈으며, 풋-백과 받아먹기 위주로 득점을 올렸기 때문에 필드골 성공률이 제법 높았습니다. 87-88시즌에 그는 윌리스와 번갈아가며 스타팅으로 출전해 평균 10득점, 6.1리바운드에 55.7%(리그 8위)의 야투성공률을 기록했죠. 한편 그 해 호크스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와 치열한 대접전을 벌였는데, 호크스가 3-2로 리드한 채 열린 6차전 막판에 100-102로 호크스가 1골 차 뒤지고 있었습니다. 호크스의 마지막 공격 때 보스턴의 집중 수비로 에이스 도미닉 윌킨스가 볼을 잡지 못한 채 얼떨결에 그에게 볼이 갔고, 그는 연장 행을 노리는 회심의 러닝-훅 슛을 던져봤으나 그만 림을 외면해 버렸죠. 그렇게 6차전을 패한 호크스는 7차전마저 통한의 패배를 당하며 시리즈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88-89시즌에 그는 윌리스가 무릎 부상으로 시즌을 통째로 결장하자 땜빵 스타팅으로 활약했죠. 여러 시즌 동안 묵묵히 음지에서 활약한 그는 89-90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자 시카고 불스와 계약하며 호크스를 떠났습니다. 그는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의 멤버로 2차례 우승을 맛보기도 하였으며, 이후 유럽 등을 전전하다가 94-95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죠. 은퇴 후 그는 CBA 등 하부리그 여러 팀의 코치직 등을 역임했습니다.




7위


#_3 Shareef Abdur-Rahim




샤리프 압둘-라힘은 약체팀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수년간 고독한 에이스로 뛰며 리그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선수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01 드래프트에서 애틀란타 호크스가 행운의 3번픽을 거머쥐자, 호크스는 이를 이용해 조지아 주 태생의 이 엘리트 파워포워드 영입에 성공하죠. 호크스는 드래프트 데이 때 밴쿠버에 브레빈 나이트+로렌젠 라이트+3번픽(파우 가솔 지명)을 내주는 대신 그와 27번픽(자말 틴슬리 지명)을 얻어왔습니다. 지난 2년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호크스는 당장의 전력 강화를 위해 긁어보지 않은 유망주 가솔 대신에 즉시전력감인 그를 택한 것이죠. 01-02시즌에 평균 21.2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한 그는 생애 첫 올스타에도 선발이 되었으며, 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전에서는 50득점을 넣는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 그는 호크스를 플레이오프까지 끌어올리는 데에는 실패했죠. 그는 유려한 포스트 무브와 탄탄한 골밑 득점 기술을 지녔으며, 스핀-무브의 달인이었습니다. 또 중거리슛도 제법 준수해서 2점 라인 안에서는 어디든 득점할 수 있는 뛰어난 스코어러였죠. 그는 빅맨임에도 자유투 성공률이 80%를 넘길 정도로(통산 81%) 정확했으며, 이를 무기 삼아 파울 유도에도 능했습니다. 하지만 튼실한 득점력과 달리 수비력은 취약한 편이었죠. 02-03시즌에 호크스는 밀워키 벅스로부터 글렌 로빈슨까지 영입하며 다시금 플레이오프 진출을 호언장담했으나, 로빈슨과 압둘-라힘의 포워드 라인은 공격력은 좋아도 수비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며 결국 실패한 조합이 되고 말았습니다. 잇따른 리빌딩 실패의 고배를 마신 호크스는 결국 03-04시즌 도중에 그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하고 말았죠. 이후 그는 무릎 부상 등에 시달리며 더 이상 예전의 클래스를 보여주지 못했고, 07-08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에 새크라멘토에서 어시스턴트 코치 및 D-리그 팀 GM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리그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6위


