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Free-Talk

중국 황제 이야기: 한(漢)의 전성기를 연 문제(文帝)

 
11
  760
2020-02-28 18:24:34

 

중국 드라마 '대풍가'의 주인공인 한 문제 유항

 

어쩌면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아는 중국 역사는 한()나라 시대의 역사일 것이다. 아무래도 초한지삼국지등처럼 한나라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서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는 살면서 한 번씩은 한 고제(高帝) 유방과 한 무제(武帝), 광무제(光武帝), 헌제(獻帝) 등 한나라 황제들에 대해서 들어보게 된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한나라의 황제는 고제도, 무제도, 광무제도, 영제도, 헌제도 아니다. 바로 한 문제(文帝) 유항이다.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은 한나라의 흥왕은 효문 40여년까지 이어지니 덕이 넘치는구나라며 한 문제의 업적을 칭송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공은 한 고조보다 클 수 없고 덕은 한 문제보다 높을 수 없다며 문제의 업적을 평가하기도 한다.

 

 

한 고제 유방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나다

 

한 문제의 이름은 유항이다. 유항의 생모는 박희로 본래 위()나라의 왕 위표의 후궁이었다. 당시 유명한 관상가였던 허부는 박희를 보고는 천자를 낳을 상이라 점쳤는데, 위표는 이 말이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뜻으로 여겼다.

 

이에 위표는 당시 한나라 왕이었던 유방을 배신했다. 그러나 위표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한신에게 패했다. 박희를 비롯한 위표의 후궁들은 모두 유방의 첩이 됐다. 하지만 박희는 1년이 넘도록 유방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때마침 박희와 함께 유방의 첩이 됐던 위나라의 후궁들 중에서 서로를 잊지 말자고 약속했던 관 부인과 조 자아는 박희를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은 유방의 시중을 들다가 옛 약속을 유방에게 알려줬는데, 이를 들은 유방은 박희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잠자리로 불렀다.

 

박희는 잠들기 전 유방에게 어젯밤 꿈을 꾸었사온데 푸른 용 한 마리가 제 배를 휘감았습니다라 말했다. 이에 유방은 귀한 징조로군. 내 당신의 뜻을 이뤄주리라라 답했다. (참고로 유방은 자신을 적룡(赤龍)의 후손이라 부르고 다녔다) 그리고 박희는 회임했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한 문제가 되는 유항이었다.

 

어머니 박희의 복은 곧 유항의 복이었다. 한 고제 유방은 유항을 얻은 이후 박희를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게 오히려 두 모자(母子)를 살려주게 됐다. 한 고제는 유항을 대나라의 왕으로 임명했는데, 대나라는 편벽한 곳에 위치했고 땅이 척박했으며 흉노와 같은 이민족들의 침략을 자주 받았던 곳이었다. 그만큼 세력이 가장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유항을 살려주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당시 한 고제는 척 부인을 총애했고 조왕 유여의를 태자로 삼고자 했다. 젊은 시절 항우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온갖 고생을 다했던 여치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척 부인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설상가상 자신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유영이 척 부인의 아들인 유여의에게 태자 자리까지 위협받자 깊은 앙심을 품었다.

 

여치의 잔인한 품성으로 자신이 죽은 이후 척 부인과 아들이 걱정됐던 한 고제는 어떻게든 유여의를 태자로 삼고자 했지만,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기원전 1954월에 장안성의 장락궁에서 삶을 마감했다.

 

척 부인과 유여의의 운명은 한 고제의 우려대로 끔찍했다. 황태자 유영이 한 혜제가 되자 여후는 척 부인을 영항(永巷-궁녀에 들어가는 감옥)에 감금해 하루 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줬다. 유여의는 혜제의 보호 아래 목숨을 보전했으나, 황제가 잠시 사냥을 나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이후 여치는 척 부인에게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고, 귀를 잘라서 귀머거리로 만든 이후 눈을 도려냈다. 그리고 두 손발을 끊어 빈소()에 던졌고 이것을 사람돼지(人彘)’라고 칭했다. 며칠 후, 여치는 이 광경을 혜제에게 보여줬는데, 이를 본 황제는 충격에 빠져 병을 얻었다. 그리고 정치의 대권은 어머니인 여치에게 넘어갔다.

