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유망주였던 정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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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5-05-07 02:07:46
아래에 정훈 이야기가 언급된 김에 얹혀가는 기분으로 이야기 좀 해볼께요.
정훈(199.2cm)은 초등학교때 육상부터 시작해서 리틀야구선수로 활약하다(리틀야구단시절 친구는 장성호) 중학교 1학년때 운동 그만두고 일반 학생으로 지내다가, 고1때 박성근씨의 눈에 띄어(당시 키가 192cm에 팔다리 길쭉길쭉한 일명 네덜란드인 체형) 뒤늦게 명지고때 정식농구부에 입문합니다.
명지고 1학년 후반기에 정식부에 입문, 1년을 쉬며 농구 기본기훈련을 쌓고,
고2때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명지고 3학년때 박성근씨를 따라 낙생고로 전학갑니다.
반년간은 전학생 패널티로 경기출전을 못했고, 낙생고는 후반기에 고교대회 3개를 석권하며 한순간에 고교농구 최강자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당시 낙생고 주전선수들을 살펴보면,
전병석-진경석-이근석-이한권-정훈.. 이었는데요. 정훈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이 모두다 공격지향적인 선수들이었고,
사실 정훈은 국제전에서 잠시 잠깐을 제외하곤 제대로 가드로 뛴적은 없지만,
정훈의 가드 성향, 패스 선호적인 마인드는 처음 시작하던 단계인 이때 뿌리박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리구리 연예인 양동근을 닮았다는 말도 듣는 전병석은 서전트 1m의 고탄력 선수로도 알려져있는데,
상당한 공격지향적 가드였고,
일명 성균관대로 같이 진학한 일명 낙생트리오외에 좀 생소할 수 있는 이근석 선수는 고등부시절 198cm의 프로필키에 슛거리도 길었던 맘먹으면 경기당 25점 이상은 밥먹듯 넣었던 대표적인 스코어러 선수였지요.
정훈은 명지고-낙생고 시절 포지션은 센터였지만 처음부터 리바운드와 불낙외에 공격적인 롤에서는 피딩, 패스를 우선시 하는 선수였고 4명의 주전이 자기공격성향이 강한 구성에서 정훈의 그러한 역할로 인해 팀이 더 강해지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지요.
처음부터 패서, 가드를 희망했던 정훈에게, 박성근 감독은 성균관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대학까지 함께 같이가면 대학에선 가드시켜주께 하고 꼬득여서 정훈을 성대로 계속 같이 데려갑니다. 하지만 성대에서 졸업때까지 단 한번도 가드를 시켜주진 않았지요.
정훈이 프로데뷔전 장신가드란 말이 나온건 그의 가드지향 마인드와 잠시잠깐 나오는 플레이 성향을 본, 당시 대학부 팬들이 붙여준 것이었을 뿐입니다.
정훈은 대학시절 간간히 명지고시절 1년후배 김동우와의 1:1 다득점 대결을 펼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적극적 개인공격플레이를 자제하고 팀플레이에 우선하는 성향탓에 주로 팀공격의 3옵션이었습니다. 그러다 팀이 크게 패하고 있으면 그때서야 팀의 공격 제1옵션으로 올라와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기공격을 펼치던 선수였지요.(농구대잔치에서의 상무 현주엽과의 다득점 대결 등등)
그래서 항간엔 정훈이 다득점 하는 날은 성대가 크게 패하는 날이라는 그닥 좋지 않은 늬앙스의 소문이 붙어다니기도 했어요.
정훈이 소속학교에서 제대로 가드로 뛰어보진 못했지만,
그나마 국제전에선 가드로 뛰며, 의외로 괜찮은 활약상을 펼치기도 합니다.
아래에는 정훈의 대학시절 국제전 활약상을 좀 길게 언급해볼까 합니다.
윗 짤은 00년 존스컵때(대학선발+상무 조합팀으로 구성)의 것으로 과거 중앙대 팬싸이트이던 드래곤바스켓싸이트에 올라와 있던 것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2000년 7월에 치뤄진 제23회 대만 존스컵 대회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면,
당시 감독은 상무감독이었던 추일승 감독이었고, 대학+상무의 조합으로 출전했었습니다.
한국은 대만B, 코스타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 뉴질랜드 와 더블어 예선 B조에 편성되었고
조예선에서..
한국 86 : 66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85 : 58 대만B
한국 89 : 69 코스타리카
한국 54 : 71 뉴질랜드
.. 3승1패의 조예선 성적으로 조2위로 준결승(4강)토너먼트에 올라갔으며
A조 1위었던 실질적 대만 국가대표팀인 대만 A팀을 상대로 87 : 78로 격파하고...
결승에서 (예선에서 패한 상대인) 뉴질랜드와 리턴매치를 하여 67 - 78 로 패하고 준우승을 차지했었습니다.
.
이때 한국을 두번이나 꺽고 우승을 차지한 뉴질랜드 대표팀이 바로, 불과 2년후 2002년 세계선수권에서 4위의 돌풍을 일으킨 그 팀의 리빌딩 과정중의 팀이었었지요..
여기서 정훈은 6경기에서 평균 16.8분 출전 6.3점 (3P% : 33.3%[6/18]) 1.8리바 1.0어시 0.5스틸의 스탯을 찍었는데요..
(당시 존스컵 감독이었던 추일패 상무감독은 훈이를 스읭맨으로 활용하였고, NBA 서머리그에 참여하는 등 NBA진출을 노렸던 탈아시아급 첸신안 등을 잘 수비하고, 경기운영시 윤활유 역할도 잘 해내며 좋은 활약을 펼쳤었지요.)
