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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스포츠가 거둔 최대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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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1 23:28:23

해방 후 1950년대 중후반까지 우리나라 여자 농구는 학교농구, 즉 여고농구였습니다. 숙명여고, 이화여고, 경기여고, 상명여고, 진명여고, 정신여고 등이 각축전을 벌였고, 숙명, 이화, 경기의 라이벌 구도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했습니다. 1957년 4월에 한국은행 여자농구팀이 창단되어 그해 여고 졸업생 스타들을 싹쓸이했습니다. 한국은행은 창단 첫해에 숙명여고를 41-38로 물리치고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한국은행이 무적포스를 자랑하던 1958년에 상업은행이 농구부 창단을 선언했습니다. 상업은행의 경영을 이끌던 실세 진영득 전무는 경기상고 시절 농구선수였고, 그 이후로도 줄곧 농구광으로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진영득 전무는 숙명여고 센터인 박신자 선수를 스카웃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인맥을 동원했습니다. 한국은행도 박신자를 영입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고, 농협은 박신자를 영입해 농구팀을 창단한다는 복안으로 총재의 진두지휘아래 스카웃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박신자는 상업은행을 택했고, 이에 따라 1959년부터 한국은행 대 상업은행의 운명적인 라이벌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1961년 9월에 열린 한국은행과 상업은행의 라이벌전에는 3,000명을 수용하는 장충체육관에 7,000명이 운집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습니다.


1962년에는 한일은행과 제일은행이 여자농구팀을 창단했고, 실업팀인 한국전력, 동신화학, 조폐공사도 여자농구팀을 창단했습니다. 1963년에는 국민은행, 서울은행, 조흥은행이 창단되었습니다. 군사정권은 1963년에 ‘박정희 장군배 쟁탈 동남아여자농구대회’를 만들어 여자 농구 붐에 편승했습니다. 한국의 여러 은행들과 유니티카 일본레이온 일본통운 등 일본의 여러 팀에 대만이 팀들이 우승을 겨룬 그 대회 기간 동안 장충체육관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관중들이 들어찼고, 거리의 TV앞에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국기는 단연 여자농구였고, 여자농구의 인기에 그나마 근접하는 운동종목은 프로레슬링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팀들 중에서 상업은행이 절대 강자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상업은행은 국내대회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 장군배’에서도 일본과 대만의 실업팀을 물리치고 5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76cm의 센터 박신자는 독보적인 스타였고, 농구를 떠나서도 깨어있는 선각자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이화여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을 정도입니다. 한국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이 150cm 가량이던 그 당시였기에 박신자는 우리 국민이 생각할 수 있는 최장신에 가까웠습니다.



보통 4년마다 열리는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가 5년 만에 1964년에 페루에서 열렸는데, 참가 예정이었던 이탈리아가 출전하지 않게 되어 우연히 그 자리를 우리나라가 메우게 되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초청이어서 우리나라는 대표팀을 꾸리는 대신 상업은행팀을 내보냈습니다. 당시 상업은행은 박신자, 김명자, 김영자, 엄미자, 신항대, 나정선, 강옥순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갖춘 팀이었습니다.


고산지역인 페루에 대한 정보 하나 없이 무작정 원정길에 나선 상업은행팀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선전하여 우리나라는 일본을 누르고 13개국 중에서 8위를 거뒀습니다. 준비된 상태에서 명실상부한 대표팀이 출전해서 실력을 발휘한다면 세계 3위 이내에도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농구인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센터 포지션의 박신자는 월드베스트5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월드베스트에 뽑힌 박신자는 페루 대통령과 악수하고 인사말을 나눴는데, 그들 중에 박신자만이 유창하게 스페인어를 구사해 순식간에 페루 대통령을 한국 팬으로 만들었습니다.


세계 선수권대회 이후 상업은행에 맹렬히 도전한 팀은 제일은행이었으나 해체된 조흥은행의 최고스타 김추자가 상업은행을 선택함으로써 상업은행은 박신자·김명자·김추자라는 무적트리오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대만팀의 어느 코치가 이들 트리오를 ‘삼보(三寶)’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별명은 국내에서도 널리 사용되어 이들의 공식 애칭이 되었습니다. 1965년도에 열린 1회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 대회(ABC)에서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우리 대표팀은 일본을 두 번(87-85, 85-85)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고, 두 경기에서 60점을 넣은 박신자는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혔습니다.



우리나라가 학수고대하던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가 이번에는 3년만인 1967년 6월에 체코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농구협회는 명실상부한 대표팀을 선발하기 위해 연초에 설발전을 치러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선수들을 주축으로 12명으로 구성된 대표팀을 선발했습니다. 이들 12명의 명단은 박신자, 김명자, 김추자, 채현애, 신항대 (이상 상업은행), 주희봉, 임순화, 이혜숙, 이영희, 김영임(이상 제일은행), 이소희(국민은행), 서경자(숙명여대)였습니다.