 

이처럼 잔인한 여치였지만, 그렇다고 유방의 아들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었다. 당시 아무리 여치가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개국공신이었던 번쾌와 관영, 주발, 왕릉, 하후영, 육가, 그리고 진평 등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개국공신들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유()씨 일족을 모두 죽일 수는 없었던 탓에 여치는 자신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유씨 일족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

 

변방에 척박했던 대나라의 왕인 유항은 당연히 여치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또한, 박희 역시 무사히 아들의 봉지로 보내졌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황제가 되다

 

기원전 180년 태후 여치가 세상을 떠나자 개국 공신인 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 그리고 유장을 비롯한 한 황실(皇室)의 일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여()씨 일족을 몰살했다. 그리고 여치가 세웠던 후소제를 폐했는데, 누구를 황제로 세울지가 문제였다.

 

이에 문무백관들은 정변 때 공을 세웠던 한 고제의 장손이자 제왕인 유양과 회남왕 유장을 황제 후보로 뒀다. 그러나 진평을 비롯한 개국 공신들은 여 태후의 외척들이 악랄하고 흉악했기에 사직이 이토록 위태로워졌소. 그런데 제왕의 어머니는 사()씨 집안이며, 사씨 집안 역시 흉악하고 악독하오. 만약 제왕을 황제로 추대한다면 또 다른 여씨를 부르는 꼴이 될 것이오회남왕의 외가 역시 모두 악랄한 사람들이니, 회남황을 황제로 세울 수 없소라 반박했다.

 

이때 주발이 그럼 대왕을 황제로 추대할 수밖에 없소. 대왕은 고제의 아들이자 어질고 너그러우며 그 어머니인 박씨도 공손하며 선하지 않소라며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이에 대신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필자는 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는 기록을 믿지 않는 편이다.

 

일단 이 기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름 아닌 유항이 여씨 토벌 때 어떤 공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항이 한 고제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황제가 되기에는 명분이 한없이 미약했다. 유양과 유장은 군대를 이끌고 여씨 일족을 몰아내는 공을 세웠지만, 유항은 대나라 자체를 안 떠났다. , 어떤 공적도 세우지 못했는데 아무 공이 없는 사람이 황제로 쉽게 즉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다. 이건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이 떼돈을 버는 것과 다름없다.

 

두 번째, 황궁을 장악했던 것은 분명 진평과 주발과 같은 개국 공신들도 있었지만, 유양과 유장의 사람들도 있었을 테다. 이들이 주군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황제로 추대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키워준 주인을 배신하는 것은 큰 죄다. 이들이 옛 주인을 배신하고 만장일치로 새로운 주인을 빠르게 섬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필자는 진평과 주발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이 무력으로 다른 이들을 위협했거나,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고 본다. 아무리 진평과 주발 등이 개국공신이고 정변에서 많은 공을 세워서 발언권이 강하다고 해도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이 저리 쉽게 굴복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어쨌든 자신을 황제로 추대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항은 깜짝 놀랐다. 조정에서 사자가 오자 유항은 낭중령 장무와 중위 송창을 비롯한 대신들을 불러 모아 어찌하면 좋을지를 물어봤다.

 

장무는 조정 대신들 모두 고조께서 살아계실 때 대장을 지냈던 자들로 용병술에 능하고 모략에도 밝습니다. 대신의 직위로만 만족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고조와 여 태후의 위세가 두려워 참아왔을 뿐입니다. 허나, 여 태후께서 돌아가시자 여씨 일가를 죽여 장안을 피바다로 만들었으니, 지금 전하를 황제로 모시겠다고 말을 하더라도 쉬이 믿으셔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병을 핑계로 상황이 변하는 것이 옳을 줄 아뢰옵니다라 답했다.

