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게리 페이튼은 조던을 얼마나 잘 막았을까
위 자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이클 조던은 1996 파이널에서 유독 부진했습니다. 수비가 집중되고 긴장감이 넘치는 플레이오프에서 더 펄펄 날아다녔던 조던이기에 의아하기까지 합니다. 시애틀과의 파이널 이전까지 플레이오프 12경기에서 32.2득점(FG 47.9% 3P 44.2%), 4.8리바운드, 4.1어시스트, 1.9스틸을 기록한 사실만 보아도 파이널에서 부진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조던의 부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선수가 바로 게리 페이튼입니다. 조던이 1985년 데뷔한 이후 더블팀, 트리플팀이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 매경기 수비가 집중되었고 데니스 존슨, 시드니 몽크리프, 마이클 쿠퍼, 모리스 칙스, 앨빈 로벗슨, 데니스 로드맨, 죠 듀마스 등 리그에서 최고라 평가받던 수비수가 늘 그를 막았습니다. 또한, 크레이그 일로, 제럴드 윌킨스, 라트렐 스프리웰, 데렉 하퍼, 미치 리치몬드, 에디 존스, 존 스탁스, 브라이언 러셀 등 조던만을 전담으로 수비했던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조던을 수비했던 그 많은 선수 중에서 거의 첫 번째로 거론되는 선수가 1996 파이널에서의 페이튼입니다. 그 페이튼의 수비는 조던이 놓친 공을 재빨리 잡아서 코트를 가로질러 원핸드 덩크로 마무리 짓고 뒤따라 오던 조던을 도발하듯 빤히 쳐다보는 장면과 조던이 포스트업을 위해 자리를 잡으려고 하면 찰싹 달라붙어서 거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으로 대변되고 있습니다.
페이튼의 수비가 어느 정도였길래 조던이 부진할 수 밖에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졌습니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기억은 과장되고 왜곡되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처음 보는 것처럼 1996 파이널 시리즈를 다시 시청했습니다.
1,2,3차전까지 조던 수비의 중책을 맡은 선수는 데트레프 슈렘프와 허시 호킨스 였습니다. 그리고, 조던만을 수비하기 위해 벤치에서 데이비드 윈게이트와 빈센트 애스큐가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이 세 경기에서 게리 페이튼이 조던을 막는 모습은 전체 10%정도로 아주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슈렘프는 조던보다 키가 크지만 조던의 스피드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고 호킨스는 스피드가 뛰어난 편도 아니고 신장에서도 열세지만 두 선수 모두 쉽게 봐 넘길 수 없는 끈끈함과 투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시애틀의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팀수비가 조던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조던이 공을 잡으면 즉시 가장 가까이 있는 시애틀 선수가 더블팀을 들어오고 그와 동시에 골 밑에서는 두 세명의 선수가 조던의 골밑 돌파를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시애틀에는 페이튼을 제외하고는 특출한 수비수가 없었지만 수비 조직력만큼은 엄청난 연습량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 수비의 타겟은 조던이었습니다. 외곽에서 공을 잡으나 포스트업을 하나 어김없이 더블팀이 들어왔고 빠른 드리블, 스크린 등을 이용해 한 명을 따돌리거나 베이스라인 쪽으로 턴을 해서 더블팀을 무너뜨리더라도 또다른 더블팀이 가해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조던은 공을 잡으면 더블팀이 형성되기 전에 빠르게 공격을 시도하거나 패스를 하는 수 밖에 없었고, 장기인 강하고 안정적인 포스트플레이를 펼칠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세 경기에서 평균 31득점을 올리긴 했지만 수비를 제외하고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경기 내용이었습니다.
4차전에서는 드디어 경기 초반부터 게리 페이튼이 조던을 수비합니다. 앞선 세 경기에서도 몇 번 보여준 적 있지만, 페이튼은 조던이 페인트 존에서 공을 받지도 못하게 격렬하게 자리 싸움을 벌였습니다. 파이널 여섯 경기에서 조던이 두 번의 오펜스 파울을 범하고 페이튼에게는 세 번의 디펜스 파울이 불릴 정도로 아주 치열했습니다.
조던이 포스트 플레이를 자신의 공격 주무기로 삼은 1991년 이후 이렇게 자리싸움에서 곤란을 겪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페이튼의 말라 보이는 상체와는 달리, 경기 중 살짝 들어올린 옷 아래로 드러난 엄청난 하체 근육을 보고 놀란 적 있지만 강골로 이름나고 가드나 포워드를 상대로도 힘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던 조던에게 이정도의 몸싸움을 벌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사실, 페이튼은 1차전부터 조던을 수비하고 싶어했지만 종아리 근육에 부상을 입은 페이튼에게 더 큰 부상이 생겨 시리즈 전체에 큰 타격을 줄까 염려한 조지 칼 감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3연패를 당하자 페이튼은 조지 칼을 직접 찾아가 '우리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조던을 막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코트 위에서 미스 매치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조던을 수비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조지 칼은 하는 수 없이 페이튼의 말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이튼은 자신만의 전략을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4차전이 끝나고 있었던 페이튼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조던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고 2년 동안 코트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과는 다르다. 내가 가진 최고의 카드는 조던을 끊임없이 압박해서 지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된 더블팀으로 쉴 틈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조던은 많은 슛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에게 유리한 경기가 될 것이다.'
이 전략은 조지 칼 감독이 1차전부터 시애틀 선수들에게 요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기를 보면 페이튼의 인터뷰 내용이 그래도 적용됨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페이튼과 전투를 치르느라 바쁜 조던에게 공을 투입하지 못한 불스 선수들은 어영부영하다 샷클락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무리한 공격을 남발하게 됩니다.
5차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어 불스는 3연승 뒤 2연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던은 여지껏 겪어보지 못한 페인트 존에서의 국지전과 1,2,3차전에서처럼 쉴 새 없이 압박해오는 시애틀의 수비 모두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경기를 풀어 나갈 수 없었습니다. 즉, 페인트 존에서 공을 잡은 후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한 축을 형성해 일대일 공격, 킥아웃 패스 등 여러 옵션을 만들어야 하는데 공을 받기조차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페이튼은 조던이 페인트 존에서 공을 잡은 뒤 수비를 하는 것은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조던 또한, 늘 그렇듯 페인트 존에서의 공격이 여의치 않을 때는 골 밑까지 돌파를 해서 득점을 시도했지만 시애틀 선수들은 즉시 파울을 해서 손쉬운 득점을 주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조던이 자신만의 흐름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모두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페이튼이 조던을 수비한 것은 4,5,6차전에 집중되었습니다. 그 세 경기에서도 비중을 따진다면 50%를 약간 웃도는 정도입니다. 페이튼이 최고의 선수를 상대로 그에 어울리는 놀라운 수비를 보여주었지만 시애틀 선수들의 끈질기고 조직적인 수비가 없었다면 조던에게 부진한 파이널을 선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페인트존에서 조던과 보기 힘든 명장면을 연출한 페이튼 뿐만 아니라 시리즈 내내 조던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시애틀 선수들 또한 훌륭했습니다. 지치지 않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시애틀의 조직적인 수비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훈련과 준비를 했는지를 짐작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