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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만년 후보선수의 매우 특이한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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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9-19 18:29:43

1955년 12월 24일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남. 본명 최희암


휘문중 입학 후 농구를 시작했고 휘문고 시절 나름 스타로 각광을 받음. 공부와 운동을 병행함.


큰 키로 인해 중1때 센터를 맡았으나 중3 이후로 176cm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음.


중학생 시절부터 연세대에서 선수생활 하는 것을 꿈으로 삼고 있었으나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전국의 스타플레이어가 연세대로 몰림.


1974년 연세대는 이미 9명의 체육특기자 입학생이 결정된 상태였음. 그는 정식으로 대학입시를 쳐서 연세대에 합격함.


인창고를 졸업한 동기 박수교와 대학 및 실업에서 같은 팀, 같은 포지션을 맡음. 그는 만년 후보선수로 전락함.


대학교 3학년 까지도 경기 출전시간을 얻지 못함. 여자친구가 직관 온 종별선수권 결승전에서 코치에게 애걸해 7분의 출장시간을 얻음.


대학 3,4학년 시절 연세대는 대학농구를 석권함. 박수교, 신선우, 장봉학, 배기남이 그와 동기임.


졸업 직후 동기들과 함께 새로 창단된 현대 농구팀에 입단함. 그의 소속사는 현대건설.


1978년 3월 동기 장봉학이 막판에 김상천과 바뀜으로 인해 박수교, 신선우, 김상천, 배기남, 박광호, 최관웅, 이종구와 함께 현대 농구팀 창단멤버가 됨.


그는 후보 선수였지만 대학입학 이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출장시간을 얻음.


고려대학교가 49연승으로 무적 행진을 기록함. 선수층이 얇은 현대는 고려대와 붙을 때마다 크게 리드했다가 후반 막판에 안타까운 역전패를 당함. 대통령기 결승에서는 고려대에 종료 4분 남기고 10점 리드했으나 신선우의 자유투가 빗나가고 종료 4초전에 황유하에게 동점골을 허용한 후 연장에서 패함. 신선우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후 현대의 전력은 크게 약화됨.


실업 2년차에 현대에는 황유하, 조명수, 이문규 등 즐비한 스타플레이어들이 입단함. 출전시간을 얻지 못한 그는 해군에 입대함.


30개월 해군 농구팀 복무기간 중에 그는 만년 후보 선수로 전락해 단 한 경기도 의미 있는 출장시간을 얻지 못함


그는 제대 후 은퇴를 택해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근무함.


현대건설에 사표를 내고 삼일중학교 체육교사로 임용됨.


1986년 중앙대의 돌풍 속에 모교 연세대 농구부가 파탄 위기에 처하자 그는 체육교사를 사직하고 연세대 농구팀의 임시감독대행을 맡음.


연세대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보임으로 인해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함.


미국 대학농구의 전술을 과감히 채용함과 동시에 체벌을 동반한 혹독한 훈련으로 연세대를 다시 정상에 올려놓음.


정재근, 이상범, 오성식, 문경은, 김재훈,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을 차례로 리크루팅하는 데 성공함.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훈련과 체벌에 모든 스타플레이어들이 한번씩은 팀을 이탈함. 하지만 모두 제 발로 걸어 들어옴.


연세대학교는 대학농구를 평정함은 물론 전체 성인농구를 장악함.


국가대표의 국제대회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연세대 전성시절동안 국내 농구의 인기는 끝없이 올라감.


실업팀과 대학팀을 망라한 농구대잔치에서 세 차례 우승.


끝없는 학구열로 연대 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 미국의 연방체육대학원(United States Sports Academy)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함.


국내농구의 프로화를 끝까지 반대했으나 연대 감독을 사임한 2002년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의 감독을 맡음.


2005년 동국대 농구부 감독을 거쳐 2006년에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감독으로 프로에 복귀해 2009년까지 전자랜드 감독을 맡음.


2009년 그는 전자랜드 계열사인 고려용접봉의 중국 다롄(대련) 법인장으로 임명됨. 국내와 중국 조선업의 호황으로 그의 회사는 번창함.


2013년 STX다롄조선소의 부도로 전자랜드 계열사인 고려용접봉은 80억원의 채권을 회수하지 못했고 매출도 급감. 회사는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노력으로 외형축소와 구조조정 선에서 마무리 되고 수익구조는 개선됨.