#_4 Paul Millsap




유타 재즈에서 7시즌 동안 활약한 폴 밀샙은 13-14시즌을 앞두고 FA가 되자, 애틀란타 호크스와 2년 19mil에 계약했습니다. 당시 호크스는 FA가 된 기존의 주전 4번 조쉬 스미스와 재계약하지 않고, 대신 그를 잡았죠. 13-14시즌에 그는 팀의 에이스 알 호포드가 흉근 부상으로 조기 시즌-아웃되자 묵묵히 에이스 롤을 이어받아 평균 17.9득점, 8.5리바운드를 올려주었고, 생애 첫 올스타 선발의 영광도 안았습니다. 이듬해인 14-15시즌, 호크스는 60승을 올리며 정규시즌 동부지구 1위를 차지했고, 그는 다른 동료 셋(제프 티그, 카일 코버, 알 호포드)과 함께 올스타에 선발되었죠. 그리고 1월 달에 호크스가 전승(17승 무패)을 기록함에 따라 그를 비롯한 팀의 주전 전원이 나란히 동부지구 “이 달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즌 막판에 불의의 어깨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정상 컨디션이 아닌 채로 플레이오프에 임했고, 정규시즌과 달리 플레이오프 내내 고전하던 호크스는 끝내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스윕당하고 말았죠. 오프시즌에 다시 FA가 된 그는 2년 전에 비해 주가가 많이 뛰어오르며 호크스와 3년 58.9mil에 재계약했습니다.


그는 포지션 대비 작은 키에 운동능력이 걸출하지도 않지만, 코트 위에서 항상 열정을 다해 플레이하는 근성 가이죠. 빅맨이면서도 뛰어난 중장거리 슛을 보유한 그는 특히 호크스에 오면서 3점슛 시도를 많이 늘렸습니다. 또한 그는 준수한 돌파력과 포스트 무브, 뛰어난 바디 컨트롤, 부드러운 마무리 기술을 바탕으로 작은 키에도 주저 없이 골밑으로 달려들어 득점을 해내죠. 그리고 보통 언더사이즈 빅맨은 수비에서 약점을 노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오히려 적극적인 수비 마인드로 팀 수비를 한층 향상시켜줍니다. 특히 그는 매우 빠른 손을 지녀서 빅맨 중에서는 최정상급의 스틸 능력을 자랑하며, 블락 타이밍이 좋아 신장 대비 뛰어난 샷 블로커죠. 또한 대학 시절 3년 연속 전미 리바운드 왕을 차지했던 경력이 있을 정도로 단신이지만 보드 장악력도 좋은 편입니다. 15-16시즌에 그는 평균 17.1득점, 9리바운드, 1.7블록슛, 1.8스틸을 기록하며 3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고,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도 등극했죠. 그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다소 기복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 4차전에서는 45득점, 13리바운드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이번 시즌을 마치고 옵트-아웃해 FA가 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 때문에 시즌 도중 트레이드 설이 나돌고 있는 중입니다.




5위


#_5 Josh Smith




오크힐 고등학교를 마친 후 고졸로 2004 드래프트에 직행한 조쉬 스미스는 전체 17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탁월한 운동능력을 뽐낸 그는 루키 시즌부터 제법 스타팅으로 기용되며 평균 9.7득점, 6.2리바운드, 1.9블록슛을 기록, 올-루키 세컨드 팀에 선발되었죠. 그리고 슬램덩크 컨테스트에 참가해 프랜차이즈 레전드인 도미닉 윌킨스의 저지를 입고 멋진 윈드밀 덩크를 터뜨리는 등의 퍼포먼스로 우승을 차지, 그 주가를 높였습니다. 그는 2년차인 05-06시즌에는 주로 3번 포지션을 소화하면서도 어마어마한 탄력을 뽐내며 평균 2.6개(리그 4위)의 블록슛을 기록하기도 하였죠. 이후 점차 4번으로 자리를 잡아간 그는 06-07시즌에는 평균 16.4득점, 8.6리바운드, 2.9블록슛(리그 2위)으로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역사상 최연소로 통산 500 블록슛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이후 09-10시즌에 최연소 1,000블록슛도 경신함) 한편 07-08시즌을 마치고 제한적 FA가 된 그는 멤피스 그리즐리스로부터 5년 58mil의 오퍼를 받았는데, 호크스가 이를 매치함에 따라 잔류하게 되었죠.