 

하지만 송창은 대신들의 의견은 옳지 않습니다. 진나라 말기 조정이 부패했을 때 각국의 제후들과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당시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나, 천자가 된 자는 유()씨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천자가 되려던 호걸들의 꿈은 이미 다 깨진 것이나 다름없으며 누가 감히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대신들의 의견이 옳지 않은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고조께서 유씨 자손들을 왕으로 삼으면서 봉지를 개 이빨 나듯 들쑥날쑥하게 배분하셔 서로를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반석처럼 단단한 종파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유씨의 강성한 세력을 믿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 황실은 건국 후 진나라의 학정을 폐하고 새 법령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었습니다. 그 덕에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며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민심이 모이는 곳은 함부로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 이것이 그 세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여 태후는 자신의 위세를 이용해 여 씨 중 세 명을 왕으로 봉했고 정권을 쥐고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그러나 태위 주발이 부절을 가지고 북군에 들어가 팔을 걷어 보이라 하니 장수와 병사들 모두 왼팔을 걷어붙여 여씨를 등지고 유씨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모두 하늘이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도 백성들은 그들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대신들이 한 마음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또한, 지금 안으로는 주허후와 동모후 같은 친족 세력들이 버티고 있으며, 밖으로는 강성한 오, , 회남, 양아 등 제후왕국들이 있사옵니다. 또한, 고조의 아들 중에는 회남왕과 전하, 두 분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두 분 중에서도 전하께서는 회남왕보다 나이가 많고 어질며 사리에 밝으시다고 정평이 나있습니다. 하여 조정 대신들도 민심을 따라 전하를 황제로 옹립하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뜻을 의심치 마소서라 반박했다.

 

그런데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유항은 이 문제를 박희와 상의했다. 허나, 모친인 박희 역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거북의 껍데기로 점괘를 쳤다. 점괘는 대횡경경 여위천왕 하계이광 (大橫庚庚 餘爲天王 夏啓以光)’이라고 나왔다. ‘내가 천왕이 될 것이니 하계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더 높은 빛을 낸 것처럼 되리라는 뜻이었다. 이에 유항은 나는 이미 왕이거늘 또 무슨 왕을 한다는 말이냐라 고개를 내저었는데 점쟁이는 점괘에서 말하는 천왕은 천자를 일컫는 것이옵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유항은 외숙부인 박소를 황성으로 보내 주발 등 공신들을 만나보게 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야 한나라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한 문제(文帝). 황제의 나이 22살 때의 일이었다.

 

 

검소함과 근면함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하다

 

한 고제가 인의와 덕으로 천하를 얻었다면, 한 문제는 검소함과 근면함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가의는 한 문제에게 상소를 올려 창고에 곡식이 그득하면 예절을 알고 의식주가 풍족하면 영욕을 한다는 관자의 말을 인용해 곡식 생산량을 발전시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함지를 설명했다. 이에 황제는 곧바로 조서를 내려 농업은 나라의 근본으로 백성들의 삶과 깊은 관계가 있으니 각급 관리들은 힘을 다해 농업 생산을 발전시키고, 전조(田租)를 절반으로 감면하도록 명하였다. 황제는 기존 곡물 생산량의 15분의 1을 세금으로 걷던 체제를 30분의 1만으로 내게 하도록 바꿨다.

 

또한, 조조는 황제에게 현명한 군주가 황위에 앉으면 백성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조정이 나서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정이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전국은 이미 통일됐고 몇 년 동안 수해나 가뭄 등의 재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저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농업 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라며 지금 가장 급한 일은 백성들에게 농업 생산을 장려하는 일이라고 건의했다.

