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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콘리를 '과소평가된' PG라고 부르지 말아라 -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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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5-02-03 10:42:40

2015년 1월 21일자 grantland에 올라온 칼럼입니다.

평소양질의 번역글을 항상 즐겁게 읽기만 하던 유저지만, 제일 좋아하는 팀의 최고 페이보릿 선수에 대한 칼럼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순 없었네요.... 
그래서 어설프게나마 번역을 시작했는데, 너무너무 길더군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2편으로 나눠서 올리려고 합니다. 
전반부는 콘리의 프로 이전 시기와 드래프트 첫 시즌, 후반부는 그 이후 내용에 대해서입니다.
수많은 의역과 오역과 날림번역이 있습니다만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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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어느 경기의 하프타임 시간, 라이오넬 홀린스는 마이크 콘리를 호되게 꾸짖고 있었다. 그는 비속어를 곁들여가며 콘리의 퍼포먼스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콘리는 자신이 그렇게 부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날 그리즐리스는 전반에만 11개의 턴오버를 기록하는 등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이 찌부둥한 상태였다. 그 경기는 스페인 농구팀인 "Caja Laboral"과의 시범경기였고, 그들은 NBA팀을 상대로 풀코트 프레싱을 펼치고 있었다. 홀린스는 콘리에게 "너는 지금 NBA에서 뛰어본 적도 없는 선수에게 꼼짝도 못하고 있다고!" 라며 질타했다. 
감독님의 질책에 콘리는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런 자신을 자제했다. 콘리는 스스로에 대한 자제력과 강한 극기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그가 그의 아버지인 콘리 시니어(올림픽 육상 세단뛰기 금메달리스트였던)에게서 항상 칭찬받고 인정받아왔던 그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하프타임 이후, 콘리는 팀의 10-0 Run을 진두지휘했으며, 그날 27점을 기록하면서 멤피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홀린스가 멤피스의 감독으로 있었던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콘리는 자신과 홀린스 감독은 위와 유사한 순간들을 아마 수백번은 함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NBA 포인트가드와 엄격하고 까다로운 코치(그것도 한때 PG 포지션에서 챔피언쉽 레벨에 있었던..!) 사이의 관계는, 마치 바닷물의 조수가 들어차고 빠져나가는 것처럼 항상 서로 주고받아 왔던 그런 것이었다.
"그땐 제가 잘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 콘리는 말했다. 
"감독님은 항상 절 감독님 옆으로 불러세워서 크게 혼내시고 호되게 꾸짖으셨죠. 저는 그게 감독님께서 제가 갖고 있는 무언가를 보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감독님은 제가 최고가 되길 원하셨어요. 저를 한계까지 밀어붙이시길 원하셨죠."
당시 콘리는 스스로를 경기를 조율하고 팀원들을 서포트하는 '테이블 세팅 포인트가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순간순간 발휘되는 그의 스코어링 부문에서의 폭발력은 그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를 부연해주고 있었다.
"저는 제가 '10-point guy'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감독님께선 제가 그때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고 계셨죠."

그리고 오늘날, 콘리가 없는 그리즐리스의 성공시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홀린스는 브룩클린 넷츠로 떠났지만, 오랫동안 꼬리표처럼 콘리에게 붙어다녔던 "과소평가된"이란 표현은 이제 구식이 되었으며, 더 이상 그에게 적용시키기가 민망해졌다. 그는 리그 내에서 가장 완벽한 마에스트로들 중 한명이며, 리그 내에서 가장 완벽한 팀들 중 하나를 지휘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콘리는 (거칠고 터프하며) 감정적인 팀 로스터를 흔들리지 않게 지탱하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잭 랜돌프나 마크 가솔도 그렇지만, 멤피스의 성공에 있어서 마이크 콘리는 절대적입니다." - 콘리가 NBA에 입성할 당시 멤피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조니 데이비스(Johnny Davis)의 말이다. 
"콘리가 없는 멤피스는 그냥 아예 다른 팀입니다. 콘리는 이제 정말 NBA 최고 PG가 되었죠."

