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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스티브 내쉬의 넘쳐흐르는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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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5-03-23 09:24:32

원문: http://www.si.com/nba/2015/03/21/steve-nash-retirement-legacy-lakers-suns-mavericks-santa-clara


스티브 내쉬의 커리어와 은퇴에 대한 Sports Illustrated의 Lee Jenkins의 글입니다.

원문으로는 좋은데 번역하니 안 사는 것 같아서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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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에서, St. Michaels University School과 G.W. Graham Secondary School의 경기가 열렸다. G.W. Graham의 포인트가드는 178cm, 67kg의 Gabe Mannes라는 선수로, 그는 코트 위로 올라설 때 운동화 바닥을 한 번 문지른다. 인바운드 패스를 잡기 전에는, 손가락 끝을 살짝 핥는다. 슛을 쏘고 난 후에는, 손목을 직각으로 한 팔로우스루 자세를 유지한다. 그의 감독은 이를 보고 "모든 습관 하나하나가 완전히 똑같아요"라고 말한다.


"유산(Legacy)"이라는 말은 스포츠세계에서 남용된다. Legacy은 공식적인 정의는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보통 쓰는 의미와는 다르다. 보통 우리가 Legacy라고 할 때는 운동선수가 커리어 동안 모은 수상내역, 각종 기록과 우승 트로피를 일컫는다. 하지만 그건 사실 이력서에 적는 항목들일 뿐이다. 내쉬가 미래에 남기는 것은, 정말로 그의 유산이다.


Gabe Mannes가 그의 운동화를 문지를 때, 그게 바로 스티브 내쉬이다. 고란 드라기치가 up-and-under무브를 쓸 때, 그게 바로 스티브 내쉬이다. 토니 파커가 한 포제션에서 연달아 픽앤롤을 3번 할 때, 데미안 릴라드가 스크린 아래로 가는 어리석은 수비수를 보고 슛을 날릴 때, 라존 론도가 안으로 돌파한 후 다시 돌아나오면서 컷인하는 선수한테 침착하게 패스를 할 때, 그게 바로 스티브 내쉬이다. 골든 스테이트가 스몰라인업을 쓸 때, 애틀랜타 호크스가 속공을 할 때, 어디선가 어떤 선수가 트랩 수비를 쇄도해오는 빅맨한테 연결되는 섬세한 패스로 뚫어낼 때, 그 모든 것의 일부분은 스티브 내쉬로 연결될 수 있다. 그의 유산은 크리스 폴, 카이리 어빙, 러셀 웨스트브룩과 리키 루비오 안에 살아있다. 그들 스스로는 그걸 눈치채지 못해도 말이다. 그의 유산은 Gabe Manees와 같은 캐나다의 어린 청년들 안에 살아있다. 이 모든 포인트가드들은 스티브 내쉬가 만들어낸 자유를 만끽하며 플레이한다. 스테판 커리가 말하기를, "내쉬는 새로운 플레이방식을 창조해냈어요. 내가 편안한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18시즌 동안 리그의 흐름을 개척한 내쉬는, 이제 NBA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쉬의 커리어의 마지막은 LA에서의 지루하면서도 끔찍한 3년이었다. 등의 신경손상은 그가 속도를 내거나, 방향을 바꿀 때마다 통증이 더 심해졌다. 속공은 그에게 잔인하였고, 원정경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는 점차 증가하는 통증은 견딜 수 있었지만, 점차 감소하는 민첩성은 결국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는 스크린을 돌아나와 각도를 활용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더 이상 스티브 내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연습시간은 레이커스 연습시설의 헬스장에서, 경기시간은 스테이플스 경기장의 헬스장에서 보냈다. 그는 컨디셔닝 코치 Tim DiFrancesco에게 항상 "Keep chipping away(계속 노력해야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두 남자 모두 지쳤다. "매일매일이 코 위를 망치로 두드려맞는 것과 같았어요"라고 Difrancesco는 말한다. 결국 바닥난 것은 내쉬의 정신력이었다.