 

한 문제는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식을 국겨의 요새나 소속된 군, 현에 갖다 바치면 조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작위를 주겠노라 발표했다. 또한, 농민들의 전조의 절반을 감면해주라 명했다.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니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 농민들은 힘겨운 농사일을 하면서 조세까지 부담하고 있다. 이처럼 농사에 전념하는 자와 상인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농업을 장려하는 방법이 완비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전조는 최대한 감면해주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선포했다.

 

또한, “농업은 천하의 근본으로 적전을 개척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다. 짐이 친히 앞장서서 농사를 지어 종묘에 제사할 곡식을 생산하겠노라라며 요역과 세금을 줄이는 동시에 적전을 만들어 직접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문제 13년 다시 조서를 내려 짐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어전의 작황을 가지고 제사의 예물로 사용할 것이다. 황후도 친히 뽕잎을 따고 누에를 쳐서 제사에 필요한 의복을 직접 만들 것이다며 이를 하나의 제도로 정립했다.

 

한 문제는 농업과 조세를 개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황제는 연좌제법과 육형 및 비방 요언죄 등의 엄하고 가혹한 형태의 형벌은 폐지된 상태로 유지했다. 그리고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 진()나라 시절부터 이어져온 연좌제법의 폐지를 명했다.

 

황제는 법령은 정치의 근거로서 포악한 세력을 막고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허나 지금은 죄를 범한 자들을 법으로 처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죄짓지 않은 부모와 처, 자식, 형제들까지 함께 벌하고 있다. 짐은 이런 제도에 반대하니 대신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잘들 논의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연좌제법은 백성들을 진압하고 신하들의 권리를 강화하는데 있어서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이에 문무백관들은 백성들은 스스로를 구속할 수 없으므로 법령을 제정하여 그들을 관리해야 하는 일이 옳은 줄 아옵니다. 연좌제법이 있는 것은 죄 없는 친족들이 범죄자와 함께 벌을 벋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옵니다. 이 법이 오래도록 이어져왔기에 옛것을 따름이 마땅한 줄로 사료됩니다라는 핑계를 댔다.

 

이에 한 문제는 법률이 공정해야 백성들은 충직하고 온후해진다고 들었소. 처별 역시 백성들이 기꺼이 순흥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오. 그리고 백성을 관리하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관리의 직책이오. 허나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면서 불공평한 법으로 백성들을 억누르기만 한다면 그들이 흉악하고 포악한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이런 법이 과연 범죄를 막아내는 일이라 할 수 있겠소? 이런 법령이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다들 생각해보시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연좌제법은 폐지됐다.

 

한 문제가 칭송받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의 검소함이었다. 한 문제는 황제로 24년이나 있는 동안 궁실이나 정원, , , , 그리고 어용 기구 등을 하나도 늘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늘 거친 견직물로 만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자신이 총애했던 신 부인까지도 땅에 끌리는 옷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침대나 방 안에 치는 휘장에도 수를 놓지 못하게 했다.

 

한 번은 황제가 지붕이 없이 난간만 있는 노대(露臺)를 건축할 계획으로 장인은 불러 비용을 계산해보라 말했다. 이에 장인은 황금 1백 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들은 한 문제는 황금 1백 근은 10가구의 가산에 상당하는 액수다. 선제께서 남기신 궁전에서 살면서 제대로 지키지 못해 선제의 얼굴에 먹칠할까 늘 염려했는데, 노대를 지어 무엇하리오!”라며 노대를 건축할 계획을 포기했다.

 

 

반격을 위한 밑거름을 다져놓다

 

한 무제가 중화사상의 꽃을 피어낸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면, 한 문제는 손자인 무제가 중화사상을 널리 펼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다져놓은 인물이다.