처음부터 항상 그래왔던 것은 아니었다. 2007년 전체 4번으로 드래프트된 콘리가 도착했을 당시, 그리즐리스 구단은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콘리는 PG 포지션에서 빡빡한 경쟁에 직면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루키 시즌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부상도 겪었다. 그는 더디게 성장했고, 구단은 그를 트레이드시키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 당시, 멤피스는 매 시즌마다 새로운 PG를 드래프트하고 트레이드하고 새로 영입할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서 그 기간 동안, 콘리와 경쟁하고 그의 자리를 뺏어갈 것처럼 생각되는 새로운 얼굴들이 항상 팀 내에 존재했었다.
"그땐 정말 누구든지 쉽게 절 밀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 라고 콘리는 당시를 회고했다. 
"정말 불투명한 상황이었죠. 언제든지 밀려나서 그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PG 포지션은 종종 NBA에서 가장 빠른 - 혹은 가장 가파른 - 성장곡선을 겪는다고 여겨진다. "PG들은 경기장 위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해내야만 하니까요." - 콘리가 드래프트될 당시 멤피스의 포워드였던 마이크 밀러의 말이다. "포인트가드들은 항상 독료들을 북돋아주어야 하죠. 더군다나 진짜 힘든 일이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리더쉽도 함께 갖추어야 하구요."
밀러의 말처럼, 그리즐리스에서 성공을 이룩하기 위해 콘리는 리스펙트에 관한 면과 독단적인 - 나서서 자신감있게 주장하고 이끌어가는 - 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방법을 배워나가야만 했다. 그는 팀메이트들을 지원하고 서포트해줄 때와 그들에게 명령하고 지시해야 할 때에 대한 감각을 지녀야만 했다.

"콘리는 아마도 그때 스스로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 콘리의 루키 시즌을 멤피스에서 함께했던 베테랑 PG 데이먼 스터드마이어(Damon Stoudamire)의 말이다. 
"하지만 콘리는 아마 무슨 일을 맡겨도 해낼 수 있었을 겁니다. 다들 그가 그렇게 높은 드래프트 순번을 보장받았을 정도의 선수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들 있었지만, 콘리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겪어내고 극복해내는 'Calmness'를 보유한 선수였죠. 콘리는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친구에요. 그건 엄청난 거고, NBA에선 특히 더 그렇죠."



NBA에서 왼손으로 가장 많은 득점을 만들어내는 선수 중 한명이지만, 콘리는 원래부터 왼손잡이는 아니었다.
"마이크가 왼손으로 자유롭게 레이업을 하고 피니쉬를 해내기 전까지는, 아직 NBA에 도달할 만한 레벨이 아니었죠." 아들에 대한 콘리 시니어의 설명이다.
콘리 시니어는 아이재이아 토마스가 일리노이주 전역에 신동으로 명성을 떨치던 시기 시카고에서 자랐다. 아칸소 대학의 신입생 시절 농구부와 육상부에서 뛰었던 콘리 시니어는 결국 농구를 포기하고 육상에 헌신하기로 결정했고, 미국 대표로 출전한 1992년 올림픽 세단뛰기에서 미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하지만 농구는 콘리 시니어의 첫사랑과 같은 것이었고, 그는 자신의 아들과 그것을 공유했다.
"마이크는 13개월때부터 공을 가지고 놀았어요." 라고 그는 회상했다.
"저는 마이크에게 공을 내줬고, 아들녀석은 자기가 무슨 손을 쓰는지 알기도 전부터 왼손으로도 곧잘 슛을 쏘곤 했죠. 어릴 때부터 이미 왼손으로도 슛을 쏘긴 했었어요."
콘리 주니어는 자신이 아이들용 규격 사이즈의 골대에 슛을 쏘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가 림 위로 공을 날려보내는 데에 가장 많이 썼던 방법은 엉덩이로부터 몸 왼쪽으로 힘을 주고 팔을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어떤 까닭인지, 농구할 때 저는 왼손으로 그런 플레이들을 했어요. 그리고 '아마 내가 농구부에 들어간다면 그냥 왼손잡이가 되겠구나' 하고 느꼈죠."