그는 작년에 15 경기만을 뛰었고, 한 경기가 끝날때마다 3주 동안은 휴식을 취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경기 다음날 아침, 그는 항상 "젠장, 나 이대로 끝난건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끝난건가? 사라지고 마는건가?" 그의 초조함은 고통으로 이어졌다. 결국 지난 10월 레이커스의 내쉬 시즌아웃 발표는, 그에게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의 마음은 집착을 버리지 못했지만, 그의 몸은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그의 주변인들은 내쉬가 이미 그때 은퇴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식적인 은퇴선언은 지난 수요일까지 미뤘다.


"모든 운동선수는 두번의 죽음을 겪어요. 매우 힘든 일이죠. 항상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요. 과거의 나를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해요."라고 내쉬는 말한다. 그는 애도의 여러 과정 중에 스스로가 어디쯤에 있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그는 피닉스에서의 2회 MVP도 아니고, LA에서 스스로 짐도 못 옮기던 환자도 아니다. 

"저는 아직 대학장학금을 한 학교로부터 밖에 못 받은 캐나다의 꼬맹이에요." 그는 농구를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Santa Clara 대학의 신입생이다. 그는 여름방학동안 게리 페이튼, 제이슨키드와 연습하면서 놀림받던 학생이다. 그는 NBA 스카우트들로부터 NBA선수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출생지가 잘못되었다고, 걷는 방식조차도 잘못되었다고 지적받던 학생이다.




1996년 드래프트 당시 피닉스의 스카우트들은 내쉬보다 시라큐스의 John Wallace를 선호했다. 하지만 피닉스는 얼마 전에 33살의 Donnie Nelson을 어시스턴트 코치고 고용했었고, 넬슨은 St. Michales 고등학교 시절 스타선수였던 내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넬슨은 내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 이후의 내쉬를 계속 지켜보면서 넬슨의 생각은 바뀌었다. 1996년 드래프트 당일, 피닉스 구단주 제리 콜란젤로는 넬슨에게 "내쉬에 대해 느낌이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넬슨은 "만약 내쉬가 NBA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당장 날 짤라도 돼요"라고 대답하였다.




NBA에 입성할 당시 내쉬 제이슨 키드와 케빈 존슨의 뒤를 잇는 팀의 3번째 포인트가드였다. 그는 매일 2번씩 연습을 감행하면서 플로터와 크로스오버를 익혔다. 190cm, 88kg의 캐나다인으로서는 NBA 선수가 되는 것만 해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선천적인 등 기형을 가진 채로, 17000점과 10000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뭔가 불편했어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항상 훈련했어요. 항상 체육관에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집착했었어요. 그 덕분에 저는 지금의 선수가 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감옥에 갇힌 느낌이었어요."

그가 8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되었을 때도, 그는 즐거움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제가 만약 조금만 긴장을 늦추거나, 무엇인가에 만족한다면, 그 모든 것이 바로 무너져내려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항상 다음날에도 일찍 체육관에 들어가서, 그런 만족감을 밀어내야만 했죠."




해변 근처에 여유롭게 앉아있는 현재의 내쉬는 여유로워 보인다. 그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양말 없이 신발을 신고 있다. 그는 항상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 안에 숨겨진 열정을 감춰왔지만, 요즘은 좀 더 자주 웃게 되었다. 그는 최근 5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슛을 쏴본 적이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마치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자랑하는 알코올 중독자와도 같다. 


"저에게 있어 슈팅은 중독이었어요. 집착이었죠. 너무나 오랜 시간 스스로에게 부담을 지웠어요. 이제는 드디어 절벽 끝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으니까, 안심이 되기도 해요."


그는 농구가 가져다 준 흥분을 어떻게 대체할지 아직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 애초에 그 흥분을 대체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은 매주 축구를 뛰고, 그의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개를 산책시켜준다. 언젠가는 적당한 배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옛 피닉스 경기 테이프를 틀어보거나, 스테픈 커리와 스스로를 비교하는 그런 타입의 사람은 아니다. 그는 "유산"이라는 말에 손사레를 치고, 그가 NBA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말에는 그냥 웃기만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었다면, 누군가는 그 유산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포인트가드로부터의 패스는 그의 여러 후계자들에게 이미 전달되었다.