다롄에서 5년간 경영성과와 위기관리능력을 인정받아 2014년 그는 고려용접봉의 국내외 영업과 구매를 총괄하는 사장으로 영전됨.


그가 경영하는 고려용접봉의 창원 공장은 창원산업단지 내에 약 2만평 규모로 운영되고 있으며 정직원 400 명에 연간 매출 규모는 3천억원 가량임.


그는 현재도 고려용접봉 사장을 맡고 있으며 성공적인 CEO로 평가받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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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9-14 17:27:13

허허..대단하네요
이래서 엘리트 체육인들도 공부를 놔버리면 안될텐데 말이죠..

WR
2016-09-14 19:27:53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2016-09-14 18:25:31

와.. 이런건 진짜 어떻게 아시는거죠

정말 대단하시네요

WR
2016-09-14 19:28:20

고맙습니다. (그분에게 직접 들은 내용도 있습니다.)

2016-09-14 18:41:40

가장 최근 뉴스는 이거네요.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8&aid=0002537742

WR
1
2016-09-14 19:29:15

올해들어 그 회사에 좋은 일들이 넘칩니다. 그래서 표정이 더 밝아 보입니다.


http://www.etnews.com/20160610000193

2016-09-14 22:38:16

이 불황의 시기에 대단하네요.

2016-09-14 19:01:21

엘리트농구선수가 특기자전형아니고 공부로 연세대가서 농구부하다가 실업팀까지 갔다는 건가요? 대단하네요

WR
2016-09-14 19:32:14

본인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기도 한데, 지금 찾아보니 올해 신동아 기사에도 나왔었네요.


“중·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시험 치르고 연대 들어가는 내가 대견했던지 휘문고 감독님은 물론 교장선생님까지 연세대 농구부를 찾아가 최희암이란 애가 입학하면 농구부로 받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제자가 농구로 대학 진학을 못하게 된 데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들의 도움 덕에 74학번으로 농구부에 입단했다."


두 페이지에 걸친 기사인데 제가 몰랐던 내용도 들어있네요. 

동기생 신선우, 박수교, 장봉학과 1년 후배 신동찬, 박인규 등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는 동안 학교에 남은 최희암은 딘 스미스에게 농구를 배운 도널드 휴스턴을 만났고, 그로부터 프리징 플레이(freezing play), 페이크 스위치(fake switch), 트래핑 디펜스(trapping defense) 등의 기술을 배우게 됐다. 
 

“그때 농구부에서 통역 가능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그분의 말을 통역하고, 그분이 가르치는 새로운 기술의 농구를 배우면서 농구에 푹 빠져 지냈다. 그때 김영기 감독(현 KBL 회장)과 김인건 코치가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었는데, 연세대 농구부와 세 차례 연습 경기를 했다. 우리로선 주전 멤버들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던 터라 2진 선수들을 데리고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휴스턴이 알려준 기술로 경기를 풀어가면서 대표팀을 상대로 한 번 지고, 두 번을 이겨버렸다. 김영기 감독이 얼마나 화가 나고 창피했겠나. 주전도 아닌 후보들이 뛰는 상대한테 두 번이나 졌으니. 나중에 우리한테 다가와선 ‘도대체 그 기술이 뭐야?’라고 물으시더라. 김영기 감독도 그때 처음으로 ‘프리징 게임’ ‘런 앤 점프’ 같은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WR
2016-09-14 19:32:56

전체 기사 링크는 여기에 있습니다. (두 페이지입니다.)


http://shindonga.donga.com/3/all/13/522053/1



2016-09-15 22:26:51

배일리님의 넓은 지식에 감탄합니다.

WR
1
2016-09-16 02:12:21

고맙습니다.

2016-09-19 09:32:58

글 중에 장봉학이란 이름이 있어서 너무 반갑네요!

저희 아버지 친구분이신데 당시 휘문고-연세대-삼성에 뛰어서 엘리트 체육인의 코스를 걸으셨는데 국내농구에서 별로 언급되지 않았더라구요. 사실 저도 잘 몰랐지만..

WR
2016-09-19 18:29:43

제가 좋아했던 스타입니다. 중거리슛의 명수였죠. 삼점슛 시대였다면 더 주목받았을 선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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