콘리 시니어가 인디애나폴리스에 자리를 잡으면서, 콘리의 가족은 1990년대 후반 아칸소에서 인디애나로 이사를 했다. 콘리가 12살이 되었을 무렵, 그는 Terre Haute에서 열린 어느 토너먼트에서 안경을 끼고 키가 껑충하게 큰, 약간 어리버리한 듯한 한 소년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그렉 오든(Greg Oden)이었다. 두 소년은 금방 친해졌고, 많은 설득 끝에 오든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콘리 시니어가 일하는 AAU팀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했다. 오든은 콘리 가족과 동거하면서 그해 여름을 보냈다. 콘리와 오든 사이의 오랜 우정의 시작이었다. 그들이 함께한 팀은 재능들을 확보했고 승승장구했다. 미래의 NBA 플레이어들인 조쉬 맥로버츠, 에릭 고든, 데콴 쿡과도 합류하였다. 4년이 지나는 동안, AAU High Level에서 콘리와 오든이 속한 Spice Indy Heat 팀은 단 2번의 패배만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정말 좋은 팀들을 모두 꺾었죠." 콘리 시니어는 회고했다.
"거의 매번, 그리고 무엇보다 거의 대부분을 엄청난 점수로 이기곤 했어요."
오든을 포함하여 팀원들은 모두 (그 레벨의) 슈퍼스타로 발돋움했고, 오든은 향후 역대급 포텐셜을 가진 최고의 빅맨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조용하고 작은 포인트가드는 쉽게 간과되기 일쑤였다.
"콘리는 언제나 안정적이고 꾸준했고, 또 그렇게 화려한 걸 즐겨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어요." 조쉬 맥로버츠는 말했다. "하지만 콘리는 언제나 제대로 된 플레이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게임이 끝나고 보면 어느새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고 있기도 했죠. 콘리는 항상 그랬습니다."

그가 지휘한 팀의 유쾌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콘리 시니어는 계속해서 그의 선수들에게 일정한 선을 상기시켰다. "콘리의 아버님이 항상 우리에게 주지시킨 게 있어요." 라고 오든은 설명했다.
"너무 들뜨지도 말고, 너무 쳐지지도 말아라. (제 생각엔) 그게 콘리가 어릴때부터 커온 방식이었죠."
콘리 시니어는 그의 아들이 아이재이아 토마스처럼 신체적인 재능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과 경기 감각을 바탕으로 플레이하길 원했다. 콘리 부자는 토마스의 아들인 Zeke가 AAU팀에 합류할 때 토마스로부터 직접 배울 기회를 얻기도 했다.
"콘리 그 친구는 참 대단한 볼 핸들러였어요." 토마스는 콘리를 그렇게 회고했다.
"그 친구는 양손을 다 썼고, 그래서인지 자신의 점프슛에 대해선 큰 확신이 없는 편이었죠. 어떨 때는 오른손을 쓰고, 어떨 때는 왼손을 쓰고, 또 어떨 땐 양손으로 슛을 쏘기도 하더라구요. 그렇지만 그 친구는 항상 '어떻게 농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봐준 건, 단지 그 친구가 자신의 슛에 확신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었죠."


콘리와 오든이 Lawrence North 고등학교로 입학했을 때, 오든은 누구보다 확실한 NBA 유망주로 여겨졌다. 하지만 팀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콘리였다는 것을, 그들의 코치인 잭 키퍼(Jack Keefer)가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경기 시작 전 오든이 부상으로 벤치에 머물러야 했을 때, 콘리는 키퍼 코치가 라커룸에서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전통적인 코치의 역할이지만, 이번에는 그 관계가 반대로 적용되었다. 콘리는 키퍼에게 다가가 "코치님, 우리가 이길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겨보일게요."라고 다독였다.

"콘리는 다른 동료들을 일일히 보살펴주느라 그렇게 많은 득점을 하는 편은 아니었죠. 그렇지만 그 경기에서 콘리는 (오든 대신) 득점을 해줘야 했고, 실제로 38점을 넣으면서 환상적인 플레이를 해줬어요. 우리는 이긴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던거죠." - 키퍼의 설명이었다.