 

한 문제는 주변의 소수민족들에게 우호 정책을 썼다. 여치가 정권을 잡던 시기에 남월왕 조타는 스스로 존호를 높여 자신을 남월 무제라 칭했고 군사를 보내 남군을 공격하여 남방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는 황제의 가마인 황우좌독을 타고 한나라 황실과 대등한 지위를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에 문제는 즉위한 직후 조타의 고향인 진정(眞定)의 지방관에게 조타 조상의 묘를 보수하라는 명을 내렸고, 조타의 형제들에게 많은 재물과 귀한 신분을 줬다. 동시에 육가에게 출사를 명하며 조타에게 자신의 친필 서신도 함께 보내면서 오령 이남은 조타에게 맡길 테니 알아서 다스리고 간섭하지 않겠으나, 중국의 황제는 단 한 사람 뿐이니 스스로 칭제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전했다. 이에 조타는 칭제를 취소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 문제는 흉노에 대해서도 화친 정책을 펼쳤다. 흉노가 공격하면 수비를 강화시켰을 뿐 대군을 보내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당시 흉노와 한나라가 맞서기에는 흉노의 세력이 너무나 강성한 까닭이었다. 이에 한 문제는 부황인 한 고제 때 펼친 화친 정책을 계승해 국가의 안보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짐이 현명하지 못해서 멀리까지 은덕을 베풀지 못해 이민족들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변경 지역의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고, 내지의 백성들이 부지런히 일해도 편하고 즐겁게 지낼 수 없으니, 이 모든 죄는 다 짐의 부덕함에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흉노는 잇달아 변경을 침범해 적잖은 관리와 백성들을 살해했고 변방의 관원들과 방비를 보는 장수들도 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짐의 과실을 더욱 가중시켰다.

 

오랫동안 재난이 그치지 않고 전쟁이 잇달아 발생하니 각 나라들이 어찌 안녕을 누릴 수 있겠는가. 짐은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며 천하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다. 만백성이 무섭고 불안한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고민했고 파견한 사신들의 오고 가는 수레의 덮개가 앞뒤로 마주하고 도로 위에 수레 자국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했으니, 이는 흉노의 선우에게 짐의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흉노의 선우는 과거 화친의 자리로 되돌아왔으니, 국가의 안정과 백성들의 이익을 고려하여 작은 실수들은 서로를 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바른 길로 가고자 한다. 형제와 같은 우의를 맺음으로써 천하의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흉노가 다시 침입하자 이번에는 두 개의 방어선을 구축해 흉노의 공격을 막아냈다. 또한, 백성들과 일부 흉노족, 그리고 죄수들을 변경 이남으로 이주시켰고 15편제로 조직하여 평소에도 훈련을 시켜 전쟁이 발발하면 곧바로 응전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이것은 둔전(屯田)의 효시가 됐다.

 

또한, 한 문제는 흉노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백성 중 말 할 필이 있는 자는 요역 면제를 3인까지 해줬으며, 서북 변경 지대에서 36개의 말 사육장을 관노 3만 명이 전투용 말을 기르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훗날 손자인 한 무제(武帝)가 흉노를 상대로 대규모 반격을 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죽으면서도 검소함을 명하다

 

한 문제는 짐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라. 묘지를 크게 만들지 마라. 금은보화를 함께 매장하지 마라. 장례기간을 너무 길게 하지 마라. 전국의 백성들과 관리들은 단 3일만 상복을 입는 것을 허락하겠다. 간소하게 처리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기원전 1576. 46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황제가 된지 24년째 되는 해였다.

 

한나라는 한 문제가 다스린 24년 동안 국고가 풍족해졌으며,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한나라는 한 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한 경제(景帝) 시절에도 태평성대를 누리며 문경지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그리고 경제의 뒤를 이은 한 무제 시절에 흉노를 상대로 대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한나라는 무제 시절을 기점으로……

1
Comment
2020-04-03 09:55:08

한 무제 이야기도 부탁드립니다..!!!

24-04-19
20
1982
24-04-19
2
260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