그는 어마어마한 탄력을 바탕으로 멋드러진 슬램덩크와 블록슛을 자주 선보이는 쇼-타임 플레이어입니다. 또한 보기와 달리 패싱 센스도 겸비하여 종종 멋진 어시스트 패스들을 찔러주곤 하며, 볼-핸들링도 준수하죠. 다만 점프슛이 형편없는 데도 개의치 않고 미드 레인지와 3점 라인에서 슛을 남발하며, 자유투도 부실합니다. (통산 자유투 성공률 63.2%) 그의 16피트 너머 미들슛의 성공률은 35% 이하(통산 34.5%), 3점슛 성공률은 30% 이하(통산 28.3%) 정도에 불과한데, 이를 자제시키지 않으면 공격 시도의 3분의 1 이상을 이런 비효율적인 슛을 던지는데 낭비하죠. 또 너무 블록슛에만 집착하다가 기본 수비를 등한시한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으며, 코치의 지시를 어기고 제멋대로 뛰기 일쑤여서 당시 마이크 우드슨 감독과 잦은 불화에 시달렸습니다. 그래도 지속적인 우드슨의 지도로 그는 점차 슛을 줄이고 포스트 무브를 익혀가며 정통 빅맨에 가까워졌고, 블록슛만 노리는 나쁜 수비 습관들도 점점 고쳐갔죠. 결국 그는 09-10시즌에는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발되며 훌륭한 수비수로도 인정받게 되었고, 그가 수비에서 중심을 잡아주자 팀 성적도 꾸준히 향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잘 컨트롤하던 우드슨 감독이 경질된 후로 점프슛을 난사하는 그의 나쁜 버릇이 다시 도지고 말았죠. 11-12시즌에 그는 평균 18.8득점, 9.6리바운드로 커리어-하이 기록을 세웠지만, 공격 시도의 45% 가량을 성공률 34%대의 롱 레인지 슛으로 가져가며 팬들의 속을 썩였습니다. 결국 그는 12-13시즌을 마치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4년 54mil에 계약하며 호크스를 떠났죠. 그는 디트로이트에서는 2년도 채우지 못하고 방출되는 파란을 겪기도 했으며, 이후 백업을 전전하다가 현재는 중국 리그에서 뛰고 있습니다.




4위


#_32 Dan Roundfield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주전 파워포워드로 활약하던 댄 라운드필드는 78-79시즌을 앞두고 FA가 되자 애틀란타 호크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호크스는 그를 영입한 댓가로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을 인디애나에 보상으로 내주었죠. 78-79시즌에 그는 강력한 수비력으로 팀을 이끌며 평균 15.3득점, 10.8리바운드, 2.2블록슛을 기록했습니다. 그와 7풋 센터 트리 롤린스가 지키는 호크스의 골밑은 그야말로 철옹성 같았고, 상대편에게 무수한 피블락을 선사해줬죠. 그해 호크스는 플레이오프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디펜딩 챔피언 워싱턴 불리츠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아쉽게 패배했습니다. 이듬해인 79-80시즌에 평균 16.5득점, 10.3리바운드를 기록한 그는 생애 첫 올스타 선발 및 올-NBA 세컨드 팀,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죠.