콘리와 오든은 함께 3번의 챔피언쉽 타이틀을 따냈고, 모교인 Lawrence North에 103승 7패라는 기록을 안겨주었다. 사실 오든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이 7풋 센터는 대학을 건너뛰고 바로 NBA 드래프트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든을 포함한 그 학년의 졸업생들은 'One - and - Done으로 불리우는 NBA 나이제한 규정의 첫번째 적용 대상이 되었다. 오든은 키퍼 코치에게 어느 대학에 가는 것이 조언을 구했고, 키퍼는 오든에게 "어디든 콘리가 가는 곳에 함께 가는게 좋을 것이다"라는 조언을 했다.
"오든은 콘리와 함께 훌륭한 시간들을 보냈죠." - 키퍼는 말했다.
"오든은 고등학교에서 얼추 야투율이 86%정도 나왔어요. 콘리가 림에서 한 2인치 정도 거리에 건네주면 잡아서 덩크하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스텝만 밟고 있으면 떠먹여주는 셈이었습니다. 오든 같이 그렇게 큰 빅맨이 그 정도로 자기를 서포트해주고 케어해줄 누군가를 만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죠. (그 또래의) 모든 가드들은 스스로가 30점을 넣길 원하니까요. 콘리는 절대 그러지 않았어요."

많은 유명한 코치들이 Lawrence North를 방문했고, 그들의 타겟은 거의 오든이었다. 키퍼 코치는 당시 듀크대학의 감독이었던 Mike Krzyzewski 정도가 "One-and-Done" 선수들의 리크루팅에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인디애나의 코치인 Mike Davis에 대해서는 "그는 이미 Armon Bassett에서 PG를 데려오려 했기 때문에, 오든이 아닌 콘리에게는 그렇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당연히 오든은 Hooiser를 패스해버렸죠." (Hooiser - 인디애나 주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

키퍼 코치는 오하이오 주립대 코치인 테드 마타(thad Matta)와 이미 친분이 있었다.
"콘리와 오든은 그를 잘 따랐어요. 마타는 정중하게 두 친구들을 오하이오 주립대로 데려갔고, 제가 했던 방식을 따라서 녀석들을 편하게 만들어줬죠. 콘리랑 오든이 돌아와가지고는 저한테 말하더군요. '코치님, 저흰 오하이오로 갈래요' 라고 말이죠."



"마이크 콘리를 드래프트한 바로 그 순간부터, 저는 콘리가 대학 최고의 포인트가드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다들 '그 녀석은 오든이랑 같이 뛰었을 뿐이야'라면서 웃더군요." - Matta는 말했다. "전 콘리가 지닌 실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는 06-07시즌에 콘리와 오든을 신입생으로 데려왔고, 둘은 오하이오 주립대를 정규시즌 27승3패로 이끌었다. 콘리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팀이 필요로 할 땐 득점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땐 어시스트를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Buckeyes(오하이오 주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는 2007년 NCAA 토너먼트에 1번 시드를 배정받았다. 4강에서 그들은 조지타운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챔피언쉽 매치에서 아쉽게 75대84로 플로리다에 패하고 말았다. 20득점 6어시스트의 콘리와 25득점 12리바운드의 오든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오하이오는 플로리다의 균형잡인 인&아웃사이드 게임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 시즌을 치르는 동안, 콘리 시니어는 이미 오든의 에이전트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포스트시즌이 종료되는 순간, 그는 그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도 일해야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든과 콘리는 모두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다.
"토너먼트가 끝난 이후, 저는 제가 그동안 뭘 해냈는지에 대해서나 NBA에서 말하는 예상 등수(Mock Draft를 의미)가 어땠는지에 대해선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라고 콘리는 말했다. "기회란 건 그렇게 자주 오는게 아니니까요. 창문은 언제든지 다시 닫힐 수 있는거죠. 저는 (더 높은 단계로) 점프해야 했어요."