당시 공산국가였던 체코는 우리와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선수단은 일본의 체코대사관에서 어렵게 비자를 얻어 체코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12개 국가의 대표팀이 참가하는 대회였는데, 자신의 우방국인 체코에서 우리나라 대표가 참가하는 것에 자극받은 북한이 뒤늦게 체코 조직위에 특별 참가신청서를 냈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체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쿠바가 전격적으로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대표팀을 체코에 보낸 북한은 철수하지 않고 계속 우리 선수들과의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고, 더 잘살았기 때문에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리 선수들과 만났을 때 적극적인 설득과 공작(?)을 벌여왔고, 우리 선수들은 지시받은 대로 북한측 인사들을 피하기 바빴습니다. (1990년 이후 이 같은 상황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당시에 우리 선수단은 방안에 있을 때에도 열쇠구멍까지 막아 밖에서 들여다 볼 수 없게 했고, 화장실에 갈 때에도 항상 3명 이상 모여서 가도록 지시받았습니다.


북한 선수들과 대사관 직원들이 우리 선수단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방해하는 가운데, 한국팀은 첫 번째 경기에서 이탈리아에게 76대 56으로 완승을 거뒀습니다. 예선 두 번째 대결은 홈팀인 체코였습니다. 체코에 패해도 결선 진출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예선리그의 전적이 결선에 반영되기 때문에 그 경기는 결선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체코는 무적팀인 소련 바로 아래 티어를 구성하는 전력인데다 홈의 이점을 갖고 있어 결코 쉽지 않은 승부라고 여겨졌습니다.


체코와의 대결에서 전반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34-34 동점으로 끝났습니다. 후반에 우리나라는 분전해서 종료 4분을 남기고 6점을 리드했으나 그때 박신자가 5반칙으로 퇴장당했습니다. 그 사이 체코는 경기를 뒤집어 종료 12초를 남기고 66-65로 앞선 상황에서 공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게는 절망적인 순간이었지만 경기종료 7초전에 교체멤버인 주희봉이 체코의 패스를 가로채 골대 근처의 김추자에게 패스했고 김추자는 수비를 제치며 경기종료 버저와 함께 드라이브인을 성공시켰습니다. 그 순간 심판은 본부석으로 달려가 계시원에게 골과 종료 버저 중에 어떤 것이 먼저인가를 확인했습니다. 본부석에 있던 체코 계시원이 골이 먼저라고 확인해줌에 따라 한국이 67-66으로 승리했고, 우리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모두 코트로 뛰어나와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체코 관중들은 자신의 대표팀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게 패해서 어리둥절하면서도 이후에 코리아라는 나라를 잊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프라하로 옮겨서 열린 결선리그에서 한국팀은 동독을 64-59로 꺾은데 이어 일본에게 81-60으로 대승을 거뒀습니다. 일본은 1964년 올림픽 개최국인데다 체코에서 열렸던 세계배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었는데, 체코를 꺾은 한국이 일본마저 이기자 체코의 매스컴은 우리나라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를 연거푸 내보냈습니다. 한국팀의 다음 경기는 우리와 공동선두를 달리던 소련이었습니다. 소련은 1950년대 후반 이후 1980년대 초까지 무려 20여년동안 국제대회에서 전승을 거두게 되는 무적의 팀이었습니다. 2미터가 넘는 장신센터 프로코펜코바를 포함해 주전 중에 190cm 이상이 세 명이었고 이들은 모두 탄탄한 기본기와 슈팅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팀은 애당초 소련에게 이길 방법이 없었기에 83-50으로 패한 후에도 전혀 기가 죽거나 사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출전 11개국 중에서 6개 나라의 팀이 결선에 올라 마지막 한 경기를 남긴 1967년 4월 21일, 우리는 3승 1패로 2위에 오른 채 유고와 최종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즉, 유고에 이기면 준우승이 확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고와의 경기 전날 우리팀이 김철환 단장이 문공부에서 제작한 한국 홍보자료를 다른 나라 관계자들에게 건내주다 체코 경찰에 적발되어서 24시간 내로 추방을 명령받았습니다. 김 단장은 납치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우리팀 트레이너와 조직위원의 호위를 받은 채 체코를 빠져나갔습니다. 다음날 우리 선수들은 그 소식을 듣고 많이 흔들려 전반전에 11점차로 유고에 리드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반전에 마지막 투혼을 발휘해 78-71로 승리했습니다. 체코 관중들은 우리 팀에 환호와 기립박수를 보냈고, 북한 측 선수단과 요원들은 화를 내면서 바삐 움직였습니다.