그는 빅맨으로서는 다소 빈약한 체구였지만, 워낙에 강골이고 운동능력이 출중해 경기 중에는 언더사이즈라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강인한 파워를 바탕으로 자신보다 더 큰 선수들을 상대로 터프하게 리바운드를 따냈으며, 4번 포지션에서는 당대 최고의 샷 블로커였죠. 특히 그는 피지컬 넘치는 수비력으로 상대편 에이스 포워드를 철통처럼 막아내곤 했습니다. 또한 오펜스 리바운드에 이은 풋-백으로 종종 득점에도 가담해주었고, 18피트 안팎에서 던지는 점프슛도 준수했죠. 그는 코트 위에서는 그 누구보다 거칠고 용맹한 전사였으나, 코트 밖에서는 점잖은 카리스마로 동료들을 이끈 온화한 리더였습니다. 그는 이후로도 두 번 더 올스타에 선발되었으며, 매년 올-디펜시브 팀에 단골처럼 그 이름을 올렸죠. 한편 그는 6시즌 동안 묵묵히 호크스의 안방을 사수했지만,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리빌딩을 원하던 호크스는 결국 83-84시즌을 마치고 그를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트레이드하고 말았습니다. 호크스는 그를 내준 대가로 디트로이트로부터 83 드래프트 1라운드에 지명자인 앤트완 카와 젊은 포워드 클리프 레빙스턴, 미래의 2라운드 2장을 받아왔죠. 이후 디트로이트, 워싱턴에서 뛴 그는 말년에 무릎 부상 등으로 고생했으며, 86-87시즌을 끝으로 리그를 떠나 유럽에서 1년을 더 뛴 뒤 선수 생활을 마쳤습니다. 은퇴 후에는 엔지니어로 활동한 그는 2012년에 부인과 카리브 해에서 휴양을 즐기던 중, 물에 빠진 부인을 구하려다 안타깝게도 그만 익사하여 59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3위


#_42 Kevin Willis




미시건 주립대 출신의 케빈 윌리스는 84 드래프트에서 전체 11번으로 애틀란타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에는 주로 백업 센터로 활약한 그는 2년차인 85-86시즌 도중에 클리프 레빙스턴을 벤치로 밀어내고 주전 파워포워드로 자리 잡았죠. 86-87시즌에 평균 16.1득점, 10.5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기록하기도 한 그는 불의의 발 부상을 당해 88-89시즌을 통째로 결장해야 했으나, 다행히 건강히 복귀하여 그 후로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그는 91-92시즌에 갑자기 일취월장한 실력을 뽐내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는데, 평균 18.3득점에 15.5리바운드(데니스 로드맨에 이어 리그 2위)를 올리며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죠. 당시 그는 12차례나 20-20 이상을 기록했고, 29득점-31리바운드 경기, 33리바운드 경기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7풋의 신장으로 파워포워드로선 제법 큰 편이었던 그는 근육질의 탄탄한 체격과 준수한 운동능력을 지녔으며, 골밑에서 터프한 리바운더였죠. 또한 그는 탄탄한 포스트 무브를 바탕으로 페인트 존에서 “베이비 훅 슛”으로 마무리하는 능력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훗날 샤킬 오닐의 필살기로 널리 알려진 이 훅 슛의 원조가 바로 그였죠. 그리고 한 차례의 발 부상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큰 부상이 없이 건강히 뛰었는데, 이처럼 강한 내구성은 훗날 그가 21년이나 현역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큰 키와 뛰어난 탄력에도 불구하고 팔이 너무 짧아서 세로 수비에 문제점을 노출했으며, 볼을 잡으면 패스할 줄 모르고 림만 바라보는 블랙홀이라는 단점도 있었죠.


그는 이후로도 18득점, 12리바운드 가량의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꾸준히 호크스의 골밑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93-94시즌 도중 부동의 프랜차이즈 스타 도미닉 윌킨스까지 트레이드하는 등 대대적인 팀 개편의 분위기 속에서 윌킨스 다음으로 터줏대감이던 그 역시 예외가 될 순 없었죠. 결국 그는 94-95시즌 개막 2경기 만에 스티브 스미스, 그랜트 롱 등과 맞트레이드 되어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했습니다. 이후 그는 여러 팀을 거치며 꾸준히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02-03시즌에는 샌안토니오 스퍼스 소속으로 우승을 맛보기도 했죠. 그리고 04-05시즌에는 42살의 나이에 친정팀 호크스로 복귀하여 백업 센터로 29경기를 뛴 뒤 은퇴했다가, 2년 후인 2007년에 달라스 매버릭스와 10일 계약을 맺으며 44살의 나이로 현역에 복귀, 리그 역대 두 번째로 나이 많은 현역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1위는 1948년에 45살의 나이로 2경기를 뛴 냇 히키) 그는 현재 미시간 주립대 시절 동료인 랄프 워커와 함께 “윌리스 & 워커”라는 의류 브랜드를 운영 중입니다.