NBA의 포인트가드 혁명이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 정확히 집어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1999년 봄의 댈러스를 꼽아볼 수 있다. 도니 넬슨은 피닉스에서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직했었고, 그의 아버지인 Don Nelson 감독을 설득하여 내쉬를 영입했다. 도니의 판단은 옳았었지만, 그것이 증명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댈러스에서 내쉬의 첫 시즌은 그의 커리어 최악의 시즌이었다. 도니는 내쉬가 왜 계속 슛하기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 포인트가드입니다. 저는 패스하고 싶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라고 내쉬가 말했다. 1999년 즈음에는, 많은 포인트가드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도니의 대답은 "개소리 하지마"였다. "너는 도미넌트한 선수야." 현대농구의 대부분의 코치들과 마찬가지로, 도니는 최고의 포인트가드는 패스를 잘하는 것만큼 슛을 잘 쏴야 하고, 패스와 슛은 서로를 보완하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3월 24일에, 댈러스는 휴스턴을 상대로 경기를 졌고 내쉬는 야투 1/10을 기록했다. 더크 노비츠키는 내쉬가 성공한 그 한 개의 야투를 아직도 기억한다. "저는 벤치에 있었고, 경기장의 팬들은 끊임없이 내쉬한테 야유를 퍼부었어요. 야유가 제일 심해졌을 때, 내쉬는 최고속력으로 코트를 뛰어가서, 3점슛을 쏴서 집어넣었어요. 그때 '이자식 깡따구가 장난 아닌데'라고 생각했었죠."


노비츠키와 내쉬는 함께 댈러스 프로농구를 부활시켰다. 댈러스는 원래 3팀 트레이드를 통해 두 선수를 영입했었지만, 노비츠키는 드래프트 픽이었고 유럽리그에서 2년을 더 뛰고 싶어했다. 댈러스 프런트는 일단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내쉬를 만난 다음에 결정하라고 노비츠키를 설득하였다. 결국 노비츠키와 내쉬는 같은 아파트의 룸메이트가 되었고, 경기가 없는 날이면 매일밤 HORSE(이거 농구게임인데 한사람이 슛 성공시키면 다른 사람이 그대로 같은 위치에서 슛해야되고... 한국말로 뭐라 그러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_-;;)를 했고, 픽앤롤을 같이 연습하였다.



댈러스는 내쉬를 매우 아끼게 되었지만, 그의 등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고, 결국 2004년에 피닉스가 내쉬를 뺏어갔다. "그때 당시 우리는 어떤 식으로 플레이할지도 전혀 생각 못했었어요"라고 당시 피닉스의 감독 마이크 댄토니는 회상한다. 유럽에서 감독을 할 당시, 댄토니가 감독하는 팀들은 마치 농구경기를 사격연습처럼 대하였다. 서로 간격을 벌리고 3점라인 뒤에 선 다음에 마구 슛을 쏘는 것이다. 

"NBA에서는 그런 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을지 두려웠어요. 다들 '그렇게 하면 선수들이 죽어나고, 넌 결국 짤릴거야'라고 하더라고요." 

그 해 여름 댄토니는 제리와 브라이언 콜란젤로 형제와 만났고, 콜란젤로 형제는 댄토니에게 그가 꿈꿔오던 말을 해줬다. "감독님이 생각하기에 가장 뛰어난 5명을 쓰세요." 댄토니는 당장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센터로, 숀 매리언을 파워포워드로 옮겼다. 당시에는 혁명적이었던 스페이싱이 가능한 스몰라인업으로, 내쉬는 그 덕분에 농구의 오펜스를 재창조해낼 수 있었다.


"내쉬는 훌룡한 포인트가드가 탁 트인 코트에서 마음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줬어요"라고 댄토니는 말한다. "경기가 폭발적으로 변해요."