우리 선수단은 공식 폐회식이 열리기 한참 전에 준우승국을 위한 간이 폐회식을 열어줄 것을 체코에 요청했고, 그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우리만을 위한 폐회식에서 선수들의 목에 은메달이 걸리고 상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선수들은 눈물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선수단은 도망치듯 체코를 탈출해 서독 국경에 도달했고, 우리를 쫓아오던 두 대의 북한 승용차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선수단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월드베스트5의 명단이 공개되었습니다. 박신자는 최다득표로 1위에 올랐고, 김추자도 베스트 5에 뽑혔습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박신자는 지금 이대로 죽으면 제일 행복할 것이라는 뜻밖의 답을 던졌습니다.


5월 8일에 선수단이 귀국했을 때 김포공항은 환영 인파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국민환영대회에는 3만여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처럼 성대한 국민적 환영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박신자를 비롯한 우리 여자대표팀은 그해 8월말에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해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현재까지 우리나라 여자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따낸 유일한 금메달입니다.


유니버시아드 우승 후 박신자는 잠적했습니다. 상업은행은 비상이 걸렸고, 박신자를 찾지 못해 그녀 없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온 국민이 박신자가 돌아오길 기대하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팀이 경기하는 날 평상복으로 관중석에 나타났습니다. 26살의 나이, 모든 영광을 겪어본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최정상에서 은퇴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누구의 설득에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업은행은 1967년 11월 그녀를 위한 한국전력과의 은퇴경기를 마련했습니다. 평일에 열린 경기였지만 수천명의 관중이 몰려 대스타의 마지막을 지켜봤습니다.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신자는 주한미군 소속의 문관 브래드너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1980년대 초에 창단한 신용보증기금 여자 농구단 초대 감독을 맡아 농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 여자 농구 대표팀은 1979년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에서도 준우승을 거뒀고, 1984년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하나씩 따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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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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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2 00:00:16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16-09-02 02:38:34

예나 지금이나 농구는 신체능력이 중요하고 특히나 동양인에게 불리하다고 알려진 종목인데 대단하네요.
아시아권에서 농구로 이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둔적이 있을까요?

2016-09-02 04:23:14

글로만 읽어도 눈물이 왈칵하네요~

2016-09-02 11:00:09

좋은 글 감사합니다- 체코 기록원 이야기 참으로 멋지네요- 

2016-09-02 11:03:59

이름만 들어왔지, 이렇게까지 대단한 업적을 남기신 분이라곤 몰랐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2016-09-02 11:57:39

와... 박신자가 이런 레벨의 선수였군요.

흥미로운 글 잘 보고 갑니다.

바쁘신 와중에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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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9-02 12:38:33

이제는 은퇴했지만 여농의 대표적인 선수 박정은이 이 분 조카죠.

이런 분조차도 80년대에 감독 하면서 여자라고 심판에게뿐만 아니라 선수에게도 무시 당했다 하니 지난 시대지만 참 너무한 시대였다 싶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여자농구 이야기에 관심 생기신 분이 있다면 '96년만의 덩크슛'이란 책을 권해드립니다. 박신자님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상세히 나오고 한국 여자농구의 역사가 재밌게 잘 담겨 있습니다.


2016-09-02 12:34:32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9-02 19:34:14

박찬숙, 최경희 선수에게 열광하던 기억을 하며

정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9-02 21:15:30

와...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새삼 데이먼님께 놀랐습니다. ^^ 몇번을 놀라고 감탄하는지 모르겠네요.

2016-09-02 22:55:44

이런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는지 어떻게 취합하고 체계를 잡으시는지 정말 대단하시네요 wkbl을 재밌게 보는 팬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다^^

2016-09-02 23:39:36

박신자 선수의 스페인어는 유창하다기 보다는, 인사말만 통역에게 배운 듯 합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5/nd98050130.html

『그때 페루에서 한국은 정말 미지의 나라였어요. 그런데 지구의 끝에서 온 박신자씨의 뛰어난 활약을 보고 한국붐이 일었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 당시 페루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던 벨라운데 대통령이 한국 농구대표단을 대통령 집무실로 초청할 정도였으니까요. 박신자씨가 저한테 물어본 스페인어로 대통령에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벨라운데 대통령은 어디서 그렇게 유창한 스페인어를 배웠느냐고 반가워했지요. 당황한 것은 박신자씨였습니다. 인사말밖에 모르는 박신자씨가 대통령께서 뭐라고 하는지 몰라 얼굴 붉히면서 당황하던 기억이 납니다』

2016-09-03 09:57:31

우리나라 여농이 저렇게 강했었군요. 잘봤습니다.

2016-09-03 13:07:25

어우 칼럼 쓰셔도 되겠어요
잘봤습니다

2016-12-20 04:15:26

이런 일들 어떻게 다 아시는지 신기하네요. 분야도 넓으시던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칼럼 수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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