2위


#_32 / #_10 Bill Bridges




빌 브리지스는 캔자스 대학을 졸업하고 61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전체 32번으로 시카고 패커스(Chicago Packers, 워싱턴 위저즈의 전신)의 지명을 받았으나, NBA로 진출하지 않고 대신 하부리그인 ABL의 캔자스-시티 스틸러스(Kansas City Steers)에 입단했습니다. 그는 소속팀 스틸러스를 우승으로 이끌고 득점왕, 리바운드왕을 석권하는 등 ABL을 평정했으나, 안타깝게도 ABL은 운영난으로 인해 1962년 말에 문을 닫고 말았죠. 한편 그가 타 리그에서 뛰는 사이 그의 드래프트 권리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로 넘어갔고, 그는 62-63시즌 도중에 호크스와 계약하며 리그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벤치에서 두각을 보인 그는 64-65시즌에는 일약 주전으로 발탁되어 평균 더블-더블(11.5득점, 10.8리바운드)을 기록했고, 밥 페팃이 부상으로 빠졌을 때 그 공백도 잘 메꿔주었죠. 이듬해 페팃이 은퇴하자 본격적으로 주전 4번으로 자리 잡은 그는 뛰어난 보드 장악력과 수비력으로 호크스의 골밑을 지켰습니다.


그는 2m도 안 되는 작은 키의 언더사이즈 빅맨이었지만, 탄탄한 웨이트와 강력한 파워를 바탕으로 보드를 사수하는 터프한 리바운더였고, 끈질긴 수비수였죠. 그는 코트 안에서는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며 동료들을 도왔고, 코트 밖에서는 훌륭한 라커룸 리더로 동료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그리 뛰어난 스코어러는 아니었으나 공격 리바운드 후 풋-백으로 종종 득점을 올려주었고, 훅 슛과 턴-어라운드 점퍼도 약간 던질 줄 알았죠. 또한 그는 늘 골밑에서 거친 몸싸움을 일삼으면서도 워낙에 강골이라 별다른 큰 부상 없이 커리어를 보냈습니다. 그는 66-67시즌에는 평균 17.4득점, 15.1리바운드를, 이듬해인 67-68시즌에는 평균 15.6득점, 13.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되었죠. 그리고 68-69시즌과 69-70시즌에 2년 연속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오르며 그 수비력을 과시했고, 70년에 한 차례 더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노장이 되어버린 그는 결국 71-72시즌 초반에 짐 워싱턴과 맞트레이드 되어 필라델피아 76ers로 이적하고 말았죠. 이후 그는 필라델피아, 레이커스 등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커리어 마지막 해인 74-75시즌에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소속으로 행운의 반지를 따기도 했습니다. 그는 호크스에서 10시즌을 뛰는 동안 7년 연속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했으며, 또한 공식 신장이 2m가 안 되는 선수들 중 평균 리바운드 역대 3위(평균 11.9개/1위는 엘진 베일러의 13.6개, 2위는 거스 존슨의 12.1개)에 올라있기도 하죠. 그는 말년에 암으로 투병하다가 2015년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위