당시 주전은 김승현(전형수)-김병철(상무)(이형주)-정훈(박재일)-송영진(김태완)-김주성.. 이었습니다..
일견 스탯이 대단치는 않아보일 수도 있지만, 예선전에서 25득점 전후로 득점 1위를 달리고 있던 대만A팀의 에이스 첸신안을 전담수비하여, 단 6점으로 꽁꽁 틀어묵는 수비로 팀승리에 공헌하는 등 스탯이상의 공헌도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 2001년 5월 동아시아대회때에는,
한국, 일본, 대만, 몽고, 호주, 중국, 카자흐스탄이 대회에 나와 돌아가며 1경기씩 붙고 그 성적에 따라 4강을 편성하여 준결승, 결승전을 치루는 방식이었는데요.
정훈은 몽고전에는 출전치 않아 팀의 6경기 중 5경기에 나왔었구요.
정훈의 경기별 스탯은,
일본전 40분 16점(3P : 3/7) 8리바 5어시 3스틸
대만전 31.5분 14점(3P : 2/3) 5리바 2어시 3블락
호주전 32.5분 10점(3P : 1/8) 5리바 2어시 1스틸
중국전 18분 13점(3P : 3/6) 8리바 2어시 1스틸 (후반전 포인트가드로 뜀)
카자흐전 32.5분 13점(3P : 1/7) 7리바 2어시 1스틸
입니다.
평균 30.9분 13.2점(3P : 10/31.. 32.25%) 6.6리바 2.6어시 1.2스틸 0.6블락의 평스탯이었고,
특히 후웨이동-왕즈즈-야오밍이 모두 뛴 역대최강 중국팀을 상대로 아시아팀으로 유일무이하게 승리하는데에 있어 후반전 포인트가드로 출격하여 큰 공헌을 세웠지요.(중국전 후반전 정훈-김동우-송영진-김태완-김주성의 주전 라인업, 이때 코칭스탭인 김남기씨는 당시 중국전에서 정훈이 포인트가드로서 수비와 김주성과의 2:2플레이를 참 잘 소화해내주었다고 칭찬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보기엔 여러모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참 다재다능한 선수라고 칭찬을 많이 했었지요.)
이 위짤은 01년 유니버시아드 대회때 전체 기록표로 역시 드래곤바스켓에 올라왔던 것을 간직하고 있던 것입니다.
2001년 8월 유니버시아드 대회
스웨덴, 멕시코, 영국, 브라질, 미국, 우크라이나와 각각 경기를 치뤘습니다(총 6경기)
위 전체 스탯표를 참고하시고,
훈이는 6경기 모두 나와 평균 12.67점(팀내 3위) 4.0리바(팀내 2위) 1.3어시(팀내 3위) 0.5스틸, 3점슛률 20.1%(5/24)의 스탯을 찍었었는데요...
특히 비록 지역대표로만 출전했지만, 장신에 피지컬이 강한 미국전에서 장신 스윙맨으로 뛰며 무한 돌파로 자유투를 무려 11개나 얻어내는 활약(10개 성공)과 19점을 넣어, 국제전에서 통할 수 있는 장신 슬래셔(또는 스윙맨)으로 아마팬들에게 인정받기도 했었지요...
프로에서 2순위로 정훈을 지명한 이는 다름아닌 박수교씨였는데,
물론 감독으로서는 팀을 망하게 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훈을 2순위로 지명한 다음의 코멘트는, "훈이를 장신가드로 잘 키워서 써보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곧 박수교씨는 모비스 감독에서 해임되고 이후 부임한, 연세대시절 분업화농구를 맞춰나갔던 최희암감독과는 아무래도 궁합이 맞지 않았습니다. 결과를 떠나 정훈 본인에게는 차라리 박수교 감독 밑에서 뛰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물론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감독이 어떻든 뛰어난 선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역할을 제대로 다하며 코트에서 빛을 발해야 하는 게 맞는 말이긴 하나, 농구구력이 길지 않고, 소극적 성향의 정훈은 사실 어느정도 관리가 필요한 선수였지요.
프로에서 가드로서 능력미달로 판명되었다지만,
사실 프로에서조차 제대로 가드로 뛰어본적이 없었지요.
모비스 데뷔시즌 후반부에 잠시 가드용병을 수비하는 수비형 슈팅가드로의 롤을 맡은바 있고, 그나마 그러면서 좀 살아나긴 했었습니다만...
그 큰 키(맨발 199.2cm)때문에 최희암감독과 전창진 감독밑에서 4번 용병을 수비하는 식스맨 파워포워드 역할을 주로 했었고, 허재감독밑에서 뒤늦게 3번롤을 부여받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속된말로 폼이 다 무너진 다음이었습니다.
그 폼이 다 무너진, 속된말로 이미 회생불능의 망가진 이후 3번으로 뛰는 그를 보고 드리블이 너무 높고 애초에 가드볼 자질이 부족하다고 평하는 것도, 성균관대시절 낮고 빠른 드리블로 돌파하던 그를 기억하는 입장에선 아무리 대학과 프로의 레벨을 생각하더라도 아쉬움이 남더군요.
국제전에서 가드역할을 잘 소화해내었던 것도 그의 숨겨진 능력중의 하나였었을테니까요.
물론 어째꺼나 저째꺼나 결국 스스로 꽃피워내지 못하고 종료된 상황에서 이런 저런 사정을 아쉬워 하는건, 속된말로 죽은자식 부랄만지기격밖에 안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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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유형이였지만 아킬래스건 파열후 운동능력을 상실한 김동우가 프로에서 살아남은것만 봐도 정훈은 기량미달이거나 멘탈이부족했던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