멤피스 그리즐리스는 07 드래프트가 실시되기 몇일 전에 팀을 떠난 제리 웨스트(Jerry West)를 대신하여 크리스 왈라스(Chris Wallace)를 그들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한 때 3년연속 서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던 그리즐리스 구단은 무려 22승으로 추락한 시즌을 보내면서 로터리 픽을 받게 되었다.
포틀랜드가 1번픽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은 케빈 듀란트를 건너뛰고 그렉 오든에 1번픽을 행사하는 운명적인 선택을 하였다. 듀란트는 전체 2번으로 시애틀로 가게 되었고, 애틀랜타가 3번으로 플로리다의 알 호포드를 지명했다.
GM 왈러스는 드래프트에선 포지션상의 필요성보다는 탈렌트를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리빌딩중인 팀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전체 4번으로 마이크 콘리를 지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PG는 NBA에서 정말 가치있는 포지션입니다. NFL로 치면 쿼터백과 같은거죠. PG에서 뛰어난 퀄리티의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멤피스에서, 콘리는 이미 PG 포지션만큼은 차 있었던 로스터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즐리스 PG 포지션은 그 직전 드래프트 1라운더 출신인 카일 로우리와, 12년차 베테랑 데이먼 스터드마이어 등으로 이미 포화된 상태였다.
"이미 제가 드래프트로 뽑혔었는데, 그건 좀 우스운 상황이었죠." 로우리는 말했다.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되는건지 이해가 안갔어요. 물론 저는 마이크를 좋아했고, 마이크와 단짝처럼 지냈죠. 우린 같이 골프도 치러 다녔고, 마이크가 정말 좋은 친구란걸 항상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거랑 구단의 노선을 이해하는 거랑은 별로 상관이 없죠. 전 24번째로 드래프트됐고, 마이크는 4번째니까요. 아마 구단에선 마이크에게 기회를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선수들이 서로에 대해 호감과 친밀감을 느끼는 만큼, 프로로써의 자존심과 야망도 그들 사이에 자리잡기 마련이다. 멤피스는 어느 쪽이든 구단을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부여하고, 동시에 선수의 다음 계약시 증가할 시장 가치를 저울질해보는 것을 고려해야만 했다.



또다른 PG였던 데이먼 스터드마이어는 두 젊은 선수들의 멘토였다. 그는 멤피스가 콘리를 드래프트한 직후에 라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그도 아직 구단과 함께할 미래가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라우리와 콘리는 게임에 접근하는 방식이 완전히 상이했다. 스터드마이어가 보기에, 냉정하면서도 적극적인 면을 가진 라우리는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코트에 몽땅 쏟아부을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콘리는 항상 좋은 평가를 받았던 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뛰었던 선수인 것처럼 보였고, 누군가가 그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그가 지닌 재능과 더불어 편안하게 조화를 이루는 타입이었다.

"라우리는 핏불 같았어요." 스터드마이어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플레이하고 그가 해내는 것들은 정말 솔직하고 강직했죠. 그는 모든 걸 해내길 원했어요. 그리고 콘리에 대해서는, 그 친구가 한번도 경쟁심을 불태우고 누군가를 이기려드는 적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다른 선수들에 녹아들어서 함께 플레이하려고 하면서 성장하고 있었죠."

스터드마이어는 콘리와 라우리 모두에게 적극적인 면을 지닐 것을 주문했다. 커리어 초기에, 콘리는 스스로의 슈팅 능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가 꾸준하게 점퍼를 향상시키기 전까지, 스터드마이어는 항상 콘리에게 '수비수들은 니가 무슨 슛을 쏘겠어? 하면서 널 우습게 볼걸. 아마 간격을 벌리고 니 돌파만 막으려고 하겠지.' 라고 지적했다. 스터드마이어는 코트 위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니가 원할 때마다 여기에서 점수를 얻어내야 되는거야' 라고 말했다. "코트 내에 이런 지점들을 많이 만드는게 니가 앞으로 할 일이야. 이 위치들을 편안하게 느낄 정도가 되야 한다고. 그게 내가 돈을 번 방식이거든." 스터드마이어가 콘리에게 건넨 말이었다.

스터드마이어의 멘토링이 지나칠 정도로 훌륭했던 탓인지, 그의 두 제자들은 빡빡한 멤피스 로테이션에서 결국 그를 밀어냈다. 스터드마이어는 콘리의 루키 시즌이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바이아웃을 요청했고, 2008년 2월 샌안토니오와 계약을 맺었다. 물론 스터드마이어는 두 젊은 가드들의 성장을 그 이후 몇년간 계속해서 지켜봐주었다.
"어린 PG였던 콘리는 그 이후 잭 랜돌프, 떠오르는 센터 마크 가솔, 루디 게이, 벤치에서 출격하는 OJ메요 같은 선수들과 함께하게 됐죠. 그들 모두 패스를 받길 원했구요." 하고 스터드마이어는 말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포인트가드라면, 여러분들은 '아니아니, 이번엔 니 차례가 아니야'라고 팀원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하죠. 포인트가드는 코트 위의 모든 이들이 무언가가 함께 이루어져간다는 느낌을 받게 해줘야 합니다. 제가 콘리에게 말해주고자 했던 건, 네가 당당하게 서서 스스로의 의견을 관철하면 동료들이 네게 떼를 쓰거나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죠."