#_9 Bob Pettit




루이지애나 주립대 출신의 밥 페팃은 54 드래프트에서 전체 2번으로 밀워키 호크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명실상부한 대학 최고의 빅맨이었으나, 6-9의 키에 200파운드가 약간 넘는 빈약한 체격조건 때문에 프로에서는 더 큰 선수들을 상대로 고전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들을 비웃듯 루키 시즌에 평균 20.4득점, 13.8리바운드를 올리며 신인왕, 올스타에 올-NBA 퍼스트팀까지 차지했습니다. 이듬해인 55-56시즌에 호크스는 연고지를 밀워키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옮겼고, 페팃은 평균 25.7득점, 16.2리바운드로 득점왕과 리바운드왕을 동시에 석권하며 사상 첫 시즌 MVP에 뽑히게 되었죠. (리그에서는 바로 이 시즌부터 MVP를 시상했습니다.) 56-57시즌에 호크스는 정규 시즌 성적이 34승 38패에 그쳤으나, 플레이오프에서 선전하며 파이널에 진출해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호크스는 객관적인 전력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37득점을 올린 페팃의 활약으로 1차전을 승리로 이끌며 기선을 잡았고,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며 승부를 최종 7차전까지 끌고 갔죠. 2차 연장까지 간 운명의 7차전에서 보스턴이 경기 종료 직전 2점차로 앞서자, 호크스의 선수 겸 감독인 알렉스 해넘은 페팃의 탁월한 공격 리바운드 능력을 믿고 허를 찌르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해넘은 코트 끝에서 끝으로 94피트짜리 장거리 인-바운드 패스를 던졌고, 백보드를 맞은 공은 해넘의 계산대로 페팃의 손에 들어갔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던진 회심의 버저비터 풋-백이 림을 돌아 나오며 우승은 보스턴에게 돌아갔죠. 이듬해에 두 팀은 파이널에서 다시 맞붙었는데, 3차전에서 보스턴의 빌 러셀이 발목 부상으로 쓰러지자 승부의 추가 기울고 말았습니다. 러셀이 정상이 아닌 보스턴은 페팃을 저지할 길이 없었고, 호크스가 3-2로 앞선 채 맞이한 6차전에서 페팃은 보스턴의 골밑을 농락하며 무려 50득점을 기록,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1년 전의 패배를 설욕했죠.


페팃은 체격은 빈약했지만 대신 상대 빅맨들을 농락할 수 있는 탁월한 스피드와 운동능력, 볼-핸들링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외곽슛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주로 페이스-업 상황에서 긴 레인지를 바탕으로 슛을 쏘거나 스피드로 수비수를 제치고 골밑으로 파고들곤 했으며, 파울을 유도하는 능력도 당대 최고였죠. 또한 그는 자신보다 더 크고 무거운 선수들을 상대로도 놀라운 투지와 근성을 바탕으로 리바운드 싸움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는 공격 리바운드의 달인이었는데, 풋-백 득점으로만 경기당 10점 가까이 넣어줄 정도였죠. 58-59시즌에 그는 호크스를 49승 23패로 이끌며 평균 29.2득점, 16.4리바운드를 기록, 생애 두 번째 MVP 및 득점왕에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크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에게 덜미를 잡히며 리핏에는 실패하고 말았죠. 이후 그는 2년 연속 팀을 파이널로 이끌었으나, 숙명의 라이벌 보스턴에게 내리 패하며 안타깝게 우승을 더 추가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61-62시즌에 호크스는 인종차별 갈등 등으로 내홍을 겪으며 팀 성적이 추락했는데, 혼란의 와중에 그는 시즌 마지막 6경기 동안 임시 감독직을 맡아 팀을 4승 2패로 이끌기도 했죠. 그 후로 그는 두 시즌 더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64-65시즌에 그만 무릎 부상을 당해 30경기를 결장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전까지는 커리어 내내 큰 부상이 없었고 웬만한 부상에도 꿈쩍하지 않았죠. 심지어 57-58시즌 도중에는 손 부상을 당해 깁스를 하고도 태연하게 경기를 치렀고, 올스타전에서 그 깁스한 손으로 28득점 26리바운드를 올리며 올스타전 MVP를 차지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30줄을 훌쩍 넘긴 그는 더 이상 철인이 아니었고, 올-NBA 팀도 처음으로 세컨드로 밀리며 데뷔 이후 10년간 지속된 올-NBA 퍼스트팀 연속 등극 기록을 마감했죠. 결국 그는 몸이 예전만 못하고 또 선수로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판단해 그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는 11년 커리어 내내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4차례나 올스타전 MVP(56, 58, 59, 62)를 차지하며 이 부문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역대 공동 1위에 올라 있죠. 또한 그는 두 차례 시즌 MVP와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역사상 최초로 통산 2만 득점을 돌파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커리어 내내 매 시즌 평균 20득점, 12리바운드 이상을 올려주었는데, 이는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그만이 가지고 있는 대기록이기도 하죠. 그밖에도 그는 프랜차이즈 한 경기 최다 득점(57점/도미닉 윌킨스, 루 허드슨과 타이) 및 리바운드(35개) 기록을 세운 바 있으며, 시즌 평균 20-20 이상(60-61시즌, 평균 27.9득점, 20.3리바운드)을 기록한 역대 세 명 중 하나(나머지는 윌트 체임벌린과 제리 루카스)기도 합니다. 그는 1971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그의 등번호 #9는 호크스에서 프랜차이즈 1호로 영구결번 되었습니다.