결국 그들은 우승에는 실패하였기 때문에, 선즈는 그저 조금은 신기한 7초짜리 B급 팀으로 폄하하기 쉽다. 하지만 그 때의 선즈는 지금 다른 몸으로 새롭게 부활하여 날개짓하고 있다. 끊임없이 픽앤롤을 전개하는 샌안토니오, 골든 스테이트, 애틀랜타, 휴스턴의 경기를 보라. 이들 팀에서 선즈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처음에는 그냥 카오스처럼 보였어요"라고 그랜트 힐은 말한다. "하지만 점차 다른 팀들이 선즈의 스타일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스티브 내쉬는 그것에 제일 많은 기여를 했어요. 예전에는 포인트가드는 공을 받아 하프라인을 넘고 인사이드나 윙에게 패스하기만 했죠. 내쉬는 아예 새로운 방식을 보여줬어요. 팀에 커리나 릴라드, 웨스트브룩, 크리스 폴 같은 선수가 있으면, 그냥 그들에게 팀을 넘겨주면 되는거에요. 몇 개의 세트플레이나, 약간의 구조는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직감을 믿고 맡기는거죠."


그랜트 힐은 2007년에 피닉스에 영입되었고, 갑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총알패스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만약 패스를 하나 놓쳐서 못 잡으면, 스티브는 "미안 내 실수"라고 하고는, 바로 다시 저에게 패스를 날렸었어요"라고 힐은 기억한다. 내쉬 옆에서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 힐의 커리어도 다시 부활하였다. 이는 채닝 프라니, 마신 고탓, 그리고 수십 명의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팀 토마스의 예를 들어보자. 커리어 36.9%의 3점 슈터인 그는 선즈에서 뛴 딱 1년 동안 3점 성공률이 42.9%로 뛰었다. 그는 그 한 시즌 덕분에 클리서프로부터 24밀짜리 계약을 받았고, 클리퍼스로 가서는 아무도 다시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쉬의 유산은 포지션과 국경을 초월한다. 캐나다의 빅토리아에서 자라나던 어린아이일 당시, 내쉬는 캐나다 출신의 수준급 NBA 선수는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었다. 현재와 비교해보면, 지난 4년만 하더라도 캐나다는 5명의 로터리픽과 2명의 1번픽을 배출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내쉬를 묘사할 때 "그는 주변 사람들을 더 낫게 만든다"라고 한다. 그 말은 북미 전체에 울려퍼진다. 그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 딱 한 곳을 제외하고는.





2012년 여름에, 내쉬는 선즈를 떠나 레이커스나 닉스, 혹은 랩터스로 이적할 기회를 가졌다. 내쉬는 그의 친구인 현 워리어스 감독 스티브 커에게 "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어. 나는 가장 큰 위험과 가장 큰 보상을 원해"라고 말했다. 결국 LA와 내쉬 및 4개의 드래프트 픽을 교환한 사인앤트레이드는 한 시대를 상징한 선수와 구단 모두에 족쇄를 채웠다. 내쉬는 딱 한경기를 뛰고 왼쪽 다리를 부러뜨렸다. 얼마 안 지나 내쉬는 재활을 하고, 레이커스는 리빌딩을 하고 있었다. 레이커스가 포기한 드래프트픽을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드와이트 하워드가 휴스턴으로 떠나고 파우 가솔이 시카고로 이적한 다음에도, 내쉬는 여전히 레이커스 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등 부상은 낫지 않았고, 그의 9.7밀짜리 연봉은 처치곤란이었다. 캐나다는 물론 애리조나와 택사스에서도, 내쉬의 이름은 곧 황금시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LA가 있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그의 이름은 암흑기를 연상시킨다.