콘리는 멘토의 조언을 충실하게 받아들였지만, 조용한 자신감과 부드러운 인성을 통해 동료들을 승리하게 만들어주는 콘리 자신만의 방식으로 플레이를 해나갔다.
"저는 (조화롭게) 녹아들길 원했죠." 콘리는 말했다. "저보다 더 나이많은 선수들과 함께 뒤는 것은 꽤 난감한 일이었어요. 마이크 밀러, 데이먼 스터드마이어, 스트로마일 스위프트 같은 선수들 말이죠. 그들은 저처럼 어린 선수가 말하는 걸 그저 기계적으로 듣기도 했죠. 저는 제가 그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 절 존중해주고, 제가 하는 리드를 따라주길 기대하는 그런 위치에 이를 때까지 더 배워야겠구나 하는걸 깨달았어요. 제 본래 성격은 더 느긋하고 그다지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지만요."

오른쪽 어깨 근육에 입은 부상은 콘리의 루키 시즌을 6주간 날려버렸다. 콘리와 라우리가 모두 건강했을 때, 그리즐리스는 꽤나 요상한 로테이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 경기 직전에 두 선수에게 러닝과 슛을 쏘게 하고, 더 나은 컨디션으로 출발한 선수에게 더 많은 시간을 뛰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두 젊은 선수 모두에게 그다지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드래프트 전체 4번으로 뽑혀서 온 루키라면, 좀더 많은 플레잉 타임을 기대하게 되죠." 콘리는 말했다. "1월 전까지 저는 홈에서는 한번도 선발로 뛰지 못했어요. 구단은 절 원정에서 뛰게 했죠. 솔직히 뭐가 어떻게 되는거지? 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백코트의 정체는 멤피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인 조니 데이비스로 하여금 1980년대 후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직면했던 상황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케빈 존슨과 마크 프라이스를 보유하고 있었고, 존슨이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둘 중 누구도 완전히 만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콘리와 라우리는 매 경기 순간순간마다 경쟁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돈독한 친구가 된 상태였으며, 서로가 경기 내외적으로 NBA 선수로써 적응하는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우리 관계는 둘 모두에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되주었어요." 콘리는 말했다. "물론, 우릴 더 의욕넘치게 만들기도 했죠. 우린 계속 같이 연습했어요. 같이 체육관에 가지 않은 날이 없었죠. 마치 '뭐 좋아, 같이 숨이나 쉬자' 이런 것처럼 간단한 거였죠. 거기에 물론 '내가 기회를 얻길 원한다면 오늘 내가 더 나은 플레이를 해야만 해'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콘리의 루키 시즌동안, 그리즐리스는 그 직전 22승에 비해 불과 조금밖에 나아지지 않았다. 시즌 중반을 지나면서, GM인 왈라스는 프랜차이즈 센터인 파우 가솔과 2라운드 픽을 레이커스로 보내면서, 많은 NBA 관계자들이 레이커스가 먹다 남은 찌꺼기 정도로 여긴 콰미 브라운, 자바리스 크리텐톤(또다른 PG였다), 아론 맥키, 그리고 파우의 검증되지 않은 동생인 마크 가솔을 2장의 드래프트 픽과 교환하였다. 이 무브는 당시 레이커스 경쟁팀의 감독들과 단장들에게 광범위하게 성토되었으며, 샌안토니오의 그렉 포포비치로 하여금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트레이드는 번복시켜버릴 수 있는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좀 터무니없을 정도의 과격한 주장을 내뱉도록 만들었다. (역자 주 : 아놔 폽할배 )

구단의 이런 움직임 와중에, 콘리는 그의 첫 시즌을 평균 9.4득점과 4.2어시스트라는, 당시 전체 4번픽에 기대되는 활약을 많이 밑도는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자신들이 뽑은 루키가 스타덤에 오르길 희망하는 그리즐리스 구단의 기대치에도 훨씬 못미치는 성적이었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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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3 10:35:30

과소평가 하는사람 없지않나요?