종합 랭킹






Epilogue


파워포워드 편에서는 고민되는 순위가 많았습니다. 1위 선정이야 식은 죽 먹기였지만, 2위인 빌 브리지스 VS 3위인 케빈 윌리스, 4위인 댄 라운드필드 VS 5위인 조쉬 스미스는 보는 관점에 따라 뒤바뀌어도 이상할 게 없는 순위였죠. 특히 라운드필드와 스미스는 글을 올리기 바로 직전까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최종적으로 순위를 바꾼 것입니다. 예전에 보스턴 편에서 빌 샤먼 VS 샘 존스를 놓고 업로드 직전에 순위를 바꾼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네요. 개인적으로는 누적 기록을 중요시하는 편이라 평소 조쉬 쪽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었는데, 비록 누적은 뒤지지만 임팩트와 당대의 위상, 그리고 팀 내에서 위치(라운드필드는 명실상부 팀의 에이스였죠.)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한 끝에 결국 라운드필드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밀샙이 현재 호크스에서 굉장히 훌륭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중인데 이번 시즌 후 옵트-아웃할 것이 분명해보여 향후 거취가 불투명한 게 아쉽네요. 아예 시즌 도중 트레이드 될 지도 모르니... 만약 이번 시즌이 호크스에서 그의 마지막 해라면 Top5 진입은 사실상 힘들 겁니다. 조쉬가 워낙에 막강하니... 중위권에 레빙스턴 VS 레이트너도 고민되는 순위였습니다. 결국은 레빙스턴의 착실한 누적과 보이지 않는 공헌 등을 높이 사서 올스타인 레이트너 앞에 두었는데, 이 역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는 순위겠죠.


이번 파워포워드 편은 전편인 스몰포워드 편에 비해 포지션의 뎁쓰가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마이너 상위권에 위치한 몇몇 선수들은 그 위상과 업적으로 따져보면 타 포지션 메이저 하위권에 충분히 랭크될 만 하죠. 실례로 존 브라운은 처음에 3번으로 분류했을 때에는 넉넉히 메이저 랭킹 안에 들었으나, 4번으로 포지션을 옮기면서 그만 마이너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존 드류와 함께 뛰었을 때 두 선수의 포지션을 구분하는 것도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죠. 얼핏 보면 드류가 더 많은 리바운드를 잡기에 파워포워드처럼 보이는데, 실상 드류는 운동능력으로 많은 리바운드를 잡긴 해도 주로 외곽을 맴도는 유형입니다. 반면에 브라운은 드류보다 리바운드 능력은 부족해도 상대적으로 더 포스트 플레이어에 더 가깝죠. 요새로 치면 브라운은 사이즈는 어중간해도 부지런한 스트레치 4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류의 경우에는 데뷔 초에 현지에서도 그런 평이 많았지만, 엘진 베일러의 짝퉁 같은 스타일이었죠.