"제가 본 선수는 어항 속에 갖혀, 빙빙 돌고 위아래로 헤엄치며 어항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유리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람이었요"라고 레이커스의 컨디셔닝 코치 DiFrancesco는 말한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항을 두드리면서 "제발 스티브 정신차리고 헛짓거리 좀 그만해'라고 소리치고 있었죠. 그들에게는 계약이 끝날 때까지 내쉬가 대충 시간을 떼우는 것처럼 보였을거에요. 하지만 저는 내쉬와 함께 어항 속에 있었어요. 제가 보기에는, 내쉬처럼 어항 밖으로 뛰쳐나갈려고 죽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결국 지난 10월 레이커스가 내쉬의 시즌아웃을 선언함으로써 어항의 유리가 깨졌을 때, 내쉬는 당장 그의 영화제작사와 재단과 미팅을 잡으며 인생의 2막에 뛰어들었다. 스스로가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일찍 은퇴한 어떤 사람은, 내쉬에게 "그릇을 비우라"라는 불교의 명언을 알려주었다. 이는 마음을 비워야만 새로 채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레이커스의 연습시설에 나타나지 않는 내쉬는 많은 레이커스 팬들의 원성을 샀지만, 내쉬는 그때 이미 그릇을 비우는 중이었다. 그가 레이커스의 로스터에 남아있던 유일한 이유는 레이커스가 그의 만기계약을 트레이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어쨋든 레이커스는 내쉬에게 계속 월급을 주고 있었고, 결국 내쉬가 두 달 전에 연습시설에 돌아와 루키 줄리어스 랜들과 조던 클락슨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개막전에서 다리가 부러진 랜들은 슈팅자세 연습밖에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내쉬는 랜들에게 슛쏘고 팔로우쓰루에서 손목을 쭉 뻗으라고 가르쳐줬다.


"레이커스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건 잘 알고 있어요"라고 내쉬는 말한다. "결국 다 망했죠. 하지만 저는 이 프레셔를 원했어요. 저는 이 도전을 원했고, 후회하지 않아요."


그는 LA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맨하튼 비치에 그는 10살짜리 쌍둥이 딸, 그리고 4살짜리 아들과 함께 자리잡았다. 내쉬는 이혼하여 자녀의 양육권을 전처와 나누고 있다. 드디어 그는 체육관에 갈 걱정할 필요없이 애들에게 여유롭게 책을 읽어줄 수 있다. 


빅토리아에 있는 그의 어릴적 집은 동네 놀이터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아버지 존은 프로 축구 선수로, 내쉬가 골을 넣을때보다 패스를 했을 때 더 칭찬하였다. "아버지를 기쁘게 만든 건 패스였어요. 아버지로부터 받은 칭찬과 사랑은, 제가 점점 더 패스하고 싶게 만들었죠." 그는 자신의 부모님과 같이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제 아이들이 스포츠를 사랑하도록 키우고 싶어요. 하지만 조심해야 하죠. 제가 다 할 수는 없어요. 저는 그저 환경을 조성하고, 그들이 뭘 하던 응원할 뿐이죠."


내쉬의 부모님은 아직도 아들이 신경쓰인다. 아들은 괜찮다고 해도, 그의 등 부상이 만성화될까봐 늘 걱정한다. "그의 몸은 아직도 50년은 더 작동해야 되자나요"라고 그의 어머니는 말한다. 


내쉬는 이미 캐나다 국가대표팀의 GM이다. 스티브 내쉬 제단은 아동복지를 위해 지난 10년간 475만 불을 모금하였다. 그가 사촌동생과 함께 세운 영화제작사는 벌써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다큐멘터리 여러 개를 제작하였다. 농구, 자선활동, 영화제작. 내쉬는 이 중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고, 아무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내쉬는 샐러드를 먹은 후 아들을 픽업하러 학교에 가고 있다. "그냥 최대한 자유롭고, 아무런 영향도 안 받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야 제 인생의 한 부분에 작별인사를 하고, 다음 부분이 어디에 갈지 알 수 있죠."


현재 그의 그릇은 비워져 있다. 그가 남겨놓고 간 그릇은, 지금도 넘쳐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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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5-03-23 10:25:30

잘 봤습니다
부디 그가 원하는 것처럼 절벽 끄트머리를 잊어버렸으면 합니다
아련하게 느껴지지만 상실감을 잘 이겨내길~!

2015-03-23 11:23:33

좋은글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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