WR
2015-02-03 15:00:58

요샌 전보다는 줄은 것 같아요~ 그런데 현지에서도 저런 칼럼 제목이 있는걸 보면 여기나 저기나 그런 경향이 다 있는건 마찬가진가봐요 

2015-02-03 11:23:54

과소평가를 받는건 아니지만 탑 포인트 가드중에 인지도나 인기가 떨어지는건 사실이죠.. 

WR
2015-02-03 15:01:35

하편을 올리기도 했지만 거기 보시면 콘리도 그런거 잘 알고 있다고.... 

Updated at 2015-02-03 11:28:05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인데 이렇게 멋지게 번역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 늦게보길 다행입니다.


예전에 콘리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느꼈지만 동료들이 그에게 보내는 존경과 신뢰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수비와 리더십만으로도 굉장한 수준에 도달한 선수였죠. 다만 리딩과 공격에 있어서는 올스타급이 되지 못할까봐 걱정이었는데,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장시키는 선수답게 이제는 공수겸장에 리더십과 클러치 본능까지 갖추며 최고레벨에 거의 근접한 포인트가드가 되었네요. 스몰마켓의 조용한 가드인데다 팀 성향상 스탯이 잘 나오지 않아 다소 과소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멤피스가 더 높이 올라간다면 분명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을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이번 시즌이 되었으면 하구요.
WR
2015-02-03 15:03:23

underdog님이나 fainny님이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해주셨었는지 알겠더라구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콘리에 관한 글이라 많이들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옆동네에도 올리고 싶었는데 눈팅유저라서)


부디 콘리가 오래 맠가랑 지보랑 같이 멤피스에 남아주었으면 좋겠네요.
2015-02-03 11:29:53

한 때는 오든친구,오든과 패키지,오든효과 같은 소리를 듣기도 했었죠

WR
2015-02-03 15:03:58

오든이니 그럴 만도 했지요 하하... 이 글 옮기면서도 느끼지만 둘다 정말 어릴때부터 우정을 쌓아오고 찡한 부분도 많더라구요.

2015-02-03 11:30:25

콘리~

WR
2015-02-03 15:04:23

콘리는 더 럽....이죠! 

2015-02-03 13:15:55

콘리의 글이군요. 정말 재밌네요. 묘하게 울컥하기도 하고 빠져듭니다~ 하편이 기대됩니다!!

WR
2015-02-03 15:04:52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느낌을 처음 읽을 때 받아서 부족하게나마 옮겨보기로 한 거였는데 그렇게 봐주셔서 정말 기쁘네요~!

2015-02-03 16:58:21

콘리와 오든이 어릴때부터 친구였다니..정말 놀랍네요. 어릴때부터 친구인 녀석들이 고등학교를 제패하고 대학교도 같이하고 같은 드랲에서 1번과 4번픽으로 뽑히다니...
오든이 비록 일찌감치 이탈했지만 이 둘은 정말 행복한 농구인생을 보냈네요.

2015-02-03 19:16:28

좋아하는 선수에관한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2015-02-03 20:11:04

마이티마우스

2015-02-04 09:53:59

제목이 어색하네요.

과소평가된 PG 라는건 칭찬의 의미일텐데...

'과소평가된'이 아니라면
과대평가된 PG 라는 것처럼 들리네요..


WR
2015-02-04 11:13:00

매번 과소평가된 PG로 불리우는 것과 리그 최고 PG로 불리는 건 전혀 다른거죠. 과소평가되고 있다는건 그 실력이나 활약을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가 되고, 이 칼럼에선 전반적으로 콘리는 그런 꼬리표도 이제 붙이기 무색한 최고 레벨의 PG라는걸 알리고자 하고 있구요.
'과소평가된 PG가 아니라면 과대평가된 PG' 이건 논리적으로 맞지않는 이분법이라고 생각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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