잡설입니다만, 20위에 랭크된 조지 라트코비츠의 경우에는 사진 찾는 것도 만만찮은 작업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온 사진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그게 과연 그 본인의 얼굴인지 검증이 덜 됐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등번호가 다름...) 그런데 그 사진 외에는 대조해볼 만한 제대로 된 사진을 못 구해서 애를 먹다가 예전 시라큐즈 내셔널즈에서 뛰던 시절의 단체 사진을 하나 어렵게 구해 대조한 끝에 위 사진의 인물과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단체 사진은 해상도가 낮아 인물 대표 사진으로 보여주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 위 사진에서 다른 등번호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죠. 이처럼 옛날 선수들은 얼굴 사진 하나 찾는 것도 제법 곤욕입니다.


마이크 스캇의 경우에는 나름 롤 플레이어로 좋은 커리어를 쌓고 있었는데 하필 안 좋은 일이 터졌고, 이번 시즌에도 부상이 겹치는 등 상황이 좋지 못해 영 성적이 신통치 않네요.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는데 앞으로 호크스에서 오래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번 편에서는 순위 밖으로 밀렸지만 충분히 28위에 랭크 될 만한 선수들도 있었는데, 바로 애덤 키프와 아이반 존슨입니다. 이 둘과 28위인 샘 펠럼과의 격차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 안 나는데, 펠럼이 좀 더 오래 뛴 걸로 프리미엄을 얻어 결국 랭킹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죠.


그럼 이것으로 파워포워드 편을 마치구요, 마지막 센터 편은 구정 연휴 전에 업로드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5
Comments
2017-01-25 10:36:42

역시 1위는 그분이네요. 잘봤습니다!

2017-01-26 22:45:11

당연한 1위군요.


개인적으로 누적깡패 조쉬가 4위라고 생각했는데 5위로 밀렸군요.


예전에 윌리스옹이 애틀란타에서 뛸 때, 감독 작전지시하는데 먼산보는 조쉬 머리를 눌러서 작전판보게 하는 모습이 인상깊어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 때 멘탈만 제대로 잡혔다면 훨씬 나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을텐데 아쉽습니다.

WR
2017-01-26 22:52:17

누적깡패 조쉬는 사실 시리즈 준비하는 몇개월 내내 죽 잠정 4위였습니다. 거짓말같이 글 올리려고 마무리하는 그 순간에 마음이 확 바꼈습니다. 웬지 그날따라 라운드필드 옹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가 않더군요. 조쉬에게는 개인적으로 미안했지만 누적 차이가 좀 나긴해도 라운드옹과 조쉬는 근본적으로 그릇이 다른 선수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2017-01-26 22:55:41

조쉬한테 미안할 게 뭐있나요?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태업성 플레이하던 선수에게는 5위도 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문제는 태업안하고 본인이 잘하는거에 집중하고 성실하게 더 잘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거죠.

WR
2017-01-26 23:10:24

개인적으로는 참 애증이 교차하는 선수라서... 10여년 전 처음 이 작업 손댔을 땐 저 밑에서 언급도 못되던 애송이가 짧지 않은 시간 호크스에서 족적을 남겨준게 괜히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연인처럼 늘 싸우고 화해를 반복했던 우드슨 감독이 좀 더 지휘봉을 오래 잡았더라면 그래도 조금 더 컨트롤이 됐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bos
74
8778
24-04-16
min
79
12674
24-04-16
atlbkn
40
6304
24-04-13
por
69
14230
24-04-12
hou
33
12058
24-04-08
orl
43
7948
24-04-10
dalsac
48
8347
24-04-05
dal
57
20164
24-04-04
gswind
89
11114
24-04-02
hou
62
11120
24-03-23
bos
125
31266
24-03-18
atlgsw
91
23007
24-03-18
bosden
59
7784
24-03-16
den
125
26123
24-03-14
lal
44
8874
24-02-24
den
93
19220
24-02-20
dal
81
16830
24-02-17
dal
79
9200
24-02-06
bos
54
6373
24-02-15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